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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 살아계심을 적용하자>의 줄거리:
치과에 갈 때면 늘 생기는 걱정이 있습니다. 의료보험이 적용 되는 치료인가 하는 것이지요. 보험 규정이 적용 될 수있는 치료라야 실제로 보험혜택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분이 창조주이시며, 나의 아버지라는 점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내 마음에 적용 되어 내 지정의의 활동에 배어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적용 법을 알아 이 사실이 적용만 되면 깜짝 놀랄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눈 앞에 펼쳐집니다.
하나님 살아계심을 적용하자
(민28:1~29:40)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내 헌물, 내 음식인 화제물 내 향기로운 것은 너희가 그 정한 시기에 삼가 내게 바칠지니라
3. 또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여호와께 드릴 화제는 이러하니 일 년 되고 흠 없는 숫양을 매일 두 마리씩 상번제로 드리되
4. 어린 양 한 마리는 아침에 드리고 어린 양 한 마리는 해 질 때에 드릴 것이요
5. 또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에 빻아 낸 기름 사분의 일 힌을 섞어서 소제로 드릴 것이니
6. 이는 시내 산에서 정한 상번제로서 여호와께 드리는 향기로운 화제며
7. 또 그 전제는 어린 양 한 마리에 사분의 일 힌을 드리되 거룩한 곳에서 여호와께 독주의 전제를 부어 드릴 것이며
8. 해 질 때에는 두 번째 어린 양을 드리되 아침에 드린 소제와 전제와 같이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로 드릴 것이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 살아계심을 적용하자>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 살아계심을 적용하자’
목회를 할 때에도 그렇고 요즘 혼자 이곳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는 동안에도 계속 반복돼서 경험되는 것이 있습니다. 목사님들이 찾아오시거나 일반 성도님들이 큰맘 먹고 찾아오셔서 대화를 하게 됩니다. 보통 목사님들 경우는 목회의 문제를 가지고 대화를 하게 되고 일반 성도님들은 가정 문제, 경제 문제, 건강 문제, 자녀 문제 등 우리 삶에서 흔히 부딪히는 것들이 대화 속에서 표현됩니다. 이 목회나 삶의 모든 영역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근본 원인이 대화 끝에 가면 항상 같은 결론으로 도달하게 되는데, 문제들을 문제로 느끼는 그 문제의식 자체가 문제인 것으로 판명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문제로 보이던 것들이 문제가 아닌 것으로 판명이 되는데, 단지 내 마음에 생긴 문제의식 때문에 그 문제의 중압감을 느끼고 있었을 뿐, 그 문제로 보이던 것들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진행되는 하나님아버지의 사랑의 인도하심이었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이 있기 전에는 그 문제들이 무조건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느끼고 제발 한 순간이라도 빨리 사라지길 바랐던 일들이었는데, 십자가 복음의 원리를 통해서 대화를 나누고 나면 그 어떤 일도 필요하지 않은 일이 없고, 사랑의 뜻이 담기지 않은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말씀들을 하십니다. 결국 문제는 무엇이었고 왜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습니까? 참 신기하게도 어떤 분야의 문제를 가지고 대화를 시작했든지 결론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이 그동안 내 마음에 적용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인데 참 이상합니다. 선민에게 있어서 인생에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창조주이신데, 그 분이 나의 아버지로서 살아계신다는 이 사실이 내 마음에 적용되고 있지 않았다는 이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수백 수천 가지의 일이 문제로서 활성화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문제로 보는 것이라도 내 마음에서 문제의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문제될 것이 없고 문제가 아닌데 왜 그렇게 문제의식이 이곳저곳에서 생깁니까?
마6:31~32절에 주님께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라고 하십니다. 이방인들은 영적으로 아버지가 없는 고아들이기 때문에 걱정을 합니다. 그러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라는 이 말씀이 전부인데 이 사실이 내 마음에 적용되지를 않기 때문에 문제들이 문제로 느껴지게 됩니다.
‘적용한다.’라는 말이 영어로 ‘apply’라고 합니다. 이 ‘apply’는 ‘application’이라는 말로 보통 ‘신청한다.’라는 말로 사용하는데 ‘적용하다’라는 말로 상당히 많이 사용됩니다. 이 ‘apply’라는 단어는 ap+ply로 구성되어 있는데 ap라는 접두어는 ‘~을 향하여 / ~에게’라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 뒤에 ply는 fold로 ‘접다 / 겹치게 하다’라는 뜻으로 ‘적용한다.’라는 말은 ‘겹치게 한다.’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치과에 갈 때에 오늘 받을 치료에는 보험이 적용되는지 걱정을 합니다. 혹은 한의원을 찾아갈 때에도 보험이 적용되는 부분이 있고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보험의 적용은 보험약관상의 규정과 치료받는 나의 현실이 겹치는 것입니다. 내가 치료 받는 것이 겹칠 수 있는 보험 규정이 없다면 적용이 되지 않습니다. 적용이 되면 내 손에 실제로 보험금이 주어지게 됩니다. 혹은 UN이 북한에 ‘경제 제재를 가한다.’라는 이야기를 할 때에 ‘가한다.’라고 하는 말을 영어에서 apply라는 말을 씁니다. 이 말을 영어에서 ‘to apply economic sanctions’라고 합니다. 또 ‘미국 의회가 백악관에 정치적인 압력을 가한다.’라고 할 때에도 ‘to apply political pressure’가 됩니다. 의회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백악관에 겹치도록 놓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신다.’라고 하는 것은 사실인데 너무나 간단한 이 사실이 내 마음에 겹치게(apply)되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게 됩니다.
어떤 목사님과 대화를 하는 중에 목사님이 펑펑 우십니다. 왜냐하면 목회 일에 바빠서 목회의 원칙과 부흥의 원리를 따르고 예배당 건축 등을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장로님께 전화하고 교인들과 딜을 하듯이 애를 쓰면서 설득하려고 쫓아다니는 이 모든 일들이 왜 벌어지고 힘든 중압감을 안고서 살아가고 있느냐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고, 그 아버지가 살아계시고 내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라는 이 사실이 내 마음에 적용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라서 펑펑 우시는 목사님도 있으셨습니다. 어떻게 내가 하나님 살아계심을 마음에 적용시키지 않고 있는지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내 하나님으로 살아계심이 마음에 적용된 증언들은 성경에 산처럼 쌓여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 전체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 아버지 되신다는 그 사실이 마음에 적용되어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셨습니다. 특별히 극명하게 드러난 비유적 사건이 하나 있다면, 제가 자주 말씀드리는 풍랑 만난 배에서의 깊은 잠입니다. 조각배에 올라타신 상태에서 풍랑을 만났을 때 깊은 잠을 주무실 수가 있었던 것은 모든 삼라만상과 풍랑까지 다스리시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사실이 마음에 적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형법 3조 2항이 적용되므로 그 사람의 죄과가 드러나는 것처럼,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면서 아버지라는 사실이 주님의 마음에 적용됨으로 실제로 나타난 효과는 풍랑 만난 배 위에서 잠을 주무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실이 적용되지 않고 대신에 바다에 풍랑이 일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겹쳐져서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마음에 적용되는 사실이 있으면 그것에 의해 지정의 활동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보험 규정에 적용되면 보험금이 나오는 것이고, 형법에 적용되면 죄가 드러나서 형이 확정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이 적용되면 우리의 지정의 활동에 창조주의 자녀로서 의식이 나타나게 되는데 간단합니다.
삼상17:11절에 골리앗 앞에서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라고 합니다. 그런데 45절에 “다윗은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라고 합니다. 사울과 이스라엘 군대는 왜 무서워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으로서 살아계신다는 그 사실 하나가 적용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적용되지 않으면 효과가 실제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요1:12절의 말씀대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시는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그 사실이 적용이 안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적용은 법적 적용이 있고, 기술적 적용이 있고 예를 들면 비행기의 터보엔진의 원리가 자동차에 적용이 됩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적용이 있는데,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내 마음에 적용될 수 있으려면 인격적인 적용이 되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됩니까?
예를 들어 중학생이 둘이 있습니다. 한 명은 아버지가 사업을 하다 실패한 후에 좌절하고 집을 나가서 노숙자가 되어서 찾지를 못합니다. 다른 한 명은 아버지가 재벌입니다. 이 두 학생이 돈 100만원이 필요한 일이 벌어졌을 때에 아버지가 노숙자인 이 중학생은 아버지가 노숙자라는 사실이 적용되니 마음에 근심이 생깁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재벌인 중학생은 아버지가 재벌인 사실이 적용되므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끙끙 앓고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이 적용되면 문제도 아닌 것을 문제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처럼 돌에 맞아서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고 뼈가 으스러져 죽는 순간에도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그 사실이 적용만 되면 나를 치는 자들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길 정도가 되어버립니다. 내 몸이 돌에 맞아 죽는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어디에 있습니까마는, 그런데 그것조차도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문제라고 느끼고 걱정하고 우울해하고 근심하는 모든 것들은 단 하나 하나님 살아계심이 내 마음에 적용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또 상번제의 이야기를 반복하십니다. 소제와 포도주를 부어드리는 전제를 곁들여드리는 상번제 얘기를 하시고 그 다음에 읽지 않은 부분에 안식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일 년 동안 지켜야 될 절기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매달 첫 날을 지켜야 하는 월삭과 유월절, 칠칠절, 나팔절(우리로 말하면 신년에 드리는 제사), 속죄일, 장막절 제사에 대한 이야기가 반복되어 나오는데 이 이야기를 왜 하시는 것일까요?
이제 가나안 땅에 진입하려고 하는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 때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될 일이 바로 ‘제사’라고 말씀해주시면서, 단 한 마디도 보통 사람들이 살면서 부딪칠 수 있는 일반적인 삶의 문제(재정 문제, 건강 문제 등)를 어떻게 해결해야 될지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문제 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먹고 살 일이 급한데 제사 이야기만 자꾸 하십니다.
우리는 이 제사를 예배당에 모여서 드리는 예배로 생각하는데, 엄격하게 말해서 제사는 어떤 형식을 따라 드려지는 예배가 아니라, 제사는 인격적으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내 마음에 적용시킬 수가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적용되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라는 걱정이 생길 수가 없게 됩니다. 재벌의 아들이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걱정을 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마8:20절의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라고 하신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읽다보면 이상한 특징이 나옵니다. 모든 절기의 제사 때마다 매일 매일 드리는 ‘상번제를 드리라’는 이야기가 계속해서 나옵니다. 유월절, 무교절, 나팔절, 속죄일 등에 제사를 드리더라도 상번제를 계속 드릴 것을 일부러 명시를 하십니다. 그리고 또 하나 상번제처럼 반복되는 것이 안식일인데 안식일은 ‘아무 일도 하지 말고 하나님께만 몰두하라’는 것입니다. 그 안식일의 핵심 되는 규정인 ‘성회로 모이고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말씀이 모든 절기 때마다 반복됩니다. 안식일은 일주일마다 돌아오니 한 달에 한 번 드리는 제사 속에서 안식일 규정을 다시 언급할 필요가 없지요. 왜냐하면 한 달에 네 번씩은 안식일로 쉬고 있기 때문이고 매달 첫날에 드리는 제사인 월삭만 제외하고는 일 년에 한 번씩 드리는 모든 절기에서는 안식일의 핵심 규정인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상번제와 안식일의 정신이 일 년 내내 드리는 모든 제사의 의미를 기본으로 깔고 관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월절, 장막절, 나팔절, 칠칠절의 모든 제사들은 상번제와 안식일의 의미를 기본으로 깔고 진행되는 하나님아버지와 나와의 관계가 지속 될 때에 나타나는 특별한 이벤트들입니다.
나와 애인이 사귀기로 결정을 하면 처음 만난 날을 기념할 수 있고, 100일을 기념할 수 있습니다. 둘이서 여행을 간다면 이런 날을 기념하는 것처럼 관계의 내용을 채우는데(먹는 순대의 내용을 채우는 것처럼) 기본적인 관계를 상번제와 안식일의 의미가 구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식으로 말하면 십자가 생활화와 기도입니다.
안식일의 의미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인데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에게만 몰두하기 위해서 이 세상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골방에서 하는 기도의 의미이고 기도조차도 십자가로 하는 기도로 십자가 생활화의 연장인 것입니다. 상번제가 드려지는 것을 알면서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것입니다. 상번제에 소제와 전제를 곁들이는데 소제는 언제 십자가를 생활화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매초 매분마다 ‘나는 주님과 함께 죽은 자로서 마음이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하나님께로 가야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내 마음은 승천하신 주님 안에서 하나님께 머물러 있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상번제의 의미가 십자가 생활화로 완성된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 일이 있고 또 기도도 주기도문으로 기도를 하세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마음이 갈 수 있습니까?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것은 ‘내 마음 속에 하나님의 이름만 남게 해 달라’는 것인데 이것도 세상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을 때에 할 수 있습니다. “나라가 임하옵시며”라는 것은 내 마음이 없어진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임하시길 바라는 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것은 뜻이 이루어지려면 재정 문제에 대해서 먹고 사는 것 외에는 모든 지출항목을 하나님께 맡겨야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람과 만날 때에도 내가 판단하지 말아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상황을 만날 때에도 내가 판단하지 않고 죽어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기도하는데 환경적인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로 주기도문의 기도를 하면서 기도에 몰두합니다. 이 결과로서 나타나는 일이 ‘내가 하늘에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 마음에 적용이 됩니다. 마음에 적용되고 나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 내 앞에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면 우리에게 문제가 주어집니다. 예를 들어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 대학을 들어간 고아출신의 학생이 있습니다. 또 부동산 업자의 아들이 있고, 빠듯한 월급쟁이의 딸이 있고, 재벌4세의 자녀도 있습니다. 서울대학 등록금이 300만원이라면 고아출신 학생에게는 큰 문제입니다. 그리고 빠듯한 월급쟁이의 딸에게는 똑같은 300만원이라도 고아출신 학생보다는 부담이 적어집니다. 그러나 재벌4세의 자녀라면 3억이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똑같은 300만원이라도 다 다릅니다. 이렇게 내 삶에서 경제 문제가 주어질 수도 있고 건강 문제가 주어질 수도 있고 자녀 문제가 주어질 수도 있는데 그 문제에 마음이 적용되어 사로잡히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선 그 문제를 등지고 골방에 들어가서 안식일의 의미를 실현시켜야 하는데 하나님께 몰입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문제에 대해 죽어서 주님 따라서 마음을 하나님께 보내는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사실을 나의 마음에 적용시킴으로 내 수준을 고아출신의 마음 상태로부터 재벌 자녀의 수준까지로 바꿔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문제를 보게 되면 태산 같았던 문제가 개미 만하게 보입니다. 문제가 태산 같을 때에는 앞에서만 보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좁쌀 같이 작아지면 위에서도 보고 사방에서도 보이고 뒤집어서도 볼 수 있게 되면서 문제의 성질도 ‘아, 이것밖에는 안 되는구나’라고 보여 집니다. 그런데도 자꾸만 문제가 생기면 마음으로 문제를 끌어안습니다. 엊그제 말씀드렸던 다순이 누나의 원리를 적용하는 것입니다. 개가 쫓아오면 개를 끌어안고 하나님께 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말로 하면 먼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마음에 적용하는 것을 힘쓰라는 것인데, 모든 절기의 제사들은 하나님께 몰입할 때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얘기될 수 있는 내용물들이므로 기도가 풍성해질 수 있습니다.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건져주신다.’는 것이고 장막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존이 불가능한 광야에서 40년을 살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전능하신 능력으로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내용들을 채워가며 주기도문으로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내 마음이 올라가려면 이 땅에서 붙잡고 있는 건강, 사업, 자식, 배우자, 경제문제 등을 하나씩 거명하며 십자가로 끊어내는 것입니다. 자식에게로 갔던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게 해주셔서 하나님께로 가게 해주시고, 배우자에게 갔던 마음이 죽게 해주셔서 하나님께로 가게 해주시고, 재정문제로 헐떡였던 마음 죽게 해주셔서 하나님께로 가게 해주시고… 사람들은 죽는 기도를 5분만 하고 나면 할 것이 없다고 하는데, 주기도문으로 구체적인 내용을 내 삶에 적용시키다 보면 내 마음을 뺏어가는 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내 마음이 죽고, 그 죽은 문제들에 대해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그 죽은 문제에 대해서 내가 해야 될 일이 있다고 하면 행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 많은 문제에 하나님의 뜻이 임하려면 내 마음에서 기본적으로 돈에 대해서 죽어야 하고 사람에 대해서 죽어야 하고 환경에 대해서 죽어야 하는데, 이런 기도를 하다 보면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기도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이런 기도를 하면서 내 마음을 고아출신에서 재벌4세를 넘어서 세상을 지으신 조물주, 왕 조물주인 그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사실이 적용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아플 때에도 아프다는 사실을 내 가족들이 보고 내 마음이 하나님의 자녀 됨을 적용할 때에 극복하게 되고 주변 사람들의 마음이 허물어지고 깨어지는 기적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려고 나를 아프게 하신 것입니다. 가난도 마찬가지이고 세상적인 어려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십자가 생활화와 십자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내 마음에 적용되기만 하면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이 놀라운 축복을 허락해주셨는데도 제가 인격적으로 적용시키는 일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미련 곰탱이 같은 삶이 중단되게 하셔서 주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하게 하시며, 주님의 십자가로 기도하게 하셔서 하나님 살아계심이 언제나 내 마음에 적용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