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정체성’의 혼란과 혼돈으로 인한 각 종의 病理현상을 ‘아노미(Anomie)’현상이라고 한다. 아노미를 가장 격렬하게 심각하게
겪는 나라가 한국이다. 한자·한문인문학으로 본 『한국사회大觀 』 의 冒頭 글과 이 책 ‘정체성’ 메뉴의 글들에서 자세히 밝혔다.
핵심적인 論旨는 미국식 서구문화에의 경도(傾倒)이다.
특히 문자·언어 측면에서 우리말의 70% 정도가 漢字語임에도 한자를 쓰지 않고 영어를 함부로 남발(濫發)하는 풍토가 큰 문제다. 매년 동물을 상징으로 하는 각 띠에 맞추어 년초에 신문지상에 등장하는 칼럼 역시 서구 편향성이 강하다. 황하문명의 동양철학적 원리에 기반하고 있는 동물 띠에 서구의 문화를 갖다 붙여 해석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아래 조선일보(2022.01.12.)에 실린 전문가 칼럼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마침 범(虎)띠 해와 관련한 家苑선생의 강의가 있었고 서로 극명(明澄)하게 대조(大別)되기에 참고삼아 게재한다.
======================================================================
경북 예천 壬寅年 尙賢學會 特講 2022. 1. 11(陰曆 辛丑年 12. 9)
황하문명 유학경전 문헌 고찰
壬寅年에 살펴보는 범[虎] 이야기
壬寅年은 北方水인 검은 범띠해다. 地支인 寅은 東東北方이자 地天泰䷊의 正月로 天地萬物이 交通하며 小往大來하는 象이다. 따라서 寅에는 새롭게 시작하는 한 해를 두려운 듯이 敬虔(경건)하게 맞이해야 한다는 뜻과 함께 山君, 山中王, 山神靈, 山君子 등으로 불리는 범을 배치했다. 『大戴禮記・保傅』편에 “鳳凰生而有仁義之意,虎狼生而有貪戾之心”라고 했듯이 범은 이리와 함께 ‘虎狼之心’이라 하여 貪戾(탐려, 탐욕스럽고, 사나움)의 동물로 여겨 ‘虎狼이’로 일컬어졌는데 虎는 순우리말로는 범이다. 범은 힘세고 勇猛하면서도 愼重하여 指導力과 決斷力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虎患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무섭고 사나워 無謀하며 暴虐함을 나타내기도 한다. 한편 범은 농작물에 해를 끼치는 멧돼지를 주 먹잇감으로 삼기에 한해를 마감하면서 모든 神에게 祭지내는 臘祭(冬至後三戌,臘祭百神。夏曰嘉平, 殷曰清祀, 周曰大蜡, 漢曰臘)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범은 敬畏의 대상이기도 하기에 貪戾를 대표하는 짐승은 흔히 승냥이와 이리인 豺狼(시랑)으로 비유된다.
[참고] 臘祭(납제)는 시대에 따라 그 이름이 다른데 周나라 때에는 蜡祭(사제)라 했다. 『禮記・郊特牲』에 따르면, 섣달(歲十二月)에 천자가 베푸는 蜡祭(사제)인 大蜡의 대상은 여덟 종류인데, ①先嗇(선색, 神農氏), ②司嗇(사색, 后稷), ③百種(백종, 백곡의 정령), ④農(농, 옛적의 田畯인 勸農官), ⑤郵表畷(우표철, 郵는 郵亭의 집이므로 밭고랑이 서로 이어진 곳을 표시하여 郵舍를 짓고, 田畯이 거처하던 곳으로 田畯이 이곳에 기거하면서 농경을 독려했기 때문), ⑥禽獸(금수, 농경과 관계가 깊은 소와 말 등), ⑦猫虎(묘호, 고양이와 호랑이는 농작물을 해치는 쥐와 멧돼지를 잡아주기 때문에 모신다.), ⑧坊水庸(방수용, 坊은 제방, 水庸은 溝渠로 모두 농사를 짓는데 공이 크기 때문에 이를 맡은 신에게 제사한다.)을 말한다.
먼저 ‘恭敬하다, 敬虔하다’는 뜻의 寅의 쓰임을 『書經』에서 살펴본 뒤에, 범과 관련된 내용 몇 가지를 儒學經傳 속에서 찾아본다.
『虞書・堯典』 “寅賓出日하여 平秩東作이니(나오는 해를 공경히 맞이하여 봄 농사를 고르게 펴니)…寅餞納日하여 平秩西成이니(들어가는 해를 공경히 전별하여 서성(가을의 결실, 秋收)을 고르게 펴니)”…『虞書・舜典』 “汝作秩宗이니 夙夜에 惟寅直哉라사 惟淸하리라(순임금이 伯에게 그대는 질종을 맡았으니,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오직 공경하고 곧게 하여야 맑아지리라.”) …『虞書・皋陶謨』 “同寅協恭하사 和衷哉하소서(고요가 禹에게 공손을 합하시어 충심으로 화합하소서)”…『周書・無逸』 “昔在殷王中宗하신대 嚴恭寅畏하사 天命自度하시며 治民祗懼하사 不敢荒寧하시니(周公曰 옛날에 은왕인 중종이 계셨는데 엄숙하고 공순하며 공경하고 두려워하시어 천명으로 스스로를 헤아렸으며 백성을 다스림에 공경하고 두려워하시어 감히 안일함에 빠지지 아니하셨으니)”…『周書・多方』 “洪惟圖天之命하여 弗永寅念于祀하니라(주공이 은나라 관리들에게 크게 하늘의 명을 도모하여 길이 공경히 생각하여 제사하지 아니했느니라.)”…『周書・周官』 “少師少傅少保는 曰三孤니 貳公弘化하여 寅亮天地하여 弼予一人하나니라(成王曰소사와 소부와 소보는 가로대 삼고니, 공에 다음하여 교화를 넓혀 천지를 공경하여 밝혀서 나 한 사람을 보필하나니라.)”
『論語・述而』 “子路曰子行三軍則誰與잇가 子曰暴虎馮河하여 死而無悔者를 吾不與也니 必也臨事而懼하며 好謀而成者也니라”
『禮記・檀弓下』 “孔子過泰山側한대 有婦人哭於墓者而哀러라 夫子式而聽之라가 使子貢問之러니 曰子之哭也에 壹似重有憂者라 而曰然하다 昔者에 吾舅死於虎러니 吾夫又死焉하고 今吾子又死焉이라 夫子曰何爲不去也오 曰無苛政이나이다 夫子曰小子識之하라 苛政은 猛於虎也니라”
『詩・小雅・小旻』(제6장) 不敢暴虎와 不敢馮河를 人知其一이오 莫知其他로다 戰戰兢兢하여 如臨深淵하며 如履薄冰호라 (감히 범을 맨손으로 잡지 못하는 것과 감히 하수를 걸어서 건너지 못하는 것을, 사람이 그 하나만 알고 그 다른 것을 알지 못하도다.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며 조심하고 조심하여 깊은 못에 다다르듯 하며 얇은 얼음을 밟듯이 하노라.)
『詩・邶風・簡兮』(제2장) 碩人俣俣하니 公庭萬舞로다 有力如虎며 執轡如組로다(큰 사람이 크고 크니 공의 뜰에서 만무를 추도다. 힘이 범 같으며 고삐 잡음이 인끈 잡은 것과 같도다.)
『詩・小雅・何草不黃』(제3장) 匪兕匪虎어늘 率彼曠野아 哀我征夫 朝夕不暇로다(뿔소도 아니며 범도 아니거늘 저 광야를 달리는가. 아아, 우리 부역 간 사내들이여, 아침저녁도 겨를 하지 못하도다.)
『詩・大雅・常武』(제4장) 王奮厥武하시니 如震如怒로다 進厥虎臣하시니 闞如虓虎로다(왕이 그 무용을 떨치시니 우레가 치듯 노한 것 같도다. 그 범 같은 신하들을 나가게 하시니 포효하는 소리가 성난 범 같도다.) 闞 바라볼 감, ‘범의 포효소리 함’ 虓 범이 울부짖을 효
『詩・魯頌・泮水』 (제5장) 矯矯虎臣이 在泮獻馘하며 淑問如臯陶 在泮獻囚리로다(굳세고 굳센 범 같은 신하들이 반궁에서 베어온 귀를 바치며, 고요처럼 신문을 잘하는 이가 반궁에서 죄수를 바치리로다.)
『周書・立政』 “王左右는 常伯과 常任과 準人과 綴衣와 虎賁니이다(왕의 좌우는 상백과 상임과 준인과 철의와 호분이나이다)”에서 虎賁(호분)은 왕의 親衛隊를 말한다.
『周書・君牙』 “心之憂危 若蹈虎尾하며 涉于春冰호라(穆王이 君牙에게 명하며 마음의 근심과 위태로움이 마치 호랑이 꼬리를 밟으며 봄의 얼음을 건넘과 같노라.)”
『周易』
乾䷀괘 (文言傳 제2절) 九五曰飛龍在天利見大人은 何謂也오 子曰同聲相應하며 同氣相求하여 水流濕하며 火就燥하며 雲從龍하며 風從虎라 聖人이 作而萬物이 覩하나니 本乎天者는 親上하고 本乎地者는 親下하나니 則各從其類也니라
天澤履(천택리, ䷉) 卦辭 : 履虎尾라도 不咥人이라 亨하니라
天澤履(천택리, ䷉) 六三爻 : 眇能視며 跛能履라 履虎尾하여 咥人이니 凶하고 武人이 爲于大君이로다
天澤履(천택리, ䷉) 九四爻 : 履虎尾니 愬愬이면 終吉이리라
山雷頤(산뢰이, ䷚) 六四爻 : 顚頤나 吉하니 虎視耽耽하며 其欲逐逐하면 无咎리라
澤火革(택화혁, ䷰ ) 九五爻 : 大人이 虎變이니 未占에 有孚니라 象曰大人虎變은 其文이 炳也라
===============================================
[아트 인사이트] ‘호랑이’가 그들에겐 더 열심히 살게 하는 힘이 되었다
올해의 호랑이는 그냥 호랑이가 아니라 검은 호랑이다. ‘검은 호랑이’는 상상 속 동물이라고 하니 여러 화가가 그린 호랑이 그림 중에서도 이 맥락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은 앙리 루소(1844~1910)의 것이 아닐까 싶다. 루소는 본 적 없는 호랑이를 수없이 많이 그렸다. 사람들에게는 군대에서 복무하는 동안 멕시코로 파병 나갔을 때 본 호랑이를 그린 것이라고 말했지만, 실은 프랑스 밖으로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었다.
왜 거짓말을 했을까?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려면 작가의 삶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루소는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관세청 말단 공무원이 되었고 홀로된 어머니를 봉양하며 여섯 자녀를 두었지만 대부분을 유아기에 잃었다. 그에게 유일한 낙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다른 과목은 몰라도 그림과 음악에서만큼은 상을 받았던 터였다. 틈틈이 그린 그림들로 40대 초반 전시회에 참여하며 상도 탔지만 아내도 세상을 떠나고 만다. 49세에 회사를 그만두고 공무원 연금 약간과 거리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한 푼돈을 모아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며 그림을 그린다.
<사진설명 :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지 못한 앙리 루소는 실제로 호랑이를 본 적 없지만 루브르박물관에서 본 들라크루아의 그림을 표본 삼아 수없이 호랑이 그림을 그렸다. 소설 ‘파이 이야기’는 망망대해 작은 배에 호랑이와 함께 남겨진 주인공이 호랑이 덕분에 결국 고난을 극복하는 이야기다. 위는 루소가 그린 호랑이 그림, 가운데는 들라크루아의 작품. 아래는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의 한 장면.>
멕시코에 가 본 적은 없었지만 파병에서 돌아온 병사들에게 들은 이국 세계는 루소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가보지 않은 세계를 그리기 위해 주말마다 동물원과 식물원을 찾아다니며 연구했다. 정식으로 그림을 배워본 적은 없었지만 루브르 뮤지엄에서 본 외젠 들라크루아의 그림을 표본 삼아 열심히 스케치했다. 루소는 자신의 스승은 자연이라고 말했지만, 훗날 학자들은 작품 속 동식물의 계절이 하나도 맞지 않음을 지적한다. 동물원과 식물원에 꾸며놓은 인공의 자연을 보고 짜깁기하며 그린 그림이라 루소 나름의 편집과 가공을 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물학자들은 오히려 이 사실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데, 지적 연구 대상으로서가 아닌, 처음으로 위안과 영감의 원천으로서 자연의 중요성을 다룬 예술이기 때문이다.
크기와 비례도 엉망이고 묘사력도 한참 떨어졌지만 피카소를 비롯한 당대의 젊은 작가들이 열정적인 루소의 순수함을 발견하고 지지하기 시작했다. 66세로 삶을 마친 그의 장례식에는 여러 예술가가 모여 애도를 표했다. 아픔이 가득한 삶이었지만 마음속에 신념을 품고 계속 전진하다 보면 좋은 결과가 온다는 것을 그의 삶이 증명하고 있다. 평범한 직장인에서 예술가로 희망의 길을 묵묵히 걸어간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 영국 내셔널갤러리, 뉴욕 현대미술관, 파리 오르세미술관에 소장되어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전하고 있다.
환상과 실제 사이, 무엇이 더 흥미로운가
<아래 필자 김영애 소개 : 이화여자대 서양화과 및 동 대학원에서 현대미술사 석사, 프랑스 파리 에콜 뒤 루브르에서 박물관학 석사 후 파리 8 대학에서 박사과정 수료, 저서 : 『예술의 모든 순간에 존재하는 갤러리스트』 『페로티시즘』 『나는 미술관에 간다』>
루소의 삶은 얀 마텔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와 묘하게 닮았다. 이 영화에도 호랑이가 등장한다.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던 파이네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려다 큰 풍랑을 겪게 된다. 어린 소년 파이는 다행히 작은 배로 탈출하지만 가족의 생사는 알 길이 없다. 배에는 그 외에도 다리를 다친 얼룩말, 오랑우탄, 하이에나, 그리고 호랑이가 있었다. 동물들끼리 약육강식의 사투를 벌이고 결국엔 파이와 호랑이만 남게 된 상황, 파이는 호랑이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각고의 노력을 펼치고 어느덧 배는 멕시코의 한 섬에 다다른다.
호랑이는 밀림으로 유유히 떠나버리고 파이는 사람들에게 구조된다. 병원에서 요양 중인 파이에게 일본인 보험 회사 직원들이 사고 경위를 묻는다. 파이는 호랑이와 함께 살아남은 과정을 설명하지만 사람들은 믿지 못한다. 할 수 없이 파이가 얼룩말, 오랑우탄, 하이에나 대신에 다리를 다친 선원, 어머니, 요리사로 각색하여 살아남은 인간들 사이의 격투와 살해 이야기를 들려주자 보험 회사 직원들은 그제야 수긍하며 서류를 접수한다. 영화는 나이 든 파이가 삶을 돌아보며 자기를 찾아온 한 소설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액자식 구성이다. 중년의 파이는 소설가에게 두 버전 중 어떤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는지를 되묻고,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어떠한 이야기를 믿든 그것은 자유다.’
믿음의 문제
검은 호랑이를 검색해보니 실제로는 발견된 적이 없는 상징적 존재라는 설도 우세하지만 유전자 변이종이 있다는 의견도 있다. 새해에는 경제가 나아질 거라는 낙관론이 있는가 하면 더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도 분분하다. 양비론을 논하기 전에 이 모두는 루소가 진짜 호랑이를 봤는지, 파이가 호랑이와 함께 배에 있었는지 아닌지처럼 그 어느 것이 맞는다고 단정할 수 없는 해석 문제로 보인다. 중요한 건 루소가 호랑이를 상상하며 꿈을 키우고, 삶의 고단함을 뛰어넘는 위대한 예술가가 되었다는 것이 아닐까? 또한 파이는 호랑이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았지만 그 공포를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성장했다.
루소와 파이의 호랑이처럼, 올해 우리 곁에 있을 검은 호랑이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내 안에 있는 믿음, 자신을 잘 이끌어주고 더 열심히 하게 만드는 어떤 기운이 되었으면 한다. 세운이 어떤 이에게는 행운으로 때로는 고행으로 다가올지라도,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결국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니체의 말처럼, 나를 자극하고 때로는 힘을 주는 호랑이 기운을 받아 한 해를 우렁차게 보낼 때다. 현재로서는 검은 호랑이의 존재를 알 수 없지만, 한 해를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에 따라서 2022년이 끝날 무렵 우리는 검은 호랑이가 진짜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김영애 이안아트컨설팅 대표, 조선일보 2022.0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