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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4장 우리의 무대가 세계인 이유 8. 꿈에도 잊지 못할 1976년, 워싱턴 모뉴먼트 1 1975년 12월에 뉴욕 맨해튼의 북쪽에 있는 배리타운에 통일신학대학원을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유대교와 기독교, 천주교, 불교 등 모든 종교를 초월해서 각계의 교수들을 초빙했습니다. 그들이 교단에서 자신의 종교를 가르치면 우리 학생들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 묻습니다. 수업시간은 매번 격렬한 토론장이 되었습니다. 2 모든 종교가 한 덩어리가 되어 토론을 하며 잘못된 편견을 깨고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능한 젊은이들이 우리 학교에서 석사 공부를 마친 뒤에 하버드나 예일대학의 박사과정에 입학했습니다. 그들은 오늘날 세계 종교계를 이끌어가는 인재들이 되었습니다. 3 미국 국회는 1974년과 1975년에 나를 초청했습니다. 나는 하원 의원들 앞에서 'One Nation Under God'이란 주제로 강연을 했습니다. "미국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탄생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 축복은 단순히 미국인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4 그 축북은 미국을 통해 내려진 세계를 위한 축복입니다. 미국은 축복의 원리를 깨닫고 전 세계의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미국은 건국정신으로 되돌아가는 일대 각성운동을 벌여야 합니다. 5 수십 개로 나누어진 기독교를 통합하고 모든 종교를 규합해서 세계문명의 역사를 새로 써야 합니다" 하고 거리의 젊은이들을 향해 외쳤던 그대로 미국 국회의원들 앞에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때까지 미국 의회에 초청을 받아 강연을 한 외국의 종교 지도자는 나밖에 없었습니다. 연달아 두 번이나 국회의 초청을 받자 한국에서 온 문 총재가 도대체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이들이 부쩍 늘어났습니다. 6 그 이듬해 6월 1일, 뉴욕의 양키스타디움에서 미국의 건국 2백주년을 축하하는 축전이 열렸습니다. 당시 미국은 건국 2백 주년을 자축할 만큼 편안하지 못했습니다. 공산당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고, 미국의 청소년들은 마약과 낙태 등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나는 미국, 그것도 뉴욕이 큰 병에 걸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병들어 누운 뉴욕의 심장에 칼을 대는 심정으로 축전에 임했습니다. 7 축전 당일은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습니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아무도 비를 피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밴드가 'You Are My Sunshine'을 연주하자 양키 스타디움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한 목소리로 그 노래를 따라 불렀습니다. 비를 철철 맞아가며 햇빛의 노래를 부르니, 입으로는 노래를 하지만 눈에서는 눈물이 났습니다. 빗물과 눈물이 범벅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8 나는 학교 다닐 때 복싱을 했었습니다. 복싱을 할 때 잽을 아무리 여러 번 넣어도 맷집 좋은 선수들은 끄떡도 안 합니다. 하지만 어퍼컷을 한 방 크게 날리면 아무리 힘 좋은 선수도 휘청합니다. 나는 미국이란 나라에 어퍼컷을 한 방 크게 날릴 셈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거둔 성공보다 훨씬 큰 규모의 집회를 가져서 미국사회에 문선명의 이름을 확고하게 박아둘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9 워싱턴은 미국의 수도입니다. 국회의사당과 직선으로 이어지는 자리에 모뉴먼트라고 하는 탑이 있습니다. 마치 뾰족하게 깎은 연필을 세워놓은 것과 같은 모양입니다. 그 모뉴먼트 아래로 링컨기념관까지 이어지는 드넓은 잔디밭이 있습니다. 그곳은 말 그대로 미국의 심장입니다. 나는 그 곳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 계획을 세웠습니다. 10 워싱턴 모뉴먼트에서 행사를 가지려니 미국 정부의 허가를 얻어야 하고 미국 파크경찰한테도 허가를 얻어야 했습니다. 미국 정부는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위기에 몰린 닉슨 대통령을 용서하라고 신문광고를 내고 카터 대통령의 자유주의 정책을 심하게 반대한 사람이니 반가워할 리가 없었습니다. 미국 정부가 여러번 퇴짜를 놓는 바람에 대회 날짜를 40일 앞두고서야 겨우 허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11 우리 식구들도 너무 큰 모험이라며 다들 말렸습니다. 워싱턴 모뉴먼트는 도심 한복판에 자리 잡은 사방이 뻥 뚤린 공원입니다. 그것도 나무가 울창하게 담장을 친 곳이 아니라 그저 푸른 잔디밭입니다. 그러니 행여 사람이 적게 모이면 천지사방에 그 썰렁함이 다 드러날 판입니다. 12 그 넓은 잔디밭을 가득 채우려면 수십만의 인파가 몰려와야 하는데 과연 그 일이 가능하겠는가 말입니다. 그때까지 워싱턴 모뉴먼트에서 큰 행사를 가진 사람은 두 사람 뿐이었습니다. 워싱턴 모뉴먼트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인권 행진을 벌였던 곳이며 또 빌리 그래이엄 목사가 대규모 집회를 가졌던 상징적인 곳입니다. 그런 장소에 내가 도전장을 냈습니다. 13 나는 그날의 집회를 위해 쉴 새 없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원고를 네 번이나 고쳐 썼습니다. 집회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 왔는데도 그날 무슨 설교를 해야 할지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그러다 원고 쓰기를 마친 날이 겨우 대회 사흘 전이었습니다. 본래 나는 설교 전에 원고를 만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이 쓰였습니다. 뭔지 확실치는 않지만 대단히 중요한 집회가 될 게 분명했습니다. 14 마침내 1976년 9월 18일, 꿈에도 잊지 못할 일이 그날 벌어졌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끊임없이 워싱턴 모뉴먼트로 몰려들었습니다. 무려 30만 명이라는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어디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찾아온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머리카락 색깔이며 얼굴색은 모두 제각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보내신 모든 인종이 다 모인 것 같았습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정말 세계적인 집회였습니다. 15 나는 30만 명의 인파 앞에서 "퇴폐적인 미국 청년들을 위기에서 구해내어 희망의 젊은이로 만들려 미국에 왔다"고 당당히 선포했습니다. 내가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관중들 속에서 환호성이 일었습니다. 동양에서 온 레버런 문이 전하는 가르침은 혼돈의 시대를 살던 당시 미국 청년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들은 내가 전하는 순결과 참가정의 메시지에 환호했습니다. 사람들의 열광적인 반응에 내 안에서도 진땀이 흘렀습니다. 16 그해 연말,「뉴스위크」는 나를 1976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습니다. 그렇지만 또 한 편에서는 나를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그들에게 나는 동양에서 온 이상한 마술사일 뿐 그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백인이 아니었습니다. 또 자기들이 흔히 듣던 기성교회의 가르침과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한다는 게 그들을 몹시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17 더군다나 백인 청년들이 '눈이 생선처럼 가늘고 긴 아시아인'한테 존경심을 표하고 따르는 것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없습니다. 그들은 내가 순진한 백인 젊은이들을 세뇌시킨다고 악소문을 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환호를 보내는 무리들 뒤에서 나를 반대하는 세력을 모았습니다. 내게 또 다른 위기가 닥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겁내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분명히 옳은 일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18 미국은 인종차별과 종교차별이 심한 나라입니다. 전 세계 모든 인종들이 모여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자유와 평등의 나라로 알려져있지만 사실은 인종차별과 종교차별로 심한 갈등을 빚고 있는 곳입니다. 그것은 퇴폐와 타락, 물질주의처럼 1970년대의 풍요 속에 나타난 사회 병폐보다도 훨씬 더 미국 역사에 깊이 아로새겨져 쉽게 치유되기 어려운 고질병이었습니다. 19 그 무렵 나는 종교 간의 화합을 이끌고자 흑인들 교회를 자주 찾아갔습니다. 흑인 리더들 중에는 마틴 루터 킹 목사처럼 인종차별을 없애고 하나님의 평화세계를 이룩하려 애쓰는 숨은 일꾼들이 많았습니다. 20 그들은 법적으로 인종차별이 금지되기 전, 수백 년 동안 벌어졌던 흑인 노예 시장의 사진을 교회 지하실에 전시해놓곤 했습니다. 살아있는 흑인을 나무에 매달아 불에 태우는 장면, 노예로 팔려온 흑인들을 닭처럼 늘어놓고 입을 벌려보는 장면, 남녀흑인을 벌거벗겨놓고 노예를 고르는 장면, 울부짖는 아이를 엄마 품에서 떼놓는 장면 등 차마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르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었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앞으로 30년 안에 흑백 혼혈가정에서 태어난 아이가 미국의 대통령이 될 겁니다." 21 1975년 10월 24일, 시카고 집회에서 나는 그렇게 말했고 그날의 예언은 지금 미국에서 현실이 되었습니다. 시카고 태생의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었으니까요. 그러나 내 예언이 저절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종교와 교파 간의 갈등을 없애기 위해 흘린 많은 사람의 피와 땀이 이제야 한 송이 꽃이 되어 피어난 것입니다. |
平和を愛する世界人として 第四章 私たちの舞台が世界である理由 8. 夢にも忘れられない一九七六年、ワシントン記念塔 一九七五年十月、ニューヨーク・マンハッタンの北側にあるベリータウンに「統一神学大学院 (UTS)」 を設立しました。 教授陣には、ユダヤ教、キリスト教、仏教など、あらゆる宗教の垣根を越えて、各界から優れた人材を迎え入れました。彼らが教壇に立って自分の信じる宗教を教えれば、学生たちは鋭い質問を投げかけます。授業は、毎回白熱した議論の応酬の場となりました。 あらゆる宗教が寄り集まって討議することで、間違った偏見はなくなり、学生たちはお互いを理解し始めました。こうして、多くの有能な若者が私たちの学校で修士課程を終えて、ハーバード大学やエール大学の博士課程に進学していきました。彼らは今日、世界の宗教界を導く人材になっています。 アメリカ議会は、一九七四年、七五年に私を招請しました。私は、上下両院議員の前で「アメリカを中心とした神の御旨」という主題で講演を行いました。 「アメリカは神の祝福によって誕生した国です。しかし、その祝福は、ただアメリカ人だけのものではありません。それは、アメリカを通して下された世界のための祝福です。アメリカは祝福の原理を悟り、全世界の人類を救うために自らを犠牲に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そのためには、建国精神に立ち返る一大覚醒運動を起こさなければなりません。数十に分かれたキリスト教を統合し、あらゆる宗教を一つにまとめて、世界文明の歴史に新たな一ページを加えるべきです」 私は、道行く若者に向かって訴えたのと全く同じことを、アメリカ議員の前で声高に訴えました。その時点で、アメリカ議会から招請を受けて講演した外国の宗教指導者は私しかいません。続けて二度も議会の招請を受けると、韓国から来た「サン・ミョン・ムーン (Sun Myung Moon)」 とは一体誰なのかと、関心を持つ人がとても増えました。 その翌年の六月一日、ニューヨークのヤンキー・スタジアムで、アメリカ建国二百周年を祝う祭典を開きました。当時のアメリカは、建国二百周年を自ら祝っていられるほど平穏無事とはいえない状況でした。共産主義の脅威に苦しんでいたのであり、青少年の多くは、麻薬や堕胎など神の願いとはかけ離れた人生を送っていました。私はアメリカ、中でもニューヨークが大きな病にかかっていると考えました。そこで、病に臥したニューヨークの心臓にメスを入れる気持ちで祝典に臨みました。 祝典当日は驚くほどの雨が降り注ぎましたが、開始直前、会場一帯は晴れ、悪天候の苦難を劇的に超えて、大会は成功裏に行われました。まだ雨が降っている時のことです。 バンドが「ユー.アー・マイ・サンシャイン(You Are My Sunshine)」を演奏すると、ヤンキー・スタジアムに集まった人々は、全員で声を合わせて一斉に歌い始めました。雨に打たれながら太陽の光の歌を歌うので、口では歌を歌いましたが、目からは涙が出ました。雨水と涙が入り混じる瞬間でした。 私は学校に通っていたとき、ボクシングをやっていました。ボクシングでは、いくらジャブを何回入れても、体力のある選手はびくともしません。しかし、アッパーカットを一発大きく入れれば、どんなに体力のある選手でもぐらつきます。 私は、アメリカという大国にアッパーカットを一発大きく入れるつもりでした。今までに成功したどの集会よりもはるかに大きな規模の集会を持ち、アメリカ社会に「サン・ミョン・ムーン」の名前をしっかりと刻み付ける必要があると考えました。 ワシントンDCはアメリカの首都です。アメリカ議会議事堂とリンカーン記念堂を直線で結んだほぼ真ん中にワシントン・モニュメントという記念塔があります。 ちょうど削って尖らせた鉛筆を垂直に立てたのと同じ形をしています(高さ百六十九メートル)。その記念塔の下には、リンカーン記念堂まで続く幅の広い芝生広場があって、そこはアメリカの心臓部といってよい場所です。私は、そこで大規模な集会を開く計画を立てました。 ワシントン記念塔前の広場でイベントをするためには、アメリカ政府の許可を得なければならず、アメリカ公園警察からも許可を取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しかし、アメリカ政府は、私のことをあまり好ましく思っていませんでした。アメリカ政府が何度も申請書を突き返してきたため、大会当日の四十日前になってようやく許可を得ることができました。 信徒たちも、あまりに大きな冒険だとして、誰もが引き留めようとしました。ワシントン記念塔前広場は、都心の真ん中に位置し、がらんとした、辺り一帯に何もない公園です。それも、木が生い茂って垣根になっている所ではなく、ただの青い芝生の広場です。 ですから、もし人が集まらなければ、四方八方からその閑散とした様子があからさまになってしまいます。広い芝生の広場をぎっしりいっぱいにしようとすれば、数十万の人波が押し寄せてこ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が、果たしてそれが可能かということです。 その時まで、ワシントン記念塔で大きな行事を行った人物は二人しかいませんでした。公民権運動の一環で「ワシントン大行進」を行ったマーティン・ルーサー・キング牧師と、大規模な宗教集会を開いたビリー・グラハム牧師です。そのような場所で大会を開こうと、私が挑戦状を突きつけたのです。 私はその日の大会のために、休む間もなく祈祷しました。原稿を四回も書き直しました。大会の一週間前になっても、その日にどんな説教をすべきか心が定まっていませんでした。 原稿を書き終えたのは、大会のわずか三日前です。本来、私は説教の前に原稿を用意することはしません。しかし、その時はそうしてみようと心が動かされました。どういう訳なのかはっきりしませんが、とても重要な大会になることは明白でした。 ついに一九七六年九月十八日、夢にも忘れることができないその日が来ました。朝早くから人々がひっきりなしにワシントン記念塔に押し寄せてきました。何と三十万人という大勢の人の群れです。 それほどの群衆が一体どこから押し寄せてきたのか、全く見当もつかないことでした。彼らの髪の毛の色や顔の色は皆、色とりどりでした。神様がこの地上に送り出されたすべての人種が集まったかのようでした。それ以上何を言う必要もない、本当に世界的な大会になりました。 私は三十万人の群集の前で、「退廃的なアメリカの青年たちを危機から救い出し、希望の若者にするためにアメリカに来た」と堂々と宣布しました。私が一言一言語るたびに、観衆の中で歓呼の声が上がりました。東洋から来たレバレンド・ムーンが伝える教えは、混沌の時代を生きていた当時のアメリカの青年たちにとって、新鮮な衝撃でした。彼らは、私が伝える純潔と真の家庭のメッセージを歓迎しました。人々の熱狂的な反応に、私の体からも脂汗が流れてきました。 その年の暮れ、『ニューズウィーク』誌は私を一九七六年今年の人物」に選びました。しかし、また一方では、私を警戒し、恐れる人たちが増えました。彼らにとって私は、東洋から来た不思議な魔術師にすぎず、彼らが信じて付いていくような白人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また、自分たちがよく聞く既成キリスト教会の教えと少々異なった話をするということが、彼らをとても不安にさせました。 その上、白人の若者たちが、「目が魚のように細長いアジア人」を尊敬し、彼に付いていくのを絶対に容認できませんでした。彼らは、私が純真な白人の若者を洗脳していると悪い噂を流し、私に歓声を送る群れの背後で、私に反対する勢力を集めました。またしても新たな危機が身近に迫ってきたのです。しかし、臆することはありませんでした。私は明らかに正しいことをしていたからです。 アメリカは人種差別と宗教差別が激しい国です。アメリカンドリームに憧れて、世界中からあらゆる人種が集まってくる自由と平等の国として知られていますが、実際は、人種差別と宗教差別によって激しい葛藤が生じている国です。それは、退廃と堕落、物質主義のような一九七〇年代の豊かさの中に現れた社会の病弊よりも、はるかに深くアメリカの歴史に根ざした、簡単には治すことのできない持病のようなものでした。 その頃、宗教問の融和を導くために、私はよく黒人の教会を訪ねていったものです。黒人のリーダーの中には、マーティン・ルーサー・キング牧師に倣って、人種差別をなくし、神の平和世界を築こうと努力する隠れた人材がたくさんいました。 彼らは、法的に人種差別が禁止される前、数百年間続いた黒人奴隷市場の写真を教会の地下室に展示していました。生きている黒人を木に吊して火で焼く場面、奴隷として売られてきた黒人たちを鶏のように並べてその口を開ける場面、男女の黒人を裸にして奴隷を選ぶ場面、泣き喚く子供を母親の懐から引き離す場面など、およそ人間の心を持っていたならば到底できないような蛮行を犯す姿がそのまま写し出されていました。 「見ていてください。これから三十年のうちに、黒人と白人の混血家庭から生まれた子供がアメリカの大統領になるでしょう」 一九七五年十月二十四日、シカゴの集会で私はそのように語り、その日の予言は、今やアメリカで現実のものとなりました。シカゴで誕生したオバマが大統領になったのです。しかし、私の予言は自然に成就したのではありません。宗教と教派問の葛藤をなくすために大勢の人の血と汗が流されたからこそ、今、一輪の花が咲いたのです。 |
As a peace-loving global citizen CHAPTER FOUR - Why We Work Globally 8. Washington Monument, 1976 In September 1975, we founded the Unification Theological Seminary in Barrytown, New York, which is located north of New York City. The faculty was hired on an interreligious basis, and we had professors representing Judaism, Protestantism, Catholicism, Eastern Orthodoxy, and Oriental philosophy. When they lectured about their own religions, our students asked them very difficult questions. The classes always became forums for intense debate. When all the religions were put together and debated, they began to break through the incorrect concepts that they had about each other and to better understand each other. Gifted young people finished their master’s level education at our seminary and entered the doctoral programs at Harvard, Yale, and other leading U.S. universities. Today they have become people capable of leading the religious world on a global scale. In 1974 and 1975 I was invited to speak on Capitol Hill. I spoke in front of members of the House of Representatives on the topic “One Nation Under God.” I addressed the congressmen in the same manner as I had the young people on the street, saying, “America was born through God’s blessing. This blessing, however, was not for Americans alone. This was God’s blessing for the world, given through America. America must understand the principle of this blessing and sacrifice itself in order to save the world. To do this, there needs to be a reawakening that lets America return to its founding spirit. Christianity, which has been divided into dozens of denominations, must be united, absorb all religions, and open a new future for world civilization.” I was the first foreign religious leader to be invited to speak by the U.S. Congress. After I was invited for a second time, many more people became interested in finding out about this man Reverend Moon from Korea. The next year, on June 1, 1976, we held a celebration at Yankee Stadium in New York City to commemorate the two hundredth anniversary of America’s independence. At the time, America was not so peaceful as to have the presence of mind to celebrate its anniversary. It was feeling the threat of communism, and its young people were living lives far distant from the desire of God, engaging in such things as drugs and free sex. I felt that America was seriously ill. I went to the celebration feeling as though I were like a surgeon cutting open the heart of a New York that lay sick. On the day of the celebration, torrential rains came down, and a strong wind blew the decorations all around the field, but no one tried to get out of the rain. The band started playing “You Are My Sunshine,” and everyone in the stadium began to sing together. They were singing a song about sunshine, even as they were being soaked by the rain. Their mouths were singing about sunshine, but their eyes were crying. It was a moment when rain and tears were mixed together. Then, incredibly, as I went to the stage to speak, the sunshine broke through the rain clouds. It was as if God had heard their singing. I did some boxing when I was in school. You can hit a good boxer with many jabs and still find that he is not affected. If you can land a solid upper cut, however, even the strongest boxer will be shaken up. I was counting on landing a solid upper cut on America. I felt that there needed to be a much larger rally than what had been held up to that point so that the name “Sun Myung Moon” would be indelibly carved into America’s mind. Washington is the capital of the United States. In a place that is a straight line from the Capitol, there is a tower called the Washington Monument. It is an obelisk, shaped like a sharpened pencil standing on its end. A large grassy area extends from the monument to the Lincoln Memorial. This area represents the heart of America. I set a plan to hold a large rally in this place. To hold a rally there, however, we needed permission from the U.S. government and the U.S. National Park Police. Most U.S. officials did not like me very much. I had previously put ads in newspapers calling on the people of America to forgive former President Richard Nixon, who had been pushed into a crisis because of the Watergate incident. This view was very unpopular. So now the U.S. government kept turning us down, and it was not until forty days prior to the event that we were finally able to receive permission. Our members, too, suggested to me that this was too ambitious a plan and that we should not go forward. The National Mall surrounding the Washington Monument was an open park in the middle of an urban area. There were not many trees—just a wide expanse of grass. If the crowd were small, it would be obvious for everyone to see. To fill such a large area, there would have to be hundreds of thousands of people. Our members wanted to know how this could be possible. Prior to this, only two people had held large events on the National Mall. Dr. Martin Luther King, Jr., had held a rally for civil rights on the steps of the Lincoln Memorial, and Rev. Billy Graham had held a large gathering there. So it was a place with a lot of symbolism. This was the place that I was challenging. I prayed without ceasing for this rally. I wrote the speech that I was to deliver four different times. A week before the event, I still had mixed feelings about what I should say in my speech. Finally, three days before the event, I completed the text. Generally, I don’t speak from prepared texts. I made an exception in this case, because of my concern that the event go well. I knew this was going to be a particularly important event, though I wasn’t quite certain in what way. I will never forget what happened on that day, September 18, 1976. People started coming to the Washington Monument from early in the morning. Some three hundred thousand people gathered. It was impossible to tell where all these people had come from. They had all different colors of hair and skin. All the races that God sent to earth gathered on that day. It was a rally on a global scale that does not require any additional description. I stood in front of the gathering and declared, “God prepared America for two hundred years. This is the time for awakening. America must accept her global responsibility. Armed with Godism, she must free the communist world and at last build the Kingdom of God here on earth.” The speech was interrupted many times by shouts and applause. Newsweek, in a year-end pictorial review of the major events of 1976, carried my photograph and referred to me as part of the revivalism of the 1970s. On the other hand, an increasing number of people were beginning to look at me with caution and fear. To them, I was nothing more than a strange magician who had come from the East. I was not a white man they could place their faith in and follow. The fact that I was saying things that were somewhat different from what they had heard in their churches made them feel very insecure. In particular, they could not allow a situation in which young white people were showing respect to and following an Asian with slender eyes shaped like a fish. They began spreading rumors that I had been brainwashing innocent young white people. This group that opposed me gathered in the background, behind those who were shouting their support. I knew that another crisis was about to befall me. I was not afraid, however, because I was clearly doing what was right. America is widely known as a country of freedom and equality, where people of all races come to realize the American dream. In fact, however, there is a great deal of struggle stemming from racial and religious discrimination. These are chronic illnesses that are embedded deep within America’s history, and they are therefore much more difficult to cure than the social diseases such as immorality and materialism that arose out of the affluence of the 1970s. About this time, I often visited African-American churches in an effort to foster ecumenical harmony. Among black leaders there were some who, in the manner of Dr. King, were working to do away with racial discrimination and bring about God’s world of peace. Some of these ministers had images hanging in their basements of slave markets that had existed for hundreds of years prior to being outlawed. One such image was of a black man being burned alive while hanging from a tree. Another was of black men and women stripped of their clothes being looked over like merchandise by potential slave buyers. And yet another was a black baby crying as it was being taken away from its mother. One could hardly believe that human beings were capable of the barbaric acts depicted so clearly in those images. “Wait and see,” I told a gathering in Chicago on October 24, 1975. “Within the next thirty years, there will be a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who was born into an interracial black and white family.” The prophecy I made that day has now come true in America with the inauguration of President Barack Obama, who spent much of his adult life in Chicago. This prophecy did not come true on its own. Many people shed their blood and sweat to do away with the struggles between the races, and those efforts have now finally blossomed. Surprisingly, a number of ministers of established churches in America came and brought their congregations to the Washington Monument rally. They decided that my message transcended denominations and that I was inspiring young people. I called on people to transcend differences of denomination and religion, and those words were realized at this rally. The Washington Monument Rally was a miracle. Three hundred thousand people attended, making this among the largest gatherings ever on the National Mall. |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