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訓敎經 (훈교경)
뜻이 가는 길
이 세상에 뜻 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도 자기 나름대로의 뜻을 중심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전 세계 곳곳에 살아가고 있는 인류는 자기 사업에 대한 뜻, 학문에 대한 뜻, 혹은 자기 전문분야에 대한 뜻을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선이 요구하는 것
그러면 이 뜻은 무엇을 중심삼고 이루어 나가느냐? 물론 사람을 중심삼고 이루어 나가되, 그 마음을 중심삼고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은 어느 누구나 잘못되기를 바라지 않고 잘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평면적이든, 입체적이든, 시대적이든, 역사적이든 더더욱 잘되기를 바라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뜻이 지향하는 최고의 목표는 만민이 좋아하는 기준에 이르는 것입니다.
사람의 양심은 말할 것도 없이 언제나 선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 선은 인간으로 하여금 더 큰 무엇을 성사시킬 수 있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은 선을 따라서 뜻을 세워 나가야 됩니다. 자기의 연구분야나 사업분야. 혹은 다른 어떠한 분야를 막론하고 선에 입각하여 뜻을 세워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 자체를 두고 볼 때에 선은 어떠한 내용을 지니고 있느냐? 선은 피동적이냐 주동적이냐를 분석해 볼 때에 선 자체는 피동적이기를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언제나 주동성(主動性)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사회, 어느 단체든 그 조직이 크면 클수록 그것을 중심삼고 그 사회나 단체를 움직여 선한 기준권내에 예속화시키려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참다운 선을 바라느냐? 선 자체가 피동적이 아니고 주동적이어서 우리의 생활에 불의와 손해를 갖다 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언제나 이익을 갖다 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을 가진 사람은 선에 입각하여 자기 주체성을 갖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남한테 지배받기를 싫어하는 원인도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또 양심을 터로 해서 바라는 선의 기준도 한계적인 것을 원치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한국 사람이라 해도 한국적인 사람으로 남아지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자기가 한국 사람이라 해도 세계적인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존재가 될 것을 선은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참다운 양심적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참다운 양심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의 주체성이라든가 자기 자체를 중심삼은 최고의 이념을 견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양심적인 사람일수록 자기의 절대적인 주체성을 요구하는 것이요, 절대적인 최고의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뜻이 지향해 나가는 데는 무엇이 연결되느냐?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이상, 혹은 이념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뜻은 이상세계를 향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상은 어떤 것이냐? 그것은 만민의 생각권내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요, 혹은 시대권내에서 그 목적을 세워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대성과 역사성을 초월하고 지역적인 한계를 넘는 기준에서 찾아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은 상대적인 이상권을 요구합니다. 이 기준이 무한해지면 무한한 환경권을 요구하게 되는데, 그 무한한 상대적인 이상권을 요구하는 마음의 주체성 역시 무한한 것이며, 그러기에 무한히 지고(至高)한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러한 마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고귀하다는 것입니다.
뜻이 가는 길은 이상을 향하여 가는 길입니다. 역사과정을 거쳐간 수많은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살다 갔지만, 뜻은 더 높은 선을, 더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해 나왔습니다. 보다 높은 이상을 추구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시대의 변화에 따라, 혹은 국가의 주권이 바뀜에 따라 그 환경이 가지각색으로 변하여도 뜻은 언제나 하나의 이상세계를 향하여 나가는 데 자극이 되고 힘이 되어 나왔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점점 이상세계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만인이 바라는 뜻은, 그 이상은 하나의 목표를 향하여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뜻이 가는 길
절대적인 뜻, 최고의 이상적인 뜻, 그야말로 하나님의 이념과 통할 수 있는 뜻은 둘이 될 수 없습니다. 세계는 역사과정을 거쳐 현대문명을 맞이하여 비로소 하나의 이상권내에 귀일 될 수 있는 단계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거 우리 선조들의 양심은 선하지 못하였던가?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보다 선했습니다. 선조들이 그리던 이념이 현세만 못했느냐? 결코 못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 당시에 전부가 하나될 수 있는 하나의 이념을 주장하고 나서야 했는데 왜 못했느냐? 뜻이 가는 데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뜻은 출발과 동시에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목적지까지 가는 데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종교적인 입장에서 볼 때 인간시조가 타락했다는 것은 부정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타락은 무엇이냐? 뜻의 본향성을 잃어버린 것, 즉 뜻이 향할 수 있는 본래의 바른 방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가야 할 길을 제쳐놓고, 가지 않아야 할 길로 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뜻과 일치되는 방향을 버리고, 뜻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간 것이 타락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류 역사가 인간시조의 타락과 함께 출발되었다는 것을 공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인류는 반드시 그 방향을 돌이켜서 하나의 이념적인 세계를 향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역사 과정에 왔다 간 수많은 선지선열, 혹은 수많은 도주들은 무엇을 했느냐? 그들은 각각의 주장을 내세워 엉클어진 뜻의 방향을 하나의 목표를 세워서 그 방향으로 귀결시키려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의 절대적인 이상세계를 향하여 나가는 방향에 부합될 수 있는 길을 찾아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그 길을 몇 각도에서 부합 시켰느냐? 평행선상에서 부합시켰느냐, 직선상에서 부합시켰느냐? 어떤 주의, 주장이나 어떤 종교가 가는 길에는 한 단계만큼 부합시키면 남은 만큼 시련이 남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각도로 출발해서 어느 정도 내려가면, 역사과정에 벌어지는 인연이 끝날 때까지는 그 사명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련의 각도는 그만큼 줄어드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양심을 중심삼고, 더 고차적인 목표점을 향해 나가기 위해 나온 것이 무엇이냐? 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인류역사를 개관해 볼 때, 문화는 종교적인 기반을 통하여 발전해 나온 것입니다. 즉, 문화가 발전한 것은 오랜 역사과정을 거쳐오면서 종교적인 기반을 통하여 그 시대권 내의 문화권을 하나의 방향점으로 수습해 나왔기 때문이 라는 것입니다. 그건 왜 그랬느냐 하면, 뜻이 지향하는 하나의 목적점에 귀결시키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뜻이 지향하는 목적
뜻을 지향하는 데 있어서 중대한 사명을 한 것은 종교입니다. 그러한 종교의 역사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현실의 문화세계를 능가할 수 있는 깊고 새로운 내용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종교적인 내용을 통한 뜻의 기준, 혹은 이념적인 기준은 온 인류가 지향해 나가는 뜻의 목적과 결부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민주주의는 무엇을 중심삼고 되어 있느냐? 기독교 사상입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이와 반대의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뜻이 나오는 길을 더듬어 보면, 뜻은 본질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뜻은 종합적인 최선의 기준을 통하여서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뜻이 귀결점을 이루려면 단시일의 과정을 가지고는 안 됩니다. 또한 그 인연을 접합하기 위해서는 인류역사와 더불어, 그 문화역사와 더불어 관계를 가져야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랜 역사적인 이념을 가지고 현실에서 중요한 책임과 사명을 다하면서 뜻에 발전을 주었던 종교가 바로 기독교입니다.
그런데 공산주의는 어디서 나온 것이냐? 1917년에 소련을 중심삼고 난데없이 나왔습니다. 그러면 이 공산주의가 역사적인 뜻과 지금까지의 시대적인 모든 뜻을 전부다 하나로 묶을 순 있느냐?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양심다운 양심에 고개를 숙이는 고차적인 기준이 유물적이냐, 유심적이냐 할 때에 이것은 두말할 것 없이 유심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돈이 많은 사람이라고 해서 그를 인격자라고 부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인격자란 양심의 기반 위에 더 큰 무엇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 있어서 종교적인 역사를 중심삼고 새로운 형태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꼭지점을 앞질러 나가는 인연을 가진 사상의 체계를 갖추어야 됩니다. 또 기독사상을 중심삼고 세계인류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런 것을 볼 때 공산주의는 뜻과는 정반대의 사상입니다.
뜻의 목적은 이상을 찾는 것입니다. 이상은 무엇을 통하여 이루어지느냐? 하루 세끼 밥을 먹고 배부른 것으로 이상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아무리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술이 목적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일시적인 사랑이 아니요, 싸게 사올 수 있는 사랑도 아닙니다. 본질적인 사랑입니다.
이 본질적인 사랑을 분석해 보면, 사랑에는 혁명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참사랑에 해당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시조 때부터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수천년 후의 후손인 우리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과 똑같은 것입니다. 또한 수천년 후에 우리의 후손들이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과도 같을 것입니다. 사랑에는 발전도 없고 종식도 없는 것입니다. 혁명의 요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 순수한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 것이냐? 하나님이 어떤 존재를 절대적인 기준의 자리에 세워 놓고, 그의 존재성을 인정하고 그를 사랑하신다면, 그 사랑은 더 이상 혁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랑일 것입니다.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혁명은 어디서부터 출발하느냐? 욕망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나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버리고, 좋은 내용을 전체 앞에 적용시켜야 합니다. 그것을 사회에 적용시켜 사회에 혁명을 일으키고, 종교에 적용시켜 종교계에 혁명을 일으키고, 또한 다른 모든 분야에 적용시켜 그 분야에서 혁명이 벌어지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뜻이 지향하는 것은 이념입니다. 그러나 이념은 그 자체만으로는 뜻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뜻은 사랑 문제를 통해서 해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물질만을 가지고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기독교에서 제일 중요시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면 이 사랑을 이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냐? 그것은 신랑 신부를 짝지워 주는 것입니다.
오랜 역사과정을 거쳐오면서 사랑의 내용을 중심삼고 나온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독교는 세계적인 종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이념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계적인 종교가 되어야 하고, 세계적인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사랑 문제를 들고 나와야 합니다. 이때의 사랑은 타당성이 있어야 됩니다. 그 사랑이 아벨에게만 해당되고 가인에게는 해당되지 않거나, 대한민국 사람에게만 해당되고 미국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혁명을 거쳐온 역사도 사랑에는 아랑곳없이 한순간에 통합될 수 있고, 적응될 수 있어야 됩니다. 기독교에 그런 사랑이 있다면, 기독교를 중심삼고 세계의 국가를 통합시킬 수 있으며, 이상세계를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결여된다면 새로운 혁명이 일어나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기독교는 바라볼수록 어두웠습니다.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현재의 시점까지 연결시킬 수 있는 내용이 불분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형태는 갖추었지만 내용으로는 내세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무에 올라가는 것은 내려오는 것보다 더 힘이 듭니다. 그러나 진짜 높은 나무에 올라갈 때에는, 그럭저럭 올라가지만 내려올 때는 더 어려운 것입니다. 또한 어떻게 해서 내려왔다 해도 다시 올라가려 할 때에는 못 올라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내려왔으면 반드시 올라가야 됩니다.
사랑도 '아!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하면서 계속 올라가기만 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은 올라갔다 내려왔다, 주었다 받았다 해야 합니다. 사랑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부자간의 관계는 지구의 끝과 끝에 떨어져 있더라도 그 거리를 초월하고 찾아가서 서로 품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원인이 되어서 그러겠는가?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존재요, 우리는 지극히 비천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비천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사랑할 수 있느냐? 절대적인 존재가 비천한 자리까지 왔다갔다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독교가 그 기준까지 연결시키는 사명을 띠고 현시점까지 와서 세계성을 띠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편화시켜서 만민이 참으로 인정할 수 있는 공적인 사랑의 법도에 적용시켜야 됩니다. 그러자면 현시점에서, 현시대의 역사과정을 뛰어넘을 수 있어야 됩니다.
사랑주의가 나와야 하는 이유
그러면 앞으로 기독교가 해야 할 사명은 무엇이냐? 역사과정의 종합적인 이념과 더불어 사상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종교적 사명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려온 역사적 인연을 따라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야 되는 것입니다. 내려올 때는 6천년이 걸렸지만 다시 올라갈 때는 6천년이 걸려서는 안 됩니다. 왜? 인생이 짧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제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해도 백년밖에 못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6천년 인류 역사를 전부 다 더듬어 올라가려면 6천년이 걸려야 되고, 또 내려오는 데도 6천년이 걸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단축해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는 내용이 무엇이냐? 그것은 진리 자체보다도, 진리를 중심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시간을 초월합니다. 십년 전에 죽은 자식도 시간을 초월하여 사랑하는 마음이 그 부모에게는 있습니다.
또, 역사성을 초월하여 왕래할 수 있는 하나의 절대적인 요인이 바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셨지만, 그 진리는 사랑을 가르쳐 주는 한 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완전히 이룰 수 있는 활동을 못 하였습니다. 행동적인 결과를 통한 사랑의 내용을 소개해 주지 못하고 보류해 나온 것이 오늘날까지의 기독교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현시점에서 새로운 뜻을 지향하는 무수한 이념들을 통합 완결 지어서 인류의 행복을 조성할 수 있는 하나의 주의(主義)가 나와야 합니다. 그 주의는 무슨 주의냐? 구체적인 역사를 통하고 시대를 통할 수 있는 '사랑주의'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주의를 원하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식, 즉 아들을 보내 신랑의 감투를 씌우고, 그의 뜻을 따르는 만민을 신 부로 세우기 위해 섭리해 나오셨습니다.
역사는 흘러가더라도 그 심정의 인연은 언제나 평면적입니다. 따라서 종적인 역사를 거쳐왔지만, 하나님은 그 사회의 평면적인, 현실적인 무대를 걸어놓고 섭리하시기 때문에 기독교는 생활적인 종교가 되고, 사회적인 종교가 되어야 합니다.
인간 시조 아담 해와가 타락했는데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타락했느냐, 사랑을 받지 못하고 타락했느냐? 여기서, 하나님은 인류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아담 해와를 사랑하셨을 텐데 왜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가운데 타락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사랑하는 데는 특별한 경로를 통해서 특별한 사랑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저 대충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이 백명이 있더라도 백명 가운데 아버지의 유업을 상속해 줄 수 있는 아들은 오직 한 명뿐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 타락한 세계에서 사랑의 체계를 갖추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중심삼은 선민사상을 갖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방계 족속이고 우리는 직계 족속이다'할 수 있는 민족이 나와야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개인이 나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모든 재산과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이념과 그 하나밖에 없는 사랑을 위해 생사를 넘어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타락권내의 인간 중에서 누가 사랑의 상속자가 되느냐? 인류의 시조 아담의 타락 전 입장에 있는 사람입니다. 역사상에 선민이 나온 것은 다 사랑이 잘못됐기에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가려면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 사랑의 천리(天理)를 가르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달성할 수 있는 사람이 타락권내에서 반드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선민사상이 나와야 됩니다.
이스라엘이란 승리했다는 뜻입니다. 무엇에 승리했느냐? 어떤 운동경기에서 승리한 것이냐? 아니면 신부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 승리한 것이냐?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데 있어서 첫번째로 승리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세상 사람을 따라가면서 찾을 수 있느냐? 아닙니다. 세상 사람을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세상 사람들과 반대의 길을 가야 됩니다. 사탄과 반대되는 길을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도 아브라함도 야곱도 자기 처소를 떠나 지금까지와는 반대의 길을 갔던 것입니다.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누구보다도 더 간절히 사모해야 됩니다. 그래서 종교는 현세를 부정하고, 철학을 극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극히 극성맞게 현세를 부정한 무리가 어떤 무리냐? 순교의 역사를 가진 기독교인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사회의 병폐를 제거하기 위해서 순교를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부르짖고 사회를 부정하고 외쳤던 무리입니다. 이 기독교는 현세를 완전히 부정했기 때문에 사회로부터 몰린 것입니다. 사회를 전적으로 부정했기 때문에 사회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고 몰린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핍박하던 사람들은 망하고 핍박받던 사람은 망하지 않았느냐? 핍박을 받던 사람들에게는 뜻의 방향과 연결되어 그 뜻과 통할 수 있는 이상이 있으며, 하늘을 사랑하고 땅을 사랑하고 미래의 이념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천운과 박자를 맞출 수 있는 인연을 마련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망하더라도 그들은 망하지 않고 남아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하나님을 중심한 종교적인 이념에 의해 민주세계와 공산세계를 통일할 수 있는 심정의 천리가 밝혀지는 날에 세계는 자동적으로 통일이 되는 것입니다. 군사적인 회담이나 평화적인 회담을 통해서 통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 인류의 약 3분의 2가 종교문화권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종교권에 지금까지의 어떠한 사상도 파고들어 갈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종교주의가 나와야 합니다. 새로운 주의와 사상이 세계적인 왕자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 다음엔 엮어진 역사와 남겨진 역사를 종합해서 해결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사람이 주인이 되느냐? 겉으로 보면 강도질하고 강탈한 사람이 주인이 될 것 같지만 아닙니다. 본래의 주인은 어떠한 사람이냐? 누구보다도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주인입니다. 개도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따라다닙니다. 사랑의 마음이 없는 사람은 주인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류역사의 총결론
이런 관점에서 뜻의 목적으로 볼 때, 앞으로 세계가 머물 수 있는 내용의 모체는 무엇이냐? 물질이 아닙니다. 역사와 더불어 피 흘리고, 눈물짓고, 신음하면서, 해원의 한날을 소망해온 역사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역사적인 사랑이 실체화된 하나의 지도자가 이 땅에 나와야 됩니다. 그 지도자가 누구냐?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메시아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중심삼고 볼 때에 인류는 신부로서의 준비를 갖춘 후 신랑으로 오실 메시아를 맞아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가 필요없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윌 하자는 것이냐? 이 시점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려면 어느 정도 느껴야 하느냐? 역사 과정에 있던 사랑으로는 어림없습니다. 그 사랑의 힘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장하셨던 막연한 사랑으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더 더욱 귀한 사랑, 값진 사랑, 실체적인 사랑, 실증적인 사랑이어야 됩니다. 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강한 것이므로, 현실적인 생활관념을 가지고 어느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강하게 느낄 수 있는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사랑을 강하게 느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먼저 사랑의 길이 어떻게 놓여져 왔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부모의 자식 대한 사랑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느냐? 또, 부부의 사랑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그것은 말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느끼는 데도 자신을 사랑해 온 부모의 행로를 반대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비로소 '아! 우리 부모는 이런 분들이었구나!'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슬러 올라가서 그 사랑을 상기해 봅시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출발된 사랑은 얼마나 이상적이겠습니까?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그 사랑은 가장 멋진 사랑으로 출발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은 이 멋진 사랑을 중심삼고 자유천지 가운데서 봄날에 취해 사는, 꿈을 꾸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부풀었던 하나님의 마음, 뜨거운 불과 같은 그 사랑의 마음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랑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이 사랑을 찾기 위한 회복운동을 해 나온 것이 인류역사입니다.
인류역사의 총결론이 무엇이냐?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중심한 본연의 사랑을 다시 찾기 위한 역사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것을 찾기 위해 방법과 수단과 형태와 개념을 달리 하면서 인류역사가 흘러왔지만, 그 목적은 하나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오늘날 나를 중심삼고 볼 때 하나님의 사랑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관계가 있으려면 얼마만큼 있어야 되느냐? 예수님과 이스라엘 민족과의 관계보다 더 깊은, 그 이상의 관계가 있다는 자극을 느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의 사랑을 못 느낍니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역사적으로 해명해야 됩니다. 즉 어떻게 사랑이 발전해 나왔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해명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역사적으로 해명한 증거들을 통해서 오늘날 이 시점의 개체를 중심삼고, 역사가 이렇기 때문에 나는 이래야 되겠고, 역사가 이렇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나에게 이런 가치가 있다하는 기준을 생활에서 세워야 합니다. 그러한 생활 자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예수님을 사랑하는 입장에 싫다는 기준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내용을 어느 누구나 알 수 있게 된다면, 세계는 자동적으로 통일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무슨 수단과 방법이 필요 없습니다. 가정에서도 사랑하는 아내나, 어머니가 밥을 지어 주면 밥맛이 더 있다고 합니다. 자식을 가진 어머니는 그 자식이 아무리 똥을 싸고 비벼대서 몸이 더러워져도 밉지 않고, 오히려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역사과정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어떠한 민족을 중심 삼고 볼 때, 치열한 투쟁에서 몰리고 쫓기던 무리들이 생명을 잃어버릴 수 있는 그런 입장에서도 그 나라의 주권을 다시 세워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는 것은, 그 배후에 인간을 대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민족이 흥하고 망하는 그 역사의 배후에도, 시대마다 변천해 나가는 기독교의 역사과정에도, 오늘날 세계적인 문화가 교류되며 상충되는 과정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깃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가 아무리 부패되어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우리들이 모르는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부패한 세계 도상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몇천만 배 더 깃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한 것임을 실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는 악한 세계를 붙들고 사랑을 외치면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런 내용을 전개시킬 수 있는 종교가 없고, 그래서 종착점이 없는 것입니다. 이같이 사회를 구하지 못하고 사회를 지도할 수 있는 역량을 잃어버린 종교는 기울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체제를 갖춘 형태나 어떤 기반으로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뼛골에서부터 흘러나온 양심의 본연의 자세에 자기도 모르게 포위되고, 포위한 그 힘이 천운과 방향을 맞추어 그 방향이 역사성을 통할 수 있는 감정을 찾으면 거기서 인간 개조, 인간 재창조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회생하되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 회생하면 절대로 안됩니다. 양심적인 사람일수록 절대적인 진리를 통해서 자기가 회생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마음속 깊이 바라는 것은 참다운 사랑을 통해서 회생하는 것입니다. 그건 왜 그러느냐? 사람은 죽을 때도,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서 죽고 싶어하고, 사랑하는 환경권내에서 죽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금은 보화를 쌓아 놓고 좋아하는 자리가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을 통하여 신뢰를 얻는 그 자리에서 천적인 인연은 맺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두가 좋아하는 것
오늘날 종교는 사회를 위해 혁신운동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폭발적인 심정을 갖지 못한 종교는 그 사명을 다할 수가 없습니다. 종교는 이제까지 말없이 새로운 환경을 제시해 나왔습니다. 아무리 악한 곳으로 가는 민족이 있더라도, 그 민족에게 참다운 사랑의 폭탄을 던지면 그들은 반드시 거기에 녹아나고 동화되는 것입니다.
목에 줄을 매고 있는 송아지는 코에 코뚜레를 끼우기 전에는 끌고 가기가 무척 힘이 듭니다. 그러나 송아지에게 코를 끼고 고삐를 잡아 당기면 송아지는 끌려갑니다. 그때부터는 고삐를 힘들게 끌지 않고도 송아지를 몰고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코뚜레를 낀 송아지라고 하더라도 사랑해 주지 않는 사람이 끌고 갈 때는 잘 따라가지 않습니다. 그 송아지를 사랑 해 주는 사람만이 쉽게 끌고 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앞으로 세계를 다 소화시킬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랑도 부모가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그 사랑만으로는 안 됩니다. 남의 집 자식이 죽은 것은 가슴 아파하지 않는 그런 사랑이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사랑할 때에도 자기들끼리만 좋으면 된다고 하는 사랑은 세계 사람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사람이 필요한가? 절대적인 세계에서 공평과 평등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소원의 내용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나지만 곧 '이젠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무엇 때문에 고향에 돌아가고자 하는가? 고향 산천이 그립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부모의 품에 안기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밥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눈물 이 나오는 것입니다. 또 고향 생각만 하면 괜히 가슴이 부풀고 봄동산을 본 듯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부모 형제가 있는 고향에, 사랑의 인연을 찾아서 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즉 부모의 사랑, 형제의 정이 그립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정이라는 말을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이 '가정(家庭)'의 '정(庭)'자는 무슨 '정'자입니까? '뜰 정'이지요. 뜰에는 가지각색의 예쁜 꽃들이 많이 피듯이, 가정에도 형제가 있고 부모가 있는 것입니다. 가정은 서로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노래 부르고 춤출 수 있는 곳이 되어야 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서로 싸움을 한다면 그 뜰이 어떻게 되겠어요? 황무지가 되는 것입니다. 전부 망하는 것입니다.
돈을 갖기 위한 욕심으로 자기 아버지의 쌈지에 든 몇푼 안 되는 돈까지도 빼앗아 자기 지갑에 넣는 자식이 있다면 그는 못난 자식입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물질은 한계성을 초월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보따리는 풀어놓으면 무한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중심삼고 볼 때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 종족의 사랑, 민족의 사랑, 국가의 사랑, 세계의 사랑, 천주의 사랑의 정적 기준이 모두 다릅니다. 여기서 다르다는 것은 누구나 다 좋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식물도 좋은 음악을 들으면 잘 자라는데, 나쁜 음악을 들으면 제대로 자라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깃들어 나오는 노랫가락을 듣고 자라면 멋지게 살수 있는 것입니다. 그 멋지게 살수 있는 마음들이 바로 '사랑' 입니다.
뜻과 사랑이 가는 길
인간의 최고의 소원이 무엇이냐? 인간은 땅을 원해 전부 땅덩이를 부둥켜안고 땅에서 살겠다고 하지만 결국은 어디로 가느냐? 무덤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사랑이 깃들어 있는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하는 것이요, 사랑할 수 있는 형제의 품을 그리워하는 것이요, 사랑하는 아내의 품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 무엇도 사랑을 막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고의 진리는 사랑을 중심삼고 나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다른 종교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신랑 신부에 대한 말씀도 하셨고, 또한 형제에 대한 말씀도 하셨습니다. 즉 우주의 정점은 세계인류가 한 족속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는 사랑의 망태기 안에서 엉클어져서 자기를 위한 사랑이 아니라 가정을 더 위하는 사랑을 찾아 나가야 합니다. 또한 가정보다도 종족을 위한 사랑을 찾아 나가야 되고, 종족보다도 민족을 위한 사랑을 찾아 나가야 되고, 민족보다도 국가를 위한 사랑을 찾아 나가야 되고, 국가보다도 세계를 위한 사랑을 찾아 나가야 됩니다. 그것이 뜻이 가는 길이요, 사랑이 가는 길입니다.
충신은 나라를 위하여 자기 개인과 가정을 희생시키고, 자기 종족을 외면하고서라도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충신의 도리입니다. 또 효자도 자기 일신을 희생하고, 자기에 속한 처자를 외면하고서라도, 부모의 뜻을 따라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효자의 도리입니다. 내 개인보다도 큰일을 먼저 사랑하는 길이 뜻이 가는 길이요, 사랑이 가는 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천지를 헤아려 볼 때 예수님은 만민의 메시아가 되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원수들의 창에 몸을 찔리고, 조롱과 비소를 당하는 가운데서도, 그렇게 억울하고 비참하게 죽음을 당하는 최후의 자리에서도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 이상의 사랑을 가져야 하고, 자기에게 인연된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우리는 광명만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칠흑같은 흑암 권세도 좋아할 수 있는 아량과 배포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 배후에 악한 세력을 물리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자신보다도 가정을, 가정보다도 종족을, 종족보다도 민족을, 민족보다도 국가를 국가보다도 세계를, 세계보다도 하늘땅을 더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아가 하늘땅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이러한 마음을 하나님은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욕심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6천년 전에 인간 앞에 사랑의 기준을 세워 놓고 하나님만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천리(天理)이지 독재가 아닙니다. 예수님 역시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내게 합당치 않으며, 내 제자가 못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리가 있기 때문에 사랑의 기준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나가면 천지 운세도 역사의 과정에서 역사를 움직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미리 기도를 하게 하여 고생을 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루하지만 인간에게 몇 천년 동안이나 참게 하시는 것입니다.
뜻이 가는 길은 이상의 길입니다. 이상은 반드시 사랑을 중심삼고 자리 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거기에 영원한 안식의 터전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어느 환경에서도 영원히 안식할 수 있는 안정권이 조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종교인은 가능성이 있는 입장을 견지하고 그곳을 향해 가야 됩니다. 우리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가능성을 느끼면서 가야 됩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하라, 주님만을 사랑하라는 말은 인간 앞에 사랑의 동기인 동시에 결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2천년이라는 긴 역사과정에서 희생해 나왔지만 지금까지 남아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끝날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마지막 최후의 결승점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골인을 하여야 할 때가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후의 한 발짝을 남겨 놓고 뒤에 오는 사람에게 '너희들 지금 뛰어오는구나. 난 이만큼 왔는데' 하고 구경만하면서 서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천리길을 달렸다 하더라도 남은 한 발짝 때문에 몇 만리 길을 더 갈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현하에 뜻이 가는 길은 어떤 길이냐? 선의 길입니다. 그러면 선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냐? 선은 주는 것입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포화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이 포화선을 넘어갑니다. 포화상태에서는 그 이상은 못 올라가지만 사랑은 그 기준을, 그 포화선을 돌파하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그 활동범위를 넘어 하나님의 가슴까지 그것을 연결시켜 인연을 맺음으로써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본연의 사랑을 찾아가야 할 인생
수십 억 인류는 태어날 때도 사랑을 중심으로 나고 죽을 때도 사랑을 중심으로 죽습니다. 즉, 사랑 가운데서 태어나서 사랑을 중심삼고 살다가 사랑가운데서 죽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변하지 않는 사랑에 의존해 살고, 변하지 않는 사랑이 머무는 곳에 안식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랑이 머무는 곳이라면 바위틈일지라도 활개를 칠 수 있고, 코를 골며, 편안히 누워 낮잠을 잘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모의 사랑에 의해서 태어났지요? 참다운 사랑에 의해 태어났으면 참다운 세계에서 사랑을 붙들고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상적인 인생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잘못된 사랑의 일치점을 통해서 태어났기 때문에 잘못된 사랑권내에서 살다가 잘못된 가운데 죽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인간은 본연의 사랑을 되찾아가야 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을 해야 합니다. 본연의 사랑 안에서 못 태어났고, 본연의 사랑 안에서 못 살고, 본연의 사랑 안에서 죽을 수 없었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서 다시 살다가 죽을 수 있는 길을 개척해야 됩니다. 우리의 인생은 본연의 사랑을 되찾아가는 노정이 되어야 합니다.
본래의 사랑의 길이 무엇이냐? 이상이 깃들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러면 그 이상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본래 인간을 창조하실 때의 창조이상입니다. 사랑은 최고로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점령하고도 안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점령하였다고 해서 좋아하며 만족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람의 욕심은 무엇까지 점령하고 싶어하느냐? 하나성의 마음 보따리, 심장 한복판에 있는 비밀 창고 속의 사랑을 원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이 사랑을 완전히 점령하고 나면 사람의 욕심도 그때는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점령하기 위한 경기에 출전한 용사들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아! 수고하시는 하나님' 하면서 하나님을 붙들고 '나를 사랑해 주시오' 하다가도 얼마 안 가서 사랑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잊어버리게 되면 영원한 자기의 것이 안됩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옷을 입고 자랑하며 웃고 살고 있지만 그 전부가 임시로 빌려 입고 빌려 사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나그네의 걸음 같은 것이고, 살고 있는 집도 여관이나 호텔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무한대의 가치의 내용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하니 얼마나 불쌍한 일입니까?
사람은 사랑 가운데서 태어나고, 사랑 가운데에서 살아가고, 사랑 가운데에서 죽어가야 합니다. 그 사랑은 무엇이냐? 돈 주면 왔다갔다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존재의 기원을 발발시키는 사랑이요, 존재의 사연을 주관하는 사랑이요, 존재의 결실을 현실화시키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세계를 통일하고 싶어하는 것이며, 보좌에 앉아서 만민 앞에 자랑하고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욕망의 궁극적인 종착지는 둘만의 사랑이 아니라, 둘의 사랑을 합하여 그 가운데에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주의를 이루어 세계 인류와 함께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본연의 세계를 찾아 세움으로써 하나님을 중심으로 인류를 얽어매서 전부 다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세우려는 사랑이 그런 사랑입니다.
예수님도 그러하기 때문에 기독교를 중심삼고 세계를 복귀해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은 세계가 기독교권내에 있으며, 예수님의 사랑을 시인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2천년 전부터 끝날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부활시키어, 그 가운데 하나님을 모셔 놓고 인간을 한곳에 모아 사랑의 동산을 이루겠다고 나왔습니다. 그것이 지상천국 이념이며 기독교의 첫째 이상입니다.
지금까지 인간은 종적인 사랑의 길을 따라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주도해 온 그 종적인 사랑의 길을 세계로까지 발전시키지는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야단법석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종적 사랑, 자기의 혈통적 사랑을 분리시켜 놓고, 그 사랑을 존중시할 수 있는 새로운 사랑의 보따리가 풀어져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아내보다도, 아들딸보다도 더 세계 인류를 사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볼 때 온 인류는 다 공평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아들딸과 세계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공평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책임과 사명을 짊어지고 더 귀하고 더 가치 있는 존재를 따라가 사랑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하나님편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랑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자기의 친척, 종족, 민족을 초월하여 세계를 사랑해야 됩니다.
뜻의 길은 사랑의 길이요, 선의 길
뜻이 가는 길은 이상의 길입니다. 그러나 이 뜻의 길은 고생의 길이 되었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이상은 무엇이냐? 그것은 인간들이 사랑 안에서 태어나 사랑 안에서 살다가 사랑 안에서 죽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 길을 가는 사람은 영원히 그 사랑과 더불어 그 길의 주인이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전부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는 그런 사 랑을 가져야 합니다.
본래 인간시조 아담 해와의 소망은 하늘과 땅을 하나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위해 태어났습니다. 오늘날 인류도 그런 사랑의 인연 가운데 태어나서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살아야 할 것인데, 인간들은 이것을 알지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2아담으로 예수님을 보내시어 사랑의 인연을 상속받게 하시고, 그 사랑을 실천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한 발판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세워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를 불신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랑의 바탕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은 활동무대를 다시 영계로 옮겼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시 세계적으로 그 사랑을 전개시키기 위해 예수를 보낼 것이니, 그날이 바로 예수 재림의 날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바라시는 사랑으로 하나의 세계를 이루기 위해 예수께서 재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이 어디로 갈 것인가? 사랑이 가는 길은 선이 가는 길이고, 뜻이 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신을 희생시켜서라도 가정을 뜻 앞에 세울 수 있는 사랑을 가져야 됩니다.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개인의 종적인 사랑을 희생시켜서라도 세계적인 사랑을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인간들이 지구상에 생겨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지상천국이라는 이상세계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자기 나라사람보다도 다른 나라사람을 더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나라 사람들을 희생시켜서라도 다른 나라 사람들을 살려야 됩니다. 우리는 어디까지 들어가야 하느냐? 죽을 수 있는 최고의 밑창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세계주의자가 못 됩니다. 선생님은 여태까지 세계주의자가 되는 길을 가르쳐 왔습니다.
여러분들은 뜻이 가는 길을 위해서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희생을 각오하고, 눈물과 피땀을 흘릴 각오를 해야 합니다. 물심양면으로 세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부디 세계 인류를 위해 기도하고 정성들이는 모습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