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특별한 영화를 하나 봤다.

[보이후드]
'메이슨'이라는 소년의 성장스토리를 픽션으로 만든 영화인데 무려 12년 동안 같은 배우들과 함께 찍었다. 그래서 실제 배우들이 12년간 외적으로 성장하고 변화한 모습까지 볼 수가 있다. 먼저 이걸 보면서 12년 동안 찍을 수 있도록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했을지 상상하니 박수가 절로 나왔다.
니모를 찾아서의 앤드류 스탠튼 감독은 그의 강연에서 '인간은 모두 '문제해결사'로 태어난다고 했다. 그래서 이야기에서 갈등의 장면을 볼 때 문제해결사로서 그 갈등의 장면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보이후드의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중심이 되는 큰 갈등도 없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인상 써가며 집중하는 캐릭터도 없는 영화를 만들었다. 게다가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장면들은 그다지 긴장감을 유지하지 않는다. 다음 장면을 위한 복선은 더더구나 아니다. 이 영화는 일반적인 영화의 스토리가 가져야 할 미덕인 '개연성있는 긴밀한 스토리구조의 연결'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시간의 러닝타임이 전혀 지루하지 않고 마지막에 진한 여운과 감동이 남았다. 왜였을까?
우리는 나에게 아주 큰 변화가 생기거나 일상적이지 않은 사건이 생기면 그 때 삶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리고 터닝포인트가 언제냐고 물어본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 매 순간이 터닝포인트는 아닐까? 이 영화의 메인 홍보문구('수많은 기억의 조각들로 이뤄낸 단 하나의 특별한 이야기')처럼 스쳐지나간 인생의 조각이지만 그 조각이 없으면 내가 될 수 없다.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내 인생의 작은 기억들이 마구 떠올랐고, 그 장면에서도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는 독특한 경험을 했다.
열아홉, 수능이 끝난 지 보름 정도 된 어느 날, TV 속에서 ‘나무치료사’라는 직업을 가진 이가 나왔다. 그는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다가 어떤 운명에 이끌려 그 직업을 그만두고 전국을 돌며 나무를 치료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주로 국립공원과 큰 조경사업장 등을 다니며 병들고 있는 나무에게 약을 투여하기도 하고 관리하는 방법을 컨설팅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나는 가슴이 뛰었다. 내가 찾던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당장이라도 그분에게 연락을 해서 제자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당시는 누군가에게 연락할 수 있는 검색방법을 잘 모르던 때여서 나는 다른 대안을 찾았다. 매력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서 그들에게 일을 배우겠다고 말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3여 년 동안 나는 도자기 기술자, 연극연출가, 자개기술자, 축제문화기획자, 아마추어 성악가를 직접 찾아갔고 그들 밑에서 짧게는 2개월, 길게는 3년 정도 직접 현장의 경험을 해 보았다.
이런 조각들이 직접 연결이 되어 지금 내 삶을 이어나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사실 내가 저렇게 많은 직업인을 만나 그들 수하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보조를 하였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는 잊고 있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나의 그런 시절이 떠올랐다. 스무살 때 연극을 하면서 만난 스무세 살의 배우 언니에게 "언니는 왜 죽는 것이 두려워요? 나는 두렵지 않아요."라며 마치 영화에서 메이슨이 여자친구에게 말하듯 손발 오그라드는 멘트를 했던 것도 기억난다.
일년에 두번 명절에 친척들을 만나면 부쩍 커 있는 소년 소녀들을 보면서 어른들이 한마디씩 한다.
"아이구 많이도 컸네"
어릴 때에는 그게 귀찮았다. 어른들이야 더이상 키가 자라지 않겠지만 성장이 의무(?)인 우리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한 두사람도 아니고 여러 사람에게 들으니 지겨울 법도 했다. 하지만 더 이상 크지 않는 나이가 된 이후부터는 나 역시도 그것이 경이롭다고 느끼게 되었다. 키가 자라는 것 뿐만 아니라 몸의 비율이 달라지고 목소리가 성숙해 졌으며 미묘하게 눈빛의 변화가 생긴다는 것이 정말 신기한 일이다. 내가 알고 있는 소년, 소녀들이 외적으로 어떻게 변화했는지 관찰하는 것은 나에게 굉장한 구경거리이다^^
내가 10대에 '성공시대'라는 TV프로그램을 빠지지 않고 봤던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성공'을 하기 위해서 는 아니었다. 그 때는 성공이라는 말만 들어도 '왜 모든 사람이 꼭 성공해야해?'라며 날카롭게 반응하던 예민한 사춘기였다. 단지 나는 사람들의 삶이 궁금했다. 그들에게는 어떤 선택의 가능성들이 있었을까? 그 가능성 중에 왜 하필 그 선택을 했을까. 내 주변의 사람들과 비슷한 노력을 한 것 같은데 왜 운이 따랐을까? 어떤 선택 뒤에는 왜 저런 결과가 나온 것일까?
비슷한 이유-성공시대를 보면서 던졌던 의문과 타인의 삶에 대한 관심-에서 회사 일을 그만두고 자비를 들여서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그것을 블로그에 실은 적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는 걸 참 좋아하는 것 같다.
이 영화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일까?
그건 '우리 삶이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말은 무엇일까?' 라고 묻는 것과 같은 것 같다. 이런 류의 질문은 백석의 시의 주제는 무엇인가요? 라고 묻는 것보다 훨씬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사람마다 다르게 와 닿을 것이다.
내가 진행하고 있는 자기탐색스쿨에서 '스토리그래프 그리기'라는 코너가 있다. 두 시간 정도의 긴 시간동안 내 인생의 사건들을 모두 돌이켜보고 짝을 이룬 한 사람의 인생을 들어주는 시간이다. 흔히들 '산맥타기, 인생곡선 그리기' 등의 용어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나는 이 과정을 끝내는 시점에 반드시 이것을 물어본다.

"끝낸 후 의 소감은 어떠한가요?"
"내 삶이 나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그러면 여러 종류의 소감과 메시지가 나온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저는 주로 타인에게 인정을 받을 때 상승하는 곡선을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고난이 있거나 인정을 받지 못할 때 아래로 추락하는 경향이 있었네요. 그런 걸 알게 되었습니다.'
'아주 힘들고 굴곡이 많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전체를 놓고 보니 비교적 평탄했던 삶이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자기소개서에 적을 특별한 내용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그래프로 그려보니 하나하나가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ㅇㅇ야, 지금까지 잘 해 왔다. 너는 매 순간 니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다'
'ㅇㅇ야, 너가 몇 년 동안 애써서 해 보려고 간절히 원했던 것이 있었지? 그걸 이루진 못했지만 그러는 동안 너는 단단히 다져진 것 같아. 괜찮아. 아니 오히려 축하해!'
자기 삶이 자신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질문을 던져본 적이 있는가? 내 삶을 이루는 작은 기억의 조각들을 사랑하고 그 조각에서 하나의 의미를 발견해보고 싶은 날이다.







첫댓글 영화가 보고싶어지네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