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는 두개 입은 하나
귀는 두 개이면서도 막을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고
입은 하나이면서도 닫을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옥잠화
옥잠화가 피었습니다.
옥잠화를 보면 범어사 선원에서 보낸 1년이 떠오릅니다. 늘 묵언하면서 고요히 걷던 그 시절.
50분 공부하고 10분 쉴 때마다 뜨락에 핀 깨끗하고 하얀 옥잠화를 즐겨 보았습니다.
고개 숙인 하얀 꽃이, 시선은 방바닥 허공에 두고 이 뭣꼬! 하는 수행자를 닮았습니다.
옥잠화를 볼 때마다 도반들과 고요한 선원이 떠오르는 건 그래서일까요.
우리는 자기가 경험한 세계 속에서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같은 것을 봐도 생각이 다릅니다.
산속에 좋은 터를 보고서 목사님은 기도원을, 스님은 절터를, 보통 사람은 별장을 떠올리는 것이지요.
좋은 경험이 중요한 건 이 때문입니다.
오래전 <친구>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잔인한 장면들과 친구도 원수가 되는 상황이 무척 속상했습니다.
어지러운 세상에 휩쓸리면 친구 사이도 원수가 되고
만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감독의 선한 의도는 알았지만.
영화를 남에게 권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장이머우 감독의 <집으로 가는 길>은 많이 권한 영화입니다.
한평생 한결같은 순수한 사랑, 좋은 선생님과 제자들,
하얀 자작나무 숲, 노란 단풍과 한적한 시골 마을 모습이
지금도 행복한 기억으로 저장되어 있습니다.
지금 순간들은 곧 미래의 기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 좋은 것을 담아야겠습니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잠이 오지 않을 이유가 없는데 잠이 오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이런 날은 뭔가 꼭 알게 되는 것이 있지.
이렇게 생각하며 TV를 켰습니다.
영화가 흘러나옵니다.
27살의 주인공이 좋은 인연을 만나 행복하게 살 날만
남았는데 건망증에 시달립니다.
혹시나 해서 들른 병원, 검진 결과는 알츠하이머.
가까운 기억부터 점점 지워져 살던 집을 잊고,
직장을 잊고, 사랑하는 사람까지도 잊게 됩니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 모두가 무서운 병과 함께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고마운 일아나 고운 인연들을 잘 알았습니다.
사랑했던 인연보다 미워했던 인연을 더 오래
기억하기도 하고,
고맙고 행복했던 날들보다 원망하고 후회스러운 날이
더 많은 인생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잘한 일들이 많지만 못한 일 한두 가지로
다 덮어버리기 일쑤인 데다.
무엇보다 하루하루, 순간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자주 놓칩니다.
투명한 가을날, 빨강 분홍 하양 코스모스가
피어 있는 모습이 신비롭습니다.
쪽빛 하늘에 가벼운 깃털 구름이 흘러가는 모습도
놀랍습니다.
삶이 이런 기적이라는 걸 잊은 채 부질없는
작은 욕심에 휘둘려
멍하니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이 세상, 조아지라고 온 것인데 말이지요.
주인공
서종사에는 은행나무가 네 그루 있습니다. 두 그루는
처음 절 문을 열 때 와서 지금 서종사의 중심 나무로
자리 잡았습니다.
다른 두 그루는 마을 분이 느티나무 두 그루와 함께
심어주셨습니다, 이미 절에 은행나무가 두 그루나
있으니 필요 없다고 했는데도 굳이 주셨는데,
느티나무가 죽을지도 몰라서 잘 사는 은행나무를 더
주신 것 같습니다.
어느 해인가 예쁜 가을 국화 화분이 들어왔습니다.
겨울이 되자 국화는 시들었습니다. 모든 화분을 방으로
모실 수도 없고, 그렇다고 버리기는 아까워서 해우소
가는 길에 그 국화를 심었습니다. 그랬더니 해마다
가을이 되면 찬란한 노란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덤으로
온 은행나무도 잘 자라서 샛노랗게 이 가을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억지로 왔든,인고의 시간이 지나고 때가
되면 찬란한 주인공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밤을 주우며
어릴 적 집에는 밤나무가 많았습니다. 밤을 거둬서 팔면
살림에 보탬이 되곤 했는데, 특히 추석 전에 영그는 이른
밤나무는 넉넉한 추석을 보내는 데 한몫 거들었습니다.
서종사 둘레에는 밤나무는 물론이고 다른 과일나무도
없었습니다.그러던 어느 봄날,제자가 매실나무,
자두나무와 같이 밤나무도 세 그루 심었습니다.
그 작은 묘목에 언제 밤송이가 열리나 했는데 어느덧
자라 올해는 제법 큰 알밤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주머니가 불룩해졌습니다.
시간은 우리가 모르게 다가오기도, 지나가기도 합니다.
알밤은 찰나에 나타난 것 같습니다.
밤나무 말씀하기를
"서두르지 마세요.
할 일 하고 기다리면 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