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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리쯤 가니 여기정(女妓亭)이 있다. 신녀협(神女峽)으로 고쳤다가 또 정녀협(貞女峽)으로 이름 붙였다. 소나무 있는 벼랑은 높고 시원해 수석(水石)을 굽어보니 매우 맑으며 밝다. 그곳에 이름붙이길 수운대(水雲臺)라고 하였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전하길 이곳은 매월당(梅月堂)이 머물며 감상한 곳이라고 해서, 후에 청은대(淸隱臺)로 고쳤다.(「곡운기(谷雲記)」)
· 신녀협(神女峽)은 벽의만(碧漪灣) 동쪽 한 화살 사정거리에 있다. 상ㆍ하 두 소용돌이를 이루는데, 위에 있는 소용돌이는 명옥뢰(鳴玉瀨)와 견줄 만하고, 아래 있는 소용돌이는 너무나 기괴하여 형언할 수 없다. 양쪽의 언덕이 깎아지른 벼랑처럼 서있는 협곡이 아닌데도 협(峽)이라고 이른 것은, 대개 그 웅덩이의 형태가 마치 두 언덕이 협곡을 이룬 것 같기 때문이다. 우뢰소리가 나고 눈처럼 흰 물결이 용솟음치며 돌 색깔 또한 빛나 반들반들하다. 과연 절묘한 구경거리이다. ( 「산행일기」)
청옥협에서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김수증이 말한 대로 탁 트여 빛이 있는 것처럼 환히 보인다. 봉우리들 사이의 계곡만 보이다가 비로소 인가가 보이는 넓직한 들판이 조금씩 보인다. 마치 「도화원기」에서 개울을 따라가다가 복사꽃 만발한 도화원이 나타나듯, 그렇게 갑자기 나타난다. 조금 가면 왼편으로 물안교가 보인다. 물안교 건너편으로 논과 밭이 보이고 그 사이에 농가가 군데군데 있다. 조금 더 가면 정자가 보인다. 정자 앞의 표지석은 이곳이 3곡임을 알려준다. 그런데 표지석에는 신녀협으로 되어있다. 김수증은 처음에 신녀협으로 했다가, 나중에 정녀협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처음에 정자의 이름은 수은대라고 했다가 뒤에 청은대라고 고친 것을 따라, 현재 새롭게 지어진 정자의 이름을 청은대라고 하면서, 3곡의 명칭은 예전의 이름대로 기재한 이유는 무엇일까?
청은대 위에는 멀리서 온 부모와 외출 나온 군인이 함께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다. 사창리에 군부대가 많다는 말이 실감난다. 청은대에 오르니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뭉게구름 아래 있는 늠름한 화악산 자락이다. 정녀협은 정자 밑으로 바로 내려다보인다. 무성한 나뭇가지 때문에 자세하게 보이진 않지만 흰색의 바위와 그 사이의 푸른 물이 범상치 않다. 화악산을 배경으로 청은대를 찍었다. 청은대 뒤편의 길을 따라 내려가니 파라솔 아래 앉아 있던 아르바이트 학생들이 먼저 다가온다. 절대 물로 들어가면 안 된다고 몇 번이고 주지시킨다. 매년 물놀이 사고가 일어나는 위험한 곳이라고 엄포를 놓는다. 그래서인지 위험을 알리는 현수막이 주변 곳곳에 걸려 있다.
제일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하얀색의 바위다. 속살처럼 하얀 바위는 청옥담의 바위처럼 하나로 이루어졌다. 물 건너의 바위는 용암이 흐르다 굳은 것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서 더욱 기이하다. 양쪽의 하얀 바위 사이를 흐르는 파란 물은 원색이다.
나만 이런가? 많은 답사에도 불구하고 나의 이목을 끌은 것은 하얀색의 바위였다. 청은대 옆에 설치된 안내판에도 바위에 대한 해설만이 자세하다. “곡운구곡 일대는 화강암이 노출되어 있어 비경을 이루고 있는데, 특히 화강암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편상절리 구조를 볼 수 있다. 편상절리는 지하 깊은 곳에서 만들어진 화강암이 지표로 드러날 때, 암석을 누르던 압력이 제거되어 팽창하는 과정에서 암석에 수평방향의 결이 발달한 것이다. 곡운구곡의 제3곡 신녀협과 제4곡 백운담 일대에서는 편상절리가 발달한 넓고 평평한 화강암 반석을 잘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정약용은 소용돌이치며 흘러가는 물에 시선을 던졌다. 정녀협 위에서 소용돌이치는 물은 명옥뢰와 견줄 만하고, 아래에서 소용돌이치는 물은 기괴하여 형언하기 어렵다고 묘사했다. 그래서 ‘신녀회(神女滙)’라고 했던 것이다. 정약용의 눈을 쫓아 바라보니 과연 그러하다. 수많은 답사 이후에야 화강암의 반석과 그 사이의 푸른 물 뿐만 아니라, 위와 아래의 소용돌이치는 여울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김시습의 발자취이다. 지금 청은대가 서 있는 곳은 김시습이 머물며 감상하던 자리이다. 김수증은 이곳을 수은대라고 이름을 붙였다가, 김시습이 머물던 곳이라는 것을 알고 청은대로 바꿨다.
김시습은 여기서 하염없이 바위와 물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자신의 울분과 고독을 바위처럼 하얗게 탈색시키고 싶었을까? 물처럼 맑게 자신을 정화시키고자 했을까? 한참 동안 바라보니 조금이나마 속세의 때가 벗겨진 것 같다.
그러나 조선 영조대의 오원(吳瑗:1700~1740)은 매월당을 생각하며 시름에 잠겼다.
1리쯤 내려가 3곡인 신녀협(神女峽)을 만났다. 기슭은 점점 높아지고 계곡은 점점 넓어진다. 평평한 바위는 손바닥 같은데 점점 기울어지고 깎여지면서 밑으로 내려가니 흐르는 물은 더욱 내달린다. 서쪽은 매월당(梅月堂)의 터인데 청은대(淸隱臺)라 부른다. 차가운 물에 씻고 오래된 나무를 어루만지며 이리저리 걸으니 슬픔이 일어나 떠날 수 없다. 언덕에 올라 바라보니 시원하게 열렸다. 소나무 그늘 짙은데 서늘한 회오리바람이 나무를 흔든다. 마음은 슬프고 텅 빈 듯 쓸쓸하다. 서쪽을 돌아보니 해가 막 지려고 한다. (「곡운행기」, 『월곡집』)
오원은 21세에 아버지와 함께 곡운에 와서 삼연 김창흡을 만났다. 이때의 기록이 「곡운행기(谷雲行記)」이다. 그는 1723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728년 정시문과에 장원하여 문명을 떨치게 된다. 영조가 탕평책을 펼쳤을 때 오원은 사간원 정언으로 의리를 앞세워 반대하다가 삭직되기도 했다. 이후 유배를 가게 된 민형수를 구원하려다가 다시 삭직되었다. 그는 권력에 굴하지 않고 직언하여 당시 사림들의 신망을 받았다. 대쪽 같은 그의 성품은 매월당의 터를 보면서 불의에 굴하지 않았던 그를 생각하고 가슴아파했던 것 같다.
김수증의 조카인 창집(昌集)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겨 지나는 사람들이 읊조리고 있다.
삼곡이라 신녀 자취 밤배에 묘연한데,
텅 빈 누대 소나무와 달만이 천 년을 지켜왔네.
청한자(淸寒子)의 아취 초연히 깨쳤나니,
흰 돌에 솟구치는 여울 너무도 아름답네.
三曲仙蹤杳夜船, 空臺松月自千年.
超然會得淸寒趣, 素石飛湍絶可憐.
(곡운과 다산, 곡운구곡을 걷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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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늘 연구하는 권박사님께 경의를 표합니다.
무신 말씀을....백수라 시간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