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을 보면서 그리고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 스스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산상수훈처럼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입니다. 가정에서 이런 남편과 아버지로, 교회에서도 이런 목사로, 또 나를 만나는 사람들과 이런 관계를 갖고 산다면 참으로 성자소리를 듣게 될 것 같습니다.
어제 우리가 보았던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 삶의 주인이심을 인정한다면 인정한 만큼, 믿음을 소유 한만큼 염려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신앙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개인의 신앙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들, 특히나 제자로 부름 받은 사람들의 인간관계에 대해서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제자들의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확실한 의도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비판이라 하면 긍정적이고 교훈적인 충고까지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원문의 의미는 ‘정죄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저는 개인적인 부분이지만 이 말씀을 충실히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어느 정도 경험을 가지고 이 말씀이 옳다는 것을 경험했는데요.
저는 되도록 충고조차도 하지 않으려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충고한다고 변화되는 것을 제가 본적이 없기 때문이고, 그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되도록 충고를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더구나 말씀을 전하면서 성도들 중 어떤 한 사람을 지목해서 그 사람을 변화시킬 목적을 가지고 전하는 설교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일명 치는설교이지요. 이것 또한 말씀으로 성도를 친다고 성도가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 판에 새겨져야 변화가 오는 것이지, 나의 목적을 전하기 위해서 말씀을 인용하는 것은 전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 불행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
래서 혹시라도 말씀시간에 마음이 찔리거나 저 말은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라는 생각이 드시거든 저는 그런 의도가 없기 때문에 그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으십시오. 성령님의 감동이 오면 즉시 순종하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는 비판하지 않는 것도 충고하지 않는 것도, 정죄하지 않는 것도 적용할 수 있는데 이게 가장 안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가족들입니다. 왜 다른 사람은 되는데 가족은 어려울까요?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또 하나 5절을 보면 외식하는 자여라고 했는데 가족에게는 외식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내에게 자식에게는 외식할 수 없습니다.
혹시 남편이나 아내가 내 손을 잡고 갑자기 ‘나는 당신과 결혼한 것이 너무 좋아, 나와 결혼해줘서 고마워’라고 배우자가 말한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말하시겠습니까? 통계에서 제일 많이 나온 답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또 사고 쳤어?” “하던 대로 해? 꼼수부리지 말고.” 이런 반응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동안 자기 마음대로 해놓고는 갑자기 안하던 행동을 하면 어색하지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는 외식이 통하지 않습니다. 진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실만이 통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인간관계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진실을 말합니다. 2절부터 계속되는 말씀을 종합해보면 비판하지 말라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 들보를 빼어라는 말씀입니다. 근데 마지막 말씀 네 눈 곳에서 들보를 빼어라는 말씀의 뜻이 전체 말씀이 무엇을 전하는지를 확인시켜 줍니다.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는 것은 “하나님께 용서를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위의 말씀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께 용서를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정죄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죄인인 너도 용서를 받았는데 너는 왜 정죄를 하느냐, 그것도 너는 베들보만큼 큰 용서를 받았으면서 다른 사람의 티를 용서하지 못하느냐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인간관계의 대헌장은 무엇입니까? ‘용서입니다’ 여기에서 생각나는 성경본문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서 베드로가 주님께 물어봅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22절에 주님이 말씀하시지요.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그리고 주님의 비유가 나옵니다. 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빚을 탕감해 줍니다. 그리고 그 빚을 탕감 받은 자가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나서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감옥에 가두게 됩니다. 결국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은 분노하며 그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사람에게 다시 그 빚을 다 갚도록 했습니다.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오늘 말씀은 제자들에게 친히 말씀하시는 주님의 인간 관계론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두 가지는 진실과 용서라고 했습니다. 오늘 가족에게 진실과 용서를 먼저 실천합시다. 오늘 나와 관계하는 사람에게 진실과 용서를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장 어려운 것이 진실과 용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내 마음을 주장하시면 나는 할 수 없는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셔서 사람을 만나도 진실하게 만나고, 용서할 수 없는 일도 용서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