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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三十九回 柳下惠授詞却敵 晉文公伐衞破曹
제39회: 유하혜의 계책을 받아 적을 물리치고, 진문공은 위나라와 조나라를 정벌하다.
話說,晉文公定了溫、原、樊陽、攢茅四邑封境,直通太行山之南,謂之南陽。此周襄王十七年之冬也。時齊孝公亦有嗣伯之意。自無虧之死,惡了魯僖公。鹿上不署,彆了宋襄公。盂會不赴,背了楚成王。諸侯離心,朝聘不至。孝公心懷憤怒,欲用兵中原,以振先業。乃集群臣問曰:「先君桓公在日,無歲不征,無日不戰。今寡人安坐朝堂,如居蝸殼之中,不知外事,寡人愧之!昔年魯侯謀救無虧,與寡人為難,此仇未報。今魯北與衛結,南與楚通,倘結連伐齊,何以當之?聞魯歲饑,寡人意欲乘此加兵,以杜其謀。諸卿以為何如?」
한편, 진문공이 온(溫), 원(原), 양번(陽樊), 찬모(攢茅) 등 네 고을을 접수하여, 태항산(太行山) 남쪽으로 직접 통하게 되니 이를 남양이라고 했다. 이때가 주양왕 17년(기원전 635년) 겨울이었다. 그때 제나라의 효공도 역시 제환공이 이룩한 방백의 자리를 이어받으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제효공은 무휴(無虧)가 죽은 후부터 무휴를 지원했던 노희공을 미워했다. 그러나 제효공은 송양공이 주재한 녹상(鹿上)의 회맹에서 서명을 하지 않아서 송나라와 사이가 틀어졌으며, 다시 초성왕이 주재한 우(盂)의 회맹에도 가지 않아 초성왕과도 등지게 되었다. 제후들의 마음은 이미 제나라를 떠났기 때문에 외교사절도 오지 않았다. 효공은 마음속으로 분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중원에 선군의 위업을 다시 떨치고 싶었다. 그래서 군신들을 소집하여 묻기를, “선군 환공께서 살아 계실 때에는 해마다 정벌하지 않은 해가 없었고, 하루라도 전투를 하지 않은 날이 없었소. 그런데 과인은 지금 조당에 편안히 앉아 마치 달팽이 껍질 속에 있는 것 같아서, 바깥일을 모르니 심히 부끄럽소. 지난날 노나라 군주가 무휴를 구원하기 위해 군사를 끌고 쳐들어와 과인을 어렵게 했으나, 이 원수를 아직 갚지 못했소. 지금 노나라는 북쪽으로 위나라와 손을 잡고, 남쪽으로는 초나라와 통하고 있소. 만약 노나라가 이 두 나라와 힘을 합쳐 우리 제나라를 쳐들어온다면 어떻게 감당하겠소? 내가 들으니, 노나라에 기근이 들었다 하는데 이 기회를 틈타 군사를 일으켜 그들의 계획을 미리 막고자 하는데, 여러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했다.
上卿高虎奏曰:「魯方多助,伐之未必有功。」孝公曰:「雖無功,且試一行,以觀諸侯離合之狀。」乃親率車徒二百乘,欲侵魯之北鄙。邊人聞信,先來告急。魯正值饑饉之際,民不勝兵,大夫臧孫辰言於僖公曰:「齊挾忿深入,未可與爭勝負也,請以辭令謝之!」僖公曰:「當今善為辭令者何人?」臧孫辰對曰:「臣舉一人,乃先朝司空無駭之子,展氏獲名,字子禽,官拜士師,食邑柳下。此人外和內介,博文達理,因居官執法,不合於時,棄職歸隱。若得此人為使,定可不辱君命,取重於齊矣。」
상경 고호(高虎)가 아뢰기를, “노나라는 여러 제후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어, 우리가 정벌한다고 해도 성과가 없을 듯합니다.” 하니, 제효공이 말하기를, “비록 성과가 없다고 하더라도 일단 한번 시도해 보면 여러 제후의 모이고 흩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오.” 했다. 이에 제효공은 친히 200대의 전차를 거느리고 노나라의 북쪽 국경을 향해 진격했다. 노나라의 변방을 지키는 장수가 소식을 듣고 먼저 위급함을 고했다. 그때 노나라는 기근이 들어서 백성들이 싸움을 감당할 수 없었다. 대부 장손신(臧孫辰)이 노희공에게 말하기를, “제나라는 우리가 무휴를 지원한 일에 대해 깊은 원한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기근이 들어 승부를 다툴 수 없습니다. 청컨대 사절을 보내 사죄하여 싸움을 피해야 합니다.” 하니, 노희공이 말하기를, “지금 좋은 말로 사죄하여 무마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했다. 장손신이 대답하기를, “신이 한 사람을 추천하겠습니다. 그는 선공 때 사공(司空) 무해(無駭)의 아들인데 성씨는 전(展)이고 이름은 획(獲)이며 자는 자금(子禽)입니다. 벼슬은 사사(士師 ; 법무장관)이고, 식읍은 유하(柳下)에 있습니다. 이 사람은 외유내강의 성격에 아는 것이 많고 사리에 통달했습니다. 관직에 있을 때 법을 집행하며 시세를 따르지 않아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은둔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사람을 불러내어 사자로 보낸다면 주군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고 제나라에서 중하게 여길 것입니다.” 했다.
僖公曰:「寡人亦素知其人,今安在?」曰:「見在柳下。」使人召之,展獲辭以病不能行。臧孫辰曰:「今有從弟名喜,雖在下僚,頗有口辯。若令喜就獲之家,請其指授,必有可聽。」僖公從之。展喜至柳下,見了展獲,道達君命。展獲曰:「齊之伐我,欲紹桓公之伯業也。夫圖伯莫如尊王,若以先王之命責之,何患無辭?」展喜復於僖公曰:「臣知所以卻齊矣。」僖公已具下犒師之物,無非是牲醴粟帛之類,裝做數車,交與展喜。喜至北鄙,齊師尚未入境,乃迎將上去。至汶南地方,剛遇齊兵前隊,乃崔夭為先鋒。展喜先將禮物呈送崔夭。崔夭引至大軍,謁見齊侯,呈上犒軍禮物,曰:「寡君聞君親舉玉趾,將辱臨於敝邑,使下臣喜奉犒執事。」
노희공이 말하기를, “과인도 그 사람을 잘 알고 있소. 지금 어디에 있소?”하니, 장손신이 말하기를, “유하(柳下)에 있습니다.” 했다. 노희공이 사람을 시켜 불러오게 했으나 전획은 병으로 갈 수 없다고 사양했다. 장손신이 말하기를, “지금 그 사촌 동생 전희(展喜)가 조정에 하급 관료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도 말을 꽤 잘하니 전희에게 명하여 전획을 찾아가 그 지시를 받아오게 하면 반드시 도움이 될 것입니다.” 했다. 노희공이 그 말을 따랐다. 전희가 유하에 이르러 전획을 만나 군주의 명을 전했다. 전획이 말하기를, “제나라가 우리 노나라를 정벌하려는 이유는 제환공의 패업을 계승하려는 것이다. 무릇 패업을 도모하려면 왕실을 높이는 것이 좋다. 그래서 선왕의 명령을 가지고 꾸짖으면 어찌 물러가지 않겠느냐?” 했다. 전희가 노희공에게 복명하며 말하기를, “신은 제나라 군사를 물리칠 방법을 알았습니다.” 했다. 노희공이 이미 제나라 군사에게 보낼 물건들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희생 짐승과 술, 곡식과 비단 등을 여러 대의 수레에 실어 전희에게 넘겨주었다. 전희가 노나라 북쪽 경계로 달려가니, 제나라 군사들은 아직 노나라 국경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에 전희가 제나라 장수를 마중하려고 앞으로 나아가 문남(汶南) 지방에 이르자, 그곳에서 제나라의 선발대와 만날 수 있었다. 제나라의 선봉은 최요(崔夭)였다. 전희는 먼저 가져온 예물을 최요에게 보냈다. 최요가 대군을 이끌고 제효공을 뵙고 (전희가 가져온) 예물을 바치니, 전희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군사를 일으켜 친히 우리나라의 경계에 임하신다는 소식을 들으신 저희 주군께서 신을 시켜 상국의 군사를 호궤하라는 임무를 맡겼습니다.” 했다.
孝公曰:「魯人聞寡人興師,亦膽寒乎?」喜答曰:「小人則或者膽寒,下臣不知也。若君子,則全無懼意。」孝公曰:「汝國文無施伯之智,武無曹劌之勇,況正逢饑饉,野無青草,何所恃而不懼?」喜答曰:「敝邑別無所恃,所恃者先王之命耳。昔周先王封太公於齊,封我先君伯禽於魯,使周公與太公割牲為盟,誓曰:『世世子孫,同獎王室,無相害也。』此語載在盟府,太史掌之。桓公是以九合諸侯,而先與莊公為柯之盟,奉王命也。君嗣位九年,敝邑君臣,引領望齊曰:『庶幾修先伯主之業,以親睦諸侯。』若棄成王之命,違太公之誓,墮桓公之業,以好為仇,度君侯之必不然也。敝邑恃此不懼。」
제효공이 말하기를, “노나라 사람들은 과인이 군사를 일으킨 것을 알고 역시 간담이 서늘해졌던 모양이구나?” 하니, 전희가 대답하기를, “소인들은 혹 간담이 서늘한 자도 있었겠지만 저는 알지 못합니다. 만약 군자라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했다. 효공이 말하기를, “너희 나라 문신에는 시백(施伯)만한 지혜가 없고, 무신에는 조귀(曹劌)만한 용기도 없다. 더욱이 기근이 들어 들에는 푸른 풀도 없는데 무엇을 믿고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느냐?” 하니, 전희가 대답하기를, “우리나라는 믿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것은 선왕의 명령이 있을 뿐입니다. 옛날 주나라 선왕께서는 태공을 제(齊)에 봉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선조이신 백금(伯禽)을 노(魯)에 봉하셨습니다. 주공과 태공에게 희생(犧牲)을 잡아 맹세하게 했는데, 그 맹세에 이르기를, ‘대대로 자손들은 왕실을 받들고 서로 해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 서약을 맹부(盟府)에 보관하고 태사가 관장하고 있습니다. 제환공께서는 아홉 번 제후들을 모아 회맹하실 때에도 먼저 노장공과 가(柯)에서 회맹하여 왕명을 받들기로 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군주의 자리를 이은 지 9년인데, 우리나라의 군신들은 목을 내밀어 제나라를 바라보며 말하기를, ‘거의 제환공의 패업을 계승하여 제후들과 친목할 것이다.’ 했습니다. 만약 성왕의 명령을 버리고 태공의 맹세를 어긴다면, 제환공의 패업을 무너뜨리고 사이좋은 관계를 원수지간으로 만드는 것이니, 군주께서는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는 그것을 믿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했다.
孝公曰:「子歸語魯侯,寡人願修睦,不復用兵矣。」即日傳令班師。潛淵有詩,譏臧孫辰知柳下惠之賢,不能薦引同朝。詩云:「北望烽煙魯勢危,片言退敵奏功奇。臧孫不肯開賢路,柳下仍淹展士師。」展喜還魯,復命於僖公。臧孫辰曰:「齊師雖退,然其意實輕魯。臣請偕仲遂如楚,乞師伐齊,使齊侯不敢正眼覷魯,此數年之福也。」僖公以為然。乃使公子遂為正使,臧孫辰為副使,行聘於楚。臧孫辰素與楚將成得臣相識,使得臣先容於楚王,謂楚王曰:「齊背鹿上之約,宋為泓水之戰,二國者,皆楚仇也。王若問罪於二國,寡君願悉索敝賦,為王前驅。」
제효공이 말하기를, “그대는 돌아가서 노희공에게 말하게. 내가 노나라와 수교하여 화목하게 지내고 싶다고. 다시는 군사를 동원하지 않을 것이네.” 하고, 그날로 명령하여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다. 잠연(潛淵) 선생이 시를 지어 장손신이 유하혜(展獲)의 현명함을 알면서도, 그를 천거하여 조정에 끌어주지 않은 행위를 비난했다. 시에 이르기를, “북변의 봉화를 보고 노나라 형세가 위급했으나, 몇 마디 말로 적군을 물리친 공은 뛰어나도다, 장손신은 그런 현자를 위해 길을 열지 않아, 전획은 유하 땅에 그대로 묻혀 살았네.” 했다. 전희가 노나라로 돌아와서 노희공에게 복명했다. 장손신이 말하기를, “제나라의 군사들이 비록 물러갔지만, 그 뜻은 실은 우리나라를 가볍게 보는 것입니다. 신이 청컨대 중수(仲遂) 공자와 함께 초나라에 가서 군사를 청해 제나라를 정벌하도록 하여, 제효공이 감히 우리나라를 엿보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그러면 수년 동단 노나라의 복이 될 것입니다.” 했다. 노희공이 옳다고 생각하여 즉시 공자 수(公子遂)를 정사로, 장손신을 부사로 하여 초나라에 사절을 보냈다. 장손신은 원래 초나라 대장 성득신과는 서로 안면이 있었기 때문에 성득신으로 하여금 먼저 초왕을 뵙고 말하게 하기를, “제나라는 녹상(鹿上)의 약속을 어겼고, 송나라는 홍수(泓水)에서 전쟁을 했으니 두 나라는 모두 초나라의 원수입니다. 대왕께서 만약 이 두 나라에 죄를 묻는다면 우리 군주께서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대왕의 향도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했다.
楚成王大喜。即拜成得臣為大將,申公叔侯副之,率兵伐齊。取陽穀之地,以封齊桓公之子雍,使雍巫相之。留甲士千人,從申公叔侯屯戍,以為魯之聲援。成得臣奏凱還朝。令尹子文時已年老,請讓政於得臣。楚王曰:「寡人怨宋,甚於怨齊。子玉已為我報齊矣,卿為我伐宋,以報鄭之仇。俟凱旋之日,聽卿自便何如?」子文曰:「臣才萬不及子玉,願以自代,必不誤君王之事。」楚王曰:「宋方事晉,楚若伐宋,晉必救之。兩當晉宋,非卿不可,卿強為寡人一行。」乃命子文治兵於暌,簡閱車馬,申明軍法。
초성왕이 듣고 대단히 기뻐했다. 즉시 성득신을 대장으로 삼고, 신공(申公) 숙후(叔侯)를 부장으로 삼아 군사를 이끌고 제나라를 쳤다. 초나라 군사들은 제나라의 양곡(陽谷) 땅을 점령하여, 제환공의 아들 공자 옹(公子雍)을 양곡에 봉하고, 옹무(雍巫)를 상(相 ; 보좌관)으로 삼았다. 무장병 천 명을 남겨서 신공 숙후를 따라 주둔해 지키게 하고 노나라의 지원을 받게 했다. 성득신은 개선하여 조정에 아뢰었다. 그때 영윤 자문(子文)이 나이가 많아 정사를 성득신에게 넘기고 싶다고 초성왕에게 청했다. 초성왕이 말하기를, “과인이 송나라에 원한이 있다고는 하나, 제나라에 대한 원한이 더 깊었습니다. 자옥(子玉 ; 성득신)이 제나라를 정벌하여 나의 원한을 갚아 주었으니, 경은 나를 위하여 송나라를 쳐서 정나라의 원수도 함께 갚아 주기 바랍니다. 경이 개선하여 돌아온 후에 경의 뜻을 들어드리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자문이 말하기를, “신의 재주는 자옥에 훨씬 못 미칩니다. 원컨대 그 임무를 자옥에게 대신하게 하면 틀림없이 대왕의 일을 그르치지 않을 것입니다.” 했다. 초성왕이 말하기를, “송나라가 바야흐로 진(晉)나라를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초나라가 만약 송나라를 치면 진나라가 반드시 구할 것입니다. 진나라와 송 나라를 동시에 감당하려면 경이 아니면 불가합니다. 경은 사양하지 말고 나를 위해 출정해 주기 바랍니다.” 했다. 이에 자문에게 명하여 규(暌) 땅에서 군사를 훈련시켜 전차와 말을 낱낱이 검열하고 군법을 밝히게 했다.
子文滿意欲顯子玉之能,是日草草完事,終朝畢事,不戮一人。楚王曰:「卿閱武而不戮一人,何以立威?」子文奏曰:「臣之才力,比於強駑之末矣。必欲立威,非子玉不可。」楚王更使得臣治兵於蒍。得臣簡閱精細,用法嚴肅,有犯不赦,竟一日之長,方纔事畢。總計鞭七人之背,貫三人之耳,真個鐘鼓添聲,旌旗改色。楚王喜曰:「子玉果將才也!」子文復請致政,楚王許之。乃以得臣為令尹,掌中軍元帥事。群臣皆造子文之宅,賀其舉薦得人,致酒相款。時文武畢集,惟大夫蒍呂臣有微恙不至。酒至半酣,閽人報:「門外有一小兒求見。」子文命召人。那小兒舉手鞠躬,竟造末席而坐,飲酒啖炙,傍若無人。
자문이 마음속으로 자옥의 능력을 돋보이게 하려고, 이날 아침에 대충 일을 마치고 한 사람도 처벌하지 않았다. 초성왕이 말하기를, “경은 군사를 사열하면서 한 사람도 처벌하지 않으니 어떻게 위엄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 했다. 자문이 아뢰기를, “신의 재주와 기력은 강한 쇠뇌가 오래된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반드시 위엄을 세우려고 하신다면 자옥이 아니면 안 됩니다.” 했다. 초성왕이 다시 성득신을 불러 위(蔿) 땅에서 훈련하게 했다. 성득신은 군사를 사열하는 데 매우 세밀하고 군법을 엄격하게 다루어서 군법을 어기면 용서하지 않았다. 하루종일이 걸려서야 겨우 일이 겨우 끝났다. 모두 일곱 사람의 등을 채찍으로 쳤고, 세 사람의 귀를 화살로 꿰었다. 종과 북은 소리를 더했고 깃발은 더욱 힘차게 펄럭였다. 초성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과연 자옥은 장군의 재목이로다!” 했다. 자문이 다시 정사를 자옥에게 넘겨야 한다고 청하자 초성왕이 허락했다. 이에 성득신을 영윤으로 삼고 군 원수의 일을 장악하게 했다. 군신들 모두가 자문의 문에 찾아와 올바른 사람을 천거한 것을 치하하고 술을 들면서 즐거워했다. 그때 문무백관들이 모두 모였지만 오직 대부 위여신(蔿呂臣)만은 몸이 아파서 오지 않았다. 술이 반쯤 취했을 때 문지기가 알리기를, “문밖에 어린아이가 뵙기를 청합니다.” 했다. 자문이 그 사람을 부르라고 명했다. 그 어린아이가 두 손을 들고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마침내 말석에 가서 앉았다. 술을 마시고 구운 고기를 먹으며 마치 옆에 사람이 없는 듯하였다.
有人認識此兒,乃蒍呂臣之子,名日蒍賈,年方一十三歲。子文異之,問曰:「某為國得一大將,國老無不賀,爾小子獨不賀,何也?」蒍賈曰:「諸公以為可賀,愚以為可弔耳!」子文怒曰:「汝謂可弔,有何說?」賈曰:「愚觀子玉為人,勇於任事,而昧於決機。能進而不能退,可使佐鬥,不可專任也。若以軍政委之,必至僨事。諺云『太剛則折』,子玉之謂矣!舉一人而敗國,又何賀焉?如其不敗,賀未晚也。」左右曰:「此小兒狂言,不須聽之。」蒍賈大笑而出,眾公卿俱散。明日,楚王拜得臣為大將,親統大兵,糾合陳、蔡、鄭、許四路諸侯,一同伐宋,圍其緡邑。宋成公使司馬公孫固如晉告急。
어떤 사람이 그 아이를 알아보았는데 곧 위여신의 아들로 이름이 위가(蔿賈)였고, 나이는 당시 13세였다. 자문이 특이하다고 여겨 묻기를, “내가 나라를 위해 대장 한 사람을 추천했는데, 원로대신들이 모두 치하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어린애인 너만 치하하지 않으니 어찌 된 것인가?” 하니, 위가가 말하기를, “여러 대신께서는 치하하셨지만 어리석은 저는 조상(弔喪)을 올리겠습니다.” 했다. 자문이 노하여 말하기를, “네가 조상을 한다니 그것이 무슨 소리냐?” 하니, 위가가 말하기를, “어리석은 소인이 보건대, 자옥의 위인이 일을 맡아 용기를 앞세우고 일을 결단하는 데에 어둡습니다. 능히 앞으로 나갈 수는 있지만, 뒤로 물러설 줄 모릅니다. 따라서 그는 싸움을 돕는 일에는 쓸 수 있지만, 전권을 맡기면 안 됩니다. 만약 그에게 군정을 위임한다면 반드시 일을 그르칠 것입니다. 속담에 ‘너무 강하면 부러진다.’라는 말은 자옥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한 사람을 천거하여 나라를 그르치게 하니 어찌 치하하겠습니까? 만약 그가 실패하지 않는다면 그때 치하해도 늦지 않습니다.” 했다. 좌우의 군신들이 말하기를, “이 어린아이의 미친 소리를 귀담아들으실 건 없습니다.” 했다. 위가가 크게 웃으며 나갔다. 여러 대신도 모두 흩어졌다. 다음날, 초성왕은 성득신을 대장으로 삼고,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진(陳)나라, 채(蔡)나라, 정(鄭)나라, 허(許)나라 등 네 나라 제후들의 군사들을 규합하여 함께 송나라를 정벌하려고 민읍(緡邑)을 포위했다. 송성공(宋成公)은 사마 공손고(公孫固)를 진(晉)나라에 보내어 위급함을 고했다.
晉文公集群臣問計。先軫進曰:「方今惟楚強橫,而於君有私恩。今楚戍穀伐宋,生事中原,此天授我以救災恤患之名也。取威定伯,在此舉矣!」文公曰:「寡人欲解齊宋之患,如何而可?」狐偃進曰:「楚始得曹而新婚於衛,是二國又皆主公之仇也。若興師以伐曹衛,楚必移兵來救,則齊宋寬矣。」文公曰:「善。」乃以其謀告公孫固,使回報宋公,令其堅守。公孫固領命去了。文公以兵少為慮。趙衰進曰:「古者大國三軍,次國二軍,小國一軍。我曲沃武公,始以一軍受命。獻公始作二軍,以滅霍、魏、虞、虢諸國,拓地千里。晉在今日,不得為次國,宜作三軍。」
진문공이 군신들을 모아 계책을 물었다. 선진(先軫)이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오늘날 초나라만이 강하게 횡행하는데, 주군께서는 초나라에 사사로운 은혜가 있다고 하십니다. 지금 초나라는 제나라를 쳐서 양곡을 점령하여 지키고 송나라를 정벌하면서 중원에 말썽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늘이 우리에게 중원의 재난을 구하고 환난을 제거하라는 뜻입니다. 위엄을 세우고 패업을 이루는 것은 이번 거사에 달려 있습니다.” 했다. 진문공이 말하기를, “과인이 제나라와 송나라의 근심을 해결하려면 어찌 해야 되겠습니까?” 하니, 호언이 나와 말하기를, “초나라는 처음에 조(曹)나라와 친교를 맺고, 새로이 위나라와 혼인을 했습니다. 이 두 나라는 또한 모두 주공의 원수입니다. 만약 군사를 일으켜 조(曹)나라와 위(衛)나라를 토벌한다면 초나라는 반드시 군사를 움직여 구원할 것이고, 그러면 제나라와 송나라는 풀려날 것입니다.” 했다. 진문공이 말하기를, “좋은 계책입니다.” 하고, 이에 그 계책을 공손고에게 일러주며, 돌아가서 송성공에게 알리고 굳게 수비하라고 했다. 공손고가 명을 받고 돌아갔다. 진문공이 군사의 수가 적음을 걱정하자, 조쇠가 나와 말하기를, “옛날에 큰 나라에는 3군이 있었고, 그다음 나라에는 2군을 두었으며, 그리고 작은 나라에는 1군을 두었습니다. 우리의 선조인 곡옥(曲沃)의 무공(武公)께서는 처음으로 1군을 둘 수 있다는 명을 받았습니다. 헌공께서는 처음 2군을 두어 곽(霍)나라, 위(魏)나라, 우(虞)나라, 괵(虢)나라 등을 멸하고 천 리를 개척했습니다. 지금의 우리나라는 지금의 2군으로 는 될 수 없고, 마땅히 3군을 두어야 합니다.” 했다.
文公曰:「三軍既作,遂可用否?」趙衰曰:「未也。民未知禮,雖聚而易散。君盍大蒐以示之禮,使民知尊卑長幼之序,動親上死長之心,然後可用。」文公曰:「作三軍,必須立元帥,誰堪其任?」趙衰對曰:「夫為將者,有勇不如有智,有智不如有學。君如求智勇之將,不患無人。若求有學者,臣所見惟郤縠一人耳。縠年五十餘矣,好學不倦,說《禮》《樂》而敦《詩》《書》。夫《禮》、《樂》、《詩》、《書》,先王之法,德義之府也。民生以德義為本,兵事以民為本。惟有德義者,方能恤民。能恤民者,方能用兵。」
진문공이 말하기를, “3군을 두면 즉시 싸움에 투입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조쇠가 말하기를, “그렇게는 안 됩니다. 백성들은 아직 예법을 모릅니다. 비록 모였다고 해도 쉽게 흩어집니다. 주군께서는 어찌 크게 사냥대회를 열고 군사들에게 군례에 대한 시범을 보이지 않으십니까? 백성으로 하여금 신분의 높고 낮음과 나이의 많고 적음에 순서가 있다는 점을 알게 하여 자신의 상사를 위해서는 몸을 바치며 죽음도 불사한다는 정신으로 무장시킨 후에나 병사로 쓸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진문공이 말하기를, “3군을 두면 반드시 원수를 세워야 하는데 누가 그 임무를 감당하겠습니까?” 하니, 조쇠가 대답하기를, “무릇 대장이 되는 자는 용기보다 지혜가 있어야 하며 지혜보다는 배운 바가 많아야 합니다. 주군께서 만약 지혜와 용기 있는 장수를 구하신다면 사람이 없음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나, 만약 학문이 있는 사람을 구하신다면 신의 소견으로는 오로지 극곡(郤縠) 한 사람뿐인가 합니다. 극곡은 나이 50여 세지만 학문을 좋아하여 게으르지 않고, 예(禮)와 악(樂)을 말하며, 시(詩)와 서(書)에 조예가 깊습니다. 무릇 예악(禮樂)과 시서(詩書)는 선왕의 법이며, 덕(德)과 의(義)의 바탕입니다. 백성들의 생활은 덕과 의를 근본으로 삼고, 군사의 일은 백성들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오로지 덕과 의를 갖춘 자만이 바야흐로 백성을 도울 수 있고, 능히 백성을 도울 수 있는 자라야 능히 군사를 부릴 수 있습니다.” 했다.
文公曰:「善。」乃召郤縠為元帥,縠辭不受。文公曰:「寡人知卿,卿不可辭!」強之再三,乃就職。擇日,大蒐於被廬,作中上下三軍。郤縠將中軍,郤溱佐之,祁瞞掌大將旗鼓。使狐偃將上軍,偃辭曰:「臣兄在前,弟不可以先兄。」乃命狐毛將上軍,狐偃佐之。使趙衰將下軍,衰辭曰:「臣貞慎不如欒枝,有謀不如先軫,多聞不如胥臣。」乃命欒枝將下軍,先軫佐之。荀林父御戎,魏犨為車右,趙衰為大司馬。郤縠登壇發令。三通鼓罷,操演陣法,少者在前,長者在後,坐作進退,皆有成規。有不能者,教之;三教而不遵,以違令論,然後用刑。一連操演三日,奇正變化,指揮如意。
진문공이 말하기를, “잘 알았소!” 하고, 이에 극곡을 불러 원수로 삼고자 하니, 극곡이 사양했다. 진문공이 말하기를, “과인이 경을 아니, 경은 사양하지 마시오.” 하고, 재삼 강권하자 이에 원수의 직을 받아들였다. 길일을 택하여 피려(被廬) 땅에서 큰 사냥대회를 열고, 중군, 상군, 하군의 삼군을 만들었다. 극곡이 중군을 거느리고, 극진(郤溱)이 보좌했으며, 기만(祁瞞)이 대장기와 북을 맡았다. 호언이 상군을 거느리게 하니 호언이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신의 형님이 앞에 있는데, 동생이 형을 앞설 수는 없습니다.” 했다. 이에 진문공이 명하여 호모(狐毛)가 상군을 거느리게 하고 호언이 보좌하게 했다. 조쇠가 하군을 거느리게 하니, 조쇠가 사양해 말하기를, “신은 올곧고 신중하기로는 난지(欒枝)만 못하고 지략은 선진(先軫)만 못하며 많이 알기로는 서신(胥臣)만 못합니다.” 하니, 이에 난지가 하군을 거느리게 하고 선진이 보좌하게 했다. 순림보(荀林父)를 어융(御戎 ; 군주의 전차를 모는 사람)으로 삼고 위주는 군주를 호위하는 차우(車右 ; 군주의 오른쪽에 타는 사람)로 삼았다. 조쇠는 군사의 일을 총감독하는 대사마로 임명했다. 극곡이 등단하여 군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그가 북을 세 번 울리자 진법을 펴는 훈련이 시작되었다. 나이가 적은 군사는 앞에 세우고 나이가 많은 군사는 뒤에 세웠다. 군사들은 앉았다 일어서고 앞으로 나갔다고 뒤로 물러나는데 모두 법규에 맞았다. 따라 하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가르쳤다. 세 번을 가르쳐도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군령 위반을 따진 후에 형벌을 가했다. 계속해서 3일 동안을 조련한 결과 기습과 정공(正攻)의 변화를 마음먹은 대로 지휘할 수 있게 되었다.
眾將見卻縠寬嚴得體,無不悅服。方欲鳴金收軍,忽將臺之下,起一陣旋風,竟將大帥旗杆,折為兩段,眾皆變色。卻縠曰:「帥旗倒折,主將當應之。吾不能久與諸子同事,然主公必成大功。」眾問其故,縠但笑而不答。時周襄王十九年,冬十二月之事也。明年春,晉文公議分兵以伐曹衛,謀於郤縠。縠對曰:「臣已與先軫商議停當矣。今日非與曹衛為難也,分兵可以當曹衛,而不可以當楚。主公宜以伐曹為名,假道於衛,衛曹方睦,必然不允。我乃從南河濟師,出其不意,直搗衛境,所謂『迅雷不及掩耳』,勝有八九。既勝衛,然後乘勢而臨曹。曹伯素失民心,又惕於敗衛之威,其破曹必矣!」
여러 장수가 극곡이 엄함과 관대함을 합당하게 행하는 것을 보고 기쁘게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바야흐로 징을 울려 군사를 거두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장대 아래에서 일진광풍이 일어나 깃대가 두 동강으로 부려지니, 여러 장수가 얼굴색이 변했다. 극곡이 말하기를, “원수기가 부러져 넘어졌으니 주장이 마땅히 당할 일이다. 내가 여러분들과 더불어 오래 일하지 못하겠구나. 그러나 주공은 반드시 대공을 이룰 것입니다.” 했다. 여러 사람이 그 연고를 물었으나 극곡은 미소만 띤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가 주양왕 19년(기원전 633년) 겨울 12월의 일이었다. 다음 해 봄에 진문공은 군사를 나누어 조(曹)나라와 위(衛)나라를 정벌하기 위하여 극곡에게 그 계책을 의논하니, 극곡이 대답하기를, “신은 이미 선진과 상의하여 대책을 세워 놓고 있었습니다. 지금 조나라와 위나라를 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으나, 군사를 나누어 조나라와 위나라를 상대하되, 초나라와는 대적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주공께서는 마땅히 조나라를 정벌한다며 위나라에 길을 빌려 달라고 하십시오. 위나라와 조나라가 바야흐로 화목하니 틀림없이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에 황하 남쪽 강가 남하(南河)를 건너 그들이 뜻하지 않은 곳으로 나아가서 바로 위나라 경계를 무찌르십시오. 이른바 ‘빠른 번개에 귀 막을 틈도 없다’는 것이니, 십중팔구 승리할 것입니다. 이미 위나라를 이긴 후에 여세를 타고 조나라에 닥치면, 평소에 민심을 잃은 조(曹)나라 군주는 위나라를 패배시킨 우리 군의 위세에 겁을 먹을 것이니 그러면 반드시 조나라를 격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文公喜曰:「子真有學之將也!」即使人如衛假道伐曹。衛大夫元咺請於成公曰:「始晉君出亡過我,先君未嘗加禮。今來假道,君必聽之。不然,彼將先衛而後曹矣。」成公曰:「寡人與曹共服於楚,若假以伐曹之路,恐未結晉歡,而先取楚怒也。怒晉,猶恃有楚,並怒楚,將何恃乎?」遂不許。晉使回報文公。文公曰:「不出元帥所料也!」乃命迂道南行。渡了黃河,行至五鹿之野,文公曰:「嘻!此介子推割股處也!」不覺淒然淚下,諸將皆感嘆助悲。魏犨曰:「吾等當拔城取邑,為君雪往年之恥,何用嘆息?」
진문공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극곡 원수는 배움이 많은 장수입니다!” 하고 즉시 사자를 위나라에 보내 조나라를 칠 테니 길을 빌려 달라고 했다. 위나라 대부 원훤(元咺)이 위성공(衛成公)에게 말하기를, “지난날 진문공이 망명했을 때 우리나라를 지나갔는데 선군께서 예를 갖추어 접대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길을 빌려 달라고 하니 주군께서는 반드시 그 요청을 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들이 장차 먼저 위나라를 치고 다음에 조나라를 칠 것입니다.” 했다. 위성공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와 조나라는 함께 초나라를 섬기고 있는데 만약 조나라를 치는 길을 빌려주면 진(晉)나라와 결맹도 하기 전에 먼저 초나라의 분노부터 살 것이다. 진(晉)나라의 분노를 사면 오히려 초나라를 의지할 수 있지만, 초나라의 분노를 산다면 장차 누구를 믿어야 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허락하지 않았다. 진(晉)나라 사자가 돌아와 진문공에게 보고하자 진문공이 말하기를, “원수의 생각에서 벗어남이 없구나!” 했다. 이에 군사들을 남쪽으로 우회시켜 황하를 건너 오록(五鹿)의 들판에 도착했다. 진문공이 말하기를, “아! 이곳이 옛날 개자추가 자기 허벅지 살로 국을 끓여 나에게 바친 곳이구나!” 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처연히 눈물을 흘렸다. 여러 장수가 모두 탄식하며 슬퍼했다. 위주가 말하기를, “우리는 위나라의 성을 함락시키고 고을을 빼앗아 주군을 위해 옛날의 치욕을 씻으려고 하는데, 탄식하여 어쩔 것입니까?” 했다.
先軫曰:「武子之言是也。臣願率本部之兵,獨取五鹿。」文公壯其言,許之。魏犨曰:「吾當助子一臂。」二將升車前進。先軫令軍士多帶旗幟,凡所過山林高阜之處,便教懸插,務要透出林表。魏犨曰:「吾聞『兵行詭道』,今遍張旗表,反使敵人知備,不知何意?」先軫曰:「衛素臣服於齊,近改事荊蠻,國人不順,每虞中國之來討。吾主欲繼齊圖伯,不可示弱,當以先聲奪之。」卻說,五鹿百姓,不意晉兵猝然來到,登城瞭望,但見旌旗布滿山林,正不知兵有多少。不論城內城外居民,爭先逃竄,守臣禁止不住。先軫兵到,無人守禦,一鼓拔之。
선진이 말하기를, “위무자(위주)의 말이 맞습니다. 신은 원컨대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오록성을 취하고자 합니다.” 하니, 진문공이 그 말을 장하게 여겨 허락했다. 위주가 말하기를, “나도 마땅히 그대의 한팔이 되어 돕겠소.” 하고, 두 장수가 전차에 올라 전진했다. 선진이 군사들에게 영을 내려 많은 깃발을 준비하게 하여, 지나는 산림과 높은 언덕마다 기를 꽂게 해서 깃발들이 숲 밖으로 비쳐 나오게 하였다. 위주가 말하기를, “내가 듣기에 ‘군사들을 움직일 때는 길을 속인다.’고 했는데 오늘은 가는 곳마다 깃발을 꽂아 드러내어서 오히려 적군들에게 알려 대비하게 하니 그 뜻이 무엇입니까?” 하니, 선진이 말하기를, “위나라가 본디 제나라에 신하처럼 복종하다가 요즈음 바꾸어 초나라를 섬기고 있습니다. 위나라의 사람들이 따르지 않자 매양 중원의 열국들이 와서 토벌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군께서 제환공을 이어 패업을 도모하시는데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되기 때문에 마땅히 먼저 소리를 내어 그것을 빼앗아야 합니다.” 했다. 한편, 오록성의 백성들은 뜻밖에 진(晉)나라 군사들이 갑자기 몰려오자 성 위에 올라가 바라보고, 다만 주위의 온산에 가득한 깃발을 보고 군사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성안이나 성밖의 백성들이 모두 앞을 다투어 도망치고, 오록성을 지키는 관리도 그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선진이 이끄는 군사들이 오록성에 도착하니 지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북을 한번 울리고 성을 점령했다.
遣人報捷於文公。文公喜形於色,謂狐偃曰:「舅云得土, 今日驗矣!」乃留老將郤步揚屯守五鹿,大軍移營,進屯斂盂。郤縠忽然得病,文公親往視之。郤縠曰:「臣蒙主公不世之遇,本欲塗肝裂腦,以報知己。奈天命有限,當應折旗之兆,死在旦夕!尚有一言奉啟。」文公曰:「卿有何言?寡人無不聽教。」縠曰:「君之伐曹衛,本謀固以致楚也。致楚必先計戰,計戰必先合齊秦。秦遠而齊近,君速遣一使結好齊侯,願與結盟。齊方惡楚,亦思結晉。倘得齊侯降臨,則衛曹必懼而請成,因而收秦。此制楚之全策也。」文公曰:「善。」遂遣使通好於齊,敘述桓公先世之好,願與結盟,同攘荊蠻。
선진이 사람을 보내 진문공에게 오록성을 점령했다는 승첩을 보고했다. 진문공이 얼굴에 기쁨을 드러내며 호언에게 말하기를, “외숙께서 땅을 얻을 것이라 하더니 오늘 그 말이 맞았습니다.” 하고, 이에 노장 극보양(郤步揚)을 오록성에 남겨 지키게 한 후에, 대군을 이동하여 염우(斂盂)에 진을 쳤다. 갑자기 극곡이 병이 나니, 진문공이 친히 가서 보았다. 극곡이 말하기를, “신은 세상에 흔하지 않은 은혜를 주공께 입었습니다. 본래 목숨을 바쳐 저를 알아준 은혜에 보답하려고 했으나 천명에 한이 있어서, 깃발이 꺾어진 조짐에 응하는 것 같습니다. 죽음이 아침저녁에 있으니 드릴 말씀이 한마디 있습니다.” 했다. 진문공이 말하기를, “경이 무슨 말을 하여도, 과인은 그 가르침을 듣겠소.” 하니, 극곡이 말하기를, “주군께서 조나라와 위나라를 정벌하시는 것은 본디 초나라를 제압하기 위한 계책임을 잊지 마십시오. 초나라를 제압하려면 반드시 먼저 전력을 계산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제(齊)나라와 진(秦)나라와 힘을 합쳐야 합니다. 그러나 진(秦)나라는 멀고 제나라는 가깝습니다. 주군께서는 속히 사자를 제나라에 보내어 동맹을 맺으십시오. 제나라는 지금 초나라를 미워하여 우리 진(晉)나라와 동맹을 생각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제나라와 동맹하면 위나라와 조나라는 틀림없이 두려워하여 강화를 청할 것입니다. 그렇게 한 후에 진(秦)나라와 수호를 맺어야 초나라를 제압하는 만전지책이 될 것입니다.” 했다. 진문공이 말하기를, “그 말이 옳소!” 하고, 마침내 사신을 제나라에 보내 수교하자고 하여, 제환공이 선대에 우호했던 것을 서술하며 서로 동맹을 맺어 초나라에 함께 대항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時齊孝公已薨,國人推立其弟潘,是為昭公。潘,葛嬴所生也,新嗣大位。以取穀之故,正欲結晉以抗楚。聞知晉侯屯軍斂盂,即日命駕至衛地相會。衛成公見五鹿已失,忙使寧速之子寧俞,前來謝罪請成。文公曰:「衛不容假道,今懼而求成,非其本心。寡人旦夕當踏平楚丘矣。」寧俞還報衛侯。時楚丘城中,訛傳晉兵將到,一夕五驚。俞謂衛成公曰:「晉怒方盛,國人震恐,君不如暫出城避之。晉知主公已出,必不來攻楚丘。然後再乞晉好,保全社稷可也。」成公嘆曰:「先君不幸失禮於亡公子,寡人又一時不明,不允假道,以至如此。累及國人,寡人亦無面目居於國中!」
그때 제나라에서는 제효공은 이미 죽고, 제나라 사람들이 제효공의 동생 반(潘)을 군주로 옹립하니 그가 제소공(齊昭公)이었다. 반(潘)은 갈영(葛嬴)의 소생인데 군주 자리를 이제 막 이어받아 양곡(陽穀) 땅을 찾아야 했기 때문에 진(晉)나라와 동맹을 맺어 초나라에 대항하려고 했다. 진문공이 염우에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제소공은 당일로 어가를 타고 위나라 땅에 이르러 서로 만났다. 위성공은 오록이 이미 함락된 것을 보고 황망히 영속(寧速)의 아들 영유(寧兪)를 진문공에게 사절로 보내어 전날의 잘못을 사죄하고 화의를 청했다. 진문공이 말하기를, “위나라가 우리에게 길을 빌려주지 않더니 이제 두려워서 화의를 청하니 본심이 아니다. 과인은 가까운 날에 위나라의 초구(楚丘)성을 짓밟아 버리겠다.” 했다. 영유가 돌아와 위성공에게 보고하니, 그때 위나라 도성인 초구성 안에 진(晉)나라 군사가 곧 이를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아 하루저녁에 다섯 번을 놀랬다. 영유가 위성공에게 말하기를, “진문공의 분노가 지금 극에 달해 나라 사람들이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주군께서 잠시 성을 나가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주공께서 이미 성 밖으로 탈출하셨다는 사실을 진문공이 알게 되면, 반드시 초구성을 공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다시 진나라에 통호를 사정하면 사직을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위성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선군께서 망명한 진문공에게 실례를 했고, 과인도 또한 잠시 밝지 못하여 길을 빌려주지 않아 일이 이렇게 되었다. 그 폐해가 나라 사람들에게 미치게 하였으니 과인 또한 나라 안에 머물 면목이 없구나!” 했다.
乃使大夫咺同其弟叔武攝國事,自己避居襄牛之地;一面使大夫孫炎,求救於楚。時乃春二月也。髯翁有詩云:「納姬贈馬怪紛紛,患難何須具主賓?誰知五鹿開疆者,便是當年求乞人!」是月,郤縠卒於軍。晉文公悼惜不已,使人護送其喪歸國。以先軫有取五鹿之功,升為元帥。用胥臣佐下軍,以補先軫之缺。(因趙衰前薦胥臣多聞,是以任之。)文公欲遂滅衛國,先軫諫曰:「本為楚困齊宋,來拯其危,今齊宋之患未解,而先覆人國,非伯者存亡恤小之義也。況衛雖無道,其君已出,廢置在我。不如移兵東伐曹。比及楚師救衛,則我已在曹矣。」文公然其言。
위성공은 이에 대부 원훤(元咺)과 동생 숙무(叔武)에게 나라의 정사를 섭정하게 하고, 자기는 양우(襄牛) 땅으로 피하여 머물렀다. 한편으로 대부 손염(孫炎)을 초나라에 보내 구원군을 요청했다. 그때가 봄 2월이었다. 염옹(髥翁)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여자를 바치고 말을 보내고 괴상한 짓을 다 하더니, 환난 중에 있던 손님을 어찌 그리 따졌는가? 누가 알았으리오. 오록 땅을 휩쓴 자가, 옛날에 구걸하던 사람이었을 줄이야!” 했다. 이달에 극곡이 군중에서 죽었다. 진문공이 매우 애석해 하며 사람을 시켜 그의 시신을 호송하여 본국으로 보냈다. 오록성을 취한 공을 들어 선진(先軫)을 올려 원수로 삼고, 서신(胥臣)을 하군 부장으로 삼아 선진이 비운 자리를 보완하게 하였다. (전에 조쇠가 서신은 아는 바가 많다고 천거했기 때문에 임명한 것이다.) 진문공은 마침내 위나라를 멸하려고 했다. 선진이 간하기를, “본디 초나라가 제나라와 송나라를 공격했기 때문에 그 위기를 구하기 위해 우리가 왔지만, 지금 제나라와 송나라의 근심은 풀리지 않았습니다. 먼저 다른 사람의 나라를 엎어버리면, 망한 나라를 보존해 주고 작은 나라를 가엽게 여기는 패자의 의리가 아닙니다. 더욱이 위나라가 비록 무도하기는 하나 그 군주가 이미 나라 밖으로 나갔으니 군주를 폐하고 세우는 것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군사를 동쪽으로 움직여서 조나라를 치는 게 낫습니다. 초나라 군사가 위나라를 구원하러 왔을 때는 우리는 이미 조나라에 있을 것입니다.” 했다. 진문공이 그 말을 옳다고 여겼다.
三月,晉師圍曹。曹共公集群臣問計。僖負羈進曰:「晉君此行,為報觀脅之怨也。其怒方深,不可較力。臣願奉使謝罪請平,以救一國百姓之難。」曹共公曰:「晉不納衛,肯獨納曹乎?」大夫于朗進曰:「臣聞晉侯出亡過曹,負羈私餽飲食,今又自請奉使,此乃賣國之計,不可聽之。主公先斬負羈,臣自有計退晉。」曹共公曰:「負羈謀國不忠,姑念世臣,免殺罷官。」負羈謝恩出朝去了。正是:「閉門不管窗前月,吩咐梅花自主張。」共公問于朗:「計將安出?」
그해 3월에 진(晉)나라 군사들은 조나라 도성을 포위했다. 조공공이 군신들을 모아 그 계책을 물으니, 희부기가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진나라 군주가 이번에 공격하는 것은 옛날 진문공이 망명할 때 그의 갈비뼈를 본다고 모욕을 준 원한 때문입니다. 그의 분노가 바야흐로 깊으니 대항할 수 없습니다. 신이 원컨대 사신이 되어 사죄하고 화평을 청하여 한 나라 백성의 환난을 구하십시오.” 하니, 조공공이 말하기를, “진나라 군주가 위나라도 용서하지 않았거늘 우리 조나라를 홀로 용서하겠는가?” 했다. 대부 우랑(于郞)이 나와서 말하기를, “신이 들으니 진문공이 옛날에 망명하여 우리나라를 지날 때 희부기는 사사로이 음식을 준비하여 바쳤다 합니다. 오늘 다시 사자로 가기를 자청하니 이것은 나라를 팔아먹고자 하는 계획입니다. 희부기의 말을 들어주시면 안 됩니다. 주공께서 먼저 희부기를 참하시면 신이 진나라 군사들을 물리칠 계책을 내놓겠습니다.” 했다. 조공공이 말하기를, “희부기는 나라에 불충을 꾀했다고는 하지만, 대대로 벼슬한 신하임을 고려하여 죽음을 면하고 관직을 박탈하겠다.” 했다. 희부기는 인사를 하고 조정을 나와 가버렸다. 이것은 마치 ‘문을 닫아 창 앞에 달이 떠 있는 줄도 모르고 매화만 곱다.’고 하는 격이었다. 조공공이 우랑에게 묻기를, “어떤 계책을 가지고 있는가?” 했다.
于朗曰:「晉侯恃勝,其氣必驕。臣請詐為密書,約以黃昏獻門。預使精兵挾弓弩,伏於城堧之內,哄得晉侯入城,將懸門放下,萬矢俱發,不愁不為齏粉。」曹共公從其計。晉侯得于朗降書,便欲進城。先軫曰:「曹力未虧,安知非詐?臣請試之。」乃擇軍中長鬚偉貌者,穿晉侯衣冠代行。寺人勃鞮自請為御。黃昏左側,城上豎起降旗一面,城門大開,假晉侯引著五百餘人,長驅而入。未及一半,但聞城堧之內,梆聲亂響,箭如飛蝗射來。急欲回車,門已下閘。可惜勃鞮及三百餘人,死做一堆!幸得晉侯不去,不然,「崑崗失火,玉石俱焚」了。
우랑이 말하기를, “진(晉)나라 군주는 이긴 것만 믿고, 그 마음이 틀림없이 교만해졌을 것입니다. 신이 거짓으로 밀서를 써서 황혼 무렵에 문을 열어 성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하겠습니다. 미리 정예병들을 활과 쇠뇌로 무장시켜 성안의 빈터에 매복시키고, 진나라 군주가 성안으로 떠들썩하게 들어오는 것을 신호로 삼아 성문을 내려 가두어놓고 수많은 화살을 일제히 쏘면 진나라 군사는 가루가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조공공이 그 계책을 따랐다. 진문공이 우랑의 항복 서신을 받고, 성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선진이 말하기를, “조나라는 힘이 꺾이지 않았는데 항복을 하겠다니, 거짓이 아닌 줄 어찌 알겠습니까? 신이 청컨대 시험해 보겠습니다.” 했다. 이에 군중에서 수염이 길고 몸이 우람한 군졸을 한 사람 뽑아서 군주의 의관을 입혀 그 역할을 대신하게 했다. 시인 발제(勃鞮)가 그 수레를 몰겠다고 자청했다. 황혼에 성의 왼쪽에서 항복을 표시하는 깃발이 오르더니 성문이 크게 열렸다. 가짜 문공이 5백여 명의 군졸을 이끌고 성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진나라 군사들이 반도 들어가기 전에 성안의 빈터에서 딱딱이 소리가 어지럽게 들리더니 화살이 메뚜기 떼처럼 날아왔다. 급히 수레를 돌렸으나 성문은 이미 내려져 닫혔다. 애석하게도 발제와 300여명의 군졸들이 죽어, 한 무더기가 되었다. 진문공은 들어가지 않았으니 다행이지, 그러지 않았으면 ‘곤강(崑崗)에 불이 나니 옥과 돌이 모두 불에 타는구나!’라는 말과 같이 될 뻔했다.
晉文公先年過曹,曹人多有認得的,其夜倉卒不辨真偽。于朗只道晉侯已死,在曹共公面前,好不誇嘴!及至天明辨驗,方知是假的,早減了一半興。其未曾入城者,逃命來見晉侯。晉侯怒上加怒,攻城愈急。于朗又獻計曰:「可將射死晉兵,暴屍於城上,彼軍見之,必然慘沮,攻不盡力。再延數日,楚救必至,此乃搖動軍心之計也。」曹共公從之。晉軍見城頭用枰竿懸屍,纍纍相望,口中怨嘆不絕。文公謂先軫曰:「軍心恐變,如之奈何?」先軫對曰:「曹國墳墓,俱在西門之外。請分軍一半,列營於墓地,若將發掘者,城中必懼,懼必亂,而後乃可乘也。」文公曰:「善。」
진문공이 옛날에 조나라를 지나간 적이 있었기 때문에 조나라 사람 중에는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었지만, 그날 밤에는 너무 창졸간이라 진위를 판별하지 못했다. 우랑은 오직 진나라 군주가 이미 죽은 줄로 알고 조공공 앞에서 허풍을 떨면서 우쭐거렸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 날이 밝아 시체들을 확인하고 비로소 죽은 진나라 군주가 가짜라는 것을 알고, 이겼던 흥이 반으로 줄었다. 그 전날 성문이 닫히는 바람에 미처 들어가지 못하고 도망쳐 온 군사가 진문공을 뵈니, 진문공이 더욱 노하여 성에 대한 공격이 더욱 거세어졌다. 우랑이 다시 계책을 내어 말하기를, “화살에 맞아 죽은 진나라 군사의 시체를 성 위에 드러내 놓아서 적군에게 보이면 그들은 틀림없이 간담이 서늘해져 공격에 힘을 다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며칠만 더 버틴다면 초나라의 구원병이 반드시 도착할 것이니, 이것은 바로 적군의 군심을 동요시키는 계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했다. 조공공이 그 계책에 따랐자. 진나라 군사가 성 위에 시체를 말뚝에 묶어 매달아 놓자 당진의 군사들은 서로 쳐다보며 입으로 원망하며 탄식하는 소리를 끊이지 않았다. 문공이 선진에게 말하기를, “군심이 두려움에 동요하고 있으니 이를 어찌해야 하겠소?” 하니, 선진이 대답하기를, “조나라의 분묘가 모두 서문 밖에 있습니다. 군사들을 반으로 나누어 묘지에 진영을 치게 하고 그 분묘들을 파내게 한다면, 성안의 백성들이 반드시 두려워할 것이고, 두려워하면 어지러워질 것입니다. 그 다음에 기회를 보아 공격할 수 있습니다.” 했다. 진문공이 말하기를, “좋소.” 했다.
乃令軍中揚言:「將發曹人之墓。」使狐毛狐偃率所部之眾,移屯墓地,備下鍬鋤,限定來日午時,各以墓中髑髏獻功。城內聞知此信,心膽俱裂。曹共公使人於城上大叫:「休要發墓,今番真正願降!」先軫亦使人應曰:「汝誘殺我軍,復磔屍城上,眾心不忍,故將發墓,以報此恨!汝能殯殮死者,以棺送還吾軍,吾當歛兵而退矣。」曹人覆曰:「既如此,請寬限三日!」先軫應曰:「三日內不送屍棺,難怪我辱汝祖宗也!」曹共公果然收取城上屍骸,計點數目,各備棺木,三日之內,盛歛得停停當當,裝載乘車之上。
선진이 즉시 군중에 영을 내려, “조나라 사람들의 무덤을 팔 것이다.” 라고 떠들어 소문이 나게 하고, 호모와 호언 형제에게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묘지에 진영을 세우게 한 후에 삽과 괭이를 준비시켜 다음 날 정오까지 시간을 정하여 각각 묘 속의 유골을 파내어 바치게 했다. 성안의 사람들이 이 소식을 전해 듣고 가슴이 찢어졌다. 조공공이 사람을 시켜 성 위에서 크게 외치기를, “분묘를 파헤치는 행위를 멈추시오. 이번에는 진정으로 항복하겠소!” 했다. 선진도 또한 사람을 시켜 응대하기를, “너희들은 우리 군사들을 유인하여 죽이고 또 시체를 성 위에 늘어놓아 욕보였다. 그래서 우리 군사들도 참을 수 없어 무덤을 파헤쳐 그 한을 보복하려는 것이다. 너희들이 죽은 군사들의 시신을 거두어 염하고 관에 넣어 우리 군에 보내면 우리도 군사를 거두어 무덤을 파헤치는 일을 중지하겠다.” 하니, 조나라 사람이 다시 외치기를, “그 일을 다 하려면 3일간 말미를 주시오.” 했다. 선진이 응대하게 하기를, “3일 안에 시신을 넣은 관을 보내지 않으면 우리가 너희들 조상들을 욕보이더라도 탓하지 말라!” 했다. 조공공이 과연 성 위에 늘어져 있던 시체를 모두 거두어 그 숫자를 헤아린 후에 각각 관을 마련하여 3일 안에 합당하게 염을 해서 관에 넣어 모두 수레에 실었다.
先軫定下計策,預令狐毛、狐偃、欒枝、胥臣整頓兵車,分作四路埋伏。只等曹人開門出棺,四門一齊攻打進去。到第四日,先軫使人於城下大叫:「今日還我屍棺否?」曹人城上應曰:「請解圍退兵五里,即當交納。」先軫稟知文公,傳令退兵,果退五里之遠。城門開處,棺車分四門推出。纔出得三分之一,忽聞砲聲大舉,四路伏兵一齊發作,城門被喪車填塞,急切不能關閉,晉兵乘亂攻入。曹共公方在城上彈壓,魏犨在城外看見,從車中一躍登城,劈胸揪住,縛做一束。于朗越城欲遁,被填頡獲住斬之。晉文公率眾將登城樓受捷。
선진은 계책을 정하여 미리 호모와 호언, 난지와 서신 등에게 전차를 정돈하게 하여 군사들을 네 갈래로 나누어 매복하게 하고, 조나라 군사들이 성문을 열고 관을 낼 때 네 문에서 일제히 공격해서 성안으로 진격해 들어가도록 했다. 4일째가 되자 선진이 사람을 시켜 성 아래에서 외치기를, “오늘 우리 군사들의 시신을 넣은 관을 보내지 않는가?” 하니, 조나라 사람이 성 위에서 응대하기를, “포위망을 풀고 뒤로 5리를 물러나면 즉시 시신을 보내겠다.” 했다. 선진이 진문공에게 고하고 군사들을 뒤로 물러나도록 명했다. 과연 진나라 군사들이 5리를 뒤로 물러나니, 성문이 열리며 관을 실은 수레들이 네 성문 밖으로 나왔다. 대략 수레의 삼 분의 일이 밖으로 나왔을 때 갑자기 포성이 크게 울리더니 네 갈래 복병이 일제히 일어났다. 성문은 관을 실은 수레로 메워져서 급히 닫을 수가 없었고, 진나라 군사들이 혼란을 틈타 공격해 들어갔다. 조공공은 성 위에서 조나라 군사를 지휘하여 진나라 군사들을 막았다. 위주가 성 밖에서 보고 수레 안에서 몸을 솟구쳐 성 위로 올라가더니 조공공의 가슴을 붙잡아 넘어뜨리고 밧줄로 묶었다. 우랑은 성을 넘어 도망치려다가 전힐에게 붙잡혀 목이 잘렸다. 진문공이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성루에 올라 승리를 보고받았다.
魏犨獻曹伯襄,顛頡獻于朗首級,眾將各有擒獲。晉文公命取仕藉觀之,乘軒者三百人,各有姓名,按藉拘拿,無一脫者。籍中不見僖負羈名字,有人說:「負羈為勸曹君行成,已除籍為民矣。」文公乃面數曹伯之罪曰:「汝國只有一賢臣汝不能用,郤任用一班宵小,如小兒嬉戲,不亡何待」喝教:「幽於大寨,俟勝楚之後,待聽處分。」其乘軒三百人,盡行誅戮,抄沒其家,以賞勞軍士。僖負羈有盤飱之惠,家住北門,環北門一帶,傳令:「不許驚動,如有犯僖氏一草一木者斬首!」晉侯分調諸將,一半守城,一半隨駕,出屯大寨。胡曾先生詠史詩云:「曹伯慢賢遭縶虜,負羈行惠免誅夷。眼前不肯行方便,到後方知是與非。」
위주는 포승줄에 묶인 조공공을 바치고, 전힐은 우랑의 수급을 바쳤으며, 여러 장수도 각각 잡은 포로들이 있었다. 진문공이 명하여 조나라 벼슬아치의 명부를 가져오게 하여 살펴보니, 초헌(軺軒)을 탈 수 있는 대부가 300명이었다. 진문공은 명부에 적혀있던 자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잡아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 명부에 희부기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희부기는 조공공에게 화의를 맺도록 권유했다가 이미 관리 명부에서 제적되어 평민이 되었습니다.” 진문공이 이에 조공공에게 그의 죄를 열거하며 말하기를, “너는 나라 안에 한 명의 현신이 있어도 능히 쓰지 못하고, 오히려 일반 소인배들만 임용하여 마치 어린아이들이 장난치듯이 했으니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하고, 고함쳐 지시하기를, “본 진영에 감금했다가 초나라에 이긴 후에 처분을 내릴 것이다.” 했다. 진문공은 초헌을 타던 300인을 모두 죽여버리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군사들의 노고에 상으로 나누어주었다. 진문공은 옛날에 희부기가 음식을 준비하여 접대한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그 가족을 북문에 살게 하고 북문 일대의 땅을 주면서 영을 내리기를, “이곳에서 소란을 피워 놀라게 하거나 희부기가 사는 곳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라도 손대는 자가 있다면 참수형에 처하리라!” 했다. 진문공이 여러 장수들의 할 일을 조정하여 반은 성을 지키게 하고 반은 자기를 따라 성 밖으로 나가 본 진영에 머물게 하였다. 호증(胡曾)선생의 영사시에 이르기를, “조공공은 어진 사람을 업신여기다가 사로잡혔고, 희부기는 은혜를 베풀어 죽음을 면했다! 눈앞의 일에 방편을 쓸 줄 모르면, 나중에 옳고 그름을 알았대도 무슨 소용 있으리오.” 했다.
郤說,魏犨顛頡二人,素有挾功驕恣之意,今日見晉侯保全僖氏之令,魏犨忿然曰:「吾等今日擒君斬將,主公並無一言褒獎。些須盤飱,所惠幾何,郤如此用情,真個輕重不分了!」顛頡曰:「此人若仕於晉,必當重用,我等被他欺壓,不如一把火燒死了他,免其後患。便主公曉得,難道真個斬首不成?」魏犨曰:「言之有理。」二人相與飲酒,候至夜靜,私領軍卒,圍住僖負羈之家,前後門放起火來,火燄沖天。魏犨乘醉恃勇,躍上門樓,冒著火勢,在簷溜上奔走如飛,欲尋僖負羈殺之。誰知棟榱焚毀,倒塌下來,撲陸一聲,魏犨失腳墜地,跌個仰面朝天。只聽得天崩地裂之聲,一根敗棟刮喇的,正打在魏犨胸脯上。
한편, 위주(魏犨)와 전힐(顚頡) 두 사람은 평소에 자기들의 공이 높음을 과신하여 교만하고 방자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오늘 진문공이 희씨 일가를 보전하는 명령을 내리는 것을 보고, 위주가 성을 내어 말하기를, “우리는 오늘 조나라 군주를 사로잡고 적장의 목을 베었는데, 주공께서는 우리에게 포상한다는 말은 한마디도 안 하시고, 그까짓 한 번 얻어먹은 음식이 무엇이 그리 대단하다고 이렇듯 마음을 쓰시니, 진실로 가볍고 무거운 것을 가리지 못하는 것이다.” 하니, 전힐이 말하기를, “희부기가 만일 진(晉)나라에서 벼슬을 한다면 틀림없이 중용될 것이오. 우리가 그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느니, 차라리 그의 집을 불 질러 죽여서 후환을 없애버리는 편이 낫겠소. 주공이 나중에 아시더라도 참으로 우리를 참수하기야 하겠소?” 했다. 위주가 말하기를, “그 말에 일리가 있소.” 하고, 두 사람이 같이 술을 마시고 저녁때가 되기를 기다려 비밀리에 군사들을 거느리고, 희부기의 집을 에워싼 후에 앞문과 뒷문에서 불을 질러 화염이 충천했다. 술에 취한 위주가 용력을 믿고 대문 위에 뛰어 올라가, 불길을 무릅쓰고 처마의 낙수받이로 비호처럼 뛰어 희부기를 찾아 죽이려고 했다. 누가 알았으랴, 기둥과 서까래가 불에 타서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위주가 발이 빠져 땅에 떨어져 넘어져서 하늘을 쳐다보게 되었다. 다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불이 붙은 기둥 하나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땅 위에 드러누운 위주의 가슴을 바로 쳤다.
魏犨大痛無聲,登時口吐鮮血,前後左右,火毬亂滾,只得掙䦟起來,兀自攀著庭柱,仍躍上屋,盤旋而出。滿身衣服,俱帶著火,扯得赤條條,方免焚身之禍。魏犨雖然勇猛,此時不繇不困倒了。剛遇顛頡來到,扶到空閒去處,解衣衣之,一同上車,回寓安歇。卻說,狐偃胥臣在城內,見北門火起,疑有軍變,慌忙引兵來視。見僖負羈家中被火,急教軍士撲滅,已自焚燒得七零八落。僖負羈率家人救火,觸煙而倒,比及救起,已中火毒,不省人事。其妻曰:「不可使僖氏無後!」乃抱五歲孩兒僖祿奔後園,立污池中得免。亂到五更,其火方熄。僖氏家丁死者數人,殘毀房舍民居數十餘家。狐偃胥臣訪知是魏犨顛頡二人放的火,大驚,不敢隱瞞,飛報大寨。
위주는 몹시 아팠으나 소리도 지르지도 못하고, 즉시 입에서 선혈을 토했다. 사방에서 불덩어리들이 난무하였다. 위주가 안간힘을 써서 일어나 정원의 기둥을 붙잡고 지붕 위로 뛰어올라 이리저리 돌아서 나왔다. 몸에 입고 있던 의복들은 모두 불이 붙어서 찢어지고 벌거숭이가 되었으나 간신히 불에서 타죽는 것을 면했다. 위주가 비록 용맹하기는 했으나 기진맥진한 나머지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때 마침 전힐이 달려와서 위주를 부축하여 공한지로 가서 옷을 갈아입히고 수레에 타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 쉬었다. 한편, 호언과 서신은 성안에 있다가 북문에서 불이 난 것을 보고 혹시 군사 반란이 일어났나 의심하여 황망히 군사를 이끌고 와서 보았다. 희부기의 집에 불이 난 것을 보고 급히 군사들을 시켜 불을 끄게 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희부기의 집은 10중 7, 8은 타 버렸다. 희부기가 가솔들을 이끌고 불을 끄다가 연기에 중독되어 쓰러졌다. 사람들이 구하여 일으켰을 때는 이미 화독에 중독되어 인사불성이 되었다. 그 처가 말하기를, “희씨의 후사를 끊어지게 할 수는 없다!”고 하며, 다섯 살 난 아들 희록(僖祿)을 품에 안고 후원으로 달려가 더러운 연못 속에 뛰어들어 목숨을 구했다. 어느덧 오경(새벽 4시경)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불이 꺼졌다. 희씨 집안의 장정도 여러 사람이 죽었고, 근방에 있던 백성의 집도 수십 채 불에 탔다. 호언과 서신은 위주와 전힐이 저지른 방화라는 사실을 알고, 크게 놀라 감히 감출 수 없어서, 본 진영에 바로 알렸다.
那大寨離城五里,是夜雖望見城中火光,不甚明白,直到天明,文公接得申報,方知其故。即刻駕車入城,先到北門來看僖負羈,負羈張目一看,遂瞑。文公嘆息不已。負羈妻抱著五歲孩兒僖祿,哭拜於地。文公亦為垂淚,謂曰:「賢嫂不必愁煩,寡人為汝育之。」即懷中拜為大夫,厚贈金帛,殯葬負羈,攜其妻子歸晉。直待曹伯歸附之後,負羈妻願歸鄉省墓,乃遣人送歸。僖祿長成,仍仕於曹為大夫。此是後話。當日文公命司馬趙衰,議違命放火之罪,欲誅魏犨顛頡。趙衰奏曰:「此二人有十九年從亡奔走之勞,近又立有大功,可以赦之!」
본 진영은 성에서 5리 떨어진 곳인데, 그날 밤 비록 성안에서 화광이 일어나는 모습을 보기는 했으나 무슨 일인지 확실히 알지 못하다가, 날이 밝자 진문공이 보고를 받고 그 까닭을 알게 되었다. 진문공은 즉시 어가를 타고 성안으로 들어가 먼저 북문으로 가서 희부기를 살폈다. 희부기는 눈을 한번 크게 뜨고 진문공을 보더니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진문공이 탄식해 마지않았다. 부기의 처가 다섯 살 난 아들인 희록을 안고서 땅에 엎드려 절하고 통곡했다. 문공도 역시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희부인은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과인이 그대를 위해 어린아이를 보살펴 주겠소.” 하고, 즉시 희부기의 처가 가슴에 안고 있던 희록에게 대부의 벼슬을 내렸다. 황금과 비단을 후하게 내리고 부기의 장례를 치르게 한 후, 그 모자를 진(晉)나라에 옮겨 살게 했다. 후에 조공공이 석방되어 조나라를 다시 다스리게 되었을 때, 희부기의 처가 고향에 돌아가 조상의 무덤에 성묘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하여, 사람을 시켜 조나라에 돌려보냈다. 희록이 장성하여 조나라에서 대부 벼슬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나중의 이야기이다. 그날 진문공은 사마 조쇠에게 명하여, 군주의 명을 어기고 방화를 한 죄에 대하여 의논한 끝에 위주와 전힐을 처형하려고 하였다. 조쇠가 아뢰기를, “이 두 사람은 19년 동안 주공께서 망명하실 때 따라다니며 고생하였고, 근자에 또한 큰 공을 세웠으니 용서하십시오.” 했다.
文公怒曰:「寡人所以取信於民者,令也。臣不遵令,不謂之臣,君不能行令於臣,不謂之君。不君不臣,何以立國?諸大夫有勞於寡人者甚眾,若皆可犯令擅行,寡人自今不復能出一令矣!」趙衰復奏曰:「主公之言甚當。然魏犨材勇,諸將莫及,殺之誠為可惜!且罪有首從,臣以為借顛頡一人,亦足警眾,何必並誅?」文公曰:「聞魏犨傷胸不能起,何惜此旦暮將死之人,而不以行吾法乎?」趙衰曰:「臣請以君命問之,如其必死,誠如君言。倘尚可驅馳,願留此虎將,以備緩急。」文公點頭道:「是。」乃使荀林父往召顛頡,使趙衰視魏犨之病。
문공이 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백성들로부터 믿음을 얻는 까닭은 영(令)이 서기 때문이오. 신하들이 나의 영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신하라고 할 수 없소. 군주가 신하들에게 명령을 행하지 못한다면 군주라 할 수 없소.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다면 어떻게 나라가 서겠소? 과인을 위해 고생한 대부들이 매우 많은데, 만약에 모두가 영을 어기고 멋대로 행한다면 과인이 이후로 다시는 한마디 명령도 내지 못할 것이오.” 했다. 조쇠가 다시 아뢰기를, “주공의 말씀은 매우 타당합니다. 그러나 위주는 재주와 용기가 여러 장수가 따를 수 없는 뛰어난 인재라 죽이는 것은 정말 너무 아까운 일입니다. 또한 그의 죄는 전힐의 부추김을 뒤따랐다고 하니 신의 소견으로는 전힐 한 사람을 죽이는 것만으로도 경종을 울릴 수 있는데, 하필 두 사람을 같이 죽이겠습니까?” 하니, 진문공이 말하기를, “위주가 가슴에 상처를 입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아침저녁에 곧 죽을 사람을 무엇이 아깝다고 나의 법을 행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했다. 조쇠가 말하기를, “신이 청하옵건대 주공의 명으로써 그를 한번 문병하여 만약 그가 죽을 것 같으면 주군의 말씀대로 형에 처하고 만약에 아직 일어나서 수레를 몰아 달릴 수 있다면, 원컨대 그 용맹한 장수를 살려놓아 위급한 일에 대비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문공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기를, “그렇게 하시오.” 했다. 이에 순림보(荀林父)를 시켜 전힐을 불러오게 하고, 조쇠를 시켜 위주의 병세를 살펴보게 했다.
不知魏犨性命如何,且看下回分解。
위주의 목숨이 어찌 될지 모르겠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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