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 드라마와 김수현
막장 드라마들을 보면, 젊은 기혼 여성들이 이혼하면 으레 돈 많은 연하의 미남이 흑기사처럼 불쑥 나타난다.
너절한 현실에 짜증 난 여인들의 로망이자 대리 만족이리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그러면서 새로운 갈등을 억지로 만들어 끼워 맞추기 식으로 길고 지루하게 끌고 나간다.
시청률에 매달려 자극적 스토리로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막장 드라마는 극 전개가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게 억지스럽다.
‘막장’의 본뜻은 탄광 갱도 끝에 있는 작업장을 뜻하지만, 인터넷에서 막장은 ‘갈 데까지 갔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막장 드라마는 주제나 주인공을 부각하기 위해 불륜이나 출생의 비밀 등으로 지나치게 갈등을 과장한다. 그러다가 갈등은 어느 날 어이없이 단순하게 풀어지기도 한다.
삶의 깊이와 고뇌도 없이 늘어놓는 윤기 없는 ‘불륜 이야기’가 마치 닭 가슴살처럼 퍽퍽하게 느껴져, 더는 인내하지 못하고 TV를 꺼버린다.
이처럼 갈 데까지 가버린 내용이 실타래처럼 엉킨 막장 드라마가 판을 칠 때 김수현 작가가 <내 남자의 여자>라는 불륜 드라마를 내놓았다.
그녀는 “무늬만 불륜인 드라마들이 갑갑해서 남녀의 불륜 심리에 포커스를 맞추었다.”라고 말했다. 이 드라마의 특징은 등장인물들에 대한 심리적 묘사가 지극히 세밀해서, 불륜을 진부하게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 남녀의 깊은 심리의 속살을 파헤쳐 오래오래 생각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는 데 있다.
다른 막장 드라마에서는 히스테릭하고 예민한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비이성적으로 공격하는 일이 수두룩하여 우리 사회의 노인과 젊은이를 이간질하고 있지만, 김수현의 이 드라마에는 그런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잘 아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있다. 남편과 사별한 시어머니는 늘 손자가 보고 싶고 외롭다고 했다. 며느리는 맞벌이하는데 아이를 맡길 곳이 없다고 하소연을 했다. 아이 보는 사람을 두었으나 아이는 점점 거칠어지고 불만이 많아져서 늘 소리를 질러대었다. 나는 두 여인의 편안한 심성을 잘 아는 고로 며느리에게 권했다. “할머니와 같이 사는 아이들은 정서가 풍부해지고 언어 발달이 뛰어나게 되는 거야.” 그렇게 수차례 권했으나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같이 사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런 모습도 혹시 막장 드라마의 영향이 아닐까에 대해 의심이 가면서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그 작품을 선택한 특정 관객만 보는 영화와는 달리 드라마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다. 그러기에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은 더욱더 사회적 책임감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1991년 처음 김수현의 드라마를 만났다. <사랑이 뭐길래>는 가부장의 권위가 아직 살아있는 봉건적인 집안과 그때로써는 파격적이던 애처가 집안을 그렸다. 드라마가 방영되는 시간이면 전국적으로 수돗물 사용량이 줄고 택시가 텅텅 빌 정도였고, 그 시간에 전화를 걸면 실례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그 경쾌한 드라마 이후 <목욕탕집 남자들>, <엄마 아빠 좋아> 등의 유머러스한 드라마가 있었는가 하면, <청춘의 덫>, <사랑과 야망>, <후회합니다>, <배반의 장미>, <불꽃>, <완전한 사랑> 등 운명극도 있었는데, 모두 탁월한 솜씨로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녀는 희극과 비극의 경계를 유려하게 넘나들며 뛰어난 작품을 만들었다. 세상을 보는 따뜻한 시각을 지닌 그녀는 마음을 숨기고 에둘러 돌아가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의 말투는 솔직하고 직설적이라 배배 꼬이는 실타래처럼 억지스러움이 없다. 총알처럼 꿰뚫는 대사로 쏘아 올리면 가슴에 탁 튕겨오도록 군더더기 없이 후련하다. 나는 마음을 말로 매끈하게 전달하지 못하기에, 신의 경지에 다다른 김수현의 간결하고 맛깔스러운 대사를 듣고 있으면 속이 후련하고 통쾌하다.
그녀에게서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은 인간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태도와 교훈적인 시각이다. 드라마 속의 어른들은 반듯한 모습이라 참다운 어른의 덕목을 잘 보여준다. 그녀 드라마의 특징은 극단적으로 나쁜 사람이 별로 없이 주연이나 조연이 모두 독특하고 뛰어나다는 점이다. 게다가 인물 분석이 집요하고 적나라하여 각각의 상황에 직면한 사람들이 쓰는 적절한 표현에는 생생한 맛이 살아 있다. 작가의 기본 자세에 근거하여 각 인물의 내면을 충실하게 표현하여, 통속적 삶을 사는 인물들을 풍부하고 세밀한 결로 살려낸다.
나는 드라마보다는 생생한 현장감과 사실감으로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다큐멘터리를 좋아한다. 그렇지만 유독 김수현 극본의 드라마는 이성을 잃을 정도로 빠져든다. 그 시간에는 아들이 무슨 부탁을 해도 들은 척도 안 한다. 나의 모성애도 그녀 드라마 앞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눈을 반짝이며 TV 앞으로 바짝 다가앉아 침을 꼴깍 삼키며 깊게 빠져드는 모습을 보며 우리 집 남자들은 웃지만, 그 짜릿한 드라마를 보는 동안은 내 생활은 활기에 찬다. 김수현 드라마를 하는 동안에는 모든 포커스를 드라마 방영 시간에 맞춘다. 그러다가 드라마가 끝나고 나면 무대 뒤로 물러난 한물간 주인공처럼 일상이 쓸쓸해진다.
절묘한 순간에 삶의 한 단면을 정확히 베어내서 보여 주는 그 짜릿한 맛. 그래서 나는 오늘도 진공청소기 같은 흡입력을 지닌 김수현의 드라마를 기다린다. 연분홍 사랑을 기다리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