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암사에서 그냥 천안으로 오를까 하다가 부여읍내로 향했다
부여에서 하룻밤 묵으며 백제문화재 기간 부소산성을 산책하기 위해서이다
숙소에 당도했는데 무지개가 선명하게 동북쪽 하늘을 수 놓았다
먼저 가까운 정림사지로 향했다
무슨 행사인지 확성기 소리가 꽝꽝 울려댔고 한쪽에선 야시장 준비에 여념 없었다
확성기 요란하던 소리는 문화재 기간 시민 노래자랑이었던가 보다
나도 공주가 고향이라 백제문화재 기간이 어슴프레 떠오른다
크게 볼 거리 즐길 거리 없던 시절 군내 모든 사람들이 이 기간 풍악놀이에 참가한다 가장행렬에 참가한다 들떠 있었던 것 같다
부여 정림사지는 1942년 발굴조사 때 강당지에서 "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중건 당시 절이름이 정림사였고, 1028년(현종 19)에 중건되었음이 밝혀졌다.
1979~84년에 걸친 대대적인 발굴조사에 의해서 절터가 중문·석탑·금당·강당이 남북선상에 일렬로 배치되고 그 주위를 회랑으로 두른 전형적인 백제식 가람배치인 남북일탑식임이 확인되었다.
현재 정림사지는 사적 제301호로 정림사지5층석탑(국보 제9호)과 정림사지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다.
정림사지의 강당지 한복판에는 고려시대 불상이 있다. 보물 제108호. 높이 562㎝의 거불로 오른팔과 왼쪽 무릎이 떨어져나갔고 몸체의 마멸이 심한 편이다. 또한 머리부분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어서 전체적인 양식고찰이 어려우며, 왼손의 윤곽으로 보아 지권인을 취한 비로자나불로 추정된다.
항상 학생들 인솔로 부여를 찾았기에 이런 불상이 여기 있는 줄도 모르고 이곳을 지나쳤었다
몇 십년째 별로 복원의 흔적이 없는 이곳에 오늘은 그래도 문화재 기간이라고 사람들이 그런대로 북적거렸다 보통 때는 10여 명 사람 보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이 정림사지 5층 석탑은 미륵사지석탑(국보, 1962년 지정)과 함께 백제석탑이 목탑의 번안(飜案)이라고 하는 근거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석탑양식의 계보를 정립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고, 1981년에는 이 사지에 대한 전면발굴이 이루어져서 석탑 주변도 조사되었다
이 석탑의 높이는 8.33m이며, 석탑의 구조는 일반적인 건축이나 석탑에서와 같이 지대석(地臺石)을 구축하고 기단부를 구성한 다음 그 위에 5층의 탑신부(塔身部)를 놓고 정상에는 상륜부(相輪部)를 형성하였다.
이 탑의 초층탑신에는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평정한 공을 기리는 글이 해서(楷書)로 새겨져 있어서 한때 ‘평제탑(平濟塔)’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씁쓸한 백제의 역사이다
외세를 끌여들여 자기 조직만을 위하는 어느 인간군들의 적나라한 모습이 투영된다
그러나 그들이 승자가 되고 후세가 그들의 손아귀에서 역사를 만드니 이 인간세상 또한 동물의 세계에 지나지 않는다
정림사지 옆엔 명혜공주 태실비가 있다
명혜공주는 조선 현종과 김육의 딸 명성왕후 사이에 태어난 차녀로서 숙종의 누이이다
명혜공주는 신정(申晸)의 아들인 신요경(申堯卿)과의 혼인이 결정되어 신요경은 동안위(東安尉)로까지 봉해졌으나, 1673년(현종 14년) 4월 27일, 가례를 올리지 못한 상태에서 명혜공주가 갑자기 사망하였다.
명혜공주가 사망한지 약 3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8월 2일에는 명혜공주의 친언니인 명선공주도 혼례가 결정된 상태에서 요절하고 말았다
이에 현종은 두 딸을 불쌍히 여겨 두 공주에 대한 전장(田庄) 및 공장(供帳) 등을 생존한 공주들의 예와 같이 하였는데, 숙종 연간에 이것을 관장하는 내시가 이 물건들을 가로챌 뿐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상당한 부담이 된다 하여 이러한 경제적 지원을 모두 중단하라는 상소가 올라왔다. 그러나 상소를 받은 숙종은 지원을 중단할 경우 부왕인 현종의 뜻을 저버릴 뿐 아니라 이미 두 공주에 대해 그 지원을 많이 줄였다는 이유로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정림사지 동쪽에는 정림사지 박물관이 있다
정림사지는 일제강점기 이후 백제탑공원으로 이용되었으나 1979년부터 시작된 발굴조사에서 사지(寺址) 전모가 밝혀졌으며 1983년 3월 26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를 연구 · 관리 · 전시하기 위해 2006년 9월 29일 정림사지전시관으로 개관하였다. 이후 2008년 5월 2일 1종 전문박물관으로 등재되어 현재 정림사지박물관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