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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C 조선통신사 거제도에서 출발하다. 1편> 2015년 作.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 차례 : 1) 머리말
2) 여말선초(麗末鮮初) 일본 사절단과 거제도 상황
3) 여말선초 조선통신사(회례사) 파견
4) 여말선초 대마도(對馬島) 정벌(征伐) 개괄
5) 거제도 지세포 통신사절단 출발지(出發地)
6) 계해조약(癸亥條約)
7) 조선초기 일본사절단 예물(禮物) 품목
8) 거제도를 경유한 통신사들의 시편(詩篇)
9) 조선전기 지세포를 거쳐 간 사절단 인물 소개.
10) 맺음말
1) 머리말
일본으로 가는 조선통신사가 해상출발지(海上出發地)로 부산포(釜山浦)를 모두 이용했다고 여기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15세기에는 대부분 거제시 지세포(知世浦)항구에서 유숙(留宿)한 후[기착지], 대마도(쓰시마)로 출발한 거제도의 자랑스런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대양을 향해 나래를 펴는 거제시민의 자부심과 자긍심을 다시금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거제도는 고대 한국∙중국∙일본의 해상교통로의 요충지(要衝地)로써 다양한 문화가 용광로처럼 융해되어 넘쳐나는 곳이었다. 특히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일본과의 무역은 기원전부터 이어온, 거제도를 경유한 해상로(海上路)를 이용했는데, 전라남도 남해안과 제주도 그리고 경남의 마산(합포), 웅천(진해), 김해, 부산포 등에서 출발해 거제도의 다대포∙지세포∙아주동(옥포) 등지에서 배를 정박한 후에 해상의 일기를 살핀 후, 쓰시마 난류(쿠로시오 지류)를 타고 대마도 해안에 이르는 바닷길이었다. 백제의 무역, 김해 가야국의 일본 항해길, 몽고의 일본정벌, 조선의 대마도 정벌 모두, 거제도 해상을 경유해서 대마도로 향하였다. 고려말기부터는 가끔씩 부산포를 이용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연중 동해로 흐르는 대한해협의 쓰시마 난류 때문에, 바람의 방향을 고려해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여몽정벌군의 일본 침략과 여말선초(麗末鮮初) 3차례 대마도 정벌(東征)이 모두 거제도 해상을 이용했던 계기로 15세기 거제도는 최전방 해안의 수군진영이 섬을 빙 둘러 구축되고 거제 지세포항구는 수군진영과 더불어, 계해조약(癸亥條約)의 체결로 대마도 왜선들이 문인(文引)을 확인하고 어세(漁稅)를 납부하기에 이른다. 이를 계기로 거제도는 통신사(사절단)의 대마도 항해 길의 출발지(出發地)나 기착지(寄着地)로 이용되었다.
특히 통신사로 가는 이들이 도중에, 거제도에서 남긴 시편(詩篇)이 많이 남아 전한다. 험난한 항해 길과 목숨을 담보로 하는 사신(使臣)의 입장에서, 그 분들은 고뇌와 우수에 가득 찬 심정이었음에도, 유독 거제도의 풍광만은 아름답고 풍류가 있는 작품으로 형상화하여 남겼으니 15세기 당시 안정된 거제지역 상황과 거제현민의 풍요롭고 평온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당시 일본 사절단이 지세포 항구를 주로 이용한 배경과 당시의 외교상황, 계해조약(癸亥條約), 그리고 거제도의 여말선초 상황은 물론, 15세기 지세포에서 대마도를 향해 어려운 발걸음을 옮긴 주요 사절단의 예물(禮物) 품목과 외교사절단의 인물, 거제해상에서 남긴 시편(詩篇) 등을 살펴 보고자한다.
2) 여말선초(麗末鮮初) 일본 사절단과 거제도 상황
대마도(對馬島)로 가던 일본사절단이, 대마도 항해 길의 출발지(出發地)나 기착지(寄着地)로써 거제시 지세포(知世浦) 항구를 이용한 시점은 고려말기부터 시작되었으나, 본격적인 통신사가 대마도로 향해 출발하거나 경유지로 이용한 시기는 15세기였다. 특히 15세기 일본 본토는 지방 다이묘들이 세력권을 형성한 전국시대였다. 그래서 조선의 외교 상대는 대마도주(對馬島主) 종정성(宗貞盛)와, 큐슈 북부지방과 혼슈 서부지방의 맹주 대내전(大內殿)과 소이전(小二殿)을 상대해 외교관계를 맺어왔고, 때론 교토의 막부쇼군의 취임과 사망 時에 방문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이 일본에 파견하는 사절을 ‘통신사(通信使)’, 일본이 조선에 파견하는 사절을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 칭했다.
'외교통신(外交通信)'은 두 나라가 서로 신의(信義)를 통하여 교류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조선에서 일본에 파견한 사절의 명칭은 보빙사(報聘使), 회례사(回禮使), 회례관(回禮官), 통신관(通信官), 경차관(敬差官) 등 다양하였다. 일본에 파견된 사절단에 통신사라는 명칭이 처음 쓰인 것은 1413년(태종 13)에 박분(朴賁)을 정사로 한 사절단이었으나 이 사행(使行 사신행차)은 도중에 정사가 병이 나서 중지되었고, 그 뒤 1429년(세종 11) 박서생(朴瑞生)을 정사로 한 사절단이 일본 교토(京都) 쇼군에게 파견되어 임무를 수행하고 귀국하였는데 이것이 실제로 시행된 최초의 통신사(日本通信使)라고 할 수 있다. 기록上 일본에 파견한 사절단으로 가는 일행을 ‘통신사‘라는 호칭을 처음 쓴 것은 고려시대 1375년, 무로마치(室町) 막부장군에게 왜구 금지를 요청하는 사절을 파견할 때였는데 그때는 명칭만 통신사였을 뿐, 그 조건과 목적을 갖추지 못했다.
조선초기 통신사 일행은 일본과 대마도 호위선단을 제외 한, 상사(上使)·부사(副使)·서장관(書狀官), 수행원, 격군을 포함 100 여명에 2~4척의 선단으로 꾸렸는데 조선후기에는 400 여명에 6척의 선단이나 되었다. 실제로 일본으로 가는 사신단의 불안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는 바닷길에 난파의 전례가 자주 발생하는 대마도까지, 예상할 수 없는 바람과 파도 때문이었다. 또한 호위를 맡고 있는 대마도주 왜인들과 막부장군들의 수하들이 사신을 응접함에 있어서 언제 돌변할지 몰라 매우 염려되었으며 특히 왜국의 음식과 풍토병은 너무나 두려운 존재였다. 조선중기까지 대마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도착한 우리나라 남해안 항구는, 당시 쓰시마 난류와 바람의 방향 등이 主요인으로 작용하여, 남동해안 여러 지역에 도착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거제도, 웅천(제포), 가덕도, 다대포, 부산포, 울산 등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역사서에 자주 전한다.
한편 첫번째의 대마도 정벌은 1389년(창왕 1) 2월 박위(朴葳)에 의해 이루어졌고 조선의 대마도정벌은 1396년(태조 5)과 1419년(세종 1)에 있었다. 1419년 조선초기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 前에, 거제도에는 도만호(都萬戶)가 옮겨와 있었다. 태종11년 1411년, 가배량(加背梁, 통영)·견내량(見乃梁) 등지의 만호로 하여금 옥포(玉浦)로 옮겨 지키게 하였으니, 이른바 왜구의 길목을 틀어막은 것이었다. 고성∙거제 인근 지역에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수어하는 곳이 8곳이나 되었다. 당시 고성(固城) 가배량(加背梁)에서 거제(巨濟) 옥포(玉浦)로 옮겨 도만호가 수어하였는데 병선 22척, 군사 1천 1백 22명이었다. 거제 영등포(永登浦)에는, 병선 8척, 군인 7백 20명이 있었고, 1404년 설치한 견내량(見乃梁) 수군만호도 거제(巨濟) 옥포(玉浦)로 옮겼는데 병선 20척, 군사 9백 40명이다. 1418년 당시 오아포 수군절도영에는 병선 28척, 군사 2천 6백 1명이 주둔했다. 조선태종 때 거제 수군인원만 4000 명이 넘었다. 이러한 사실은 모두 대마도 정벌과 왜구의 침략에 대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이후 대마도 정벌 후에 가배량진영은 거제시 오아포(다대포)로 이설하면서 수군도안무처치사(오아포), 이후 경상우도 수군절도사(경상우수영)로 명칭이 바뀌었다. 1418년 세종∙태종 두 임금께서 대마도 정벌 前에 거창군 가조현에 있던 거제현관청을 거제본섬으로 옮길 것을 계획하고 실제 세종 4년(1422)에 환도(還島)하였다.
그리고 1444년(세종26) 대마도 항해의 기착지 역할을 하던 지세포에, 1443년 계해조약(癸亥條約)으로 인하여 만호를 두었다가 세조3년 1457년 만호를 폐지하였는데 성종4년 1473년 다시 복치하여 1894년까지 지속되었다. 세종13년 1431년 옥포에 수군진영을 설치, 문종1년 1451년 옥포만호로 승격하였고 조선중기에는 옥포에 왜학을 두게 되었다. 단종1년 1453년에는 조라포 수군만호(구조라)가 설치되면서 거제섬 전체가 거대한 해안방어의 요충지로 변모해 나갔다. 1449년 진무토평사(鎭武討評事) 이호성(李好誠 1397~1467)이 거제현령으로 부임해 읍치 고현(고정리)에 새로 성을 쌓았으며(1453년 완공), 1470년경에는 거제7목장과 거제7진영이 함께 갖춰져 거제도는 우리나라 최전방 군사기지로써 든든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일본사절단은 16세기 초 삼포왜란 以後부터는 동래현 부산포를 이용해 일본으로 향했는데 이는 선박의 기능과 축척된 항해술의 발전이 한몫을 했으며 또한 육지에서 일본으로 가는 가장 빠른 여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거제시 일운면 지세포만에 ‘배숲개’(주림포 舟林浦, 현재 옥림리)라는 지명이 있다. 옛 어르신들의 말에 따르면, “아주 옛날에 지세포만에 배들이 숲을 이루듯이 정박해 있었다. 지세포에서 보면 옥림쪽이 배가 숲을 이룬 것처럼 보여 ‘배숲개(舟林浦)’라고 동네 이름을 붙였다.”고 했다. 불과 100년 전의 모든 역사기록에도 옥림마을이 ‘주림포(舟林浦)로 표기되어 있다. 어찌되었건 역사기록에서 증명하듯, 지세포만은 고대로부터 15세기까지 일본으로 향하는 바닷길의 중요한 기착지(寄着地)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주1] 대내전(大內殿) 일본 전국시대 서부 혼슈와 큐슈 북부 지방을 세력권으로 기반한 오우치(大內)가문을 뜻한다. 당시 대마도를 사이에 두고 우리나라와 무역을 활발히 행하였던 지방의 강력한 다이묘였다. 오우치 다이묘(大內殿)
[주2] 소이전(小二殿) : 소이전은 소이만정(小貳滿貞)을 지칭. ‘貳’를 ‘二’로 쓰는 것은 우리나라 기록의 통례이다. 도노[殿]는 군장(君長)에 붙이는 존칭. 또 그 거처를 뜻하기도 한다. 대마도주 종(宗)씨의 조상을 대마수호대(對馬守護代)로 삼은 것은 소이씨였으며, 이때에도 역시 종주(宗主)였다. 《해동제국기》에도 “소이전은 재부(宰府)에 산다. 재부는 대도독부(大都督府)라 부르기도 하는데, 서북으로 박다(博多)에서 3리 떨어진 곳에 있다.” 한 것이 이것이다.
[주3] 회례사(回禮使) : 조선 시대, 일본에서 보내온 사절에 대한 답례로 일본으로 보내던 사절. 답례로서 외국을 방문하는 사신인 보빙사(報聘使)와 유사 함.
[주4] 통신사(通信使) : 조선 시대,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보내던 사신.
[주5] 경차관(敬差官) : 조선 시대, 지방에 국방·외교 업무를 띤, 임시로 내려 보내는 벼슬을 이르던 말인데 대마도로 파견時에 사용함.
[주6] 선위사(宣慰使) : 조선 시대, 외국의 사신이 입국했을 때 그 노고를 위로하기 위하여 파견하던 임시 관직
[주7] 동정(東征) : 1396년(태조 5) 10월에 왜구(倭寇)가 동래(東萊)ㆍ울진(蔚珍) 등지에 침입하므로, 12월에 김사형(金士衡) 등을 보내어, 일기(壹岐)와 대마도(對馬島)를 치게 한 일을 가리킨다.
3) 여말선초(麗末鮮初) 조선통신사(회례사) 파견
고려 말기의 여일(麗日) 관계는 여원연합군의 정벌과 왜구의 침구(侵寇 침략과 노략질)로 인해 지극히 위태로웠다. 당시 ①1292년(충렬왕18) 몽골에 의해 일본으로 파견되었던 태복윤(太僕尹) 김유성(金有成), 원나라의 조양필(趙良弼)이 선유사(宣諭使)로, 곽린(郭麟)은 서장관(書狀官, 문서의 기록을 담당)으로 일본에 갔다. 이 때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가 집권하던 시기로서 동정(東征)한 데 원한을 품고 구류되어 있다가 모두 일본에서 사망했다. 그리고 ②공민왕(恭愍王) 때에는 김룡(金龍)과 김일(金逸)을 금적사(禁賊使)로 보냈는데, 일본 조정은 애매한 태도를 취했으나 실질적인 영향력을 가진 일본 막부와 고려 정부의 협조는 어느 정도 접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③우왕(禑王) 원년에는 나흥유(羅興儒)를 파견하였고, 1377년(우왕3)에는 안길상(安吉祥)을 보내었으며 같은 해에 정몽주(鄭夢周)를 파견하게 되었다. 그런데 안길상은 병사하였고, 나흥유와 정몽주는 구금되었다가, 1378년 7월에 정몽주(鄭夢周)가 일본에 포로로 잡혀있던 윤명, 안우세 등 수백 인을 데리고 귀국하니 성공적인 외교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이는 당시 여일관계에 있어서의 사행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던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실례가 될 것이다. 이후 ④같은 해 10월에는 이자용(李子庸)과 한국주(韓國柱)를, 5년에는 윤사충(尹思忠)을 보내어 보빙(報聘 답례 방문)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려의 일본통신사들은 때로 평화교린의 상황에서 사행을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 목숨을 담보로 하였다.
조선 건국 후에는 ⑤1394년(태조 3) 5월28일 일본회례사(日本回禮使) 김거원(金巨原)이 중 범명(梵明)과 더불어 사로잡혀 갔던 본국인(本國人) 5백 69명을 거느리고 왔고 ⑥1394년(태조 3) 10월11일 최용소(崔龍蘇)가 일본회례사(回禮使)로 일본 구주(九州)에 파견되어 구주절도사(九州節度使) 이미카와(令州了俊)에게 왜구를 토벌하여 양국의 우호를 도모하자는 국서를 전하고, 이마카와가 차견(差遣)한 승려 종구(宗俱)와 함께, 1395년(태조 4) 7월10일 피로인 570여 명을 대동하고 귀국하였다. ⑦1408년(태종 8) 3월 14일 일본 통신관(日本通信官) 부사직 박화(朴和)가 본국(本國)에서 잡혀간 사람 남녀 백여 인을 추쇄(推刷)해 가지고 돌아오기도 했다. 1410년(태종 10) 4월 14일 사직(司直) 박화(朴和)가 일본(日本)에서 돌아왔는데, 지좌전(志佐殿) 원추고(源秋高)가 형부 대랑(刑部大郞)을 보내어 호송(護送)하고, 예물(禮物)을 바쳤다. ⑧1409년(기축년) 2월에 박화를 지좌전에 사신으로 보냈으니, 붙잡혀 간 남녀(男女)를 구(求)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1413년(태종 13) 12월1일 통신관(通信官) 검교(檢校) 공조 참의 박분(朴賁)을 일본에 보내기 위해 경상도 도관찰사에게 명령하여 호피(虎皮)·표피(豹皮) 10장과 잣[松子] 10석을 주어 보내게 하였다. 다음해 1414년 2월1일 일본통신사(日本通信使) 박분(朴賁)이 경상도 지경에 이르렀으나 통신행렬을 중지 시켜 되돌아오게 했다.
1419년 대마도 정벌 후 일본통신사 기록을 살펴보면, ⑨세종 2년(1420년) 윤1월 15일, 일본에서 사절을 보낸 데 대한 답례로 1420년(세종 2) 10월8일 일본국회례사(日本國回禮使) 통사(通事) 윤인보(尹仁甫)를 임명, 10월25일 일본회례사(日本回禮使) 인녕부소윤(仁寧府少尹) 송희경(宋希璟)을 답례로 보내게 된다. 이때에는 부산을 출발하여 돌아올 때는 제포(웅천)에 도착하여 김해를 거쳐 서울로 돌아왔다. ⑩1422년(세종 4) 12월 20일, 일본 회례사(回禮使) 박희중(朴熙中)과 부사(副使) 이예(李藝) 등이 길을 떠나니, 각각 옷 한 벌씩과 모관(毛冠)·갓[笠]·신[靴]과 약품을 내리고, 서장관(書狀官)인 봉례랑(奉禮郞) 오경지(吳敬之)와 통사(通事) 윤인보(尹仁甫) 등에게 각각 모의관(毛衣冠)·갓·신을 내렸다. 1423년(세종 5) 10월13일 일본국회례사(日本國回禮使) 서장관(書壯官) 봉례랑 오경지(吳敬之) 등이 돌아왔다.
1424년(세종 6) 2월 7일 일본 회례사(回禮使)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 박안신(朴安臣)과 부사(副使) 대호군(大護軍) 이예(李藝) 등이 배사(拜辭)하였다. 10월 7일 일본 회례사(回禮使) 박안신(朴安臣)이 거느리고 간 선군(船軍) 중 사망한 16명의 초혼제도 또한 지내게 하였다. ⑪1428년(세종 10) 11월26일에는 일본통신사(日本通信使)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한 박서생(朴瑞生)이 임명되었고 12월7일 일본통신사 대사성(大司成) 박서생(朴瑞生), 부사(副使)대호군(大護軍) 이예(李藝), 서장관 전 부교리(副校理) 김극유(金克柔)가 일본의 대내전과 소이전에 물건을 보내게 하였는데, 1429년(세종 11) 12월 3일 통신사 박서생(朴瑞生)이 일본에서 돌아와서 일본 국왕 원의교(源義敎)의 답서(答書)를 바쳤다. ⑫일본국(日本國) 통신사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고득종(高得宗)과 부사(副使) 대호군(大護軍) 윤인보(尹仁甫) 등이 1439년(기미년) 8월에 선편(船便)으로 출발하여 1440년(세종 22) 경신년 5월에 돌아왔다. 특히 이예(李藝)는 사신으로 다녀온 총 40여 차례 대부분을, 거제도를 경유하여 대마도와 큐슈 등지를 다녀왔다. 1419년 이종무 대마도정벌 時 통역관 및 보좌관으로 다녀온 후부터 거제도 지세포를 출발지로 이용하니 이후부터 통신사 일행들은 자연스레 거제도를 경유하게 되었다.
⑬1442년(세종 24)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게 되어 글 잘하는 신하를 서장관으로 삼아야 했는데, 신숙주(申叔舟)가 뽑혔다. 일본에 이르자, 그의 재주를 듣고 시를 써 달라는 사람이 몰려들었는데, 즉석에서 붓을 들고 시를 줄줄 써 주어 모두가 감탄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통신사 일행과 함께 쓰시마(對馬島)에 들러 무역 협정인 계해조약(癸亥條約)을 맺었다. 1443년(세종 25) 계해년에, 일본국 통신사 첨지중추부사 변효문(卞孝文), 부사 대호군 윤인보(尹仁甫), 종사관(從事官) 훈련원 주부(訓鍊院注簿) 신숙주(申叔舟)가 동년(同年) 2월에 선편으로 출발하여 동년 10월에 돌아왔다고 되어있다. 조위(曺偉)의 서형(庶兄) 조신(曺伸)은 역관으로 동행하였고 이 후 2차례 더 일본을 다녀왔다.
⑭1459년(세조 5) 8월23일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송처검(宋處儉)을 일본국(日本國)의 통신사(通信使)로 삼고, 행호군(行護軍) 이종실(李從實)을 부사(副使)로 삼고, 선군(船軍) 한을(韓乙), 종부시 주부(宗簿寺注簿) 이근(李覲)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아 예물(禮物)을 가지고 수미(秀彌)와 더불어 일본국(日本國)에 함께 가도록 하였다. 10월 8일 새벽에 1백여 인이 세 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일본 국왕(日本國王) 사신(使臣)의 배 2척과 대마도(對馬島) 왜선(倭船) 2척과 함께 거제도 지세포에서 출발하였다. 그 뒤 일본에서 풍랑을 만나 폐몰하였다. ⑮1475년(성종 6) 을미년에는 일본국 통신사가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배맹후(裵孟厚)라고 되어 있고 1477년(성종 8)에는 일본국 통신사 승문원 참교(承文院參校) 배맹후와 부사 사섬시 첨정(司贍寺僉正) 채수(蔡壽)는 차출되어 행장(行裝)을 갖추었으나 모두 보내지 말라는 전교를 받았다.
⑯1476년(성종 7) 7월 26일 대마도 선위사(對馬島宣慰使) 김자정(金自貞)이 중추(倭中樞) 평무속(平茂續)·첨지(僉知) 피고여문(皮古汝文)·호군(護軍) 원무기(源茂崎), 특송(特送) 조국차(助國次)와 지세포(知世浦)를 출발하여 대마도의 서북쪽에 있는 사수나포(沙愁那浦)에 도착했다. 돌아올 때는 부산포를 거쳐 왔다. ⑰1479년(성종 10) 기해년에는 일본국 통신사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 이형원(李亨元), 부사 대호군 이계동(李季仝), 종사관 김흔(金訢), 조신(曺伸) 등이 차출되어 길을 떠났으나 정사(正使) 이형원이 대마도(對馬島)에 이르러 병에 걸려 돌아오다가 지세포(知世浦)에서 죽자 일행을 모두 되돌아오게 하였다. ⑱1487년(성종 18) 3월 26일 대마도(對馬島) 선위사(宣慰使) 정성근(鄭誠謹)이 사조(辭朝)하니, 명하여 대접하게 하였다. 6월 10일 대마도 선위사(對馬島宣慰使) 정성근(鄭誠謹)이 와서 복명(復命)하자, 임금이 인견(引見)하였다. 정성근이 아뢰기를, “신(臣)이 5월 초2일 진시(辰時 오전7~9시)에 배를 출발하였는데, 그날 바람이 순조롭기 때문에 포시(晡時 오후 4시경)에 대마도(對馬島) 땅에 이르렀습니다.”
◯ 조선초기 일본으로 가는 사절단은 서울(한양)에서 출발하여 다시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약 7개월~11개월가량 걸렸다. 사신의 행차 길에는 많은 수의 수행원과 수많은 화물이 동반되었고 바다의 뱃길도 순탄치 않아 항구에서 대기하는 날수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조선 전기의 경우 한일관계에 있어 가장 큰 관심사는 역시 왜구의 노략질 문제였고, 조선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대마도주나 막부장군에게 통신사를 파견했다. 따라서 통신사 파견의 표면적 이유는 왜구 금압의 요청과 우호관계 유지를 위한 장군습직 축하 등 주로 정치·외교적인 목적에서였다. 일본으로부터 조선에 파견되는 일본국왕사의 主임무는 동(銅)을 가져와 대신 생필품인 쌀·콩·목면을 구해가는 경제적인 목적이거나, 아니면 일본에서 선종(禪宗)이 크게 유행하자 조선의 대장경과 범종을 가져가는 문화적 목적이기도 했다.
4) 여말선초 대마도(對馬島) 정벌(征伐) 개괄
여말선초 사절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마도 땅에 기근이 들 때마다 해적으로 나타나 해안을 약탈하므로 병사를 일으켜 정벌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대마도 정벌은 이전(以前) 고려말기부터 시작되었다. [여몽정벌군∙여말선초정벌군 모두 거제도 해상을 이용했다. 당시 한산도 용초도 추봉도 비산도 매물도 등은 모두 거제현(巨濟縣)의 부속 섬이었다.]
첫 번째의 대마도 정벌(東征)은 고려말 1389년(고려 창왕 2년) 음력 2월에 박위(朴葳 ?~1398년)가 병선 1백 척을 이끌고 쓰시마 섬을 공격하여 왜선 300척을 불사르고, 거주지를 대부분(盧舍殆) 진멸(盡滅)하여 고려의 민간인 포로 남녀 1백여 명을 찾아왔다.
두 번째는 1396년(조선 태조 5년) 음력 12월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 김사형(金士衡 1333∼1407)이 오도병마처치사(五道兵馬處置使)가 되어 남재(南在), 신극공(辛克恭)과 더불어 쓰시마 섬을 정벌하였다.
세 번째 정벌(己亥東征)은 1419년 이종무를 3군도체찰사로 임명해 중군을 거느리게 하고, 우박(禹博)·이숙무(李叔畝)·황상(黃象)을 중군절제사로, 유습(柳濕)을 좌군도절제사로, 박초(朴礎)·박실(朴實)을 좌군절제사로, 이지실(李之實)을 우군도절제사로, 김을화(金乙和)·이순몽(李順蒙)을 우군절제사로 삼아 경상·전라·충청의 3도 병선 2백척과 기선군정(騎船軍丁)을 거느려 왜구가 돌아오는 길목을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6월 8일 각 도 병선을 견내량(見乃梁)에 모이도록 하는 한편, 영의정 유정현(柳廷顯)을 3군도통사로 삼아 경상도에 가서 이를 총감독하게 하였다. 그 때 동원된 병선은 모두 227척이며, 군사는 17285명으로 65일간의 식량을 준비하였다. 이종무(李從茂)의 정벌군은 6월 19일 거제도 남단 주원방포(周原防浦 추봉도)에서 출발하였다. 20일에 먼저 선발대 김사형(金士衡)의 10여 척이 대마도에 도착하여 대승을 거두었는데 뒤이어 이종무의 대선단이 도착하였다. 7월 3일 거제도로 귀환할 때까지 총14일 걸린 대마도정벌이었다. 이후 대규모의 왜구가 없어지고, 평화적 내왕자로 변하게 되었고 또한 그들의 죄는 묻고, 약탈행위를 방지하고자 한 정벌의 본래 목적은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기해동정(己亥東征)은 왜구에 대한 조선의 태도가 능동적으로 변한 것을 의미하며, 또 강력한 무력시위로 왜인들에게 적지 않은 위협을 준 것도 사실이다. 1421년 4월 대마도주가 통상을 허락해 주도록 애원하자, 왜구를 평화적 내왕자로 바꾸기 위한 정책으로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대마도정벌(東征) 후 즉시 왜구가 근절된 것은 아니지만, 이를 계기로 대마도를 비롯한 서부 일본 각지의 해적들이 차차 평화적 내왕자(商倭·客倭)로 변하게 되었다. 고려 말 조선 초기, 3차에 걸친 대마도 정벌은 수십 년간 계속되던 국가의 근심을 제거했을 뿐 아니라, 대일외교사상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역사상 의의가 크다고 할 것이다.
5) 거제도 지세포 통신사절단 출발지(出發地) 및 기착지(寄着地)
경남 거제시 지세포(知世浦)는 기원 전후부터 거제도의 다대포 아주(옥포)와 더불어 고대 해상 교통로의 요충지였다. 삼국시대 백제나 가야국이 일본으로 향해하는 기착지(寄着地)의 역할을 했고 몽골의 일본정벌, 조선의 대마도정벌 모두, 거제도 지세포만에서 대기했다가 해상의 풍랑과 일기를 살핀 후에 대마도로 향하였다. 이는 남쪽으로부터 동해로 흐르는 쿠루시오 난류(쓰시마난류)와 편서풍의 영향으로, 대마도로 가는 뱃길이 거제도를 거쳐 가는 것이 가장 안전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여말선초 공식적으로 20여 차례나 이루어진 일본 외교사절단(外交使節團) 중에 두세 차례를 제외하고 대부분 거제도를 경유하여 대마도로 향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419년 대마도정벌과 더불어 남해안에 수군진영이 구축되어 남해안이 안정을 되찾고, 최전방 거제도에 각 수군진영이 섬을 빙 둘러 설치되면서 1443년(세종 25) 계해조약(癸亥條約)을 맺게 되기에 이른다. 이로부터 일본으로 향하는 통신사들이 거제시 지세포에서 대기했다가 대마도 항해길에 올랐다. 지세포 수군진영의 만호(萬戶)는 대마도 어부들이 고초도(孤草島 거문도)와 여서도(전남 완도군)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자가 오고갈 때 문인(文引)을 확인하고 어세(漁稅)를 납부 받았는데 이는 대부분 일본으로 향하는 사신들의 접대비용으로 사용되었다. 당시 지세포에는 전사(傳舍) 즉, 관원(官員)을 대접(待接)하여 묵게 하는 객사와 관청, 세관(稅關), 객주(客主), 그리고 여행객(旅行客)의 여독(旅毒)을 풀고 향락을 맡아하던 기방(妓房)과 의원(醫院) 등을 모두 갖추게 된다. 지세포(知世浦)에 거류(居留)하는 왜인들도 생겨났고, 선박을 수리 건조하는 조선소는 물론, 전선(戰船)이나 어선, 선박의 정박지(碇泊地)에 시설물이 들어섰으며, 더불어 수군(水軍)들이 수자리 살던 마을이 곳곳에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조선정부의 사신이 파견될 때마다 통신사(通信使) 영빙선(迎聘船)인, 일본막부 신사(信使)의 배들과 대마도주(對馬島主)의 왜선(倭船)들이 드나들곤 했다. 그리고 일본을 향해 떠나기 전에, 길일(吉日)을 택하여 바닷가에서 반드시 해신제(海神祭)를 지냈다. 조선전기 세조에서 성종 시기에 그 항구의 성대함이 마침내 절정에 이르게 된다. 이후 왜인들의 계해조약의 위반사례가 많아져 조금씩 쇠퇴의 길을 걷다가 16세기에 이르러 삼포왜란이 일어나고 일본통신사가 부산포를 이용함에 따라 자연스레 쇠퇴∙소멸하였다.
지세포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조선초기 사절단으로서, 이름을 남긴 수많은 사신들과 수행원 격군 등이 있다. 1424년(세종 6) 박안신(朴安臣) 이예(李藝), 1428년 김극유(金克柔) 박서생(朴瑞生), 1439년 고득종(高得宗) 윤인보(尹仁甫), 1443년(세종 25) 신숙주(申叔舟) 변효문(卞孝文) 윤인보(尹仁甫) 조신(曺伸) 등이 있다. 변효문은 돌아올 때 거제시 옥포에 도착했다. 특히 이예(李藝)는 40여 차례 대마도를 오고가면서 대부분 지세포 항구를 이용했고 그 아들 이종실(李宗實)도 지세포에서 대마도로 향하였다.
1459년(세조 5)에는 송처검(宋處儉)과 부사(副使) 이종실(李宗實), 서장관(書狀官) 이근(李覲), 선군(船軍) 한을(韓乙) 등 1백여 인이 지세포에서 세 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새벽에 일본 국왕(日本國王) 사신(使臣)의 배 2척과 대마도(對馬島) 왜선(倭船) 2척과 함께 출발하였다.
그리고 1476년(성종 7) 7월 26일 대마도 선위사(對馬島宣慰使) 김자정(金自貞)이 중추(倭中樞) 평무속(平茂續)·첨지(僉知) 피고여문(皮古汝文)·호군(護軍) 원무기(源茂崎), 특송(特送) 조국차(助國次)와 지세포(知世浦)에서 출발하여 대마도 서쪽에 있는 사수나포(沙愁那浦)에 도착했다. 또한 1479년(성종 10) 기해년에는 일본국 통신사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 이형원(李亨元), 부사 대호군 이계동(李季仝), 종사관 김흔(金訢), 조신(曺伸) 등이 차출되어 지세포에서 항해길로 나섰다가, 정사(正使) 이형원이 대마도(對馬島)에 이르러 병에 걸려 돌아오다가 지세포(知世浦)에서 죽자 일행을 모두 되돌아오게 하였다.
6) 계해조약(癸亥條約)
고려 말부터 왜구가 우리나라 연안을 약탈하는 등 침입을 일삼자 1419년 그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한 뒤 조선은 통교를 중단하였다. 이에 왜구들은 식량과 생활필수품이 곤궁해질 수밖에 없었고, 대마도주는 여러 차례에 걸쳐 왜구의 금압을 서약하면서 통교를 간청하였다. 1426년 조선은 그들의 간청도 있고, 또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할 것을 염려하여 삼포(三浦)를 개항하고 무역을 허락하는 한편, 삼포와 서울에 왜관(倭館)을 설치하고 그곳에 한해서만 왜인들의 숙박과 무역을 허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마도주에게 입국증명서(圖書•書契•行狀•文引)를 만들어주어 입국하는 왜인은 이를 소지하도록 하였으며, 사송선(使送船)과 무역선(세견선)도 그 수를 제한하였다. 또한 1438년 대마도주의 세견선(歲遣船)에 대하여 25척씩 나누어 삼포에 도착하게 하는 균박법(均泊法)과 윤차적으로 머무르게 하는 삼포윤박법(三浦輪泊法)을 실시하였다. 입국 왜인의 수는 제한하여 그 크기에 따라 대선 40인, 중선 30인, 소선은 20인으로 규정하였으며, 증명서 없이 왕래하는 것을 엄금하였다. 이렇게 조금씩 교류를 완화하는 정책을 펴나가다가 1443년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된 첨지중추부사 변효문(卞孝文)이 귀환길에 대마도주 소사다모리(종정성宗貞盛)와 구체적인 조약을 체결하였다.
(1) <계해약조(癸亥約條)>
1443년(세종 25) 첨지중추부사 변효문(卞孝文) 이예(李藝) 등의 사절단이 대마도주(對馬島主) 종정성(宗貞盛)과 세견선(歲遣船) 등 무역에 대해 조약을 체결했다. 내용은 세견선은 50척으로 할 것, 삼포에 머무르는 사람의 체류기간은 20일로 하며 상경자(上京者)의 배를 지키는 간수인은 50일로 한해 이들에게 식량을 지급할 것, 좌선인(坐船人)수는 대선(大船) 40명, 중선 30명, 소선 20명으로 한할 것, 고초도(孤草島)에서 어획하는 자는 지세포만호(知世浦萬戶)의 문인(文引)을 받아 어세(漁稅)를 낼 것 등이었다. 왜인이 개항장에 도착한 후부터 본국으로 귀환시까지 비용은 조선측이 부담했는데, 그 접대비용과 세역미두가 너무 많아 재정긴축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 같은 긴축정책은 앞서 마련된 법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예외취급이 너무 빈발해서, 왜인들은 이를 위반해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등 모순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모순은 이후 삼포왜란(三浦倭亂)의 원인이 되었다.
(2) 조어금약(釣魚禁約) 해동제국기종(海東諸國記終) / 신숙주(申叔舟)
대마도 사람으로서 고기잡이하는 자는 도주(島主)의 도서(圖書)와 문인(文引) 3통을 받아서 지세포(知世浦 거제도)에 도착하여 문인을 바치면, 만호(萬戶)가 문인을 다시 만들어 준다. 고초도(孤草島)의 정해진 곳 외에는 아무데나 함부로 다니지 못하게 하며, 고기잡이를 마치면 지세포(知世浦)에 돌아와서, 만호에게 문인을 돌리고 세어(稅魚)를 바친다. 만호는 도주의 문인에 회비(回批)하여 인(印)을 찍어 돌려 줌으로써 서로 증거로 삼는다. 만약 문인이 없는 자이거나, 풍랑을 감내하지 못한다 핑계하고 몰래 무기(武器)를 가지고 변방 섬에 횡행하는 자는 적(賊)으로서 논죄(論罪)한다.[對馬島人釣魚者 受島主三着圖書文引 到知世浦納文引 萬戶改給文引 孤草島定處外 勿許橫行 釣魚畢 還到知世浦 還萬戶文引 納稅魚 萬戶於島主文引 回批着印 還付爲驗 若無文引者 稱不勝風浪 潛持兵器 橫行邊島者 以賊論]
◯ 계해약조로 인하여 대마도인들이 거제시 지세포에 어세를 납부하고 남해안의 평화로운 조업은 실제로 약50년 간 정도 이루어 졌다고 볼 수 있다. 1467년 이후 일본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가 심각하게 흔들리고 각 지역 군웅들의 할거와 쟁투가 뚜렷해지는 격동의 시대가 되었다. 이후 100년 가까이 지속되는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막이 열리면서 변방의 주민을 통제할 힘을 잃게 되었다. 1493년 경상감사 이극돈(李克墩)의 장계에 따르면, “1485년 을사년에 왜의 소선 11수(艘)가 마지막으로 세를 바쳤을 뿐이고, 그 뒤 각년(各年)에는 한 사람도 문인을 받아 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계해약조는 1510년 삼포왜란이 일어날 때까지 대마도주와 형식적인 조약으로써, 유명무실하지만 실효적 조약으로써 남아 있었다.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사절단의 거제도 체류경비 문제가 발생하여, 이때부터 일본통신사는 대부분 부산포를 이용하게 되었다.
7) 조선초기(15C) 일본사절단 예물(禮物) 품목
15세기 초기 일본은 조선으로부터 발전된 불교의 전수를 받기위하여 대장경 및 주해(注解)한 여러 경서(經書)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래서 세종 6년(1424) 박안신(朴安臣)과 이예(李藝) 등이 일본 회례사(回禮使)로 갈 때, 금자(金字) 《인왕호국반야바라밀경(仁王護國般若波羅密經)》 1부와 금자 《아미타경(阿彌陀經)》 1부, 금자 《석가보(釋迦譜)》 1부, 청지(靑紙)에 금자로 쓴 단본(單本) 《화엄경(華嚴經)》 1부, 《대장경(大藏經)》 1부를 토산물(土産物)과 함께 보낸다. 그리고 세조 5년(1459년) 통신사 송처검(宋處儉)이 일본을 방문할 때에 일본에서 청구한 대장경(大藏經) 1부(部), 법화경(法華經) 2부, 금강경(金剛經) 2부, 금강경 십칠가해(金剛經十七家解) 2부, 원각경(圓覺經) 2부, 능엄경(楞嚴經) 2부, 심경(心經) 2부, 지장경(地藏經) 2부, 기신론(起信論) 2부, 영가집(永嘉集) 2부, 증도가(證道歌) 2건(件), 조학사(趙學士) 서체의 증도가(證道歌) 2건, 고봉선요(高峯禪要) 2부, 변역명의(飜譯名義) 2부, 성도기(成道記) 2부 즉, 불경과 불교 관련 물품들이 주종을 이루었다.
조선은 통신사를 보내면서 일본국왕(실제 막부)에게 예의를 갖추어 정중하게 안부를 묻고 옛날의 정의를 돈독히 하여 날로 더욱 새롭게 발전되기를 바란다는 서신과 함께 무려 40여종의 예물을 보내면서 일일이 열거하여 기록하였다. 이는 대부분이 일본의 요청에 의해 보낸 것이었다. 그리고 명주(明紬) 3백 필, 백금(白金) 5백 냥(兩)을 사절단에게 주어 우리나라에 없는 서적 등을 사 오도록 한 것은, 새로운 문물에 대한 관심과 도입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초기에는 일본에서 생산되지 않는 표피(豹皮)∙호피(虎皮)∙인삼(人蔘)이 일본에서 최고의 인기 물품이었다. 거제도 지세포 만호(萬戶)는 거제도 체류경비 조달은 물론이거니와, 통신사 일행이 대마도를 향해 떠날 때, 거제産 ‘고라니 노루 고슴도치’ 가죽을 사절단 일행에게 선물하였고 이 물품은 일본 행차 길에서 사절단의 개인用 구입선물 비용에 전용(專用)하였다 한다.
1459년 세조가 일본국왕에게 보내는 서신과 예물 외에도, 신하로서 예조판서 홍윤성(洪允成)이 일본의 대내다다량공(大內多多良公), 전산수리대부원공(畠山修理大夫源公), 좌무위원공(佐武衛源公), 관령(管領), 경극좌좌목시(京極佐佐木氏) 대선대부 원공(大膳大夫源公)에게도 서신과 함께 선물을 보냈다. 또한 예조참판 황효원(黃孝源)은 관서도 대우원공(大友源公)에게 서신과 함께 선물을 보냈다. 예조참의 서거정(徐居正)은 대마주(對馬州) 태수(太守) 종공(宗公)족하에게 서신과 예물을 보내고, 예조좌랑 김영견(金永堅)은 일기주(一岐州) 태수(太守) 지좌원공(志左源公)과 일기주 좌지원공(佐志源公)에게 서신과 예물을 함께 보냈음이 특이할만하다 하겠다.
(1) 15세기 조선이 일본으로 보낸 예물(禮物) 품목
① 세종 6년(1424년) 일본 회례사(回禮使)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 박안신(朴安臣)과 부사(副使) 대호군(大護軍) 이예(李藝) 등.
신물(信物 증표)로 금자(金字) 《인왕호국반야바라밀경(仁王護國般若波羅密經)》 1부와 금자 《아미타경(阿彌陀經)》 1부, 금자 《석가보(釋迦譜)》 1부, 청지(靑紙)에 금자로 쓴 단본(單本) 《화엄경(華嚴經)》 1부, 《대장경(大藏經)》 1부, 대홍라 가사(大紅羅袈裟)에 초록라(草綠羅)로 장식한 것 한 벌과 자라괘자(紫羅掛子)에 아청라(鴉靑羅)로 장식한 것 한 벌, 남라장삼(藍羅長衫) 한 벌, 흑세마포(黑細麻布) 15필, 홍세저포(紅細苧布 붉고 가는 모시) 15필, 백세저포(白細苧布 흰 모시) 15필, 만화석(滿花席) 35장, 잣[松子] 5백 근, 인삼(人蔘) 1백근, 청밀(淸蜜) 20두(斗), 표피(豹皮) 5장, 호피(虎皮) 5장, 각색 사피(各色斜皮) 10장, 검붉은 사피[紫斜皮]로 만든 승혜(僧鞋 스님 신발) 한 켤레.
[주1] 대홍라 가사(大紅羅袈裟) : 아주 붉은 비단으로 만든 승려(僧侶)가 입는 법의(法衣).
[주2] 자라괘자(紫羅掛子) : 예전에 자줏빛 비단으로 만든, 소매가 없고 뒤 솔기를 길게 허리까지 째어 전투복으로 만든 옷을 이르던 말.
[주3] 아청라(鴉靑羅) : 검푸른 빛깔의 비단
[주4] 남라장삼(藍羅長衫) : 승려의 남빛 비단 웃옷, 검은 베로 길이가 길고 품과 소매를 넓게 만듦.
[주5] 만화석(滿花席) : 여러 가지 꽃무늬를 가득하게 놓아서 짠 돗자리
② 세조 5년(1459년) 조선이 준비한 예물(禮物),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송처검(宋處儉).
<일본에서 청구한 대장경(大藏經) 및 주해(注解)한 여러 경서(經書)와 토산물(土産物) 별폭(別幅)의 예물(禮物) 품목>
[ 대장경(大藏經) 1부(部), 법화경(法華經) 2부, 금강경(金剛經) 2부, 금강경 십칠가해(金剛經十七家解) 2부, 원각경(圓覺經) 2부, 능엄경(楞嚴經) 2부, 심경(心經) 2부, 지장경(地藏經) 2부, 기신론(起信論) 2부, 영가집(永嘉集) 2부, 증도가(證道歌) 2건(件), 조학사(趙學士) 서체의 증도가(證道歌) 2건, 고봉선요(高峯禪要) 2부, 변역명의(飜譯名義) 2부, 성도기(成道記) 2부. 소종(小鍾) 2사(事), 운판(雲板) 2척(隻), 동발(銅鈸) 5부, 경자(磬子) 5사(事), 석등잔(石燈盞) 5사(事), 말 안장[鞍子] 1면(面), 여러 가지 연구(緣具 관련악기), 흑세마포(黑細麻布) 20필, 백세저포(白細苧布) 20필, 백세면주(白細綿紬) 20필, 남사피(藍斜皮) 10장(張), 인삼(人蔘) 1백 근(觔), 표피심(豹皮心)·호피변(虎皮邊)·전피리(捵皮裏)의 깔개[坐子] 1사(事), 표피(豹皮) 10장, 호피(虎皮) 10장, 잡채화석(雜彩花席) 10장, 만화석(滿花席) 10장, 만화방석(滿花方席) 10장, 잣[松子] 4백 근, 청밀(淸蜜) 15두(斗)를 부송(付送)한다. / 그리고 명주(明紬) 3백 필, 백금(白金) 5백 냥(兩)을 가지고 가서 우리나라에 없는 서적(書籍) 등류의 물건을 사오게 하였다. ]
그 외 기타 개인 품목으로, 홍색 전모(氈帽) 1개, 상모 옥정자(象毛玉頂子)·도금대(鍍金臺)·옥압영(玉壓纓)·자초영(紫綃纓), 흑사피(黑斜皮) 3장, 변아침석(邊兒寢席) 15장, 갱미(粳米)메쌀 20석(石), 소주(燒酒) 50병, 밀과자(蜜果子)꿀과자 5궤(櫃), 다식(茶食) 5궤(櫃)이 있었다.
[주1] 운판(雲板) : 선종에서 재당(齋堂)이나 부엌에 달고 대중에게 끼니 때를 알리기 위하여 울리는 기구. 청동(靑銅)으로 된 판을 구름 모양으로 만든 것. 형상으로 이름함. 죽이나 밥을 끓일 때에 세 번 치므로 화판(火板), 끼니 때에 길게 치므로 장판(長板)이라 함.
[주2] 동발(銅鈸) : 쇠붙이로 만든 타악기의 하나. 놋쇠로 된 냄비 뚜껑과 비슷한 악기로, 뒤에는 손잡이로 사슴 가죽을 달고 붉은 비단 끈을 늘어뜨린 모양이며 두 개가 한 벌이다. 자바라(啫哱囉)의 일종이다.
[주3] 경자(磬子) : 뿔 망치로 쳐 소리를 내는, 옥이나 돌로 만든 아악기(雅樂器).
[주4] 흑세마포(黑細麻布) : 검고 가는 삼베. / 백세저포(白細苧布) : 희고 가는 모시. / 백세면주(白細綿紬) : 흰색 고운 명주. / 남사피(藍斜皮) : 남빛 돼지가죽. / 흑사피(黑斜皮) 검은색 돼지가죽.
[주5] 표피심(豹皮心)·호피변(虎皮邊)·전피리(捵皮裏) : 표범 호랑이 가죽을 늘려서 만든 것으로, 일본이 조선초기 인삼과 더불어 가장 선호하는 물품이었다.
[주6] 잡채화석(雜彩花席) : 여러 가지 빛깔로 아름다운 무늬를 놓은 돗자리. / 만화석(滿花席) : 여러 가지 꽃무늬를 가득하게 놓아서 짠 돗자리.
[주7] 청밀(淸蜜) : 꿀벌이 꽃의 꿀샘에서 빨아들여 벌집 속에 저장하여 둔 달고 끈끈한 액체.
[주8] 명주(明紬) : 명주실로 무늬 없이 짠 옷감. 세는 단위는 필(疋)이고, 50필을 1동이라 한다
[주9] 전모(氈帽) : 조선 시대, 비 올 때 여자 하인이나 아이들이 맨머리에 쓰던 갓의 한 가지. 대테에 살을 대고 종이를 바른 뒤에 기름에 결어 만든다.
[주10] 상모 옥정자(象毛玉頂子)·도금대(鍍金臺)·옥압영(玉壓纓)·자초영(紫綃纓) : 벙거지(모자나 갓)의 꼭지에다 참대와 구슬로 장식(裝飾)하고 그 끝에 백로의 털이나 긴 백지 오리를 붙인 것으로 갓 꼭대기에 옥으로 만들어 단 장식(裝飾). 갓끈에 구슬을 달고 아름답게 도금하였고 자주색 명주실로 갓끈을 만들었다.
[주11] 변아침석(邊兒寢席) : 자주색 비단으로 만든 잠자리에 까는 돗자리.
[주12] 다식(茶食) : 밀가루나 쌀가루를 반죽하여 적당한 넓이와 모양으로 빚어서 바싹 말린 후, 기름에 튀기어 꿀 또는 조청을 발라 튀밥이나 깨고물을 입힌 조과(造菓)
(2) <대마도주가 진상한 품목>
① 세조 5년(1459년) 일본 원추고가 우리나라에서 보낸 물건 : 조미(造米) 5백 석(石), 유분(鍮盆)놋쇠 동이 4척(隻), 매(鷹) 한 쌍(雙), 사냥개(獵犬) 한 쌍(雙).
② 세조 9년 계미년(1463) 일본 국왕(日本國王)이 사인(使人)을 통해 보낸 토물(土物) : 별폭(別幅 물품 종류를 적은 종이)은 채화선(綵畫扇) 1백 파(把), 장도(長刀) 2자루[柄], 대도(大刀) 10파(把), 대홍칠목거완(大紅漆木車椀) 대소 합하여 70사(事), 대홍칠천방분(大紅漆淺方盆) 대소 합하여 20사(事), 홍칠흑칠잡색목통(紅漆黑漆雜色木桶) 2개(箇). 그 외 병풍(屛風) 1좌(坐), 숙녹비(熟鹿皮)2장(張), 면포(綿布 무명 피륙) 수십 장이 있었다.
③ 성종 1년 경인년(1470) 일본 국왕(日本國王) 회수납정소(懷守納政所) 이세수(伊勢守) 정친(政親)이 보낸 입도(入道) 등이 와서 바친 토산물 : 별폭은 금(金) 2원(員) 21냥쭝[兩], 주(朱)염료 4포(包)보따리 40냥쭝, 대도(大刀) 15파(把), 단자(段子) 1필, 수자(?子) 1필, 부채[扇子] 50본(本).
[주1] 별폭(別幅) : 물품(예물) 종류를 차례로 적은 종이.
[주2] 조미(造米) : 매갈이. 벼를 매통에 갈아서 왕겨만 벗기고 속겨는 벗기지 아니한 쌀.
[주3] 채화선(綵畫扇) : 채색(彩色) 그림이 그려진 부채.
[주4] 대홍칠목거완(大紅漆木車椀) 대홍칠천방분(大紅漆淺方盆) 홍칠흑칠잡색목통(紅漆黑漆雜色木桶) : 아주 붉게 옻칠한 나무수레와 놋그릇, 네모난 동이, 붉고 검은 잡색의 나무통.
[주5] 숙녹비(熟鹿皮) : 잘 매만져서 부드럽게 다루어 놓은 사슴의 가죽.
④ 대마도에 체류하며.
① 대마도주가 사절단에게 선물한 물품 : 환도(環刀)·장검(長劍)·선자(扇子)·전촉(箭鏃 화살촉)·다엽(茶葉 찻잎)·호초(胡椒 후추)·치자(梔子)·아청 단자(鴉靑段子 광택이 많고 두텁고 무늬가 든 비단)·초록 단자(草綠段子 비단)·남단자(藍段子 남빛 비단).
② 성종 7년(1476) 대마도 선위사(對馬島宣慰使) 김자정(金自貞)이 대마도에서 사절단의 경비로 사용한 물품 : 환도(環刀 군도) 1병(柄) 호초(胡椒 후추) 2근(斤), 다엽(茶葉 찻잎) 3근(斤) 화포(貨布 통용 화폐) 면포(綿布 솜 피륙).
8) 거제도를 경유한 통신사들의 시편(詩篇)
조선통신사 일행들은 자신들의 작품 속에서 두려운 항해 길과 낯선 왜국의 상황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사신들이 보편적으로 표현하는 향수(鄕愁)와 풍광 그리고 여정의 즐거움, 해상의 상황을 나타내는 작품 등 다양했다. 여기에서 사절단의 향수는 당시 불안한 한일관계에 비추어보자면 사행(使行)의 부담에서 나온 심리적 요인이 더욱 컸다고 여겨진다.
조선전기 사신(使臣)들은 왜국에 대한 무한한 자신감이 그 바탕에 깔려 있어 의연한 태도를 가지고자 노력하였고, 이러한 태도는 그대로 작품에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대마도로 출발하기 前의 국토의 남단 거제도에서 읊은 작품은 한가함에 이어 여유로움까지 느껴진다. 이들이 거제도의 아름다운 해상에서 천혜의 절경과 당시 사절단의 풍류를 기록했다는 점, 그리고 이들의 작은 시구 하나하나에서 어렴풋이, 옛 거제도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으니 이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가 있다. 일본으로 향하는 사절단은 기본적으로 평화교린을 목적으로 하는 바, 조국을 대표하여 떠나는 자부심 또한 대단했을 것이다.
(1) 조선초기 학자인 이범(李範) 선생이 통신사 수행원으로 대마도를 가던 중에 거제도에서 읊은 한시(漢詩)이다.
① 거제도 가을풍경[右岐城詠]
烟花開千戶 연화(煙火)는 온 마을에 피어나고,
桑麻蓋四鄰 상마(桑麻)는 사방을 덮었네.
海山秋色秀 바다와 산에 가을 색이 빼어나고,
洲橘晩香新 물가에 열린 귤(유자)은 늦게까지 향기 새롭네.
[주1] 연화(煙火) : 사람의 집에서 불 때는 연기(煙氣)
[주2] 상마(桑麻) : 뽕나무와 삼.
집집마다 군불 때는 연기(煙氣)인 ‘연화(煙火)‘는 곧, 의식주 중에서 음식과 잠자리를 의미하고, ’뽕나무와 삼’을 뜻하는 상마(桑麻)는 옷가지를 뜻한다. 거제도 늦가을 자연과 풍광을 아름답게 묘사하였다. 여기에다 유자(귤)는 거제 토산물로써 그 향기 속에, 오감의 풍류와 문화를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거제도의 한시 중에 이 시편을 가장 좋아한다. 너무나 평온하고 행복한 고향 거제도 모습을 가장 멋지게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이 시의 배경은 늦가을 저녁나절, 집집마다 아궁이에 군불을 넣을 때인가 보다. 거제도 초가집마다 굴뚝에 연기가 올라가고, 뽕나무와 삼나무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데, 물가마다 노란 유자가 열려, 그 향기가 온 마을을 덮었으리라. 시편 3구까지는 온통 시각적인 그림을 펼쳐 놓더니 마지막 구에는 시각에서 후각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이범 선생의 문학적 천재성을 엿보게 한다.
② 거제도 해상[巨濟海上] / 이범(李範)
群山揷海淺還深 여러 산이 바다에 꽂힌 듯 얕았다가 깊었다가
頃刻能晴又易陰 잠깐 사이 개였다가 또 쉽게 그늘지네.
誰倚船窓夜吹笛 누군가 밤에 선창(船窓)에 기대어 피리 부는지,
滿船風雨老龍吟 배에 가득한 비바람에 늙은 용이 읊조리는 듯.
(2) 거제해상에서[巨濟海上] 송처검(宋處儉)과 이근(李覲) 1459년 일본통신사.
① 조접부상만리회(潮接扶桑萬里回) / 송처검(宋處儉, 세종 세조 문신).
山從見乃千峯斷 “산은 견내량(見乃梁)를 따라 천 봉우리가 솟아났고,
潮接扶桑萬里回 파도는 부상(동쪽바다)에 닿았다가 만 리 길 돌아온다.”
② 연분도구만조회(煙分島口晩潮回) / 이근(李覲, 세조때 문신).
天接海門秋水遠 “하늘은 해문(海門)에 닿은 듯 가을 물결이 멀고,
煙分島口晩潮回 연기는 섬 어귀를 가르고 늦은 파도 돌아오네.”
이근(李覲)선생은 세조5년 1월에 왕명으로 <잠서주해(蠶書註解>를 편찬했다. 세조5년 1459년 8월 대사성을 지낸 송처검(宋處儉)이 일본국 통신사로 임명되었을 때, 당시 서장관은 이근(李覲)이었다. 예물을 가지고 일본으로 가서 우리나라에 없는 서적 등 물건을 사오게 하였다. 이 분들이 대마도로 출항할 때 거제도 견내량을 거쳐 지세포에서 대기했다가, 대마도로 건너갔다가 일본본토로 갔다. 1460년 10월6일 새벽에 100여명이 세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일본국왕선2척 대마도왜선2척과 함께 출항하였으나, 큰 풍랑을 만나 두 분 다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3) 조선초기 1479년 김흔(金訢,1448년∼미상) 선생은 일본통신사 일행인 백부[伯符 조지서(趙之瑞)]가 심히 사랑한, 거제 기생 '신월(新月)'이 있었는데, 그녀는 흥이 일면 미친 듯이 노래하고 어깨가 산처럼 솟듯이 춤을 추었다. 죽간을 던지듯 붓을 놀리면 멋진 문장이 저절로 짝을 이루었다한다.[岐城妓名新月 伯符甚寵 脫㥽狂吟肩聳山 文章曺植富波瀾 搖毫擲簡]. 아래 시는 가무가 출중하고 미색인 기생 "신월"을 백부(伯符)가 사모하긴 하나, 모든 기방 손님을 접대해야하는, 어찌할 수 없는 현실에 안타까운 심정을 읊었다. / 다음 시(詩) 몇 편은 대마도로 출발하기 전에 거제시 지세포에서 여러 날을 대기하다가 지은 시편이다.
① 거제기생신월[岐城妓名新月] 자준[이계동(李季仝)1450~1506]에 차운하여 백부[伯符 조지서(趙之瑞)]에게 희롱삼아 지어 바치다.(次子俊韻 戲呈伯符) / 김흔(金訢 1448∼1492)
筆掃千人孰敢當 뭇 사람들이여~ 붓글씨로 누가 감히 맞서리오.
飄飄逸氣蓋蠻鄕 표표히 나부끼는 빼어난 기운이 변방(거제)을 뒤엎었네.
枉將大手裁長句 왕청스레 큰 재주로 긴 글귀 짓고
寄與佳人空自傷 가버린 절세미인 생각에 공염불만 태운다.
愁來一夕不禁當 내 얼굴이 바뀐, 하룻밤을 견딜 수가 없도다.
新月唯應照兩鄕 초승달이여~ 오직 두 마을만 비춰주소서.
歌舞千場供俠少 가무로써 숱한 소리판에 기방고객 모시니
任他羈客自悲傷 어쩔 수 없는 나그네, 절로 가슴이 아파온다.
脫㥽狂吟肩聳山 흥이 일면 미친 듯 노래하며 어깨가 덩실 산처럼 솟아났고
文章曺植富波瀾 문장은 저절로 짝을 이루어 파도의 물결같이 풍부하였으니
搖毫擲簡誰能供 죽간을 던지듯 붓을 놀리면 누가 감탄하지 않으랴.
百賦千篇不澁艱 천편의 온갖 시문이 어렵고 까다롭지 않았다네.
世途險巇千仞山 인생길이 험난하여 천 길 높은 산과 같고
宦海狂奔萬丈瀾 파도 이는 바다가 광분하듯 파란만장하다네.
回首東溟平似拭 돌아 본 동쪽 바다가 씻은 듯 평평하지만
憑君莫賦行路難 그대여~ 세상일이 험난하니 시편을 읊지 마시게.
② 자준의 시에 차운하여[次子俊韻]. 자준은 이계동(李季仝 1450~1506)이다.
鯨海千層浪 고래바다에는 수많은 겹겹의 물결 일고
龍驤萬斛船 용이 달리며 수많은 배들이 다닌다.
共看天遠大 모두 보는 건, 원대한 하늘 위
幾見月遶娟 아름답게 에워싼 달을 몇 번이나 바라본다.
揮麈瀾翻口 주미를 휘두르듯 물결이 어귀에 나부끼고
垂珠山聳肩 구슬 같은 산이 솟은 어깨를 드리운 듯하네.
知君棟梁具 그대가 쓸만한 동량임을 아는데,
構廈豈容捐 큰 집을 지어야지, 어찌하여 속내를 내비치려 하는가?
③ 밤비는 배를 적시고[舟中夜雨] 숙도 시에 차운하여(次叔度韻)
蕭蕭淅淅夜深聽 솔솔 부는 쓸쓸한 바람소리, 깊은 밤에 들려오고
亂打蓬窓點滴聲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 봉창을 두들기네.
獨掩塵編愁不寐 먼지 앉은 책 홀로 엿보며 시름겨워 잠 못 이룰 제,
孤燈影裏旅魂驚 외로운 등불 그림자 속에서 잠 못 드는 나그네.
獨倚孤蓬歷歷聽 홀로 의지한 외로운 쑥(떠도는 몸), 또렷이 들리는
和風蕭颯作秋聲 건들바람 스르르, 가을소리로다.
遙知今夜空閨裏 멀리서도 오늘 밤 텅 빈 규방임을 알지만
滴破佳人夢自驚 꿈속에 가인(佳人)이 물방울 흩어지듯 사라져 놀라 깼다네.
④ 김흔(金訢)이 1479년 조지서趙之瑞)와 이계동(李季仝)과 함께 사신으로 일본 대마도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거제도 해상에서 지은 시들이다. 칠언율시(七言律詩)
◯ 구일(九日) 배에 내려 전봉에 올라 서쪽으로 바라보니 동래ㆍ웅천ㆍ거제의 모든 봉우리를 낱낱이 셀 듯하였다[九日 舍舟前峯 西望東萊 態川 巨濟諸峯 歷歷可數]
愁邊無奈菊花枝 시름 끝에 국화 가지를 어찌할 수 없어서
三嗅淸春當一巵 맑은 향기 세 번 맡아 한 잔 술 마시는 것을 대신했네
作客不堪逢令節 나그네 되었으매 좋은 때 만난 것을 견디지 못하겠고
憑高逾覺在遐陲 높은 곳 의지하매 먼 변방에 있음을 깨닫겠다
蕭蕭草木窮秋後 소소한 풀과 나무는 늦가을 뒤요
渺渺煙波薄暯時 묘묘한 연기와 물결은 해가 지는 때 일세.
迢遞故山登眺處 멀고멀다 내 고향을 산에 올라 바라보니
遙知欠我醉吟詩 술에 취하고 시를 읊음에도 내게 없는 것을 비로소 알겠구나.
試登絶頂作重陽 시험 삼아 산마루에 오르매 중양절이 되어
旋買前村濁酒觴 급히 앞마을의 탁주를 사서 잔질해 보니
佳節偏驚孤客意 좋은 절후는 치우치게 외로운 손의 뜻을 놀라게 하는데
寒花只作故園香 차가운 꽃은 다만 고향 동산의 향기를 가졌구나.
明年何處逢今夕 명년에는 어느 곳에서 오늘 밤 만나리오.
此日扁舟滯異鄕 이날에는 조각배로 타향에 머물거니
不見長安渾欲老 장안을 보지 못하고 완전히 늙으려 하는데
孤雲落照共蒼茫 외로운 구름과 떨어지는 해가 함께 아득하여라.
(4) ‘문절공이 이장군에게 드린다’ 차운하여[次文節公贈李將軍韻] 이예(李藝)는 울산군(울주군)의 아전이다. 조선 태조 병자년(1396년) 울산군수 이은(李殷)이 왜인에게 사로잡혀 대마도로 끌러갔다. 이예가 대마도로 건너가 포로로 수년간 잡혀있는 군수 이은을 관리의 예로써 섬기었다. 왜 장수가 그 의리에 감동하여 특별히 이은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기에 이르렀다. 조정에서 그 재주를 특별히 중용하고자 벼슬을 내리니 마침내 중군총제에 이르렀다.(李藝 蔚山鄕吏也 洪武丙子 郡事李殷 爲倭所虜 藝卽出隨 殷在虜中數歲 恒執吏禮 倭帥感其義 特幷殷還國 藝擢用 至中軍摠制終) / 김수온(金守溫, 1410~1481)
主辱臣當死 임금이 욕되면 신하는 마땅히 죽어야 하고
州危吏必行 나라가 위기에 빠지면 관리는 반드시 행하여야 한다.
一朝能抗節 하루아침에 절조(節操)를 굽히지 말아야하니
千載永垂名 천년 동안 그 이름 영원히 드리우소서.
絶域艱難遍 먼 지역에서 괴롭고 어려움을 두루 겪고
蒼波頃刻生 만경창파에서 겨우 살아 난
此心終不變 이 마음, 끝내 변하지 않으니
利義兩途明 이익과 정의(正義)의 두 길을 밝히셨다.
◯ <지세포만(知世浦灣)> 고영화(高永和)
처녀옥녀(玉女) 신선되어 연지 찾아 상봉할 때
지세만에 비친 달빛 교태로다 살랑살랑
푸른 쪽빛 바다위로 섬의 별이 내려와서
자궁벽에 착상되면 경사로다 덩실덩실
억만년 생리통을 쏟아내던 포말(泡沫)도
씻은 듯이 사라지네 놀라와라 어귀둥실
[주] 처녀옥녀 : 옥녀봉(玉女峰 554.7m). 연지 : 연지봉(지세포 봉수대 산봉우리)
○ 거제시 지세포에 출발한 조선사절 선단(船團)은 대마도 서북편 해안에 대부분 도착하였고 이후 15세기 대마도주(관청)가 거주하던, 대마도 북섬 사카(佐賀) 항구로 이동하였다(15세기 말엽부터 대마도 남섬 이즈하라로 옮김). 조선시대 공식적인 일본 파견 외교사절 횟수가 약30회에 달하는데 그 중에 18회가 조선전기에 이루어졌다. 사카(佐賀) 항구에 있는 원통사(圓通寺)는 당시 대마도주가 집무를 보던 관청이 있었던 곳이다. 특히 일본으로 가는 외교관으로서 최대의 업적을 남긴, 통신사 이예(李藝 1373~ 1445)의 공적비가 여기에 있다.
① 조신(曺伸 1454~1528) : 자는 숙분(叔奮), 호는 적암(適庵),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두시언해(杜詩諺解)》를 지은 조위(曺偉)의 서형(庶兄)이다. 문장에 뛰어났고 특히 시를 잘 지었다. 신숙주(申叔舟)를 따라 일본에 가 문명을 떨쳤고, 돌아와 사역원 정(司譯院正)으로 발탁되었다. 중종(中宗)의 명으로 김안국(金安國)과 더불어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를 편찬하였다. 외국어에도 능통하여 역관으로 명나라에 7번, 일본에 3번 다녀왔다. 명나라에 갔을 때에는 안남국(安南國) 사신과 시로 수창하여 외국에까지 이름을 떨쳤다. 만년에는 금산(金山)에 은거하면서 풍류로 세월을 보냈다. 저서에 《적암시고(適庵詩稿)》ㆍ《소문쇄록(謏聞瑣錄)》ㆍ《백년록(百年錄)》 등이 있다. 조숙도(曺叔度) : 숙도는 조신(曺伸)의 자인 듯하다.
② 이형원(李亨元 1440∼1479) : 조선전기 문신으로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이르렀다. 성종 10년 1479년 10월에 부제학 이형원과 서장관 김흔(金訢)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으나, 통신사 이형원은 대마도에 이르러 해로가 험난하고 풍파에 놀라 병이 되어 글을 올려 이 사정을 말하였다. 성종은 국서와 폐백만 대마도주에게 전하고 돌아오게 명하여, 대마도에서 돌아오는 중에 이형원(李亨元)이 병을 얻어 거제도 지세포 전사(傳舍 객사)에서 죽었다. 이로부터는 다시 사신을 보내지 않고 일본에서 사신이 오면 예로써 접대할 뿐이었다. 예조참판에 추증되었다.
③ 김흔(金訢, 1448∼1492) : 조선초기의 문신으로 자는 군절(君節)이고 호는 안락당(顔樂堂)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으로 김전(金詮)의 형이고 김종직의 문인이다. 1471년(성종2)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문묘에 배알하러 억지로 들어갔다가 폐출되었다. 1473년 성균관 전적, 병조좌랑이 되었다. 1475년 승문원 교검을 거쳐, 1478년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이듬해 통신사 서장관으로 대마도에 갔다가 병으로 인해 돌아왔다. 1480년 문관 중시에서 율시로 장원했다. 이듬해 명나라에 다녀와 예문관 응교가 되었다. 1483년 전한을 지내고 이듬해 직제학에 승진하여 천안지방 수령의 불법행위를 사찰하였다. 1486년 공조참의에 이르렀으나 풍질(風疾)로 여러 차례 사직을 원해 1487년 상호군에 임명되어 요양했다.
[주] 안락당집 권지3[顔樂堂集卷之三] 연보(年譜) : 1479년 4월 일본 국가통신사로 부제학 이형원과 함께 사신으로 갔다. 부사 대호군 이계동(李季仝)과 더불어 사신을 보좌하는 서장관(기록 담당)으로 파견되었다. 6월7일 새벽에 거제현 지세포에서 배가 출발하여 해가 저물어 대마도 사수라포에 정박했다. 6월18일 고우에 다다랐는데 고우는 대마도주가 거주하는 곳이다. 이전에 병을 얻어 걸을 수가 없었다. 글을 써서 조정에 전하고 왕명을 얻어 돌아왔다. 9월17일 동래현 부산포로 돌아와 정박했다[成化十五年己亥四月 國家通信日本 以副提學李亨元爲使 行大護軍李季仝爲副 差公書狀官以遣 六月初七日黎明 發船于巨濟縣知世浦 日昃 泊對馬州沙愁羅浦 十八日 抵古于 古于 卽島主所居也 上个疾作 不能行 書聞 命還 九月十七日 還泊東萊縣釜山浦]
④ 고득종(高得宗 1388∼1452) :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자전(子傳), 호는 영곡(靈谷) 순원(順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걸(臣傑)이며, 아버지는 상장군 봉지(鳳智)이다. 1413년(태종 13) 효행으로 천거받아 음직으로 직장(直長)이 되고, 이듬해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대호군(大護軍)·예빈시판관(禮賓寺判官) 등을 거쳐, 1427년(세종 9)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437년 첨지중추원사가 되고 이듬해 호조참의로서 종마진공사(種馬進貢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39년 통신사가 되어 부사 윤인보(尹仁甫), 서장관 김몽례(金夢禮)와 함께 일본에 가서 아시카가(足利義敎)와 오우치(大內持世)의 서계(書契)를 가지고 돌아왔다. 1441년 예조참의로 다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는데, 그때 함부로 약재를 청하고, 또 이만주(李滿柱)와 동범찰(童凡察)의 처치를 요구한 일로 귀국 즉시 강음현(江陰縣)에 유배되었다. 2년 후 풀려나와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고, 1448년 도전운사(都轉運使)가 되어 충청도와 전라도의 쌀을 평안도로 운반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문장과 서예에 뛰어났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사후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저술이나 작품이 전하는 것은 없고,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몇 편의 시가 전한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⑤ 이계동(李季仝 1450~1506) : 본관은 평창(平昌) 자는 자준(子俊), 1470년(성종 1)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훈련원판관에 임명되었다. 1476년 무과 중시에 급제해 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이 되었다가 창성부사로 나갔다. 이 해 10월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의 부사로 대마도에 갔다가, 정사 이형원(李亨元)이 병으로 죽자 일을 잘 처리하고 돌아왔다. 같은 해 황해도관찰사로 나가게 되었으나 경력이 없어 동부승지로 임명되었다가, 도원수 윤필상(尹弼商)의 종사관으로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고 돌아와 형조참판에 승진하였다. 1479년 선전관이 되었다. 1480년 주문부사(奏聞副使)로 중국으로 떠나기 전의 사연(賜宴 : 베풀어준 향연)에서 불경한 행동으로 전라도 해남현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이듬 해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쓴 성종의 명으로 동지중추부사로 임명되었다. 1482년 여진어에 능통하고 그들의 사정을 잘 안다는 점이 인정되어 함경도절도사로 임명되었다. 이 때 여진을 성심으로 대해 재임 중 그 지역이 안정되었으며, 뒷날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에는 모련위(毛憐衛)의 여진인들이 늘어서서 인사를 할 정도로 신망을 받았다. 1486년 좌윤이 되어 정조사(正朝使)의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도상중원교사지법 圖上中原敎射之法≫을 필사해 왕에게 바쳤다.
1487년 형조참판을 거쳐 전라도병마절도사로 나갔다. 1489년 황해도에 김경의(金京儀)·김막동(金莫同)의 도적이 일어났을 때 금제사(擒制使)로 파견되어, 구질포지산(仇叱浦只山)을 공격해 우두머리를 체포하는 등 적을 소탕하고 돌아와 포백(布帛)과 무기를 상으로 받았다. 1490년 무과 출신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사양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이듬 해 야인(野人) 이마거(尼麻車)가 조산(造山)에 침입했을 때 윤필상의 추천으로 부원수가 되어 도원수 허종(許琮)을 보좌해 토벌에 나섰다. 이 때 큰 성과는 없었으나 돌아와 형조판서에 올랐다. 1492년 경기도관찰사로 나갔을 때, 계속된 흉년으로 도둑이 들끓자 연로수직법(沿路守直法)을 만들어 검색을 강화했으나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494년 지중추부사로서 성종이 죽자 고부사(告訃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중국의 무기 통제나 조선에 대한 태도 등에 대해 보고하였다. 1498년(연산군 4)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으며, 이듬 해 왕명으로 이극균(李克均)과 함께 ≪서북제번기 西北諸藩記≫와 ≪서북지도 西北地圖≫를 편찬해 올렸다. 1500년 병으로 병조판서에서 물러났다. 병조판서 재임 시에 특히 북방에 관한 여러 시책에 관심을 기울였고 용의주도한 대비를 하였다. 1504년 우찬성이 되었다가 이듬 해 좌찬성과 영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무신으로 크게 활약했으며 독서에도 힘써 당시 문무를 겸했다는 칭찬을 들었다 한다. 시호는 헌무(憲武)이다.
⑥ 이예(李藝 1373~ 1445) : 본관이 학성(鶴城) 호는 학파(鶴坡), 원래 울산군의 기관(記官) 출신인데, 1396년(태조 5) 왜적에게 잡혀간 지울산군사 이은(李殷) 등을 시종한 공으로 아전의 역에서 면제되고 벼슬을 받았다. 1400년(정종 2) 어린 나이로 왜적에게 잡혀간 어머니를 찾기 위해 자청해 회례사(回禮使) 윤명(尹銘)을 따라 일본의 삼도(三島)에 갔으나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1401년(태종 1) 처음으로 이키도(壹岐島)에 사신으로 가 포로 50명을 데려온 공으로 좌군부사직에 제수되었다. 그 뒤 1410년까지 해마다 통신사가 되어 삼도에 왕래하면서 포로 500여 명을 찾아오고, 벼슬도 여러 번 승진해 호군이 되었다. 1416년 유구국(琉球國)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포로 44명을 찾아왔고, 1419년(세종 1) 중군병마부수사(中軍兵馬副帥使)가 되어 삼군도체찰사 이종무(李從茂)를 도와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이예는 거제도 지세포를 경유해서 대마도를 다녀왔다.
1422·1424·1428년에는 각각 회례부사(回禮副使)·통신부사 등으로, 1432년에는 회례정사(回禮正使)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그런데 당시 부사였던 김구경(金久冏)이 세종에게 사무역(私貿易)을 했다고 상계(上啓)해 한 때 조정에서 논란이 되었으나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
1438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승진한 뒤 대마도경차관이 되어 대마도에 다녀왔다. 1443년에는 왜적에게 잡혀간 포로를 찾아오기 위해 자청해 대마주체찰사(對馬州體察使)가 되어 다녀온 공으로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승진하였다. 조선 초기에 사명으로 일본에 다녀온 것이 모두 40여 차례, 총667명 포로를 구출했다고 한다[조선실록 기록 上].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⑦ 박서생(朴瑞生 ?~?) : 조선의 문신. 자는 여상(汝祥), 본관은 비안(比安), 호는 율정(栗亭),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고조부는 판도사 판서(版圖司 判書)를 지낸 박계오(朴繼五)이고, 증조부는 직장(直長) 박종주(朴宗柱)이고, 조부는 예부 낭중(禮部 郎中) 박윤보(朴允甫)이고, 부(父)는 박점(朴漸)이다. 손자 박효원(朴孝元)은 춘추관 기사관(春秋館 記事官)으로 『세조실록(世祖實錄)』을 편찬에 참여하였고, 장령(掌令), 사간(司諫)을 역임하였다. 박서생은 1401년(태종1)문과 중시에 급제하여 좌정언에 제수될 정도로 학문이 뛰어 났다. 이후 1419년(세종1) 사헌부 집의, 1426년 대사성, 대사헌, 1429년 우군첨총제(右軍簽摠制),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 ; 1430) 공조ㆍ병조의 참의(參議), 판안동 부사(判安東府事 ; 1432) 역임. 이 등을 역임하였다. 태종 대에는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특히 1428년(세종 10) 조선 최초의 통신사 정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일본의 제도와 풍습을 소개하면서 좋은 점을 차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수차와 화폐사용, 교량과 역원(驛院)의 정비, 상가의 진열장 및 간판 정비, 사탕수수 재배, 각종 염색이나 은박지 제조법 소개 등 매우 실용적이고 시대를 앞서가는 건의 내용이 있다. 박서생의 관력이나 시무책 건의는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다.
⑧ 변효문(卞孝文 1396∼?)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초계(草溪). 초명은 계문(季文), 자는 일민(一敏). 경(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빈(贇)이고, 아버지는 판윤(判尹) 남룡(南龍)이며, 어머니는 영문하부사 염제신(廉悌臣)의 딸이다. 1414년(태종 14) 알성문과에 을과 3등으로 급제, 내외직을 지낸 뒤 직제학을 거쳐 1428년(세종 10) 봉상시소윤(奉常寺少尹)을 지냈다. 1439년 판내섬시사(判內贍寺事)를 거쳐 그 이듬해 첨지중추원사가 되었으나, 이전에 회령대후(會寧待候)로 재직시에 귀화한 여진인들의 의복지급사건에서 죄를 지은 사실로 의금부·사헌부 등의 탄핵을 받아 1441년 파직되었다. 1443년 첨지중추원사로 복직되어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으나, 태종 때의 죄인이었던 이속(李續)의 손자인 인휴(仁畦)를 통신사 수행시 대동하였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다. 1446년 빈전도감제조(殯殿都監提調)를 거쳐 경창부윤(慶昌府尹)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 이듬해에 이전에 훈련제조(訓鍊提調) 재직 때에 아들 이흠(李欽)의 무과시험에서 감찰(監察)에게 청탁한 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직산(稷山)으로 장류(杖流 장형을 받고 유배당함)되었다. 1454년(단종2) 다시 중추원부사를 거쳐 경주부윤·전주부윤을 역임하였으나, 1458년(세조4) 전주부윤 재직 중 축재한 죄로 파직되었다. 1444년『오례의주(五禮儀注)』를 상정(詳定)하였고, 앞서 최치운(崔致雲)·이세형(李世衡)·김황(金滉) 등과 함께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을 편찬하였다.
⑨ 윤인보(尹仁甫 생몰년 미상) : 조선전기 무신, 1414년(태종 14) 왜관통사(倭官通事)를 지내고 1420년(세종 2) 일본국회례사통사(日本國回禮使通事)를 거쳐 1424년 왜통사(倭通事)·호군(護軍) 등을 역임하였다. 1430년 통신사통사(通信使通事)를 거쳐 1440년 통신부사상호군(通信副使上護軍)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450년(문종 즉위년) 상호군으로 대마도 상인들이 많이 오는 것을 엄하게 경계하도록 상소하였다. 1455년(세조 1) 상호군으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⑩ 김자정(金自貞 생몰년 미상) : 조선전기 문신, 본관은 김해(金海). 진사시를 거쳐 1453년(단종 1)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집현전권지정자(集賢殿權知正字)에 제수되었다. 1455년 세조 즉위에 협조하여 좌익공신(佐翼功臣)에 책록되었다. 그 뒤 승문원박사를 거쳐, 1470년(성종 1) 예조정랑이 되어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이어서 장령(掌令)·참교(參校)를 지내며 한어(漢語)의 교육을 강조하였다. 1474년 선위사(宣慰使)로서 대마도에 건너가 왜인문제를 처리하고 돌아와, 1481년노사신(盧思愼) 등과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였다. 이어 대사간을 역임하고, 1483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대왜문제를 잘 처리하였다. 그 뒤 병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충청도관찰사를 지냈으며, 1485년 하정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서 전라도관찰사·대사헌·개성유수를 지내고, 1492년 호조참판이 되었다가 뇌물수뢰 혐의로 탄핵을 받고 곧 동지중추부사로 체직되었다. 1491년 정조부사(正朝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연산군이 즉위하자 하정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497년(연산군 3) 지의금부사로 무오사화를 처리하여 논공행상되었고, 그 뒤 한성부판윤을 지냈다. 어학, 특히 한어에 능하여 외교업무에 공이 많았다. 시호는 정명(精明)이다.
⑪ 정성근(鄭誠謹 ?~1504) : 조선전기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이신(而信)·겸부(兼夫). 자순(子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설(舌)이고, 아버지는 대제학 척(陟)이다. 어머니는 이양몽(李養蒙)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74년(성종 5)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479년 수찬으로 경연관(經筵官)을 겸하였다. 1481년 부교리로서 승지의 업무를 맡을만한 인물로 추천되었고, 경차관(敬差官)으로 경기도에 파견되어 교동현의 유민(流民)을 진휼하였다. 이듬해에는 홍문관부응교로서 구황적간(救荒摘奸)하기 위해 전라도에 파견되었으며, 1483년 황해도경차관이 되었다.
그 뒤 홍문관전한을 거쳐 대마도선위사(對馬島宣慰使)로 파견되었다. 1487년에는 시강관으로 경연에서 용인(用人)의 법도를 지켜야 함을 주장하였다. 이 해 직제학이 되었다. 그가 선위사로 대마도에 갔을 때, 대마도주가 주는 화선·호초(胡椒) 등을 모두 되돌려주기도 하였다. 그 뒤에 도주가 그 물건을 또 특별히 보내와서 나눠주게 했으나, 그가 완강히 사양하여 왕은 그 물건을 도로 대마도에 돌려보냈다.
그 뒤 해주목사를 거쳐 1490년반우형(潘佑亨)·표연말(表沿沫) 등과 함께 사유(師儒)로 선발되기도 하였다. 이어서 경기도경차관·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에 이르렀는데, 이 때 해주목사로 재직할 때의 부정으로 탄핵을 받자 사직을 청하였다. 1494년 성종이 죽자 3년 동안 수묘했으며, 1495년(연산군 1) 행호군으로 한직에 물러나 있다가 다시 정계에서 축출되었으나, 1497년에 다시 서용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참수되었으나, 중종 즉위 후에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 되고, 그의 충효로 아들이 녹용(錄用)되었다. 1507년(중종 2)에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정문이 내려졌다. 또한,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광주(廣州)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절(忠節)이다.
⑫ 신숙주(申叔舟) : 조선 세종세조 때의 문신(1417~1475). 본관은 고령으로 자는 범옹(泛翁)이며 호는 보한재(保閑齋), 희현당(希賢堂)이다. 영의정을 지냈으며,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창제와 보급에 공을 세웠다. 1443년 2월 21일에 부사직(副司直)이던 그는 다시 훈련원 주부에 임명되어 조선통신사 변효문(卞孝文)의 서장관 겸 종사관(書狀官兼從事官)으로 9개월간 다녀왔다. 계해조약에도 참여했다. 1464년 7월 일본에 파견되는 통신사(通信使)가 되어 배편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7월 19일 일본 국왕 고나하조노가 병으로 죽었으므로 일본 측의 대접은 소홀하였고 그해 12월 배편으로 귀국하였다.
10) 맺음말
거제도(巨濟島)는 크고 아름답다. 제주도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섬으로 해안선만 900리에 달하며 60여개 섬을 알처럼 품고 있다. 사면이 바다인 환해천험(環海天險)의 거제섬은 왜구가 눈앞에 놓여 있었던 지정학적 위치로 인한 요해처(要害處), 즉 적을 막기에 긴요한 용반호거(龍蟠虎踞)의 땅이었다. 거제도는 한반도의 동남쪽 대한해협의 끝자락에서 궁벽하고 고독한 곳에 머물지 않고 대양을 향해 나래를 펴는 산명수수(山明水秀)의 고장이기도 하다.
또한 거제도는 고대 해상교통의 요충지로써 교역에 의존해 살아왔다. 우리나라 남부해안 지역과 제주도 대마도 이끼섬 큐우슈우 등지로 왕래하여 재정이 풍부하였고 여러 문화가 용광로처럼 융해되어 다양성과 역동성이 넘쳐난 곳이었다.
1550년경 거제도 유헌(游軒) 정황(丁熿)은 그의 문집에서 거제도를 서술하길, “산하는 일본과 통하고 성곽은 신라 때부터 있었다. 조수를 이용하여 백제국이 통상하고 장사를 했으며 나라가 태평하여 물품과 재화가 서로 옮겨가며 무역을 했었다. 생각해보니, 대마도를 마주보는 땅의 경계에서 동쪽으로 갔었고, 맑은 날에 한번 훑어보아도 또렷이 국토의 끝(대마도)이 보인다.[山河通日本 城郭自新羅 潮通商賈百濟國 昇平物貨相貿遷 惟東案對是對馬 晴日分明一眸邊]”라고 적고 있다.
거제도는 고려말부터 설치되기 시작한 남동해안의 수군진영의 구축으로 바닷길이 안정을 찾기 시작하면서 계해조약이 발효되고 거제7목장이 설치되면서 마침내 조선초 15세기에는 대부분 일본으로 가는 조선사절단(일본통신사)이 거제시 지세포에서 머물다가, 대마도로 가는 해로(海路)의 기착지 및 출발지가 되었다. 이로써 국제 무역항으로 세관이 들어서고 통신사 행렬이 이어지면서, 통신사(通信使)를 영접∙호위하는 영빙선(迎聘船)과 어업왜선의 출입이 빈번해져 아름다운 거제도의 풍광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고의 풍요로운 고장으로 변할 수 있었다. 비록 16세기로 접어들면서 통신사의 유숙지(留宿地) 및 출발지로 쇠퇴하기는 했지만 우리나라 해양문화의 역사에서, 언제나 커나 큰 비중을 차지했던 자부심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또한 거제시 지세포(知世浦) 해상공원[해양문화관, 어촌박물관]에 여말선초, 통신사 사절단이 이 항구에서 머물다 출발했음을 알리는 작은 표지석이라도 설치해야 하며 그들이 남긴 기록을 이용해 역사가 있는, 옛 통신사 문화를 덧붙여야 한다. 여기에 조선통신사 선박 한척을 복원해서 전시할 필요도 있다. 역사는 언제나 되풀이 되어왔으니 이에 옛 항해 길을 복원하는 대마도 직통 여객선을 개설할 필요가 있으며, 거제문화예술단체에서 조선통신사 행렬재현이나 무대행사(해신제, 음악, 무용, 연극 등) 하나 정도는 적어도 새로 제작해, 지세포 해양공원에서 연중행사로 기획해 내야한다. 특히 지세포만 일대는 대명콘도 요트학교 해양문화관 어촌전시관이 들어서 있다. 이러한 시설들과 연계해 통신사 문화를 덧붙여 관광해양도시의 발판으로 삼아야한다.
비록 부산광역시가 2002년부터 심포지움을 통해, 2003년 조선통신사 재단을 만들고 현재 통신사 문화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더라도, 부산시가 주도하는 것은 임진왜란 이후의 12회, 약200 년간의 조선통신사 문화이다. 거제시는 조선전기 통신사 문화를 따로 일구고 창출해내면 된다. 이후 부산시와 연계해 ‘광역지역 문화축제‘로 협력하면 될 것이다.
생각건대, 과거 통신사 일행의 역사문화는 지나간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법고창신(法古創新)’이란 말이 있듯이, 현재의 시점에서 옛 역사문화를 되돌아보고, 변화와 혁신을 통해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 내야 한다. 역사는 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미래의 문제로 이어진다. 그 옛날 동아시아 해상교통로였던 사실을 똑바로 직시해야하며, 다시금 문화가 오고가고 문명이 전해지는, 통로의 핵심요지(核心要地)로 되살려내야 하겠다. 이에 일운면은 대마도 작은 도시[북섬 사카(佐賀) 15세기 대마관청]와 자매결연을 맺는 것은 물론, 유구한 거제도와 대마도의 역사문화를 다시금 교류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옛날 같은 섬 문화를 공유했던 대마도는 우리나라를 제외하고 거제도와 가장 가까운 곳이다. 이를 냉정히 통찰하여, 서로를 인정하고, 거제도와 대마도가 ‘성신교린(誠信交隣)‘ 즉 성실과 신의의 정신으로 새로운 21세기를 준비해 나가야한다. 현대(現代)에 접어들어, 거제도에서 세계 최고의 조선소가 세워진 것도 결코 우연(偶然)이 아니라, 면면히 이어온, 자랑스러운 거제도 역사의 오랜 맥락에 그 뿌리가 있음이니, 지금부터 지역의 미래를 위해, 한걸음씩 초석(礎石)을 다져 놓아야 할 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