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신앙은 어디서 얻을 것인가?(信仰得於何處也)
로마서 10:17
체부동, 삼청동교회(體府, 三淸洞 1929.8.11)
(彼前一章 七節). 知信之爲貴則當知得於何處也, 知金之爲貴則求金於鑛, 知珠之爲貴則知求珠於淵. 多金多玉無益於得救, 惟信得救, 其貴可知也. 非但得救爲然也, 凡事信爲之本也. 無信而能成功者有乎? 吾實未見也.(黙一章三節, 太十三章十六節, 太十三章九節) 據經而觀之則聽者有福, 又曰耳有福以其聞也. 又曰有耳者聞之, 信不可得於學也. 又不可得於行也. 又不可換以物資, 又不可致以權力, 惟得之於聞也. 古人曰聲入心通云, 福音之聲, 入于耳通于心乃可以得信也. 故聞不可不愼. 顔子之非禮勿聽, 亦此意也. 聞有各種, 有以神意聽之者, 有以人意聽之者, 此兩種不可相容, (롬八章五,六節)保羅曰肉身逆聖神, 神意逆肉身, 從肉有苦惱, 從神有平安. 不可不愼也. 此有誤解神肉兩相分離, 有若不可混同者, 然殊不知捨神則不可以爲人也. 捨肉不可以爲人也. 神肉合同成人, 至事業亦合神人而成. 此理灼然可知也. 經之所云者, 但從肉者有苦惱, 但從神者有平安, 上古未開之時, 人無知識, 先知等先傳恐怖, 使人知神, 後世人至漸開, 不可以恐怖傳之. 更以恩惠愈之. 使人知神之愛如在空太陽, 不擇善惡以照, 恐怖已去, 感謝神來, 如黑雲已散, 新旭當空矣. 但從肉者何也? 財利念慮, 物慾猜忌充滿, 聞福音之時, 閉塞不通, 福音不可以暢達, 主嘗比之荊棘, 棘身尨大蔽空, 使雨露及太陽, 不能施其光澤, 須百聞千聞, 道不能成長矣. 比之死海, 百川宗之而注入爲海, 只入而不泄, 魚鼈不能生育, 草木亦不能蕃茂, 水雖爲海而無益於人世, 故名之曰死海. 聞道亦然, 非塞耳不聽, 百聞千聞, 聞之入心, 心能受道然道不居焉. 心如死海聞之卽忘, 無信之結果矣. 爾賽所謂如此之人, 卽聽而不聞者也. 信者中多此病, 講道時不聞道而與人支話, 或幹堂內之事, 或弄幼兒着味, 坮上雖有霹靂之聲, 皆不關心矣. 接友弄兒幹事, 皆非不美而反不足怠於聽道, 主謂마르다曰, 爾有一不足, 마리아擇此善職, 故講道萬事停止, 端坐靜聽, 庶幾近道, 此外有聞道之法, 欲從神旨而生者可以得聞也. 神旨昭在聖書, 傳道宣說. 神旨入人之心如種入土. 心悅誠服, 其環境雖有如何娛樂, 皆不能奪道矣. 獲得不動之信, 雖有天下不能易其道. 於是抱道自重, 如懷中寶, 進堂欲聞道而往, 遇師欲聞道而對, 樂道如飮食, 慕義如飢渴, 知眞理無窮. 若一日不聞道, 心棘生焉. 鏡不頻拭, 塵埃來撲. 故時時掃塵可也. 聞道亦如是, 若一日不聞則塵念萌焉. 若無如是樂道之心則怠, 於進堂無心讀經, 又不祈禱, 殆不若信主者矣. 故主曰(요한 八章 三十一)恒在我道, 恒在者恒聞道也. 摩西欲救己民, 而聞火焰中發聲然後得確信. 主欲救全世, 而聞空中是我愛子之語後獻身, 保羅欲成大人物, 而聞多馬色(다메섹?)之訓, 後得大信. 古者明主夜則令瞽誦詩讀書, 欲恒聞正道也. 雖聖人不聞正道則猶爲病焉. 古人必佩玉, 聞玉鳴之聲, 時時聞之使不發邪辟之心矣.(馬太五章九節). 人有靈耳, 有不靈耳. 有靈耳後可聞主道也, 十字架之道, 於得救之人爲智, 於沈淪之人爲愚也. 我國民已於甲午前已聞亡國之語, 政府之人無靈耳故至於今日也. 日本已於六十年前, 已聞立國大道, 如彼勃興, 國之興亡不在聞之先後, 在聞與不聞. 一人見隣家或有大患, 故勸之使回突徙薪, 主人不聽火起失家云. 今朝鮮之人如此何異也? 今日多聞之日也, 各主義如雨後竹筍, 異音奇語入吾耳膜, 若不審愼不能自主, 眞道亦然, 西人聞之而興國, 東人聞之而別無道理, 聞之不能實行也.
一, 듯는 곳, 普通은 禮拜堂 或屬會.
二, 듯는 때, 普通은 主日也, 古今相異.
三, 듯는 道, 福音最要.
베드로전서 1:7
신앙이 귀중한 것을 알려면 마땅히 그 신앙을 어디서 얻게 되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금이 귀중한 것을 알려면, 금이 금광(金鑛)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진주가 귀한 것을 알려면, 그 진주는 연못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금이 많고 옥이 많아도 구원을 얻는 데는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므로, 그 귀중함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은 단지 구원을 얻는데 귀중할 뿐 아니라 모든 일에 있어서 근본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이 없이 성공하는 자가 있습니까? 나는 그런 사람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1:3. 마태복음 13:16. 마태복음 13:9의 <성경>의 말에는 ‘듣는 자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귀에 복이 있다’고 하신 것은 귀로 듣기 때문입니다. 또 이르기를 ‘귀 있는 자 들으라.’고 하였으니, 신앙은 배움으로써 얻을 수 없고, 또 행함으로도 얻을 수 없으며, 물질로도 바꿀 수 없고, 권력으로도 이룰 수 없습니다. 오직 들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소리가 들어와서 마음이 통하여진다’(聲入心通)이라고 하였는데, 복음의 소리도 귀로 들어와서 마음으로 전달되어야 마침내 믿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듣는 것을 신중히 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공자의 수제자인 안자(顔子)가 ‘예가 아니면 듣지도 말라’(非禮勿聽)한 것도 같은 뜻입니다.
듣는 데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듣는 자가 있고, 사람의 뜻을 듣는 자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용납하지 못합니다. 로마서 8장 5, 6절에, 바울이 이르기를 ‘육신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뜻은 육신을 거역하니, 육신을 따르면 고뇌가 있고, 하나님을 따르면 평안이 있다고 하였으니, 신중하여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정신과 육체를 서로 분리하여 마치 서로 혼동하여서는 안 되는 듯한 오해가 있습니다. 이러한 오해는 정신을 버리고 사람이 될 수가 없으며, 육체를 버리고 사람이 될 수 없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정신과 육체가 합하여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업에 있어서도 역시 하나님과 사람이 합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이 이치의 분명함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육신만을 따르는 자는 고뇌가 있고, 하나님을 따르는 자는 평안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아주 오랜 옛날 사람이 미개하던 때에, 사람들에게 지식이 없었으므로 선지자들이 먼저 두려운 공포심을 전하여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 사람들의 지혜가 점점 개화되어서 공포심만으로 전할 수 없게 되어서, 이제는 은혜로 그들을 깨우쳐 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마치 태양이 하늘에서 선악을 가리지 않고 햇빛을 비추어 주듯이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비쳐준다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없어지고, 검게 덮고 있는 구름을 헤치고 새로운 햇볕을 공중에서 내리 쪼이는 것처럼 하나님이 은혜를 내려주심을 감사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육신만을 따르는 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재물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물질에 대한 욕심과 남을 시기하는 마음만 가득하여, 복음이 들려올 때에도 마음이 꽉 닫혀서 통하지 않으니, 복음이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일찍이 가시떨기에 비유하셨습니다. 가시나무 떨기는 자라나 하늘을 가려 비와 이슬, 그리고 태양의 혜택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말씀을 백번 천 번 듣더라도 신앙의 도가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죽음의 바다인 사해(死海)와 같습니다. 온갖 시냇물이 그 바다를 향하여 들어오지만 들어온 뒤에는 새어나가는 곳이 없게 되니, 물고기나 거북이 같은 생물이 살 수가 없습니다. 풀과 나무도 번성하며 자랄 수가 없어서, 그 물은 비록 바다라고 하여도 세상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죽음의 바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신앙의 도를 듣는 것도 이와 같아서 귀를 막았기 때문에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백 번 천 번을 들어도 그 내용이 마음속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비록 진리의 도를 받아들이더라도 그 도가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그 마음은 죽음의 바다와 같아서 즉시 잊어버리고 맙니다. 이는 모두 믿음이 없는 결과입니다. 이사야가 ‘이런 사람은 들어도 들리지 않는 자’라고 말하였습니다. 믿는 자들 가운데는 이와 같은 병을 가진 사람이 많습니다. 설교할 때 설교는 듣지 않고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한다거나, 교회 내의 좋지 않은 일에 대해 말하거나, 어린아이를 달래는데 정신이 팔려 있으니, 강단에서 벼락 치듯 하더라도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친구를 대접하고, 어린애를 달래고, 할 일을 의논하는 것들이 모두 좋지 못한 일이지만, 도리어 설교를 듣는 일에 게으르게 됩니다. 주께서 마르다 에게 ‘너는 한 가지에도 만족한 것이 없으나 마리아는 이 좋은 일을 택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설교를 할 때는 만사를 정지하고 단정하게 앉아서 조용히 들어야 신앙의 도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그밖에도 하나님이 뜻한 바에 따라 살아가려고 하는 자가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뜻은 <성서>에 실려 있습니다. 전도할 때 <성서>의 내용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씨앗을 흙에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와 기쁨으로 복종하게 되면 그 주위에 어떤 오락이 있더라도 그가 받아들이는 진리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움직일 수 없는 확고한 마음을 얻게 되면, 비록 천하를 다 준다하더라도 그 도를 바꿀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마침내 종교의 도를 중하게 간직하여 마치 품속에 보물을 간직한 것과 같게 됩니다. 그리하여 교회당에는 도를 들으러 가게 되고, 도를 들으려고 스승을 만나게도 됩니다. 도를 즐기는 것은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처럼 하고, 옳은 일을 사모하기를 목마른 듯이 하여 진리의 무궁함을 알게 됩니다. 하루라도 도를 듣지 못하면 마음에 가시 덩쿨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거울을 자주 닦지 않으면 먼지가 와서 묻으므로 때때로 자주 닦아주어야 합니다. 도를 듣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만일 하루만이라도 도를 듣지 않게 되면 속된 생각이 싹트게 됩니다. 만일 이와 같이 도를 즐기는 마음이 없으면 게을러져서 교당에 나가더라도 <경전>을 읽을 마음이 생기지 않고, 또 기도도 하지 않게 되어 주를 믿지 않는 자와 같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한복음 8:31 ‘항상 나의 도에 있으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항상 있으라는 말씀은 항상 도를 들으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자기의 백성을 구원하려고 하는데 불꽃 가운데서 나는 소리를 듣고 난 뒤에 확신을 얻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할 때,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 헌신하셨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의 교훈을 듣고 큰 믿음을 얻었습니다. 옛 현명한 군주는 밤이면 소경을 시켜 시를 외고 글을 읽게 하여 늘 바른 도리를 들으려고 하였습니다. 비록 성인이라도 도를 듣지 않으면 오히려 병이 됩니다. 옛 사람들은 허리에 옥을 차고 다녔습니다. 이는 때때로 들리는 옥 소리 때문에 좋지 못한 마음이 생기지 않게 하려고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5:9).
사람에게는 신령한 귀가 있고, 그렇지 못한 귀가 있습니다. 영적인 귀를 가진 뒤라야 주님의 도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구원을 얻은 자에게는 지혜가 되고, 골몰에 빠진 자에게는 어리석음이 됩니다.
우리 국민은 갑오경장 이전에 이미 나라가 망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정부에 있는 사람들이 영적인 귀가 없었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일본은 이미 육십 년 전에 나라를 세우는 큰 도를 들었으므로 저렇게 발전해 일어났습니다. 나라의 흥망도 그 소문의 선후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귀담아 들었는가 아닌가에 달렸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웃집에 큰 환난이 생길 것을 알고 그 이웃으로 하여금 굴뚝을 돌리고 쌓아놓은 섶을 옮기라고 권유하였으나 그 주인이 듣지 않았다가 화재가 발생하여 집을 태웠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늘날 조선 사람이 이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오늘날은 많이 들어야 하는 때입니다. 여러 주의(主義)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이상한 소리, 기이한 말들이 내 귀의 고막을 두들깁니다. 만일 주의해 잘 살피지 않으면 자기 스스로 주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진실한 도도 이와 같습니다. 서양 사람은 그 도를 들어 나라를 일으켰고, 동양 사람은 들었으나 별다른 도리가 없다고 하여 듣고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一, 듣는 곳 : 보통은 예배당이지만 또는 [속회屬會].
二, 듣는 때 : 보통은 주일이지만 예와 지금이 다름.
三, 듣는 도(道) : 복음(福音)이 가장 중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