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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39
출애굽기 20장 1-17절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났을 때 성경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말씀합니다(요17:3).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구원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 할지라도 신자 안에는 부패성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죄책이 사라진 것은 사실이나 여전히 부패성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죄 가운데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다. 잠시 또는 오랫동안 머물러 있는 경우도 있을 수 있지만 거기에 안주하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할 때 죄에 대하여 내버려두시는 법이 있으신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죄를 지을 때 회개 하게 됩니다. 영생을 향하여 가다가 한 눈을 팔기도 하지만 다시금 영생을 향하여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회개 혹은 회심은 필수적입니다. 이때 참된 회심, 혹은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일은 몇 가지 부분으로 있는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옛 사람을 죽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새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옛 사람은 죄인 혹은 사람의 부패한 본성을 의미합니다. 반면 새 사람은 죄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한 사람 혹은 중생한 사람의 본성을 의미합니다. 옛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우리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진노케 했다는 것을 마음 깊이 슬퍼하며, 그 죄들을 더욱 미워하고 그것을 피하는 것입니다. 반면 새 사람을 살린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마음 깊이 기뻐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든 선을 행하며 살기를 사모하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에서 보자면 신자는 옛 사람이 죽은 자요 새 사람으로 사는 자이지만 부패한 본성이 우리 안에서 나오면서 옛 사람처럼 행하는 자로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이기에 옛 사람을 죽이며 새 사람으로 살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회심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모든 선을 행하며 살기를 사모하고 즐거워하는데, 이때 선행이란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서, 또한 그의 영광을 위해서 참된 믿음으로 행하는 일들만을 의미합니다. 선행의 모든 기원은 참된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어야 하고, 선행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선행의 기준은 하나님의 율법의 부합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 없이, 다시 말해 불신자가 사람들이 보기에 선하다고 할만한 것을 행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선이 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목적 없이 단지 사람만 유익하게 한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선이 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율법에 위배되는데도 하나님 앞에서 선이 될 수 있는가? 어떠한 것도 선이 될 수 없습니다.
이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선과 악의 기준인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다루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십계명에 대해 다루게 됩니다. 먼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92문을 보시면 하나님의 율법이 무엇인가를 오늘 본문의 내용으로 설명합니다.
92문. 하나님의 율법은 무엇입니까?
답.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제1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제2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제3계명: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제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제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제6계명: “살인하지 말라”
제7계명: “간음하지 말라”
제8계명: “도둑질하지 말라”
제9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제10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사실 우리는 이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3문에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죄와 비참함에 관하여, 죄와 비참함에서의 구원에 대하여, 그리고 구원에 대한 감사에 대하여 다룬다고 할 때 첫 번째 부분, 즉 죄와 비참함을 어디에서 알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어 4문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고, 거기서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요약되는 율법을 행할 수 있는가? 완전히 지킬 수 있는가? 5문은 결코 지킬 수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류는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미워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하아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두 번째 부분, 즉 죄와 비참함에서의 구원에 대한 내용으로 넘어가는데, 이 부분은 복음의 내용입니다. 방금 읽은 로마서 말씀의 이어지는 내용으로 하자면 이렇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1-22)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3:25-26)
이런 복음에서 다시금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세 번째 부분으로 넘어오게 되는데, 다시금 율법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이때 율법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에 대한 감사의 표라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되 선을 행하는 것으로 그 감사를 나타내야 한다고 할 때 그 기준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선행의 규범이 되는 율법을 여기서 다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선행의 규범, 이것을 잘 요약해 주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십계명이란 것입니다.
요리문답 92문은 하나님의 율법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데, 하나님의 율법은 세 가지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도덕법과 의식법, 재판법이 그것입니다. 도덕법은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불변하는 지혜와 및 정의와 조화를 이루는 가르침으로 옳고 그름을 분별합니다. 그런데 이 도덕법은 자연을 통해서 알게 되며, 창조 시에 이성을 부여 받은 피조물들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고, 또한 후에 그의 종들과 선지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음성으로 자주 반복되고 선포되는 가르침입니다. 바로 이 가르침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또 그가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이 도덕법을 통해 모든 지능 있는 피조물들에게 그 법에 대한 내적이며 외적인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타락한 자가 완전한 순종을 한다는 것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뿐 아니라 모든 율법을 대신하여 이루어 마치 우리가 이룬 것처럼 하게 하시는데, 이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은 결국 불순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영원한 형벌을 받게 하는 규범이 되게 하십니다.
도덕법 외에 하나님의 율법에는 의식법도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의식들에 관하여, 혹은 하나님께 드리는 공적인 예배에서 준수해야 할 외적인 엄숙한 규례들에 관하여 모세를 통하여 주신 법들인데, 메시야가 오시기까지 유대 민족에게 적용이 되었습니다. 이 법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새 언약에서 성취되는바 영적인 일들의 표요 상징이요 모형이요 그림자들이었습니다. 의식법과 함께 유대인들을 위하여 재판법도 주셨는데, 유대 백성들 가운데서 시민적 질서나 통치, 그리고 외적인 평화를 유지하는 일에 관한 것들이며, 혹은 통치자들의 질서와 의무들, 재판정, 계약, 형벌, 왕국의 경계를 정하는 문제 등에 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법은 하나님께서는 유대 나라의 확립과 보존을 위하여 모세를 통하여 전달하신 것으로,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에게 적용되며, 메시야가 오시기까지 나머지 모든 인류들과 그들을 구별 지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육체로 오시기까지 모세의 정치 체제의 보존과 운영을 위한 하나의 끈의 역할을 하며, 적절한 권징과 질서를 보존하는 수단이 되어 그리스도의 나라에 확립되어야 할 질서의 모형들이 되게 하기도 합니다.
좀 더 간단히 말하면, 의식법은 유아교회인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법으로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제사법이나 절기 등을 말합니다. 그 모든 의식법은 예수 안에서 완전히 성취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신약 시대에는 폐지가 되었습니다. 재판법은 이스라엘 국가를 공의와 공평으로 다스리도록 한시적으로 주신 법을 말합니다. 이 법 역시 구약의 이스라엘 국가와 함께 만료가 되었습니다. 더불어 도덕법의 경우도 신자에 한해서 폐지된 것이 있는데, 저주에 대해서는 폐지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도덕법으로 말미암아 신자가 저주를 받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그러나 순종의 의무까지 폐지된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식법의 경우 예수 안에서 완성한 성취로 말미암아 신약 시대 폐지가 되었다는 것과 재판법의 경우 이스라엘 국가와 함께 만료가 되었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외형이 아닌 정신 자체가 사라졌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정신이 어디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가? 도덕법 안에 남아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의식법은 폐하셨지만, 제1-4계명에서 여전히 ‘예배와 경건에 관한 교리와 의무’를 영원한 도덕법으로서 가르치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재판법은 폐하셨지만, 제5-10계명에서 여전히 ‘질서와 사랑에 관한 교리와 의무’를 영원한 도덕법으로서 가르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의 내용으로 율법을 말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다시 도덕법으로서의 율법에 대하여 좀 더 살펴보면, 이 법은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불변하는 지혜와 및 정의와 조화를 이룹니다. 영원하고 불변하다는 것은 세상의 시초부터 마지막 종말까지 그것이 하나요 동일한 법으로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나라의 문화가 이렇게 때문에 그에 반하는 하나님의 법이 달라지는 게 아닙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요 동일한 법으로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율법을 기록의 형태로 남기신 것은 모세 시대 때부터입니다. 그 이전에는 율법이 없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 이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셨는데, 이를 양심의 법 혹은 자연법이라고 합니다. 로마서 1장 18절 이하에 보면 다음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18-20)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을 계시라고 하는데, 계시의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일반계시가 있고, 특별계시가 있습니다. 지금 읽은 로마서 1장의 말씀이 일반계시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되 그가 만드신 만물을 통해 드러내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이 만물 안에서 살아가는 이상 하나님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 스스로가 눈을 감은 자로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일 뿐입니다.
물론 성경은 일반계시를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신앙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일반계시는 핑계할 수 없다는 사실만 분명히 할 뿐입니다. 다시 말해 일반계시는 하나님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에 있어서만 충분할 뿐,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이르기에는 불충분합니다. 여기에 특별계시, 즉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필요성이 있게 됩니다. 어쨌든 일반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난다고 할 때 기록된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불변하는 지혜와 및 정의를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 핑계의 이유가 될 수 있는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만물을 통해 분명히 알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만 보이신 것이 아니라 피조물이라면 마땅히 행해야 할 규범도 그들에게 알게 하셨습니다. 거기에 불순종한 자로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것입니다.
로마서 2장으로 가면 좀 더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2:14-15) 모세의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이라고 해서 질서와 사랑에 관한 교리와 의무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인 5계명, 부모 공경에 대한 내용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가장 기본이 되는 내용입니다. 즉 우리의 본성이 이런 하나님의 율법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양심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양심의 법이 곧 율법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런 양심이 타락 이후 모든 사람에게 항상 같은 기준을 제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양심이 화인을 맞은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양심을 가진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타락 이전에는 양심의 법과 율법이 일치했지만, 타락 이후 양심의 법이 흐려졌고 약해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양심의 법과 동일한 도덕법으로서의 율법을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인 악인지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런 도덕법으로서의 율법을 기록한 것이 오늘 본문 출애굽기 20장 1절 이하 17절인데, 이 내용은 신명기 5장에서 반복이 됩니다. 차이가 있는 부분도 있는데, 제4계명의 경우 왜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달리 설명됩니다. 또 제10계명의 경우 순서와 범위에 있었어도 차이가 있습니다.
4계명과 관련해서만 언급하자면 출애굽기 20장의 경우 안식일을 지켜야 할 이유가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관련해 설명합니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11) 반면 신명기 5장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구원사역과 관련해 설명합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5:15)
그러나 이런 차이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명령, 그리고 그 명령의 의도 등이 달라지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왜 이런 명령을 하시는가 할 때 십계명 서문으로 그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는데, 이것입니다. 출애굽기 20장 2절입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신명기 5장 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 즉 안식일 명령의 근거로 출애굽기 20장은 창조사역과 관련해서, 신명기 5장은 구원사역과 관련해서 말할지라도 그 모든 것의 근거는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여 내가 네게 명령하는 모든 계명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창조부터 시작해서 구원에 이르기까지 처음부터 동일한 뜻을 알리신 바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겁니다.
4계명과 관련해 좀 더 주의 깊게 보면 제4계명이 도덕법으로만 있는 게 아니라, 의식법에 속한 내용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안식일 자체는 의식법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폐지가 되었다고 할 때 도덕법으로서 주신 내용까지 폐하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이런 차이도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93문은 열 개의 계명을 어떻게 나누는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93문. 이 십계명은 어떻게 나뉘어집니까?
답.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첫째 부분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할지를 가르치며, 둘째 부분은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가르칩니다.
이것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문과 연관해서 이해할 수 있는데, 첫째 부분인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부분인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요리문답 92문에서 열 개 계명을 나누자면 제1-4계명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에 대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제5-10계명이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에 대한 부분입니다.
참고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저자인 우르시누스의 경우 이런 내용과 함께 다음과 같이 구분하기도 합니다. 십계명을 그 주제와 그 명령하고 금하는 것들에 따라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예배하는 것과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예배하는 것으로 구분합니다. 전자가 하나님 사랑에 대한 부분이고, 후자가 이웃 사랑에 대한 부분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관련된 직접적인 예배는 내적인 성격을 띠거나 외적인 성격을 띱니다. 내적인 성격의 예배는, 그 일부는 우리가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과 또한 제1계명에서 요구하는 바를 우리가 그에게 드린다는 것에 있고, 또 일부는 내적인 성격의 예배든 외적인 성격의 예배든 간에 제2계명에서 제시하는 방식으로 그를 예배한다는 데 있습니다. 외적인 성격의 예배는 사적인 것일 수도 있고 공적인 것일 수도 있는데, 사적인 예배에는 각 사람의 사사로운 도덕적 행위들이 포함되는 것으로 말과 행위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결부됩니다. 제3계명의 내용입니다. 반면 공적인 예배는 제4계명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일에서 다뤄지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하나님 사랑과 관련된 직접적인 예배라면, 이웃 사랑과 관련된 간적적인 예배에 대해서도 외적인 성격을 띠는 것과 내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 있다고 구분합니다. 먼저 외적인 성격을 띠는 것은 5계명에서 9계명까지의 내용으로 5계명은 통치자들과 부모 등이 아랫사람들과 국가적으로 행해야 할 의무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다른 계명에서도 다뤄지면서 강조되는데, 제6계명은 우리 자신과 다른 이의 생명과 안전을 보존하는 것으로, 제7계명은 순결과 결혼을 보존하는 것으로, 제8계명은 재물과 소유를 보존하는 것으로, 제9계명은 진실을 보존하는 것으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제10계명은 내적인 성격을 띠는 것으로 우리가 이웃을 향하여 가져야 할 모든 감정들을 적절히 조절하고 통제하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다음 주부터 십계명 하나하나를 살피게 되겠지만, 십계명 전체 또한 각 계명들 하나하나를 올바로 이해하는 데 필요한 일반적인 법칙만 살피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십계명이 인간의 판단이나 철학에 따라 이해할 것이 아니라, 성경의 해석 혹은 선지자들과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제시하는 설명에 따라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예로 간결한 형식으로 표현된 계명이라 할지라도 단순히 문자에만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성경 여러 곳들에 나타나는 설명들을 하나로 묶어 이해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십계명의 각 계명이 이성과 의지와 마음과 삶에서 내적이며 외적인 순종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각 부분마다 완전한 순종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그 정도에 있어서도 완전한 순종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0)고 말씀합니다. 야고보서에서도 동일하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2:10)
세 번째는 제1계명이 나머지 모든 계명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혹은 그 계명이 요구하는 순종이 십계명의 다른 모든 계명들에 대한 순종을 주도하는 최종적인 원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행하는 일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외식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이런 원리에서 첫 번째 돌판 계명이 두 번째 돌판 계명을 포함하는데,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 사랑 없이 이웃 사랑이 참되게 나타날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긍정적인 계명들 속에 부정적인 강령들이, 혹은 적극적인 계명들 속에 소극적인 강령들이 포함되어 있고, 그 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이 뭔가를 명할 때에는 동시에 그것과 반대되는 것을 금하는 것이고, 뭔가를 금지할 때에는 그 반대의 것을 명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율법은 악행을 금하는 가운데 덕을 실천할 것을 명하는 것이요, 또한 덕의 실천을 명하는 가운데 악행을 금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계명들을 지나치게 제한된 의미로 이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구체적인 계명들은 항상 일반적인 계명 속에 포괄되는 것으로 보아야 하고, 일반적인 계명들은 구체적인 계명 속에서, 원인은 결과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살인이나 간음을 금지할 때에 사람들이 악하게 가질 수 있는 모든 상해와 모든 정욕을 동시에 정죄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율법이 순결을 명할 때에는 동시에 절제를 강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여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율법에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순종함으로 구원 받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가 율법에 순종해야 할 이유는 죄와 비참함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십계명 서문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오늘 본문인 출애굽기 20장 2절입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영원 전부터 우리를 택하여 구원하신다고 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가지신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4-6) 즉 우리로 하여금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고,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율법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해야 하고 주야로 묵상해야 합니다. 주야로 묵상하고 그 율법만을 따라야 합니다. 여기에 복이 있고, 여기에 생명의 풍성함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