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화의파열(和義破裂)
명국의 유격장 심유경(沈惟敬)은 근본 유세객(遊說客)으로 일군에 나와 화친을 청하되 내가 명제에게 아뢰어 풍신씨로 왕을 봉하게 할 터이니 휴전하자 하는지라. 풍신이 허락하고 조선에 퇴군을 명하여 심유경과 약조한 일 개월 후의 소식을 기다리게 하고 군대를 울진만으로 물러갔다.
그리고 일 개월 후 심유경이 명국으로부터 돌아오고 명국이 일본의 봉공(封貢)을 허락함의 가부를 우리 조정에서도 의논하게 되어 명국의 권고하기는 봉공을 허락하면 사로잡힌 두 왕자도 돌아오게 할 것이오 일본이 조선의 덕으로 알고 감사 할지라 허락함이 좋다고 권고가 있었다. 유성룡도 찬성하고 왕도 허락하시다.
그 전에 우리의 사신 허욱(許頊)과 일장 소서행장과 같이 명국에 들어가 세 가지 조약이 있었다.
1은 다만 봉함을 구하되 공(貢)은 구하지 말 것,
2는 일군이 일인도 부산에 머물지 말 것,
3은 영구히 조선을 침노하지 말 것.
이 약조를 지키면 명봉하고 어기면 봉함을 허할 수 없다 하니 소서가 약속을 어기지 않기를 정하고 하늘을 가르쳐 맹서하였다. 이에 심유경과 소서와 같이 일본 군영에 이르러 성약하고 조선은 이종성(李宗誠)으로 봉책사를 삼고 양방형(楊邦亨)으로 부사를 삼아 일본에 보내었다.
29년 병신에 봉책사 이종성이 부산으로부터 돌아왔거늘 때에 중국 복건사람이 있어 일본으로부터 돌아와 말하되 풍신은 실로 봉함을 받을 뜻이 없고 장차 봉책사가 오면 잡아 가두려 한다 하니 종성이 놀래어 밤에 미복을 입고 돌아왔다.
다시 명국에서는 양방형으로 상사를 삼고 심유경으로 부사를 삼았고 조선서는 황신(黃愼)으로 봉책사가 일본에 이르니 풍신이 사관을 승하게 만들고 승한대우로 영접하나 그러나 거만하기 짝이 없고 양방형 등을 영접할 제 심히 너그러우나 또 홀연히 꾸짖어 가로되 내가 조선에 두 왕자를 보내었는데 마땅히 왕자를 보내어 사례함이 가하거늘 사신으로써 대신하니 이는 조선이 일본을 업신여김이라 국서를 퇴각하거늘 행장이 사사로이 황신을 보고 공교로운 말로 사례하는지라.
황신이 봉책사 돌아오는 편에 봉책을 받지 않은 것을 통지하고 추후에 황신도 돌아오다. 그 후에 심유경의 일이 전부 허위로 된 것을 알고 명제는 심유경을 옥에 가두었다가 목 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