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간길 7회차 : 빼재 ~ 부항령
2005. 2/25~2/26
글쓴이 : 미스터리
1. 지난 곳/시간.
빼재 (5:00 發) -> 삼봉산(6:28着/6:30發) -> 삼봉산하산(채소밭)(7:10통과) -> 도마치고개(소사고개) (7:22/7:30) 채소밭, 개간지 통과. -> 능선오름 시작(7:52) -> 삼도봉(草岾山:초점산) (8:45/8:55) -> 鞍部(9:04통과) -> 대덕산(9:32/9:36) -> 얼음골약수터(9:55/10:00) -> 덕산재(10:35/10:45) -> 무명봉1(833봉?)앞 (11:07), 좌로 방향 바꾸어 正北으로 진행. -> 폐광터(11:14) -> 무명봉2(폐광터 위) (11:24) -> 鞍部(11:34) -> 무명봉3(853봉?) (11:58) -> 부항령(12:32着) 총 7시간 32 분.
2. 이동거리.
빼재~삼봉산 :4.35km. ~도마치(소사고개): 3.1km. ~삼도봉(초점산) : 3.25km. ~대덕산 : 1.45km. ~덕산재 : 3.05km. ~부항령 : 5.3km. 총 20.5km.
3. 7회차.
(빼재~삼봉산), 4.35km, (5:00/6:28)
빼재에 도착하니 바람이 분다. 5회차,6회차에 기온도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지고 바람도 심하게 불어 고생이 심했던데다 귓불에 동상까지 찾아 와 허물이 벗어졌기에 마음이 먼저 춥다. 오늘도 예보에 영하 9도가 예견되어 있으니 만만치 않을 것이다.
게다가 왠 눈발까지 날린단 말이냐. (알고 보니 이것은 주위 산에 쌓인 눈이 바람에 날린 것이었음.) 빼재여서 그런가 오늘도 뺏골까지 추우려나 보다.
눈이 주위 풍경에 익숙해지니 휘어져 넘어오는 고갯길이 훤히 보인다. 이른 새벽 넘어다니는 차는 하나도 없다. 달빛 아래 펼쳐져 있는 길이 괴괴하기조차 하다.
문득 빼재에 대해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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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70년대 초 늦은 가을이었다. 자정 무렵 서울역에서 3등 열차를 타고, 새벽에 대전에 내려 끝없이 기다린 끝에 버스를 타고 구천동으로 올 수 있었다.
그 무렵에는 무주까지 오는 차는 몇 편 있었으나 구천동까지 오는 차는 하루 한 편 정도 있었나 보다. 구천동이라 해도 어디가 종점이었는지 한없이 걸어들어와 저녁 지어 먹으 니 벌써 어둠이 찾아 왔다.
그 때 텐트라야 주로 미군이 쓰다가 동대문 시장에 흘러 나온 A텐트가 최고 였으니 나도 이 비장의 무기를 가지고 다닐 때였다. 텐트치기도 귀찮다. 가게집 좌판 위에 에라 한 자락 깔고, 한 자락 덮었다.
기억에는 없으나 아마 별을 보면서 고독이라도 씹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니 뭔 청승살이 뻗쳐 혼자 그 짓을 했을까 싶다. 얼마나 떨며 밤을 지샜을까. 아침에 보니 텐트 위에 하얗게 서리가 내려 앉았다.
부리나케 아침밥을 지어 먹고 길을 나섰다. 아 잠시, 지금도 기억에 남는 버너가 있으니 큰 지뢰만했던 석유버너다. 무게만큼이나 값이 만만치 않았던 스웨덴制이든가 스베아 버너였는데 이것이 A텐트와 함께 내 재산목록에 앞자리를 차지했었다. 열심히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으로 장만했던 내 추억의 보물상자에 기억으로 남아 있는 물건들이다.
그렇게 해서 고갯길을 넘어 거창으로 가게 되었다. 지금도 삼삼하게 눈에 남아 있는 고갯길은 이미 폐도가 되어 버린 우마차길 소로였는데 작은 골자기 물도 흐르고, 빨갛고 노란 나뭇잎 가득 달고 있는 숲속 길이었다.
고갯 마루를 넘어 오자 시야가 확 트이면서 흙빛 정겨운 마을길과 이어졌는데 집집마다 너른 마당에 감나무들이 서 있고, 까만 감나무마다 주홍빛 감들이 오후의 햇살을 받아 정답게 달려 있었다. 지금도 그 감나무들은 잘 있을까 궁금하다.
그 때는 몰랐는데, 이제 생각하니 내가 넘은 그 추억의 고개가 빼재였고, 무주쪽 상오정에서 출발하여 거창쪽 개명리(상수내,하수내)를 거쳐 거창읍내로 갔던 것 이다.
2. 이 곳 지명과 관련하여 어떤이의 기록이 생각난다. 빼재에서 무주쪽으로 고개 아래 첫마을이 三巨里마을인데 이 마을은 上梧亭, 中梧亭, 三巨里 세 마을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다. (흔적은 없어졌으나 하오정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중오정도 없다) 빼재를 무주 사람들이 상오정고개라 부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상오정과 중오정은 실제 정자는 있지 않았으나, 나무와 바위가 정자와 같이 어울어져 붙인 지명이라 한다. 그런데 무주가 개발되면서 亭이라 불렀던 이 곳에 토비스콘도를 비롯한 집들이 들어 섰 으니 땅이름은 자신의 미래를 아는 것 아닌가.
한편, 거창쪽 개명리 물안실마을(상수내, 하수내) 아래쪽으로는 개명저수지가 물막이 공사를 하고 있다 한다. 물이 다 차면 이 마을은 물의 안쪽 마을이 된다.
온수리나 온정이라는 이름의 마을은 온천이 발견되고, 器興은 그릇이 흥한다는 제 이름 처럼 soft-ware(부드러운 그릇)을 담는 반도체(정보를 담는 그릇)의 메카가 되어 있음 은 과연 우연일까?
지명은 과거를 비추는 흔적임과 동시에 자신의 운명을 예견하는 예지력이 있는 것은 아닌지..
대간길 가면서 하찮은 땅이름 하나 소홀히 할 수 없음은 그런 까닭이다.
3. 또한, 빼재 주변은 한국천주교와 기독교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송계삼거리 아래 상여덤이 그랬듯이 1870년대는 천주교의 탄압이 심해져 리델 주교가 중국으로 추방되고 많은 신도들이 서울로 압송되거나 처형되었다. 이 때 이 박해를 피하여 많은 신부들과 신도들이 빼재에 숨어들어 믿음을 지킬 수 있었 다. 이 탄압은 1886년 조불수호조약이 체결되어 신부들의 치외법권이 인정뙬 때까지 계속 되었으니 빼재는 이들에게 축복의 땅이었을 것이다.
한편, 거창 지역에 최초로 개신교가 들어 온 곳이 빼재 아래 개명리였으니 1904년 미국 선교사 Smith가 개명리교회를 열고 복음을 전하였던 것이다.
한국 내에서도 불교가 왕성했던 이 지역이 캐토릭과 개신교의 중요한 지역이라는 점은 덕유의 넉넉함이 포용해 준 결과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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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두로부터 절개지에 붙어 능선으로 오른다. (5:00) 무척 가파르고 낙석에도 주의하여야 한다. 그래도 오르는 길은 햇볕은 받는 곳이라 큰 눈은 쌓여 있지 않다. 가파르게 치고 올라 첫 번째 봉우리에 도착한다. 수정봉이다.(어느 지도에는 수령봉으로 되어 있는데 아마도 빼재를 秀嶺이라 한데서 따온 이름인 듯하다.)
이 때부터 눈이 능선을 덮고 있다. 앗불싸, 헤드랜턴에 불이 흐려지면서 불을 밝힐 수가 없다. 출발 전 on-off만 확인하고 밝기는 확인하지 않은 불찰이다. 배터리를 갈아 끼우든지 비상용 손전등을 꺼내든지 해야겠다.
그런데, 눈길을 보니 웬만큼은 환히 보인다. 대보름을 이제 이틀 넘긴 보름달이 그 빛을 쏟고 있는 것이다. 어허, 운치도 좋게 雪上月光이로다. 언제 이런 기회를 다시 맞아 볼 수 있단 말이냐. 달빛산행, 하는데까지 해 보기로 마음 먹는다. -달빛 속을 대간꾼이 간다.
싸리인지 잡목인지 사이를 지나 고도를 낮추는 길로 내려간다. 아마도 지도상에 된새미기재일 듯하다. 이제야 넘나드는 이도 드물테니 어둔 밤에 재인지도 분명치가 않다. ‘된새미기재?’ 도대체 무슨 뜻일까? 궁금하다. 이 곳 노인들 돌아가시기 전에 물어 봐야 할텐데 마루금으로만 다녀 도대체 동네사람 냄새를 맡을 수 없으니 그도 갑갑한 일이다.
다른 곳 땅이름에 새의 목(bird's neck) 즉 새목이 '새미기'로 변했는데 이 곳은 가팔라 가파른 비탈을 된비알(된비탈)로 불렀듯이 가파른 새목고개라서 ‘된새미기재’가 되지는 않았을까 상상력을 발휘해 본다. (한편 새가 많은 곳도 새목이라 부르다 새미기가 되었는데 아주(되게) 새가 많았던 고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도 해 보지만 아무래도 새의 목이 맞을 듯하다)
이윽고, 산죽과 잡목사이에 샛길 같은 것이 보이는데 이 곳이 금봉암으로 갈 수 있는 호절곡재인 것 같다. 어두운 밤이라 金鳳凰이 날아다니며 점지해준 터에 세웠다는 절의 모습에 대한 궁금증은 포기한다. 예전에는 이 곳에 얼마나 싸리나 산죽이 촘촘했기에 호랑이도 절대로 벗어나기 어려운 골자기라 했던 것일까.
붉은 여명이 동쪽 하늘에 한 점 나타나기 시작한다. 가뿐 숨을 조절해 가며 봉우리에 오른다. 아무 것도 없다. 이윽고 다음 봉에 도착하니 돌무더기가 쌓여 있고 정상석이 서 있다. (6:28/6:30) 이제는 여명 속에 글씨를 읽을 수 있을 만큼 밝아졌다.
‘德裕三峰山’ 좀 이상하다. 덕유산은 이미 향적봉에서 내려 오면 구천동계곡에서 끝나고 대간길을 지나면 빼재에서 끝난 줄 알았는데 이 곳을 구지 덕유삼봉산으로 표기해야 할 이유가 있단 말인가?
---------------------------------------------------------------- * 삼봉산.
삼봉산은 거창의 高梯面 鳳溪里에 정상을 둔 고제면(더 나아가서는 거창)의 진산으로 이 곳 사람들은 佛心, 産心, 無心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산이다.
암봉들 근처에서 솟아나는 샘물들을 신령스럽게 생각해서 天地人을 아우른 三神思想과도 인연이 깊다 한다.
이곳 사람들 마음으로 숭배하는 산이었기에 가뭄이 들면 금봉암 용머리 바위에서 기우제 를 지낸 곳이기도 하다. 우리에게는 대간길 작은 산에 지나지 않으나 이 곳 사람들에게는 조상대대로 마음의 산인 것이다.
여암 申 景濬선생의 山經表(영조 45년, 1769년 발간)에는 德裕山 三峰 - 白巖峰(지금의 향적, 중봉, 무룡산을 비롯한 주요 봉우리?) - 鳳凰山(남덕유,장수덕유)까지를 덕유산 줄기로 분류했으며(自三峰 至此皆德裕) 이어서 六十峙(육십령)로 넘어 가고 있다.
즉, 삼봉산에서 육십령에 이르는 山界가 덕유산인 것이다.
(이 의문이 풀린 것은 소사고개 넘어 삼도봉에 올라서였다. 빼재는 산 사이 잠시 내려간 鞍部였으나 소사고개는 수 km에 걸친 구릉지로서 삼봉산과 삼도봉, 대덕산을 확연히 가르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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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산~도마치(소사고개)), 3.1km. (6:30/7:22)
길은 정북으로 이어진다. 정상 능선길이라 눈도 깊고 나뭇가지에 쌓인 눈도 만만치 않다. 떡갈나무와 간간히 소나무도 보이는데 눈의 무게를 못이겨 가지들은 모두 쳐져 있다. 간간히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해 큰 가지며 줄기가 꺽인 雪害木도 눈에 띈다. 아름답다는 눈으로만 본다면 雪國이 따로 없다.
암릉지대가 나타난다. 몸을 낮추어 암릉을 오르지 않고 우회한다. 좌측(서쪽) 무주쪽은 그래도 조금 나은데 우측(동쪽) 거창 쪽은 완전히 직벽에 가깝다. 건방떨다가는 위험할 것 같다. 계속 능선은 북으로 이어지는데 길을 알리는 리본들이 갑자기 오른 쪽으로 매달려 있다. 가파르기 이를데 없는 눈길이다.
다행히 우리 팀의 선두가 후미를 기다리고 있어 이 길이 맞다고 서로 확인한 후 내려간다. 이제부터 초점산(삼도봉)까지는 전라북도와 경상남도의 道界를 벗어나 경상남도 거창 족으로만 진행하게 된다. 지도를 펴 보면 금시 알게 되는 것이 지금까지의 대간길은 모두 道界(경상도와 전라도)를 지나온 것이었다. 1500년 전으로 돌아가면 신라와 백제의 국경선을 따라 진행해 온 것이다. 조금 과장한다면 왼발은 전라도땅을, 오른발은 경상도땅을 밟았으며, 역사의 시계바퀴를 돌리면 左백제, 右신라를 걸어온 것이다. 그러나 이 대간길 하산로부터 초점산(삼도봉) 정상까지는 거창 고제면에 속하는 것이다. 왜 이 곳의 道界를 마루금으로 하지 않았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이 곳의 지형이나 茂豊面의 역사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가파른 길을 조심스럽게 내려 간다. 발딛고 인간답게 내려가는 것도 잠시, 그대로 미끄러져 버린다. 이럴 때 주의할 점.- 맡겨야 한다. 공연히 안 미끄러지려고 발버둥치다가는 다치기 십상이다. 그러나 문제가 간단치 않다. 끝없이 가파르니 가속도는 붙고 도대체 브레이크를 잡을 수 없다. 언젠가 동계올림픽 중계에서 본 봅슬레이든가 그런 썰매가 생각난다. 궁둥이썰매치곤 너무 빠른 것 아닌가. 할 수 없이 모험을 걸어 길 옆 나무줄기에 발브레이크를 걸기 시작한다. 섰을 때는 발목이 시큰거리고, 엉덩이는 차고 얼얼하다.- 썰매 한 번 잘 탔네.
고개를 올라오는 우마차길 같은 길이 나타난다. (7:10) 길을 막아 놓았는데 쪽문이 반 쯤 열려 있다. 작은 판에 씌여 있기를 ‘일몰 후 출입금지’다. 지금은 일출이니 출입허용이겠구나.
고랭지채소밭이 펼쳐져 있다. 모두 수확을 거두었건만 몇몇 밭에는 언 배추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발로 차 본다. 포기는 작아도 노란 속이 꽉 차 있다. 아깝구나. 비록 먹기에 충분하더라도 사람 손이 모자라니 상품이 안되는 물건은 그대로 버려 두었을 것이다. 우리가 이미 지나 온 중재에도 무우밭이 그대로 얼어 있었는데..
넓은 밭을 지나며 지나 온 삼봉산의 뒷얼굴이 보고 싶어 돌아 본다. 아아, 아침 햇살 속 눈 덮힌 삼봉산, 정말 신비하다. 내가 중도 하산 한 옆으로도 무풍면과, 설천면을 향해서 거칠봉으로 뻗어나간 산줄기의 늠늠함도 장관이다. 오늘 따라 서두른다고 카메라를 깜박한 것이 무척 아쉽다.
이윽고 2차선 포장도로와 만난다.(7:22) 너무 넓어 고개임도 잠시 잊게 하는 곳, 도마치고개(소사고개)인 것이다.
----------------------------------------------------------- * 도마치
무풍의 덕지리(무주 쪽)와 고제의 봉계리(거창 쪽)을 넘는 고개가 도마치(고개)이다. 이제는 이 고개 바로 아래 있는 소사동의 이름을 따서 소사고개라는 이름이 일반화되었으나 초기에 백두대간을 지난 이들은 도마치고개라 하였다.
도마치란, ‘도마’+치(峙:고개)인데 도마는 본래 언덕을 뜻하는 ‘둠’ 또는 ‘두무’가 변한 말이라 하니 도마치는 고개언덕 쯤 되는 말이다. 그러다 보니 이 곳 말고도 가끔 도마치란 지명을 만나게 된다. 도마치를 한자로 都馬峙로 써서 말등처럼 긴 고개라고 해석하는 이도 있는데 이는 일제가 지도를 만들면서 순수한 우리 말이 어렵다 보니 모든 지명을 한자화하면서 엉뚱하게 변형시킨 수많은 경우 중 하나라고 한다.
흔히 우리 지명을 보면, 농경사회에서 정착생활을 한 이유로, 자기가 사는 마을 이외에는 다른 세상 구경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자기 마을 중심이었다.
자기마을 남쪽에 있으면 남산(서울의 남산도 똑같다. 강남에서 보면 북산이지 어찌 남산 이겠는가.), 앞에 있으면 앞산, 우리 마을보다 크면 큰말, 작으면 작은말, 새로 생긴 마을이면 새말(新村), 안쪽에 있으면 안말 또는 안골(內村, 엉터리로 번역하면 安谷), 개울 안쪽에 있으면 물안골(水洞,水內洞) 바라다 보이는 언덕길은 도마치. 이런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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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치~삼도봉) , 3.25km, (7:30/8:45)
2차선 도로를 건넌다. 도로 절개지 샛길같은 길로 접어들어야 하는데 프래카드가 길을 막는다. ‘백두대간 보호법 결사반대’ 탑선마을 사람들이 붙였다고 써 있다. 대간길임을 알리는 리본도 무참히 떨어져 짓밟혀 있다.
프래카드 뒤로 돌아 작은 언덕길로 접어든다. 여러 기의 무덤이 있다. 누구네집 先塋인가 보다. 石物 사이 床石을 본다. ‘學生竹山全公之墓’라고 씌여 있다. 學生이라 하면 벼슬길에 들지 못한 儒生을 이르는 말일 것이며, 竹山이라면 경기도 안성 지방인데 그 곳에 본관을 둔 전씨 선영이 이 곳에 있음은 이 지역의 특성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아직도 공부하고 계실(學生) 고인의 명복을 빌며 대간길 지나갈 수 있게 해주신 고인께 고개 숙이고 지나간다.
푸른 보리밭 한 자락이 눈을 푸르게 해서 좋았던 것도 잠시, 다시 길을 막는 프래카드와 참혹하게 깎여나간 대간길 마루금이 가슴 아프다. 심지어 어느 구간은 한 사람 지나기도 힘든 폭 50cm나 될까 하는 구간도 있고, 어디가 마루금인지 모를 구간도 있다.
훼손이 심각하구나.. 이런 생각을 하다가 과연 우리가 그런 말할 자격이 되는가 생각해 본다. 이 곳 탑선마을만 하더라도 탑선, 지경, 소사 마을 40 여세대가 누대에 걸쳐 이 곳에 터를 잡고 살아 왔다 한다.
어느날 갑자기 배낭멘 사람들이 나타나더니 이들이 설쳐 이제는 조상 대대로 살아온 삶의 터전에 속박을 가하려 하는 것이다. 인디안 마을에 백인들이 나타나듯 이 분들 눈에 대간꾼은 침략자들로 보이지 않겠는가? 삶의 터전을 지키려니 결사반대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딱한 것이 있다면 이 나라를 이끌어 오고, 이끌고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한다. 다 늦게 그나마 다행인 것이 대간길 산행하는 이들에 의해서라도 이 중요한 우리 국토를 지켜야 한다는 외침이 있었기에 그 나마 다행이었지.
늦었지만 어찌하랴. 이제라도 정부가 이 곳에 사는 이들의 피해없게 충분한 보상(그리해도 고향을 잃게 되는 아픔이야 가시겠냐만) 후 매입하여 보전해야 하지 않겠는가. 새로 복구할 것도 없다. 더 이상 토사가 유실되지 않게 유지만 하면 자연은 이 곳에 스스로 풀을 키우고, 나무를 키워 언젠가는 우거진 곳이 될 것이다.
몇 십년 후 우리의 후배, 몇 백 년 후 우리의 후손이 이 대간길을 지나게 되면 우리 선배들이, 우리 조상들이 살던 삶의 터전이었음을 알게 하는 것도 중요한 공부가 아니겠는가.
밭과 목장 사이로 능선이 시작된다(7:52) 낙엽송 조림지를 지나자 나무의 키가 작아지면서 왼족으로 대덕산, 앞쪽으로 초점산(삼도봉)이 보인다. 그 능선이 아주 부드럽다. 어머니의 젖가슴 같이 넉넉하고 부드러운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厚德山이라 부르고 싶다. 크다(大德)는 느낌에 앞서 푸근하고 넉넉하게(厚德) 보인다.
정상이 가까워지면서 키작은 관목뿐인 마루금으로 이어지고 눈 쌓인 무덤 하나가 탁트인 시야 속에 마을과 고개를 내려다 보고 있다. 아마도 초점산에서 내려 오는 氣가 모인 穴자리인가 보다. 그러기에 이 높은 곳에 고인을 모셨겠지. 문득 그 後孫들이 얼마나 發福했을까 궁금해진다.
이윽고 능선끝 봉우리에 도착한다. 아래에서 보기에는 정상으로 보였는데 최고봉은 아니고, 이 곳으로부터 산줄기가 도도히 뻗어 나간다. 수도산과 가야산 두리봉을 거쳐 북으로는 고령, 남으로는 합천을 가르면서 동남으로 뻗어나가 창녕을 바라 보면서 낙동강에 이른다.(수도지맥, 박성태님의 역저. 신산경표)
이 곳에서 방향을 북으로(좌로) 틀어 정상 도착. 草岾山(초점산)이다. (三道峰) (8:45) 어떤 못된 인간들이 그랬는지 정상석은 무참히 동강나 있다. 사방으로 틔여 있는 산줄기가 장관이다. 지나온 덕유의 연봉들이 펼쳐져 있고, 첩첩이 쌓인 산줄기 끝에는 지리산의 모습도 보인다. 그 앞으로 보이는 것이 거창의 큰 산줄기 금원산, 기백산 줄기이리라. 동남쪽 저 산줄기는 가야산으로 이어지고 있고.
출출하기에 추위도 참고 김밥 몇 개 먹는다. 금새 손이 얼얼하고 발가락이 곱다. 물도 얼어 붙어 있어 마실 수가 없다. 장쾌하게 뻗어나간 산과 설경을 보면서 추위를 위로한다.
三道峰, 본래는 초점산인데 어느 때부터 슬그머니 삼도봉이 일반화 되었다. 하기야 세 道를 가르는 봉우리이니 삼도봉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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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道峰
대간길에는 세 개의 삼도봉이 있다. 첫째가 지리산 종주 하다 보면 임걸령에서 노루목 지나 토끼봉 가는 길에 만난다. 두 번째가 오늘 오른 대덕산 아래 초점산 삼도봉, 또 하나가 다음 차에 오를 부항령 위 민주지산 옆 삼도봉이다.
본시, 조선조 태종 때인 1414년 조선을 8도로 나누었는데 이 때 충청도-전라도-경상도를 가르는 우뚝 선 산을 삼도봉이라 하였으니 다음차에 오를 부항령 위, 민주지산 옆 삼도봉이다.
이렇게 유일한 삼도봉이 있던 중, 고종 33년(1896년) 조선을 다시 13도로 나누면서 지리산 삼도봉과, 오늘 오른 초점산 삼도봉이 생기게 된 것이다.
현재 3도를 나누는 지점이 모두 7곳이 있는데
전북-전남-경남 :지리산 3도봉. 전북-경남-경북 :초점산 삼도봉. 전북-충북-경북 :부항령 북쪽 삼도봉.(민주지산 동쪽) 강원-충북-경북 :어래산 (소백산 북쪽, 선달산 좌측) 충북-충남-전북 :무명산. 경기-충북-충남 :무명산. 경기-강원-충북 :무명산, 이름 없는 작은 뒷동산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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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을 못 버티고 하산을 시작한다. (8:55)
(삼도봉~대덕산), 1.45km, (8:55/9:32)
눈길 미끄러우나 산길이 넉넉하여 마음이 푸근하다. 안부에 도착한다(9:04) 오늘 산행길 최고봉인 대덕산 능선을 오르기 시작한다.
오르막 길은 크게 가파르지 않아 여유를 즐길 만하다. 억새와 키작은 나무들뿐이니 좌우로 시야가 탁 트인다. 좌로는 무주군 무풍 땅 마을들과 산들이 보인다. 대덕산을 우러러 보아 望德山이라 했다던가? 무풍 한 가운데 망덕산이 보인다. 우로는 경북 김천땅이 잘 내려다 보인다. 초점산 삼도봉을 지나면서 경남 거창에서 경북 김천으로 넘어 온 것이다. 얼마나 오지인지 마을은 안 보이고 산줄기와 골짜기만 보인다.
오르는 길 나무줄기와 가지들에는 상고대와 쌓인 눈이 얼마나 얼다녹다를 거듭했는지 가지마다 수정막대 같은 투명한 얼음줄기들이 온 산에 가득하다. 꼭 수정으로 만든 동화의 나라에 온 듯하다. 그 투명함 속에 아래쪽은 코발트빛을 발하고 있다. 어인 얼음에 파란 코발트인가? 문득 대덕산 너머에 펼쳐진 하늘을 보니 완전 코발트다. 어허, 하늘빛이 이 수정막대에 내려 앉아 코발트빛을 굴절시키는구나. 이 길 사이를 지날 때마다 수정막대 부딪는 소리가 맑은 편경소리 같다.
자연은 위대하기도 하지만 끔직이도 아름답다. 인간의 건방떪이 부끄럽다.
드디어 대덕산 도착(9:32) 좌로(서쪽)으로 펼쳐진 茂豊 땅을 내려다 본다. 마을도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산속에 폭 싸인 고장이다. 예전부터 고달팠던 삶을 살았던 우리 선조들이 살고 싶어 했던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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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十勝地
숙종 때 李 重煥 선생이 쓰신 擇里志의 卜居論(살만한 곳을 정하는 원리)에는 可居地 (살만한 곳, 특히 사대부가)로서 ‘海居不如江居요, 江居不如川居’라고 했다 한다. (바닷가에서 사는 것은 강가에서 사느니만 못하고, 강가에서 사는 것은 개울가에서 사느니만 못하다)
그러면서 可居地로 꼽은 지역이 있으니 그 중 한 곳이 덕유산 밑 오지마을들인 장수,장계, 거창, 무주 등이었다 한다.
이 시대를 산 우리의 조상들은 밖으로는 전쟁(倭,胡)에 시달리고, 안으로는 士禍에 지치고, 민초들은 벼슬아치들의 苛斂誅求에 지쳐 있었고, 대책없는 天災에 시달렸기에 일년 농사지어 삼년 먹을 수 있고, 온갖 재해나 시달림 없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은닉하여 살고자 하였다. 이 분들의 유토피아는 三災不入之地(삼재가 넘보지 못할 땅)였던 것이다.
이런 땅을 찾고자 한 까닭에 소위 秘記(요새 말로 하면 족집게 비결이라 할까..)가 만연하였으니 정감록, 남사고의 비기 등 수십 종의 비기가 쏟아져 나왔다 한다. 명점쟁이들이 꼭 집어 이야기하면 나중 틀렸을 때 뒤감당이 어려워 그런지 애매하되 그럴듯한 점괘를 내듯이 비기도 한결같이 꼭 찝어 주지 않고 퍼즐풀이 같은 방법으로 일러 주었으니 소위 破字로 그 깊은 뜻을 알렸던 것이다. (일례로, 木子(李)得國이라 해서 李씨가 나라를 얻는다. 이성계 이야기 같은 방식)
이렇게 해서 족집게 선생들이 예견한 땅이 열 군데 있으니 十勝地이다. 다소, 이견은 있으나 십승지의 대부분은 백두대간길 아랫마을이 7,8군데는 된다고 하며 그 중, 무주 茂豊은 대표적 십승지였다고 한다. 이름만 해도 무성하고도 풍성하지 않은가. 그러다 보니 뒷산도 이들에게 큰 덕을 베풀어 굶주린 자가 없어 대덕산이라 이름 붙인 것 아니겠는가. 또 즐거움을 듬뿍 주었으니 多樂山이었을 것이다.
무풍사람들은 대덕산을 봉황의 몸으로 여기고 좌우로 이어지는 대간길을 봉황의 날개로 여긴다 한다. 그 앞에 대덕산을 우러르고 있는 망덕산은 봉황의 알이고. 그래서 이 곳은 풍성하고 인물도 많이 배출하는 땅이라 믿고 있다. 즉 이곳 사람들에게는 봉황의 땅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예부터 이 곳에 살고자 이주한 이들도 많으며, 한 때는 무주의 중심지였던 역사의 한 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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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덕산 정상은 비교적 넓다. 헬리콮타장으로 사용되는가? 눈이 쌓여 있어 표지는 보이지 않는다. 정상석과 삼각점이 있다. 한쪽 구석에는 이 곳 산악회에서 세운 스텐레스 표지판이 보인다. 기우제를 지냈다던 단의 흔적도 없다.
북으로, 민주지산 석기봉 삼도봉이 보인다. 삼도봉 뒤 우측으로 큰 산줄기가 위용을 자랑하며 뻗어나갔는데 화주봉줄기라 한다. (황악산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제 친구 저녁노을과 통화 중에 화주봉인 줄 알았다)
(대덕산~덕산재), 3.05km, (9:36/10:35)
자 이제 덕산재를 향하여 출발. 떡갈나무에 매달려 있는 눈 녹은 얼음덩어리들이 장난 아니다. 바나나 뭉치만한 것들이 머리 위에 매달려 있는데 앗불싸 머리를 때린다. 어떤 놈은 더 뭉쳐서 작은 솜사탕만한 것도 있다. 장관이다. 고개 숙여 늘어진 얼음나무 가지를 피해 가며 하산한다. 삼봉산 하산길보다는 좀 낫지만 역시 많이 가파르다.
하산길 중간에 약수터를 만난다. 얼음골약수터.(9:55) 꽁꽁 얼어 물은 마실 수 없다. 안내판이 하나 있고, 거기에는 이렇게 씌여 있다.
‘사랑으로 풀어던진 약수터에는 바람으로 일렁이는 그대 넋두리가 한 가닥 그리움으로 솟아나고....
우리는 한 모금의 샘물에서 우리를 구원함이 산임을 인식하였다.
우리는 한 모금의 샘물에서 여유로운 벗이 산임을 인식하였다.
-대덕산 얼음골 약수터를 사랑하는 사람들. ‘
그렇다. 대덕산에서 발원하여 큰 내를 이루는 물이 세 줄기인데 동북으로 흐르는 물은 김천의 감천이되고, 동남으로 흐르는 물은 거창으로 흘러 황강에 이르며, 북서로 흐르는 물은 무주의 남대천을 이룬다.
잠시 쉬며 약수터를 사랑하는 이의 글을 메모한 후 다시 하산한다.(10:00) 하산길은 눈 반 고드름(나무에 얼었다 떨어진) 반이다. 이윽고 내리막이 끝나고 포장도로 고갯길을 만난다. 덕산재다. (10:35)
이 덕산재는 무풍면 금평리와 김천 대덕면 덕산리를 잇는 고개로서 본래 이름은 주치(령)이었다. 금평리는 천연기념물 반딧불이 서식지이다. 아직도 덕산리에는 주치마을이 있다.
이 고개를 따라 내려가면 무풍면이 끝나고 설천면이 시작하는 초입에 나제통문이 있다. 무풍은 삼국시대부터 신라의 茂山縣으로 지금의 설천면을 포함한 서쪽은 백제의 赤川縣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지금의 도경계도 대간의 마루금이 아닌 무풍쪽으로 들어와 있고, 이곳의 사투리나 풍습도 거창이나 김천쪽 느낌이 많이 섞여 있다 한다.
참고로 이 나제통문이 있는 언덕과 그 앞 평야가 나제의 국경이었으나 그 당시에는 현재와 같은 굴형태의 통문은 없었다. 이것은 일제 때 도로개통을 위해 뚫은 근세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
덕산재에는 대덕산 산삼을 파는 가게가 하나 있다. 몇 년 전 이 곳을 지나갔던 先行들의 산행기에는 고갯마루의 쌍방울 주유소에서 신세 진 이야기, 김 도훈이라는 20대 후반 주유소 사장 내외의 이야기가 자주 보이던데 지금은 없다. 다만 컹컹짖어대는 목쉰 큰 개소리만 정없이 들린다. 잠시 숲길로 접어들어 에너지도 보충할 겸 초코렛을 몇 알 먹고 다시 능선길을 오른다.
(덕산재~부항령), 5.3km (10:45/12:32)
언덕길을 오르며 대덕산과 삼도봉을 뒤돌아 본다. 도마치에서 볼 때는 둥글기만 하던 산세가 덕산재쪽에서 보니 가파른 암봉의 모습을 하고 있다. 평소 같으면 뒷동산 같았을 능선길을 제법 힘들여 오르고 드디어 무명봉(아마 833봉?)에 이른다(11:07) 이 곳에서는 대간길이 다시 좌향좌하여 정북으로 향한다. 눈길 위에 산토끼 발자국이 선명하다. 이 녀석들, 눈 쌓인 이 산에서 무엇 먹을 게 있었겠나. 많이 찾아 다닐 것이다.
다시 길이 잠시 내려가더니 널찍한 안부에 도착한다.(11:14) 얼른 보기에는 무슨 산성 같은데 지도를 보니 폐광터가 분명하다. 깨끗하게 다듬어져 있고 고인돌처럼 보이는 큰 바위도 놓여 있다. 내려다 보니 부평마을 쪽으로 내려가는 길도 산골 고갯길처럼 정답게 보인다.
이곳에서 다시 능선을 오른다 10분 후 또다른 무명봉 도착(11:24) 북으로 난 능선길을 향하여 무명봉울 내려 온다. 제법 가파르다.
안부에 도착하니 (11:34) 좌우로 빽빽한 잡목과 산죽이 가득하다. 왼쪽(무풍)으로는 빠꿈히 내려 갈 수 있는 샛길이 있다. 아마 금평리로 내려 갈수 있을 것이다. 나무에 비닐커버로 “물” 이렇게 써 있는 안내글이 보인다. 목원대 표** 가 붙여 놓은 물안내 표시이다. 20분만 내려 가면 물이 있단다. 고마운 일이다. 하절기 대간길에서는 중요한 정보임에 틀림없다.
다시 오르막이다. 잡목이 끝나갈 무렵 조림지가 나타난다. 곧바로 뻗은 낙엽송숲인데 길이라고는 대간꾼들이 지나간 길뿐이고, 낙엽송 아래 넓은 구릉과 능선은 발자국 하나 없는 處女雪이다. 그림에서 본 루돌프사슴이 사는 마을 같다.
드디어 세 번째 무명봉(853봉)에 도착한다. (11:58) 앞은 틔여 앞쪽 삼도봉이 보인다. 이제 이 길 따라 하산하면 드디어 부항령이다. 걸음을 재촉한다.
능선길 싸리나무가 얼굴을 때린다. 회초리에 맞은 듯 맵다. 애들 때 사리나무 회초리에 맞아 본 경험이 있으신지? 종아리나 손바닥 맞으면 그 찰랑찰랑한 탄력에 얼마나 매웠다고. 이 길은 유난히 싸리나무가 많은 자생지인 것 같다.
이윽고 우측으로 김천쪽에서 부항령으로 오르는 포장도로가 보인다. 부항령, 김천 부항면 어전리 가목마을과 무풍면 쑥병이 마을을 잇는 고개길이다. 2000년 터널이 뚫리면서 고갯길은 생명을 다하고 이 곳 주민들에게서 잊혀진 길이다.
고개에 가까이 갈 즈음 능선길 둔덕에 자연석 주춧돌 같은 옛 산성의 흔적이 보인다. 한 군데, 두 군데, 세 둔데. 세 번째 둔덕은 제법 커서 아마 헬리콮터장으로 보수한 것 같은데 쌓여 있는 축대가 옛 산성의 흔적임이 분명하다.
부항령산성, 옛 이름은 알 수도 없고 나제의 한맺힌 전쟁터였을텐데 흔적은 무너지고 기록조차 알 수 없으니 세월을 무상타 하랴.
언덕길 부항령에 도착한다 (12:32) 바람없어 봄볕처럼 따듯하다. 이 곳이 부항령임을 알리는 표지는 아무곳에도 없다. 다만 길로 내려 오니 삼도봉터널이란 터널이름만 덩그러니 씌여 있다.
대간꾼들조차 기억을 안 해 주면 부항령이란 이름도 곧 잊혀질 것 같다. //
1. 선두는 보이지 않고 후미와도 떨어져 있어 소사고개에서 부항령까지 5시간 동안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호젓한 산행이었습니다. 좋았습니다.
2. 8회차 산행은 함께 할 수 없어 서운합니다. 즐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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