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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원불교 강동교당 원문보기 글쓴이: 강미현(알라)
솔성요론 8월 17일 ~ 8월 22일
⑴ 대의
① 작업취사의 적극적 방법
삼학은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가 있는데, 작업취사는 삼학공부의 마지막 결실에 해당한다.
취는 취할 취(取)인데, 솔성요론을 취하는 것이다. 사는 버릴 사(사)는 놓아야 할 것, 즉 계문에 해당한다.
계문에 중점을 두어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솔성요론을 표준해서 실천하여 적극적으로 작업취사공부를 진행시킬 수 있다. 부정적인 계문도 중요하지만 긍정적으로 취사해야 할 솔성요론이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계문은 모든 성자들이 밝혀주셨지만, 솔성요론을 밝힌 성자는 많지 않다. 대종사님께서 솔성요론을 밝혀주신 것은 대단히 중요한 법을 밝혀주신 것이다. 대종사님께서 솔성요론을 밝히신 것을 볼 때 다른 성자들과의 차이가 있다.
② 생활 속에서 솔성의 도를 잘 활용하는 공부를 조목화 한 것
인간의 삶은 마음을 사용하는 것이다. 마음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을 조목화한 것이 솔성요론이다.
성품자리를 경계 속에서 사용하는 길이고, 직지인심(直旨人心) 견성성불(見成成佛) 하는 것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솔성요론을 통해서 자기 마음자리를 잘 활용하는 길이다.
솔성요론 16조목, 한 조목 한 조목을 지키는 것은 성리의 바른 활용이다.
견성을 잘 하자고 하는 것은 솔성을 잘 하기 위함이다. 솔성의 의미는 대단히 높은 단계의 공부법이다.
대종사님께서 천도를 잘 순응하는 것과 천도를 잡아 사용하는 것은 공부의 경지가 다르다고 말씀하셨다. 천도에 잘 순응하는 것은 낮은 단계의 공부법이고 천도를 잡아, 일원상의 진리를 잡아서 일상생활속에서 잘 활용하는 것은 훨씬 높은 단계의 공부법이다.
③ 무시선법을 조목한 것
무시선공부를 구체적으로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는 방법이 솔성요론이다.
16조목 솔성요론을 잘 실천하면 무시선이 잘 실천되는 것이다.
계문은 참회문을 조목화한 것이다.
⑵ 내용
1. 사람만 믿지 말고 그 법을 믿을 것이요,
정전편찬 과정중 마지막 편수과정에서 이 조목을 1조로 내셨다.
1조의 중요성을 보인 것이다. 대종경에 선생의 법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여쭈니, 대종사님께서 “내 법이 바른가가 중요하지 내 사후에 내 법이 어떻게 될지는 상관하지 않는다. 내 법이 바르다면 영원히 무궁하게 전해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내 법이 바른 것인가가 중요하지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법이 주(主) 근본(本)이고, 사람은 종(從)이고 말(末)이 된다.
교당에 살아보면 이 조목을 잘 실천하는가에 따라 신심이 달라진다. 법을 주체해서 보지 않고 그 법을 전하는 사람이 먼저 보이는 것이다. 그에 따라 신심이 나고 안 나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 신심이 흔들린다.
1조를 요약하면, 법을 보고 솔성해야 한다. 사람을 보고 솔성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솔성의 표본은 법이다.
조목에 사람“만”이라고 했다. 그 “만”자가 중요하다. 이 말은 사람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주종관계를 따진 것이고 사람을 아예 믿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법을 주체로 해서 법을 운용하는 사람을 믿으라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보고 신심이 흔들리는 것은 솔성요론 이 조목을 잘못 실천하는 것이고 결국 솔성을 잘 못 하는 것이다.
부직자들이 교무님에 따라 신심이 흔들리는 경험을 한다. 어떤 교무님을 만나든지 간에 그 사람은 법을 전하는 매개체이고, 우리가 본래 믿고 표준 잡아야 할 것은 대종사님의 법이다. 법을 표준잡아 사람(상사, 아랫사람)을 대해야 솔성을 잘 하는 것이 된다.
알고 보면 굉장히 쉽지만, 실제 생활속에서 실천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전망품 12장
한 사람이 여쭙기를 [선생님의 교법이 시대에 적절할 뿐 아니라 정당한 법인 줄은 믿으오나 창립한 시일이 아직 천단하여 근거가 깊지 못하오니 선생님 후대에는 어떻게 되올지 의문이 되나이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이 법을 이미 정법으로 알았다 하니 그렇다면 나의 후대에 이 법의 확장 여하를 근심할 것이 없나니라. 보라! 세상에 도둑질하는 법은 나쁜 법이라, 그 법을 나라에서 없애려 하고 사회에서 배척하건마는 그 종자가 없어지지 아니하고 남아 있어서 우리들을 괴롭게 하는 것은, 그 같이 나쁜 법도 필요를 느끼는 무리가 일부에 있기 때문이거든, 하물며 모든 인간이 다 필요로 하는 인도 정의의 정당한 법이리요. 다시 한 예를 더 들자면, 세상 사람들이 모든 물질과 기술을 사용하여 생활을 할 때에 그 발명가를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아니요 각각 자기의 편리를 생각하여 사용하므로 자기의 편리만 있으면 아무리 사용하지 말라 하여도 자연 사용하게 되는 것 같이 모든 교법도 또한 여러 사람이 믿고 사용한 결과에 이익이 있다면 아무리 믿지 말라 하여도 자연 믿을 것이며, 믿는 사람이 많을 때에는 이 법이 또한 널리 확장될 것이 아닌가.]
2. 열 사람의 법을 응하여 제일 좋은 법으로 믿을 것이요,
조직구성원의 의견을 중요하게 여기라는 것이다.
선택의 기로에서 사람들의 의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좋은 법을 선택해야 하다.
의견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는 말도 있다.
지도자의 혜안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지도자가 어떤 것을 선택하는가가 중요하다.
밝은 지혜의 눈, 혜안이 있어야만이 좋은 법을 선택할 수 있다.
지도자는 혜안이 있어야 솔성을 잘 할 수 있다. 좋은 법, 안 좋은 법을 구별할 수 있는 혜안이어야 한다.
이 조목은 지도자의 자기 주견에 집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한 조목이다.
옛말에 “화이불류(和而不流)- 화하되 휩쓸리지 말아라.” 하는 말이다. 좋은 쪽으로 선택되도록 해야 한다.
지도자의 능력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혜안이다. 그래야만이 열사람중에 제일 좋은 법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성자들의 삶을 살펴보면, 수운대신사가 대중에게 제시한 혜안은 “인내천(人乃天) 사인여천(事人如天) - 사람이 곧 하늘이고, 사람 섬기기를 하늘과 같이 해라.”, 대종사님의 혜안은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 이런 표어들이 혜안에서 나오는 말씀이다.
이순신장군의 혜안도 대단하다. 지도자의 혜안으로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뜻을 뭉쳐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 활용하기 때문이다.
대중생활하면서 2조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3. 사생(四生) 중 사람이 된 이상에는 배우기를 좋아할 것이요,
공자 논어 첫 마디가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니 불역열호(不亦說乎)아. - 배우고 또한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할 것인가.” 이다.
공자님은 배우고 또한 익히는 것을 강조하였다.
사생은 태난습화(胎卵濕化)인데, 사생 중에서 제일 존귀하고 고귀한 것은 사람이다. 육도윤회, 많은 유정물속에서 사람이 된 것은 최고의 영광이다. 우리는 사람 중에서 대종사님 법을 만나 공부하는 사람이 되었다.
사생 중에 사람 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사생 중에서 존귀한 사람이 되었으니 사람으로서 해야 할 것은 배우기를 좋아해야 한다. 사람의 일생은 학습의 연속이다. 평생 배워야 한다.
나도 계속 배운다. 인터넷 검색도 하고 강의준비하면서 배운다. 배우기를 좋아하면 그것이 솔성이 된다. 자기 성품을 잘 활용하는 것이 된다.
배우는 것은 일생동안 해야 할 일인데, 사요중에 지자본위를 잘 하면 된다.
지자본위는 지자를 스승삼아 배우는 것이므로 지자에 대한 불공이다.
그래서 이 3조는 불공이면서 솔성이다. 불공을 잘 하면서도 솔성을 잘 하는 것은 배우는 행위이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배우는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솔성이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살아가면서 항상 배우면서 자기를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 3조목을 잘 실천하는 모습이다.
4. 지식 있는 사람이 지식이 있다 함으로써 그 배움을 놓지 말 것이요,
요점은 상에 떨어지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상은 지식이 있다는 상, 많이 안다는 상이다.
이 세상은 지식의 무한보고이다. 한량없는 지식이 널려 있는 보물창고이다.
근본진리를 밝히고 그 근본에 입각해서 부분지를 계속 밝혀나가야 한다.
지식에는 근본지와 부분지가 있다. 근본지는 지혜(智), 부분지는 지식(知)이다.
근본을 밝혔다 하더라도 부분적인 지식들(기계 도구 작동, 사용법등)은 한이 없다.
조금 지식을 갖추었다고 그 지식에 만족하지 말아라. 계속 지식을 확충시켜 나가라.
자기 많이 알고 있다는 상이 떨어지면 더 이상 진척이 없다.
자기가 조금 아는 부분에 딱 걸려서 다른 부분으로 지식을 확충시키는 데에 게을리 하지 마는 것이 솔성의 방법이라고 밝혀 주신 것이다.
지식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상에 걸리면 퇴보된다. 즉 강급되는 것이다.
5. 주색 낭유(酒色浪遊)하지 말고 그 시간에 진리를 연구할 것이요,
전무출신들이야 주색낭유하는 사람들이 있겠냐만은 일반사회 사람들은 주색에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이 많다.
주색쪽으로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는 조목이다. 그 시간을 진리연마쪽으로 방향전환을 하거라.
보통사람들이 제일 경계해야 될 일이 주색 낭유이다. 주색쪽으로 끌리면 인격파괴현상이 일어난다. 주색(술과 색, 남녀관계)은 다른 사람을 파괴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기인격을 파괴시키는 무서운 것이다. 그 방향을 진리연마쪽으로 돌리라는 것이 5조에 제시하는 솔성의 방법이다.
한량이 주색쪽으로 많이 간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 같다. 그렇게 재미를 붙이면 솔성하고는 멀어지는 것이다. 솔성은 성품을 거느리는, 공부의 높은 단계이다. 공부의 높은 단계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주색을 끊고 진리연구쪽으로 마음을 돌려야 하고 그것이 솔성을 잘하는 것이다.
6. 한 편에 착(着)하지 아니할 것이요,
병진, 중도를 말하는 것이다.
마음이 어디에 착하면 떼어낼 수 없다.
솔성 중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병진, 중도실천이다.
유가에서는 ‘백인도가도야(白刃可蹈也)나 중용불가능야(中庸不可能也)로다.’라는 말이 있다.
백인, 칼이 하얗다는 것은 아주 날카로운 것인데, 날카로운 칼도 밟을 수 있지만 중도는 행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중도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사람 사는 곳에서 제일 필요한 것이 중도실천이다. 자기가 어떤 방향으로 선택하느냐에 따라 솔성이 달라진다.
중(中)에는 세 가지가 있다. ①시간적 중도- 늦지 않게 오는 것, ②공간적 중도- 공간의 가운데를 잡으면 편안하다.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중이 되면 마음이 편안하다. ③상황적 중도
시소위(時所位?) -그 시간, 그 장소, 그 상황
집에 불이 나면 제일 먼저 가지고 나가야 할 물건이 무엇이겠는가. 어떤 교도가 집에 불이 나자 일원상과 전서를 들고 나왔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금고, 돈부터 챙기게 된다. 상황에 따른 중도. 상황에 척척 맞으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들이 못 맞추고 자기가 소중하게 여기는 방향으로 끌려가게 된다. 그러면 솔성이 잘 되지 않는 것이다. 불난 집에서 일원상과 전서를 들고 나온 곳에서는 얼마 타지도 않고 불이 꺼졌다고 한다. 그렇게 했기에 불이 더 안 나지 않은 것이다.
어떤 상황이 주어지더라도 한 편에 집착하지 말고 중도를 실천하라는 조목이다.
7. 모든 사물을 접응할 때에 공경심을 놓지 말고, 탐한 욕심이 나거든 사자와 같이 무서워할 것이요,
공경심을 놓지 말라는 것은 사사불공하라는 말이다.
자기가 접하는 모든 물건들을 대할 때마다 부처님으로 모시라는 것이다. 물건을 보면 욕심이 나게 마련이다. 욕심이 나거든 사자를 보는 것 같이 무서워하라는 것이다. 즉 공경심으로 대치해 나가라는 것이다.
탐욕, 욕심은 한계가 없다. 가지면 더 가지고 싶은 것이다.
대종사님께서 솔성하는 방법중에서 경계하신 것이 탐욕이다. 탐욕이 승해서 욕심이 나면 솔성과는 멀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공경심으로 돌려야 한다. 이것이 솔성하는 방법이다.
성품을 잘 사용해야 하는데, 잘 쓰는 방법이 욕심이 날 때 그 욕심을 돌리는 것이다.
8. 일일 시시(日日時時)로 자기가 자기를 가르칠 것이요,
자성반조해라.
‘일일 시시로’ 는 ‘매일 매일, 때로 때로’ 라는 뜻이다.
자아(자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가르치는 자기와 가르침을 받는 자기이다. 가르치는 자기는 자성이고 가르침을 받는 자기는 에고, 습관적 자기이다. 습관적 자기와 자성과의 싸움이다. 습관적 자기는 항상 자성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일상생활속에서 정리가 되어, 가르치는 자기와 가르침을 받는 자기를 스스로 인식이 되어야 한다. 인식을 하지 못하면 자기가 자기를 가르칠 수 없다.
대종경에 취사하는 대중을 어떻게 잡느냐는 질문에 대조하고 반조하라고 하셨다. 그것은 그 일을 실천하는 습관적 자기가 가르치는 자기의 말을 잘 듣고 했는가를 대조하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일일 시시로 일을 당할 때마다 대조해서 가르치는 자기가 가르침을 받는 자기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이 솔성을 잘 하는 것이다.
중용의 첫머리에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수도지위교(修道之謂教)”라고 나온다. 유교의 가장 진리적 근거가 중용에 나온다. 공자님은 논어를 통해서 인간사를 논하고 진리적인 내용은 거의 다루지 않았다. 자사가 지은 중용에서는 진리의 근본자리를 밝히는데 그 첫머리가 이 세 문구이다. 솔성이란 것이 이만큼 중요하다.
우리는 대종사님께서 건너뛰는 공부 방법을 제시해주신 것이다. 일상생활속에서 성품을 잘 다스리는 방법을 제시해주신 것이다.
자기 자성을 보지 않으면 실천을 못한다. 항상 자성자리가 여여하게 나타나 있어야 한다.
가르치는 자기가 주체가 되어 가르침을 받는 습관적 자아를 끌고 가는 것이 솔성이다.
*수행품 33장
문 정규(文正奎) 여쭙기를 [경계를 당할 때에 무엇으로 취사하는 대중을 삼으오리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세 가지 생각으로 취사하는 대중을 삼나니, 첫째는 자기의 본래 서원(誓願)을 생각하는 것이요, 둘째는 스승이 가르치는 본의를 생각하는 것이요, 세째는 당시의 형편을 살펴서 한 편에 치우침이 없는가를 생각하는 것이라, 이 세 가지로 대중을 삼은즉 공부가 항상 매(昧)하지 아니하고 모든 처사가 자연 골라지나니라.]
9. 무슨 일이든지 잘못된 일이 있고 보면 남을 원망하지 말고 자기를 살필 것이요,
이 실천이 쉽지 않다.
대체로 보통사람들은 잘못된 일이 있으면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린다.
대산종사님께서 ‘네덕 내탓’이라고 하셨다. 카톨릭에서 이걸 가지고 가셔서 아주 잘 쓰고 있다.
9조의 실천이 ‘네덕 내탓’이다. 이 ‘네덕 내탓’은 솔성의 지름길이다.
현재 사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나 국가, 정치권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모두 볼 때 항상 공부심과 대조해 봐야 한다. 일어하는 현상들이 나의 탓이 아니라 상대방의 탓으로 돌린다. 제일 심한 곳이 정치권이다. 도대체 어느 사람 말이 맞는지 모른다.
대북관계도 살펴보자. 대산종사님은 멸공, 승공, 반공을 이야기할 때 구공, 화공을 말씀 하셨다. * 남북관계를 보더라도 서로 탓으로 돌린다. 정치지도자들이나 조직지도자들이 이 9조의 실천을 잘하면 이런 사회적 현상이 해결된다.
9조는 일을 바르는 첩경이다. 자기를 바르는 일에서부터 그 일을 바르게 끌고나가는 것이다. 자기를 먼저 바르고 일을 바르게 해야지, 자기를 바르지 않고 그 일만, 남을 바르게 하는 것은 솔성에 어긋난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상대에 감사하라는 것이다.
요즘 감사를 중요하게 강조하고 있다. 원불교 솔성의 실천은 감사에서 시작된다. 감사를 잘 하는 사람은 솔성의 도를 잘 지키는 사람이 된다.
* 대산종사법어 정교편 14장
대산 종사, 한 종교인이 찾아와 「저희는 반공과 승공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하고 사뢰니 말씀하시기를 「모두들 멸공(滅共)을 하자고 하지만 극단으로 하면 안 되나니, 멸공보다는 반공(反共)이 낫고 반공보다는 승공(勝共)이 낫고 승공보다는 용공(容共)이 낫고 용공보다는 화공(和共)이 낫고 화공보다는 구공(救共)이 나으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남과 북이 한 형제요 동포임을 하루속히 깨달아 서로 용서하고 포용하며 화합하고 융화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어야 하느니라.」
10. 다른 사람의 그릇된 일을 견문하여 자기의 그름은 깨칠지언정 그 그름을 드러내지 말 것이요,
11. 다른 사람의 잘된 일을 견문하여 세상에다 포양하며 그 잘된 일을 잊어버리지 말 것이요,
이 조목을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는 상대심 때문이다.
상대심만 떨어지면 이 조목을 실천할 수 있다.
은악양선(隱惡陽善)*, 악을 덮어주는 것이다.
내 마음의 폭이 넓어서 상대방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
마음이 좁은 사람이 있고, 넓은 사람이 있다. 원래 마음자리는 좁고 넓고 할 것이 없지만, 자기가 습관적으로 익혀온 결과 좁고 넓은 마음이 있다. 자기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이 조목은 절대의 세계에서 솔성하는 방법이다.
*정산종사법어 공도편 57장
말씀하시기를 [먼저 자기의 기운을 화하게 한 후에 사람을 널리 교화하는 것이 공부인의 심법이요 지도자의 덕이니, 지도자들은 은악양선을 주로 하여 저 사람이 폭력으로써 대하면 인(仁)으로 용서하고, 저 사람이 교사(巧詐)로써 대하면 진(眞)으로 바루며, 저 사람이 권세와 이해로써 대하면 공의(公義)와 정의(情誼)로 응하여, 능히 천하 창생을 심화(心和) 기화(氣和)로써 두루 교화하여야 하나니라.]
*대산법문 3집 제4편 훈련 28.은악 양선(隱惡陽善)
은악양선(隱惡陽善)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은악은 남의 잘못을 숨겨 주어서 음덕(陰德)을 베푸는 것이요, 양선이란 남의 잘한 일을 널리 드러내 주는 것으로 권선(勸善)하는 것을 말한다.』
12. 정당한 일이거든 내 일을 생각하여 남의 세정을 알아줄 것이요,
남의 세정을 알아주는 이 솔성은 사람을 얻게 된다. 사람 얻는 법이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가면 따르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사람마음을 얻어야 한다. 사람 마음을 얻지 못하면 심복이 되지 않는다.
인간세상 속에서 살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람을 얻는 것이다. 제대로 된, 훌륭한 사람을 얻어야 한다. 세상에는 얻지 않아도 될 사람도 있다. 반드시 얻어야 할 사람을 얻어야 한다. 마음으로 얻어야 하는데, 그 방법이 그 사람의 세정을 알아주는 것이다.
복잡한 일을 할 때, 그냥 지나가면서 “얼마나 고생하냐.” 이 한 마디 하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가. 세정 알아주는 일이다. 이런 솔성을 순간순간 경계경계에 하라는 것이다.
정당한 일에 세정을 알아줘야 한다. 부정당한 일에 세정을 알아주면 죄악을 조성하는 데 동조하는 것이다.
13. 정당한 일이거든 아무리 하기 싫어도 죽기로써 할 것이요,
하기 싫을 때 있다. 강의 들으러 오기 싫을 때 있다. 그런데 강의 듣는 것은 정당한 일이니까 아무리 하기 싫어도 죽기로써 하라고 했다. 사람이 살다보면 하기 싫은 일이 얼마나 많은가.
좌선 끝나고 선요가를 하는데 “지금부터 선요가를 시작하겠습니다.”라는 말만 나오면 얼마나 싫은지..
살다보면 매일 매일 반복되는 일중에서 하기 싫은 일이 생긴다. 그 하기 싫은 일을 죽기로써 해야 한다.
정의 실현 법을 밝혀 주신 것이다.
대종사님께서 구인선진님들께 술 담배를 안 하면 생명에 지장이 있겠냐고 물으셨다. 구인선진님들께서 생명에 지장이 없겠다는 대답을 하시고 그 돈으로 저축조합금을 내셨다. 원불교의 시작은 구인제자의 술담배 참는 것부터였다.
생명에 지장이 없겠다는 것은 죽기로써 하라는 것이다.
정당한 일을 솔성할 때는 죽음을 무릅쓰고 하라는 것이다.
14. 부당한 일이거든 아무리 하고 싶어도 죽기로써 아니할 것이요,
13조와 14조를 실천할 때 주의할 점은 정당한 일과 부당한 일을 구분을 잘 하는 것이다.
구분을 잘 하라는 것은 판단을 잘 하라는 것이고 판단을 잘하려면 지혜가 있어야 한다.
대소유무 시비이해에 대조해야 한다. 대소유무 시비이해를 밝혀서 지혜가 단련되어야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교도로서 교도의 4종의무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므로 정당한 일이다.
복잡한 인간사를 잘 판단해서 안 해야 할 일을 죽기로써 안 해야 한다.
판단을 잘 하는 것이 중요하다.
15. 다른 사람의 원 없는 데에는 무슨 일이든지 권하지 말고 자기 할 일만 할 것이요,
이 조목 때문에 교도들이 입교 권장을 잘 못하는 거 같다.
이 조항 때문에 도가에서 같이 사는 사람들끼리도 인심을 얻으려고 그냥 내버려 둔다.
정당한 일, 입교연원등, 공동생활등의 실천은 이 조목을 적용시키지 말고 죽기로써 할 것의 조목으로 실천해야 한다.
안 좋은 일을 원이 없는데 계속 권장하면 싫증내고 인심이 떠날 수 있다.
박사시화선진님* 이야기를 하겠다.
남원의 유명한 대갓집 마나님을 입교시키기 위해 박사시화선진님께서 항상 드나들었다. 생불님 뵈러 가자고 하도 조르니, 어느 날 대갓집 마나님이 귀찮아서 박사시화선진님이 들어오는데, 아이들에게 없다고 하라고 하고 다락에 올라갔다. 박사시화선진님이 아이들에게 할머니 어디 가셨냐고 물어보니, 아이들은 순진하게 “할머니가 다락에 올라가시면서 없다고 하셨어요.”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대갓집 마나님이 무안하여 나와서 생불님을 뵈러 따라갔다. 대종사님을 뵙고 나서 당신도 제자가 되고 그 가문에서 수많은 전무출신이 나왔다. 박사시화 선진님이 얼마나 복을 지었겠는가.
이 조목을 적용을 잘 해서 실천을 잘 해야 솔성을 잘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 박사시화(朴四時華, 1867~1946) : 법호는 일타원(一陀圓). 법훈은 대봉도. 소태산대종사의 여성 구인제자 가운데 한 사람. 장적조ㆍ최도화와 더불어 초기 교단 3대 여걸로 불렸다. 1867년 12월 18일 전북 남원시 동충리에서 부친 규록(圭祿)과 모친 이춘직(李春稷)의 1남 2녀 중 장녀로 출생했다. 18세에 이순명(李順明)과 결혼했으나 혈육도 없이 부군과 사별했다. 이후 서울에서 뛰어난 바느질 솜씨로 생활했다. 58세 되던 1924년(원기9) 최도화의 안내로 서울에 상경한 소태산을 만나 제자가 되고 전무출신을 발원했다. 이어 이동진화ㆍ이공주 등 여러 인연들을 대종사 문하에 인도했다.
만덕산 초선에 참여하여 소태산의 시봉과 아울러 대중에게 식사를 공급했고, 익산총부 건설에 알뜰히 조력했다. 총부 동ㆍ하선에는 반드시 참여했고, 수선 대중을 위해 고령임에도 갖은 궂은 일을 하는 등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다. 소태산이 설법할 때에는 문정규ㆍ김남천 등과 더불어 백발을 휘날리며 춤을 추어 무상의 법흥을 일으켰다.(《대종경》 전망품29) 박사시화는 서울ㆍ광주ㆍ남원 등지를 두루 다니며 교직 없는 전문순교로서 교화활동을 펼쳐 교단 창립 제1대내에 무려 5백 75명을 입교시켜 최다 연원자가 되었다. 1946년 10월 18일 염주를 들고 염불을 외며 열반했다. (원불교 대사전)
16. 어떠한 원을 발하여 그 원을 이루고자 하거든 보고 듣는 대로 원하는 데에 대조하여 연마할 것이니라.
요지는 일의 성공시키는 솔성의 방법이다.
16조를 잘 실천하면 반드시 그 일의 해법을 찾게 된다.
원하는 데 계속 대조하고 기도하고 연마하게 되면 그 일을 해결해 주는 사람이 반드시 나타나게 된다. 인과의 이치는 무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원을 세우고 계속 대조하게 되면 심신작용을 계속 하게 되는 것이다. 인과는 내가 하는 심신작용에 반응하는 것이란 것을 믿고 있다. 내가 하는 일을 알아달라고 기도하지 않아도 법신불은 다 알아 주고 계신다. 그 일을 해결할 수 있는 해법이 나온다.
내가 부산에 있을 때 수련관 하나 땄는데, 105억짜리고 부지가 3천평 된다. 그 옆에 성당이 있고, 성당이 운영하는 복지관이 있다. 천주교가 그 수련관을 따면 큰 천주교 타운이 된다. 천주교에서 욕심을 냈다. 나는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보고 듣는 대로 어떻게 하면 수련관을 딸 것인가 하고 정성들이고 계속 연마했다. 이 조목을 실천을 한 것이다. 심사위원으로 내가 아는 교수(신라대학교 홍교수)가 들어갔다. 정당한 일이니까 도와주는 사람이 생기게 된다. 시에서 그 홍교수에게 사람 한 명 더 추천해달라고 했다. 5차 투표까지 가서 한 표 차이로 우리가 되었다. 이런 일들을 한 번 해서 성공을 해봐야 그 기쁨, 상쾌함을 알 것이다. 금곡청소년수련관을 따내서 부산교도들이 긍지와 자부심이 더 생겼다. 범어사도 이겼고, 천주교도 이겼고, 또 부산시에서 ‘원불교에 위탁을 주고 나서 부산시청 담당공무원들이 리베이트 못 받아서 졸딱 망했다.’ 는 그런 좋은 소문이 나니 명산 김종대 헌재 재판관이 수련관 운영하는데 도와주겠다고 했다. 뒷바라지를 다 해주고 개원까지 모든 것을 도와주었다.
틀림없다. 16조를 원이 하나 생기면 보고 듣는 대로 다 대조해서 이루어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