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회고록 2막10장 (4부)
베이비붐세대의 기준점으로 상징되는 58년생.
6.25전란후 1955년부터 1963년사이 태어난 세대를 "베이비 붐"세대라 칭한다.
매년 90~100만의 인구가 태어났으니 그 인구폭발은 경제발전의 초석이 되고,추후 한강의 기적에 동참하고 그 베이비붐세대가 결혼 전정기인 1980년대과 1990년대에 또다른 인구 증가가 생기니 이를 "베이비붐 에코세대"라 한다.
즉 내 자식들은 모두 "베이비붐 에코시대"인 것이다.
반학급은 최소80명이었고 많을시는 100명이 넘는 반도 있었다
반수는 한학년이 12반 에서 14반까지 이여졌고.
그들이 중고등학교에 다닐시는
중고등학생을 주제로 하이틴 영화도 유행하였다.
100만명에 달한 한학기생을 절대 무시할수 없는
숫자 였으니 말이다.
그당시 집집 마다 3~4명의 자식을 두는 것이 다반사 였다. (심지어 우리 큰고무네는 2남6녀의 8남매를 두었다.)
출석을 부를때도 담임선생님의 목이 쉴정도 였다.
그 베이비붐 세대는 추후 많은 시련을 격게 된다.
치열한 경쟁에 파뭍혀 입시지옥의 진한 맛을 보아야 하였고 전쟁과 같은 IMF시국을 거치고 1980년대 민주화의 초석이 되는 연세대 이한열과 서울대 박종열의 죽음으로 시작된 민주화는 1987년 노태우가 발표한 6.29선언으로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로 발돋움 하게되며. 송창식,윤형주, 양희은,송골매
대학가요제의 열풍으로 통키타와 청바지의 문화를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내 인생에서 내게 글을 쓰게 만든 색다른 스토리와 백옥 같은 단어의 주술사 "최인호"작가의 탄생과
("최인호"씨 작가는 추후 이야기 할것임) 태백산맥의 조정래와 박경리의 토지는 나에게 많은 교훈을 준 역사시대물 이였다.
아뭏튼 7080세대의 서막은 그런 우여곡절 속에 탄생되고 서로 만원버스에 의지하며 살아온 처절한 세대인 것이다.
그세대를
"7080세대"
또는
"베이비붐 세대"
라 칭한다.
나는 동갑내기 100만명과 길거리에서 부딪히면 오늘도 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