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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무조건 꼴찌를 지향한다>의 줄거리: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약간 의외의 말씀입니다. 첫째가 되고자 함을 결코 막지 않으십니다. 다만 첫째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또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 제대로 알고나 바라라는 것입니다. 어설프게 첫째 되면 기쁨은 없고 교만과 짜증만 늘어납니다.
무조건 꼴찌를 지향한다
(마가복음 9:33~37)
33.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34.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36.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무조건 꼴찌를 지향한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무조건 꼴찌를 지향한다’
제목의 의미는 인생의 목표를 꼴찌 하는 것으로 정해놓고 언제 어디서든 꼴찌를 목표로 달려갈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현재의 국가정보원인 옛 중앙정보부의 모토가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라고 했습니다. 김종필 씨가 지었다고 합니다. 한편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사회생활에도 모토가 있다면 “우리는 일등을 향하는 흐름 속에서 꼴찌를 지향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할 수만 있다면 일등을 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의도적으로 꼴찌를 지향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일등을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만 꼴찌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일등은 노력으로라도 시도를 할 수 있지만 꼴찌 되기 위해 노력한다는 말은 성립조차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꼴찌는 의도가 아닌 상황에 의해 만들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을 보자면 우리는 의도적으로 꼴찌를 지향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지향하는 정도가 아니라 꼴찌 되기에 인생을 걸어야만 합니다.
34절을 보면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이러한 논쟁을 하게 된 이유는 앞서 나타난 기적들과 연관이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은 놀라운 기적들을 일으키신 예수님께서 장차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 제자들은 드디어 다윗 왕국의 재현이 시작되리라 여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왕이 되실 때에 자신들 또한 높은 관직에 오를 것으로 예상하였습니다. 그렇기에 도대체 누가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될지를 두고 노상에서 논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의 논쟁을 염두에 두시고 35절에서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하십니다. 이 상황을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우리말 성경을 참고해보면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번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되려고 하는 제자들의 열망을 인정하십니다. 다만 첫째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며, 첫째가 되었을 때에 어떠한 일이 나타나는가에 대해서 깨달을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이 신앙적 관점에서 첫째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되는지도 모른 채 첫째가 되기만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깜짝 놀랄 정도로 역설적입니다. 제자들은 첫째가 되면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섬기게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되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과 같은 존재이며 첫째가 되기 위해서는 꼴찌가 되어야만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제목인 “무조건 꼴찌를 지향한다”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일등을 지향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각 분야에서 일등을 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자면 정말로 첫째가 되고 싶다면 꼴찌를 지향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일등이 되고자 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꼴찌는 일등을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대상이기 때문에 피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와 반대되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 역설적인 말씀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 높아짐의 원리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높아짐의 원리란 사람이 높아지다 못해 첫째가 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흔히들 높은 사람과 큰 사람은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세상에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치들이 있습니다. 돈이나 외모, 건강이나 학력 등이 그러한 가치의 대표적 예입니다. 이러한 가치들을 많이 가진 사람이 큰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가지고 있는 가치들이 축적되어서 나의 토대를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치의 토대 위에 서고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가치의 토대 위에 섰을 때에 가장 크고 높은 사람이 일등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세상에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많은 가치를 가지고 있고 그 토대 위에 섰을 때 높이가 결정됩니다.
이렇게 높이가 결정될 때에 문제가 생깁니다. 이 세상의 가치들에는 치명적인 속성이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세상의 가치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좋게 여겨 추구하는 대상들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돈이나 외모일 수 있으며 또 어떤 사람에게는 건강이나 학력일 수 있고, 목회자에게는 부흥이나 예배당건축이 큰 가치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갖가지 가치들이 모였을 때에 사회적으로 높아지게 됩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세상의 가치들은 마음의 채움이나 기쁨과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 가치를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서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고 합니다. 비교하고 우위를 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마음으로 세상의 가치를 얻으려 노력하고 있기에 비교할 수 있고 그로부터 우월감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우월감으로 나타난 교만은 뱀의 독처럼 치명적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얻음에서 생겨나는 만족감은 순간적입니다. 비눗방울이 부풀어 오르다 터져버리듯이 기쁨은 잠깐 부풀고는 금세 사라져버립니다. 그런데 기쁨을 줄 수 없는 가치를 사람들이 갖고 싶어서 부러워하고 얻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상대적으로 우위를 점했다는 이 의식은 우월감이 되고 교만으로 발전하면서 자신을 죽여가게 됩니다. 이 교만이 짜증과 섞일 때에 심리적 화학물질인 갑질과 행패 또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첫째가 되라고 말씀하신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모두가 첫째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첫째는 한 명 밖에는 존재할 수 없기에 논리적으로는 모순된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가 모두가 첫째가 될 수 있는 열둘의 자리를 준비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가치관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직 하늘의 가치관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하늘의 가치를 가질 때에 마음은 말 그대로 하늘만큼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의 모습을 떠올려봅니다. 마태복음 3장 17절을 보면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또 요한복음 17장 13절에서는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마지막 기도를 하시며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늘 가치의 특성은 기쁨이며 이 기쁨의 특성은 영원합니다. 세상의 가치는 비눗방울처럼 한 순간 영롱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곧 터져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가치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영원한 기쁨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획득할 수 있는 가치인 하나님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가치는 잠시 뒤에 사라지는 비눗방울과 같습니다. 아무리 많이 가지고 높이 서있어도 기쁨과 만족은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타인과의 비교를 통한 우월과 교만을 통해서라도 기쁨과 만족을 얻고 보고자 하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늘 가치는 실질적인 기쁨과 만족과 평강을 줍니다. 그렇다면 하늘 가치를 가진 자는 갖지 못한 자에 비해 어떤 감정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요? 하늘 가치를 가진 자의 우월감은 사람에 대해서 긍휼과 자비와 사랑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는 세상 가치에서 생겨난 우월감이 교만과 행패와 짜증과 이용하는 것으로 나타남과 대조적입니다. 타인에게 섬김을 받으려 하고, 타인을 이용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 가치를 가진 자의 높아짐은 땅에서 높아지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땅에서 높아짐은 토대를 쌓아서 높아지고자 하는 것이지만 하늘에서 높아짐은 땅에서 떨어져서 하늘을 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가진 자의 우월감은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고 돕고 섬김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정말 높은 사람인지를 알고 싶다면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하늘이 열려 마음은 하늘의 가치이신 하나님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자기를 돌로 치는 자들과 비교할 때에 우월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우월감은 돌로 치는 자들에 대한 긍휼과 자비의 마음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사도행전 7장 60절에서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하늘 가치로 일등하면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세상 가치로 일등하면 이웃을 깔보게 됩니다. 교만해져서 이웃을 우습게 여기고 사람을 이용하려 하고 행패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세상 가치의 대표적 대상은 바로 돈입니다. 돈을 많이 번 사람은 부자입니다. 그러나 부요함은 미완성의 저주입니다. 오히려 가난이 미완성의 축복입니다. 부요함이 하나님을 얻기 힘들게 하고, 가난이 하나님을 얻기에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레스트 산은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입니다. 그러나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는 시조처럼 아무리 높아도 하늘 아래에 있습니다. 진짜 높아지기 위해서는 하늘의 가치를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땅에서 마음을 붙이고 땅의 가치를 모아서 높아지려 하고 첫째가 되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모으면 모을수록 저주는 완성되어 갑니다. 반대로 하늘에 올라가서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하늘에 오르고자 할수록 축복은 완성되어 갑니다.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서 첫째가 된 사람에게는 돈은 높아지기 위한 토대가 되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자면 돈을 아무리 많이 쌓아도 하늘아래 뫼이기 때문입니다. 높다는 생각이 들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이 돈을 아무리 많이 주셔도 돈이라는 토대에 서있지 않기에 돈 없는 사람을 우습게 여기지 않습니다. 마음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돈 없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게 됩니다. 학식이 많은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의 가치를 가진 사람은 마음이 하늘만큼 높아져서 첫째가 됩니다. 그러면 학식이 아무리 많아도 학식이 없는 사람을 무식하다고 우습게 여기지 않습니다. 많은 학식은 학식이 없는 사람을 위해서 쓰라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재료로 여기게 됩니다. 또 변호사나 검사나 판사와 같이 사회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라도 하늘을 가지지 못했다면 마음에서 배우지 못하고 힘없는 사람을 우습게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하늘을 가진 사람은 기쁨을 유지해 가면서 섬기는 재료로 그 직분을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늘의 가치이신 하나님을 가질 수 있을까요? 꼴찌가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35절에서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류역사상 인간사회에서 만들어진 자리 중에 가장 낮은 자리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가장 참혹한 형벌의 자리이며 인간이 처할 수 있는 가장 낮은 자리입니다. 세상에서 꼴찌의 자리입니다. 이 십자가에 마음을 보낼 수 없다면 하늘의 가치이신 하나님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 오르심을 통해 하나님을 갖는 길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자리에서만 땅의 토대를 쌓아 높은 곳을 향하려는 마음을 죽일 수 있습니다. 땅에 대해 죽을 때에만 땅을 등질 수 있습니다. 비행기가 이륙하듯이 십자가를 통해 땅을 떠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꼴찌자리를 나의 자리로 인정할 수 없다면 땅에서 높아지고자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땅에서 높은 곳을 향하여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저주가 완성되어 갈 것입니다. 그러나 땅의 가치조차도 하늘 가치를 획득해서 일등이 된 자들에게 유용하게 쓰일 수 있습니다. 하늘에 마음을 올려 보내지 못하여 하나님을 갖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어진 땅의 가치들은 독이고 저주에 불과합니다. 마음이 하늘에 올라간 사람만이 땅의 가치로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한 재료로 삼을 수 있습니다.
세상 가치는 그 자체로는 아무리 획득해도 기쁨과 만족은 주어질 수 없습니다. 이 세상 가치를 획득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교만의 열매뿐입니다. 교만의 열매를 맺는 영혼은 서서히 말라죽어 갈 수밖에 없고 결국은 지옥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항상 꼴찌를 지향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꼴찌의 자리인 십자가에서 죽는 자만이 하늘에서 일등을 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모였다면 십자가에서 죽어 꼴찌를 지향하고, 세 사람이 모였다면 십자가에서 죽어 꼴찌를 지향합니다. 회사에서 모든 사람이 승진이라는 고지로 올라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나는 마음속으로 언제나 십자가의 꼴찌자리를 바라봅니다.
언제 어디서든 우리의 목표는 꼴찌자리인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의 모든 가치에 대해 죽을 때에 땅으로부터 하늘로 훨훨 날아오를 준비가 됩니다. 주님의 죽음과 연합함으로써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까지 연합하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하늘의 하나님을 유일한 가치로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가지셨으니 예수님 안에 들어간 나도 하나님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통해 기쁨과 만족을 누리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가치를 허락해주실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에 세상의 가치들은 올라설 토대가 아니라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고 나눠줄 사랑의 재료가 될 것입니다. 이처럼 하늘에서는 첫째가 되고 땅에서는 사람들을 섬기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늘로 올라가 하늘 높이만큼 일등이 되고 싶으십니까?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를 전하고 싶으십니까? 배우자에게도 자녀에게도 하나님의 긍휼과 불쌍히 여김은 필요합니다. 또한 가족뿐만이 아니라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베풀며 살 수 있기 위하여 우리는 반드시 하늘 높이만큼 높아져야만 합니다. 그렇게 높아진 일등들이 되기 위해서 십자가의 꼴찌자리를 지향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이 땅에서 높아지기 위한 고지를 향해 달려갑니다. 나 한 사람부터라도 이 세상의 꼴찌자리인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해 달려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가치로부터 끊어지고 자유로워져서 하늘로 훨훨 날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보좌 우편까지 가신 주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기어코 일등을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이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히 여기심을 전달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