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역사현장'일제전적지를 가다](108) 제주·일본 제2차 해외 비교취재 ② 마츠야마항공기지-진야마지하송신소 韓人 수천명 강제징용 비행장 등 건설
입력날짜 : 2008. 07.10. 00:00:00
▲고치현 낭고쿠시에 있는 진야마지하송신소호 내부. 산의 지하를 뚫고 콘크리트로 마감했다. /사진=이승철기자
위험 따르는 지하터널 굴착에 한인 동원 격납고·지하송신소호 등 제주도와 유사
제주도에서도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군 군사시설 건설에 많은 도민들이 강제 동원돼 노역에 시달렸지만 그것은 일본 본토에서도 극심했다. 취재팀이 찾은 마츠야마(松山)해군항공대 건설에도 1천명 이상의 강제징용 조선인(한인) 노동자가 동원됐다.
시코쿠섬 에히메현(愛媛縣) 마츠야마 공항과 주변 지역인 기타요시다조(北吉田町)에는 태평양전쟁 시기 마츠야마해군항공대와 마츠야마해군항공기지가 있었다. 마츠야마항공대와 기지는 1943년 10월1일 창설돼 항공대는 비행기 탑승원을 양성하는 예비훈련생의 기초교육 시설로써, 기지는 작전항공부대에서 작전을 전개했다.
일본의 패전 당시 항공대와 기지의 총 면적은 3백88㏊에 이르렀다. 이 지역은 모두 농경지였으나 일본해군이 이를 강제 수용해서 비행장을 조성하는 등 미군과의 결전을 위한 기지로 만들었으나, 패전 뒤에 모두 반환했다.
현재 기지는 마츠야마공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격납고 등이 남아있어 당시를 말해주고 있다. 격납고(엄체호)는 공항 동쪽에 있는 미나미요시다조(南吉田町)의 주택지에 3개가 남아있다. 이 엄체호는 1944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해서 38기가 있었으나 모두 훼손돼 남아있지 않다.
마츠야마공항에서 10여 분 정도 거리에 있는 이 엄체호는 제주도 모슬포 알뜨르비행장 것과 유사하게 만들어졌다. 규모는 정면 폭이 22m, 내부 길이 12m, 높이 5.4m로 알뜨르비행장 격납고와 비슷하다. 격납고는 경작지 가운데 혹은 주택가에 자리잡고 있다.
또한 기지 주변의 벤텐(弁天)산 등에는 탄약고와 창고, 거주를 위한 많은 지하터널이 구축됐다. 지하터널 굴착과 같은 공사는 많은 위험이 따르기 때문에 조선인 노동자에 의해 작업이 이뤄졌다고 한다.
취재팀이 만난 에히메대학 이치지 노리코 교수도 마츠야마 공항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전쟁유적지 건설에 조선인 강제연행자들이 동원됐으나 아직 실태파악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엄체호 주변의 주민인 사에키씨(佐伯圭世·60)도 비행장을 만들때 조선인이 많이 동원됐었다고 증언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해방 이후 현재 남아있는 사람은 2천 명 정도라고 한다.
이로 볼 때 마츠야마비행장과 엄체호 건설에 많은 강제징용 조선인들이 동원됐음을 알 수 있다.
▲에히메현 마츠야마해군항공기지 격납고 정면(사진 왼쪽), 오른쪽은 격납고 내부에서 바라본 외부 모습.
마츠야마 및 고치현에서 비행장 엄체호시설과 함께 취재팀은 고치현 낭고쿠(南國)시에서 진야마(陣山)라는 조그만 산을 뚫은 지하호를 볼 수 있었다. 제주도에서 볼 수 있는 터널식 갱도다.
진야마는 마치 제주도 오름을 연상시키는 산이다. 진야마송신소호(壕)는 이곳 지하를 횡으로 굴착하고 내부를 콘크리트로 견고하게 마감해놓고 있다. 이 송신소는 현재 민가를 통해 내부로 진입해야 한다. 총 길이는 2백30m, 내부 폭과 높이는 각각 2.5m다. 내부에는 별다른 시설은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송신소를 설치했던 좌대 흔적 등이 남아있고, 내부 구조 자체는 당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진야마송신소는 처음 고치 해군항공대의 기쿠스이(菊水)부대와 지상의 통신연락을 위해서 설치됐다. 이를 위해 1942년 말부터 토지매수가 시작돼 3.7ha의 용지에 송신소의 건물과 높이 45m의 안테나 기둥 3개가 설치됐다. 이어 미군의 공습이 예상됨에 따라 진야마에 지하호를 굴착하고 통신기를 옮긴다. 진야마송신소가 지하송신소로 바뀐 것이다.
진야마지하송신소호 건설에도 당시 조선인 노동자가 동원된 것으로 알려진다.
취재팀을 안내한 구보다 쥬지(窪田充治) 전쟁유적보존회 사무국장은 "부녀자들까지 동원됐고 강제징용 조선인들이 동원돼 비밀리에 건설됐다"며 "지역 주민들은 건설 사실을 몰랐다"고 말했다.
고치현과 에히메현의 사례는 일제가 전쟁수행을 위해 제주도를 본토결전의 무대로 삼아 군사시설을 구축하고 도민들을 강제징용한 역사적 아픔과 일본 군국주의 실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특별취재팀=이윤형·표성준·이승철기자
[탐사 포커스]제주도처럼 결전대비 전력 해안집중
1945년 7월 말 무렵의 본토결전에 대비한 일본토 육해군부대의 배치도를 나타낸 '결전병력배치요도'를 보면 시코쿠(四國)섬은 제55군(시코쿠방위군)을 필두로 4개 사단과 전차사단, 독립혼성여단 등이 주둔하고 있었다. 55군사령부는 해안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는 양상이다. 일본군은 고치현(高知縣)이 괌이나 사이판으로부터 미군이 상륙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었다.
고치현 앞 토사만 해안에는 시코쿠섬에 배치된 4개 사단 가운데 3개 사단이 집중돼고 있었다. 또한 1km 당 전력밀도는 미군 등 연합군의 유력한 상륙예상지점으로 꼽히던 9개 지역(제주도 포함) 중 최고 수준을 보여주고 있었다.
일본토 밖의 결전작전 지역으로 포함됐던 제주도 역시 최고 지휘부인 제58군은 1945년 4월 당시 제주농업학교에 위치해 있다가 일본의 패전이 가까워지면서 내륙 깊숙한 한라산 어승생악으로 옮겨 최후의 일전에 대비한다.
고치현의 병력배치 양상에서 제주도 일본군 배치와 군사시설 구축의도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이윤형기자 yhlee@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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