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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22일 주일설교
시리즈 제목: 땅을 위한 하늘의 대리인들 38
설교 제목: 소돔 사람들의 죄악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롯이 문 밖의 무리에게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
창세기 19:5~7
설교를 위한 묵상:
창세기 19장에는 하나님이 소돔성을 방문하신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님은 남자의 모습으로 그 도시를 방문하셨다. 그리고 소돔 사람들은 그 나그네에게 악한 행동을 했다. 그것은 나그네를 괴롭히는 것이다. 이방인에 대한 혐오는 하나님이 금하시는 일이다. 고아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는 모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강하지 않고 약하기에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대할 수 있다. 그런 일을 성경은 악행이라고 부른다.
이 본문은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로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본질은 나그네와 같은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소돔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접할 기회가 있었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5장 40절에서,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같은 이야기다.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그가 보호되고 존중되어야 할 대상이다. 그런 사람이 차별받는 세상은 악한 세상이다. 주님이 오신 목적은 그런 세상을 고쳐서 약자가 다시 어깨를 펴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시려는 것이다. 그런 세상이 하나님 나라가 아닐까?
이 설교에서 나는 성경이 가장 중요하게 가르치는 계명이 무엇이며 그 계명이 지향하는 세상이 곧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 나라는 현재의 세상과 어떻게 다른지를 생각해 볼 것이다. 그 과정에서 최근 몇 년 동안 벌어지고 있는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바른 입장이 무엇인지 제시해 보고자 한다.
설교 개요:
1. 하나님이 소돔을 방문하신다
2. 소돔 사람들의 죄악
3. 고아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
4. 차별금지법에 대한 입장
***
1. 하나님이 소돔을 방문하신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땅으로 내려오시는 장면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땅을 인간에게 맡기셨는데 때때로 하나님은 땅으로 내려오십니다. 그 이유는 땅을 바로잡기 위함입니다. 예를 들면, 노아의 시대에 하나님은 땅을 보시고 한탄하시면서 노아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홍수 심판을 예고하셨습니다. 그 전에 노아에게 방주를 예비하여 생명을 보존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생명의 방주는 새로운 세상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게 될 씨앗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후손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것은 시날 평지에서 사람들이 하늘에 닿을 탑을 쌓을 때였습니다. 사람들이 시도하던 일은 하나님의 의도와는 완전히 빗나간 것이었습니다. 온 세상에 흩어져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라는 것이 창조의 계획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한 언어를 사용하면서 뜻을 모아 흩어지지 말고 하늘까지 탑을 쌓아 자신들의 이름을 내자고 계획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사람들의 계획이 악함을 아시고 그들의 일을 바로잡으시려고 하늘에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그 심판은 언어의 혼잡입니다. 사람들은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분열하고 갈등하면서 선한 일을 위하여 마음을 모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 대신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온 세상을 충만하게 하는 씨앗이 되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서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25년이 흘러갑니다. 아브라함의 나이는 이제 99세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일하실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세상을 위하여 다시 씨앗을 세우셨습니다. 그 씨앗은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를 따르는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입니다. 전에 노아의 방주가 하나님이 새로운 시대를 위해 예비하신 것이었다면, 이제는 아브라함이라는 가문을 하나님이 예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에게 자식을 주실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는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를 펼치시려고 오십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사람들을 세우는 일이며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이 살아갈 세상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의 용어로는 심판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찾아오실 때 소돔과 고모라에도 방문하셨습니다. 그 두 도시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악을 일삼고 있었습니다. 그런 세상이 있는 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유롭게 자기 임무에 집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소돔 성을 심판하겠다고 아브라함에게 알려주셨다고 저는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펼치시거나 새로운 일을 행하실 때는 항상 세상을 바로잡으시는 심판을 함께 행하십니다. 이번에는 소돔과 고모라가 그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또 말씀하셨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들려오는 저 울부짖는 소리가 너무 크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엄청난 죄를 저지르고 있다.
이제 내가 내려가서, 거기에서 벌어지는 모든 악한 일이
정말 나에게까지 들려온 울부짖음과 같은 것인지를 알아보겠다.
창세기 18:20~21, 표준새번역
하나님이 소돔성을 방문하시는 이유는 그곳에서 들려오는 울부짖음이 하늘에 닿을 정도로 그 죄악이 크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하나님은 애굽에서 고통 가운데 부르짖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바로잡으시는 것을 심판이라고 하는데 그 때는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가 하늘에 닿을 때입니다. 하나님은 소돔성에서 들려오는 부르짖음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보려고 소돔으로 향하셨습니다.
2. 소돔 사람들의 죄악
그러면 소돔 사람들의 죄악은 무엇일까요? 소돔 성에는 어떤 부르짖음이 있어서 하늘에 들렸을까요? 창세기 19장은 하나님이 소돔 성을 방문하신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만나 손님으로 환대를 받은 후에 기쁜 소식을 전해주신 후에 히늘로 올라가셨고 두 천사는 소돔 성으로 떠났습니다. 소돔 성은 아브라함이 사는 곳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그 성에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해질녘에 두 천사는 소돔성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롯은 동네 어귀에서 앉아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성경의 이야기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대 중동에서 손님이나 나그네가 한 동네에 들어오면 정성껏 맞이하여 대접하는 것이 풍습이고 불문율이었습니다. 사실 창세기 18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방문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정성껏 모셨습니다. 뜨거운 한낮에 방문한 그 손님들을 시원한 그늘로 모시고 발을 씻긴 후에 떡을 대접하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대접을 했습니다. 그것이 손님을 환영하는 정상적인 태도였습니다.
두 천사가 소돔 성에 왔을 때 롯도 아브라함처럼 정성껏 모셨습니다. 저물어 가는 시간이기 때문에 하룻밤 묵고 가시라고 자기 집으로 손님들을 인도했습니다. 그때 마을 어귀에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의 어른들도 함께 있었나 봅니다. 아마 그늘에서 쉬면서 오후를 보냈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나그네가 롯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롯의 집에 들어간 손님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롯도 저녁식사를 정성껏 준비하여 함께 음식을 먹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깥에서 사람들이 소란스럽게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롯은 무슨 일인가 하고 문을 열고 마당을 나섭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동네 사람들이 죄다 몰려와서 손님들을 내놓으라고 야단입니다.
그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소돔 성 각 마을에서,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모든 남자가 몰려와서, 그 집을 둘러쌌다.
그들은 롯에게 소리쳤다. “오늘 밤에 너의 집에 온 그 남자들이
어디에 있느냐? 그들을 우리에게로 데리고 나오너라.
우리가 그 남자들과 상관 좀 해야 하겠다.”
창세기 19:4~5
동네 사람들이 롯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롯의 집에 온 남자 손님들을 달라고 했습니다. 왜 그 손님들을 달라고 합니까? 사람들의 대답은 ‘우리가 그 남자들과 상관 좀 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자기 동네에 들어온 손님들은 나그네이며 이방인입니다. 그 이방인들을 향하여 상관하겠다고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상관한다는 이 말을 성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로 해석했습니다. 소돔의 남자들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벌이는 동성애자였다고 교회는 그 동안 이 본문을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몰려온 소돔 성 사람들을 보면 젊은이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노인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소돔에 사는 사람들은 노인들도 정력이 넘쳐서 남자들과 관계를 맺는다는 뜻입니까? 이 본문이 동성애로 이해되어 왔지만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본문은 나그네 환대와 관련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은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나그네를 정성껏 대접합니다. 나그네는 거할 곳이 없고 피할 곳도 없으며 대부분 적은 수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나그네 환대에 대한 규정은 성경에 자주 언급됩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사정을 아느니라
출애굽기 23:9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신명기 10:19
실상은 나그네가 거리에서 자지 아니하도록
나는 행인에게 내 문을 열어 주었노라
욥기 31:32
반면에 악인들은 나그네를 죽입니다. 그들에게 심판을 내려달라고 시편 기자는 노래합니다:
여호와여 그들이 주의 백성을 짓밟으며 주의 소유를 곤고하게 하며
과부와 나그네를 죽이며 고아들을 살해하며
시편 94:5~6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라도 나그네를 학대하면 심판하셨습니다:
이 땅 백성은 포악하고 강탈을 일삼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압제하고 나그네를 부당하게 학대하였으므로…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에스겔 22:29, 31
3. 고아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
그러면 하나님은 왜 고아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를 잘 대접하라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신약성경에서도 나그네와 손님을 잘 대접하다 보면 천사를 대접할 수 있다(히 13:2)고 말하지 않습니까? 아마 아브라함의 나그네 환대를 말하는 것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예수께서도 최후의 심판에서 기준이 되는 것 중에 중요한 것은 우리 주위에 있는 작은 자를 대하는 방식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태복음 25:40)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약한 사람 중에 경제적인 약자가 있습니다. 그들을 환대하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잠언 19:17
성경을 보면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께 꾸어 드리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이며, 우리는 손님이나 나그네 환대를 통하여 부지 중에 천사를 대접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성경은 왜 약자에 대한 존중과 돌봄을 이토록 강조하는 걸까요? 어쩌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가장 잘 드러내는 말씀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고아나 과부 또는 나그네는 사회적 약자입니다. 그들은 든든한 후원자가 없습니다. 고아는 양육해 주는 아버지가 없는 아이입니다. 과부는 곁을 든든히 지켜주는 남편이 없는 여인입니다. 그리고 나그네는 자기의 고향과 친척, 그리고 친구들을 떠나 낯선 땅을 여행하는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숙식할 곳이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약자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역사를 보면 약자는 차별과 착취 또는 압제를 당했습니다. 예로부터 여성은 남성보다는 열등하다고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성들이 참정권을 갖게 된 것은 인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1832년-영국). 미국 사회에서 지금 여성 대통령 후보가 선거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유리천장을 극복했다고 지지연설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나라는 교육이 잘 되고 있고 국민의 의식이 성숙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아직도 어떤 나라에서는 여성을 그저 성적 착취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처럼 여성이 오랜 세월 동안 사회적 약자로 고통을 겪었다면 그들을 존중하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약자를 돌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차별과 배제를 극복하려는 노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 때 우리나라에서는 빨갱이를 찾아서 처단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책을 읽거나 소지하면 경찰에 연행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어떤 노래는 금지곡이 되었고 자신의 양심을 따라 말하다가 몇 년간 감옥에 갇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사상적으로 차별을 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종교가 박해를 받던 시절도 있습니다.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절두산 유적지는 다른 종교를 용납할 수 없었던 우리 조상들의 흔적입니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든 후천적으로 장애를 가지게 되었든지 간에 우리나라에서는 장애인을 비하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불편할까를 배려하는 자비와 사랑이 많이 부족한 시절이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왔다고 차별하는 시절도 있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일본에서 살면서 차별을 받고 심지어 관동대지진이 일어났을 때는 집단적으로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유대인을 색출하여 수용소로 끌고가서 격리하거나 죽였습니다. 그래도 독일 교회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요새도 그렇지만 나이가 너무 어리거나 너무 많다고 사람들을 고용에서 배제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키가 크거나 작은 것에 대해서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함으로 듣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보통 어린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처럼 아직 철이 없거나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이 사람을 외모로 놀리고 조롱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한 일입니다.
어느 지방 출신이라고 놀림을 받거나 업무나 고용에서 차별을 하던 시절도 있습니다. 이북 출신의 북한이탈주민이나 조선족이 우리나라에서 차별을 받는 일이 많다고 합니다. 지역차별을 당한 사람들은 정말 억울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원해서 그 지역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차별에 해당하는 것이 있고 차별이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 열심히 노력해서 어떤 업적을 성취했다고 할 때 그에 따라 상을 주기도 하고 고용이나 승진의 기회를 더 주는 것은 결코 차별이 아닙니다. 그런데 자신의 노력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것으로 사람에게 불공평하게 대할 때 그것은 차별입니다. 예를 들면 실력이 충분하고 더 뛰어난 데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또는 남성이라는 이유로 차별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처럼 선진국에서는 차별을 금지하는 법이 제정되어 시행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자는 훌륭한 정신을 담은 것입니다. 그래서 차별금지법에는 차별해서는 안 되는 영역을 밝혀두었습니다.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되는 영역은 성별, 사상, 종교, 장애, 국적, 인종, 나이, 출신지, 가족형태, 성적지향, 성정체성, 그리고 학력입니다. 이런 것으로 소수의 사람과 약자들을 차별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학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소돔 성에 대하여 하나님이 심판의 불을 내리신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4. 차별금지법에 대한 입장
최근 몇 년간 우리나라 국회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지난 2020년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대표발의한 차별금지법에는 모두 11명의 의원들이 법안 발의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한 법안이 세 개 추가로 발의되어서 모두 37명의 국회의원들이 차별을 금지하자는 법안을 발의했습니다. 하지만 차별금지법의 발의는 1997년부터 국회에서 논의되었으며 계속되는 법안 폐기에도 불구하고 법안의 발의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국회의원의 다수가 이 법을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 지도자들이 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을 무겁게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금년에는 전 헌법재판관이었던 분이 국가인권위원장으로 임명되면서 차별금지법에 대한 논란이 다시 불거지고 있습니다. 안창호 위원장은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러자 국회의원들은 그런 자세로 어떻게 인권위원장이 되려는가 하고 비판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개신교회의 상당수가 노골적으로 이 법의 제정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우리나라가 이 법의 제정을 놓고 서로의 생각을 내놓고 자기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라고 해서 일치단결하여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교회와 교단은 차별금지법 제정을 환영합니다. 이제라도 그런 법을 제정하는 것을 환영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더 많은 수의 교회들은 차별금지법 제정을 적극적으로 반대합니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저는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이 문제에 대하여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특별히 교회가 차별금지법의 제정을 반대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개신교회의 많은 신자들은 그 법이 동성애를 조장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된다고 확신하는 것 같습니다. 신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하나님 앞에 진실되게 살고자 하는 마음을 저는 이해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소돔 성이 멸망한 이유는 동성애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도시에 찾아온 나그네를 학대했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소돔 성에 가셔서 보신 것은 하늘에까지 들린 그 부르짖음이 과연 무엇 때문인가 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보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성경 전반을 둘러볼 때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소돔성에서 부르짖는 사람들은 학대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애굽에서 이방인이었던 이스라엘 자손이 학대받아 하늘을 향해 부르짖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붙들려 온 여인에게 다시는 그런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 보여주신 것은 한 사람을 집단적으로 괴롭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타인을 괴롭게 하고 타인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그를 죽이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그런 학대와 괴롭힘은 다수에 의해서 소수에게 일어납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괴롭게 합니다.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을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짓는 죄입니다. 그런 죄가 일어나는 곳에서 사회적 소수자들과 약자들이 고통 속에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그 부르짖음이 하늘에 닿을 때 이 땅에 하나님이 다시 오셔서 심판하십니다. 그것이 성경 이야기가 들려주는 이야기이며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거룩하고 경건한 삶이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약하고 소수인 사람들이 고통을 겪지 않도록 배려하고 돌보아 주는 일입니다. 그것이 나그네 환대이며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경건입니다.
끝으로 야고보서가 교회에 주는 교훈의 말씀을 소개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 주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27, 표준새번역
<끝>.
참고 자료:
성소수자와 차별금지법에 대한 토론회
2018년 10월 29일
https://youtu.be/M-vHqANa3GA?feature=shar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