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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퀸카의 역방향 사랑>의 줄거리:
약속 후 25년이 지나서야 이삭을 주시더니 이번에는 그 아들을 아브라함이 직접 번제로 드리라고 하나님이 명하십니다. 이건 정말 상식적으로도 이성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이해가 안 될 뿐 아니라 은근히 화까지 날 일입니다. 그리고 정말 납득이 힘든 것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라는 말씁입니다. 이 "이제야"가 대체 왜 이제야 나옵니까? 그 동안은 뭐였다는 거지요? 이 모든 물음에 퀸카의 역방향 사랑만이 그 답을 줄 수 있습니다.
퀸카의 역방향 사랑
(창22:1~15)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퀸카의 역방향 사랑>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퀸카의 역방향 사랑’
우리가 길에서 종종 보게 되는 경우인데, 너무나 예쁘게 생긴 엄마에 비하면 너무 외모가 떨어지는 아들이나 딸의 손을 잡고 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후세 자손들이 외모는 아버지를 닮고 머리는 엄마를 닮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말이 되지요. 너무 예쁜 엄마가 엄마보다 떨어지는 외모의 자녀와 손잡고 가는 것이 말이 됩니다. 학자들의 말대로라면 엄마보다 아빠의 외모가 많이 떨어지는 경우겠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남자의 외모는 정말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예쁜 여자와 사는 경우가 있는데, 자기 외모가 그렇게 출중하지 못하면 저돌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존감을 버리고 여자에게 달려들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퀸카를 손에 넣는 남자들이 있어요.
이런 경우를 상상하면서 오늘 본문의 내용을 우리가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제가 쓴 단편 소설을 비유로 들어봅니다.
한 대학의 남학생이 퀸카 여학생과 스쳐지나가면서 눈이 마주치게 되고 그 순간 몸이 얼어붙습니다. 자기가 학교의 퀸카를 여자 친구로 할 수 있을 주제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생긴 것도 그렇고 집안도 그렇고 모든 것이 다…
그런데 이것이 불가항력이에요. 살 수가 없는 거예요. 안 되는 줄 알면서 그 여자에게 가서 조르고 조릅니다. 하루, 이틀, 일주일, 이주일, 한 달을 조르고 졸라서 퀸카가 마지못해서 허락한 첫 번째 데이트를 합니다. 그 후로 일 년을 데이트를 합니다. 하루도 안 빼놓고 그 퀸카의 모든 학교스케줄을 다 알아서, 퀸카에게 맞추느라고 자기 수업은 다 빼먹고 학교 오는 날이면 찾아가서 데이트를 했습니다.
1년이 지났어요. 대학 안에 잘 생기고 훌륭한 남자들이 얼마나 많아요. 늘 조마조마합니다.
‘저런 남자들과 눈이 마주치지 않을까? 저런 남자들이 다가와서 프러포즈하지 않을까?’
걱정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어느 날 갑자기 퀸카인 자기 여자 친구가 막 뛰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봤더니 어떤 남자하고 만나는데, 남자가 너무 잘생겼어요. 둘이서 하이파이브하고 난리가 났어요. 그리고 둘이서 어디를 가는데 몰래 따라가 봤더니 학교 구내식당으로 가는데, 멀리서 밥 먹는 것을 보니까 자기 여자 친구인 퀸카가 하하 호호 깔깔 웃으면서 밥을 먹는데, 자기랑 먹을 때에는 그렇게 웃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분노가 생깁니다. 절망감이 치밀어 오릅니다. 당장 쫓아가서 당신 누구냐? 그리고 너는 뭔데 이 남자랑 즐겁게 밥을 먹느냐고 따지고 싶은데, 차마 자존심이 허락을 안 하는 겁니다. 이건 나 자신에 대한 예의라서 그 현장에 다가가질 못하겠어요. 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어머니, 아버지, 형님, 누나 생각이 다 납니다.
‘내가 그래도 어머니 아버지에게는 얼마나 귀한 아들인데, 어려서부터 형님과 누나가 나를 얼마나 돌봐주고 사랑해주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비참한 모양이 되어버렸는가.’
그래서 연락을 안 합니다. 삐치거나 밀당을 하느라고 일부러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동기가 없어지고 사지에 힘이 쭉 빠져서 찾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사흘이 지나도록 퀸카한테서 연락 한 번이 없어요. 그러면 그렇지. 하고 있는데 나흘 만에 퀸카에게 전화가 와서 받으려고 하는데, 순간적으로 전광석화처럼 머리를 스쳐가는 생각이 있습니다. 일 년 만에 여자 친구인 퀸카가 자기한테 전화를 건 것은 이게 처음인 거예요. 그 순간에 피가 거꾸로 솟는 겁니다.
‘내가 무슨 병신이냐? 내가 무엇이 부족하냐?’ 그러면서 전화를 끊고 받지 않습니다. 전화가 계속 울리고 삼일동안 그렇게 하다 뚝 끊어졌습니다. 그리고 잠잠합니다.
‘그러면 그렇지. 하도 불쌍하고 졸라대니까 만나준 것이지.’
그런데 한 달 뒤에 고향에서 엄마가 전화를 했어요.
“야, 너 그 미애라는 아가씨가 누구냐? / 엄마가 미애를 어떻게 알아? / 아니 전화해서 네가 있는 자취방 주소를 알려달라고 하는데, 누군지도 모르고 함부로 말 할 수 없어서 알려주지 않았거든. 그랬더니 한숨을 푹푹 쉬면서 절망하고 애원을 하는데, 그 아가씨 병나겠더라. 전화 한 번 해봐라.”
그 소리를 듣고 한 달 만에 마지 못하는 척하고 찾아가 보았습니다. 딱 보더니 싸늘해요.
‘그럼 그렇지. 그 밥 먹던 남자하고 잘 되고 있는 모양이군. 그럼 고향집에는 왜 전화를 했을까? 어떻게 알아서 전화를 했을까?’
싸늘한 채 둘이서 서먹하게 벤치에 앉았습니다. 아무 소리도 없는데 가만히 보니까 어깨가 들썩들썩하면서 여자가 웁니다. 깜짝 놀라서 왜 우냐고 했더니 여자가 하는 말이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못 될 수가 있느냐? 한 달 동안 나는 지옥을 사는 줄 알았다. 앞이 깜깜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라는 겁니다. 뒤통수를 맞는 것 같아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가? 나 같은 인간에 대해서.
이 퀸카가 일 년을 지내면서 전화 한 번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일 년이 지나면서 모든 것을 다 버리더라도 이 남자와 평생을 함께 하기로 마음에 결심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 남자라면 모든 것을 기꺼이 다 버릴 수 있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이 남자가 그 잘생긴 남자와 잘 사귀어보라고 연락을 끊어버리니까, 한 달 동안 지옥 같은 삶을 보내면서 이 남자가 다니는 과 사무실에 가서 고향집 주소를 알아내서 집에 전화하고, 그래도 가르쳐주지 않으니까 절망에 절망을 하고 있었던 차에 남자가 찾아오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울음을 터뜨려버린 겁니다.
이 3류 소설의 내용을 알아야 오늘 본문이 이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다시 설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본문 아닙니까?
이렇게 유명한 본문인데 참 거슬리는 부분이 있어요.
뭐가 거슬리느냐?
우리가 읽어서 알지만 이삭을 결박해서 나무위에 올려놓고 칼을 들어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순간에 하나님이 급하셔서 사자를 보내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부르시면서 뭐라고 하시느냐? 이 말이 너무나 이해가 안 됩니다.
12절에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여기까지는 이해 안 될 게 없어요.
그 다음에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거슬리는 것 없어요?
‘이제야’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제야’가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이 말이 이제서 나올 이야기입니까?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느냐?
사도 바울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예를 들면서 로마서 4장에서 율법과 믿음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11절에 “그때에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이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할례에 대한 이야기는 훨씬 앞에서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믿음을 의로 인을 친 표가 할례의 언약으로 나타났다는 거예요.
이것은 제가 이상하게 보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는 말씀이 이상하다는 느낌은 저만이 아니고, 사도 바울도 아마 이것을 이상하게 느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할례의 언약을 하게 되신 이유는, 이제까지 무할례 때 갈대아 우르를 떠난 아브라함의 행적을 통해서 그가 믿음으로 행했음으로, 그 믿음을 의롭다고 인을 쳐준 표라는 것입니다.
또 그 할례뿐만이 아니라, 19-22절에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라고 나옵니다.
이 두 사건, 할례와 1년 뒤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약속에 대해 아브라함이 반응한 사건은 17장에 나오고, 오늘은 22장입니다.
그리고 15장 6절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하신 것뿐만 아니라, 18장에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는 부분 17-18절에서도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숨기지 않고 알려주실 만큼 친근한 사람은 지구에서 아브라함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이해가 안 갑니다.
이 ‘이제야’라는 단어가 왜 여기 들어왔는가에 대한 질문에 실마리를 제공하는 또 다른 질문을 통해서만 답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지금 이삭을 결박하여 장작더미위에 올려놓고 칼을 내리치려는 순간에 여호와의 사자가 와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말리는데 1초만 늦었으면 이삭은 죽는 거예요.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합니다.
여기도 이상하지 않아요?
우리가 대면특권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대면특권이 언약의 자손에게 주어진 특권이고, 그 언약 자손의 시조인 아브라함의 특징이었던 것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하나님께서 언제나 직접 찾아오시고 대면하셔서 이야기하셨다는 것이고, 그것이 대면특권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사건 이후에 25장에서 아브라함이 죽습니다. 그때까지는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만난다는 장면묘사가 한 군데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만나서 소통하는 장면으로는 이것이 마지막 장면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여호와께서 직접 나타나지 않으시고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납니다. 갑자기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사이가 멀어졌습니다.
여기서 ‘이제야’라는 말을 쓰신 이유와 그리고 ‘시험하시려고’라는 말과 연결되면서 이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늘 대면하시면서 소통하시던 아브라함과 일부러 거리를 두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12장부터 봐오셔서 아시겠고, 스데반 집사님도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라고 하셨습니다. 이제까지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당신 자신을 보여주셨는데 그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1등 대상이 되십니다. 그리고 12장에서부터 지금까지 전부 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여러분이 한 번 잘 보세요.
롯을 여호와의 사자가 만나고, 하갈을 여호와의 사자가 만나고, 아비멜렉과 바로에게는 꿈같은 방식으로 만나신 것과 비교해서 아브라함에게는 찾아오시되 전부 직접 오셔서 만나십니다.
마치 퀸카에게 이 남학생이 계속해서 일방적으로 다가가서 퀸카의 스케줄에 맞추어서 데이트를 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거리를 두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찾아오시지 않으십니다.
거리를 두신 이유가 무엇이냐?
이제까지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적극성과 능동성에 의해서 아브라함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는 경우에는, 다른 대상에게 마음을 줄 겨를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늘 찾아오신다면 그렇지 않습니까? 이 퀸카의 스케줄을 다 아는 남학생이 수업 끝나면 기다리고 있으니 다른 남자를 만날 틈새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잠깐 벌어진 틈에 다른 남자를 만나서 점심을 같이 먹으러 간 거예요. 그리고 봤더니 희희낙락하면서 자기에게는 보여주지 않았던 명랑한 모습으로 밥을 먹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남학생이 둘이서 잘해보라고 뒤로 물러난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 번제를 드리는 장소까지 가는 중에 이삭과 아브라함의 대화가 나옵니다. 이삭이 뭐라고 하느냐?
7절에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냥 아버지라고 부른 것도 아니고 ‘내 아버지여’라고 합니다.
그다음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라고 합니다. 8절에서도 “내 아들아”라고 나옵니다. ‘내 아들아’를 두 번 이야기합니다.
마치 다윗이 가장 자랑스러워하고 사랑스러워하던 아들인 압살롬이 죽었을 때에 그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라고 했던 것처럼 ‘내 아들 이삭아! 내 아들 이삭아!’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이삭도 ‘내 아버지여’라고 하면서 부자지간에 배어나오는 정이 정말 사람 환장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런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이삭이 그렇게 좋구나!’라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거리를 두십니다.
그 남학생이 잘생긴 남자와 밥 먹는 퀸카의 희희낙락하는 모습을 보고 ‘그 남자와 잘해봐라’ 라고 하면서 거리를 두는 것처럼 거리를 두시는 겁니다.
이삭을 데리고 가는 그 현장에 하나님이 직접 오시질 않는 거예요.
그렇게 친한 이삭, 그렇게 좋고 너를 웃게 만드는 이삭을 멀리서 바라보고 계십니다.
이삭의 이름이 ‘웃는 자’아니었습니까?
사라를 웃게 만들고 아브라함을 웃게 만들었습니다. 희희낙락하게 만들고 명랑하고 즐겁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속 다가오시면 이삭이 끼어들 틈새가 없으니, 이삭이 들어올 수 있도록 틈새를 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보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끼어들어왔던 이삭을 제거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다가오시지 않으니 자기가 다가갑니다.
퀸카와 일 년을 데이트했던 남학생의 경우에서 퀸카가 어떤 것을 포기하더라도 이 남학생과 일평생을 같이 하겠다는 결심을 한 것처럼,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이제 역방향으로 늘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사랑을 주시고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고 그것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지나왔지만, 하나님이 거리를 두시고 그 사이에 이삭이 들어올 수 있을 정도의 틈새를 벌리시자, 이번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쳐버리고 하나님께 다가가면서 하나님과 자기의 틈새를 제거해버립니다. 한 번도 이런 식의 역방향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제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좋은 이삭, 이 땅 위에서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인간존재 전체의 의미를 담고 있는 이삭, 아브라함의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전부 이삭에게 달려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땅 위에서의 자기 인생존재의 의미를 담고 있는 그러한 이삭을 제거해버리고 하나님께 다가가는 장면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하나님! 하나님과 나 사이에 누가 끼어있으면 저는 못 삽니다. 그것이 이삭이라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라고 부르는 이삭이라도, 그 이삭이 하나님과 나 사이에 끼어들면 저는 못사는 사람입니다.’라고 이삭을 제쳐버립니다.
성탄절이 뭡니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찾아오신 사건이에요. 아무도 이 땅에 예수님이 태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해 본 적이 없어요. 나도 아니고 이웃도 아니고 목사님도 아니고 장로님도 아니고 총회장님도 아니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내주셨습니다. 그게 성탄절이에요.
이제 우리가 역방향으로 하나님과의 거리를 제거해나가야 돼요.
날마다 날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누군가가 끼어들어오면 나는 이제 못 삽니다. 하나님이 첫 번째 만남의 대상이 되어야하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심지어는 내 목숨까지도 그 사이에 끼어들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그래서 십자가를 쥐고 날마다 퀸카의 역방향 사랑을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남학생이 밤잠 안자고 번 모든 돈을 그 퀸카에게 다 썼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것을 다 주셨습니다. 돈 안 주셨다고 안 주신 겁니까? 당신의 독생자를 주셨어요.
이제는 더 주시려 해도 주실 것이 없는 것 아닙니까?
이제는 우리가 역방향으로 하나님께 다가가면서 내게 주어져 있는 그 어떤 좋은 사람이나 좋은 대상, 좋은 물건, 가족일지라도 앞이 깜깜해져야 하는 거예요.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무엇이든지 하나님보다 가까운 존재가 있으면 앞이 깜깜해져야 되는 겁니다.
퀸카가 만난 잘생긴 남자하고 잘 되어보라고 내버려 두었을 때에 이 퀸카의 눈앞이 깜깜해져서 찾아 헤매는 것처럼, 그런 마음으로 십자가를 쥐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끼어들 수 있는 수없이 많은 이삭들을 매일 매일 제거해나가면서 하나님과의 밀착관계를 이루실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신 것처럼 여러분에게 ‘네가 이제야 나를 사랑하는 줄 알겠다.’라고 하시며 하나님의 마음속에 감동을 드리는 삶을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퀸카의 역방향 사랑이 십자가를 쥐고 우리에게서 하나님을 향하여 불같이 일어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 목숨이 뭐가 아깝겠습니까? 이제까지 산 것만으로 된 것이지요. 그런데 그 잘난 목숨 붙잡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끼어들도록 허용했습니다.
집이 끼어들고, 직장이 끼어들고, 돈이 끼어들고, 건강이 끼어들고, 내 자식이 끼어들고, 배우자가 끼어들면서 하나님은 두 다리, 세 다리 건너 계셔도 아무런 아쉬움도 없이 살아왔던 저희들을 용서해주시옵소서. 이제 주님 십자가 붙잡고 날마다 퀸카의 역방향 사랑을 수행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은총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