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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39
빌립보서 2장 13절 [9장 1-5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대한 고백에서부터 다음과 같이 진술합니다. “하나님께서 택자를 영광에 이르도록 정하신 것처럼, 그의 뜻의 영원하며 가장 자유로우신 목적에 의해 그것에 덧붙여 모든 방편들을 예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선택된 그들은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되었고, 적합한 때에 역사하시는 그의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이르도록 효력 있게 부르심을 받고, 의롭게 되고, 자녀로 삼아지고, 거룩하게 되고, 그의 능력으로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도록 보존됩니다...”(제3장 6항) 여기서 모든 방편들까지 예정하셨다고 할 때 아담 안에서의 타락과 타락한 자들이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신학적으로 구원의 서정이라는 내용을 거치게 되는데, 이러한 내용은 ‘적합한 때에 역사하시는 그의 성령에 의해’ 주어집니다.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오직 택자에게만 주어지게 됩니다.
이런 작정의 내용을 따라 모든 택자들은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게 되는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8장 8항에서는 “그리스도가 위하여 구속을 값 주고 산 모든 자들에게 그는 확실하고 효력있게 동일한 구속을 적용하고 전달하되...”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구속을 적용하고 전달하기 위하여 행하시는 일 다섯 가지를 말하는데, 첫째는 그들을 위하여 중보하시는 일입니다. 둘째는 그들에게 말씀 안에서 말씀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비밀들을 계시하시는 일입니다. 셋째는 자신의 성령으로 믿고 순종하도록 그들을 효력있게 설득하는 일입니다. 넷째는 자신의 말씀과 성령으로 그들의 마음을 다스리는 일입니다. 다섯째는 자신의 전능하신 권세와 지혜로 그의 놀랍고 측량할 수 없는 경륜에 가장 일치하는 그런 방식 안에서 그들의 모든 대적들을 정복하시는 일입니다.
참고로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은 좀 더 간략하게 설명합니다. 먼저 58문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획득하신 은택들의 참여자가 됩니까? 특별히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딛3:5,6)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획득하신 은택들을 적용하심으로써(요1:11,12)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획득하신 은택들의 참여자가 됩니다. 이어 59문입니다. 누가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의 참여자가 됩니까? 구속은 그리스도께서 위해 구속을 값 주고 사신 모든 자들에게 분명하게 적용되고 효력 있게 전달됩니다(엡1:13,14, 요6:37,39, 10:15,16). 그들은 정해진 때에 성령에 의해 복음을 따라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됩니다(엡2:8, 고후4:13). 이 두 문항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획득하신 구속을 적용하고 전달하는 일이 성령 하나님의 사역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서정에 속하는 모든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성령을 통해 역사하심으로 나타나는 일이요, 성령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역사하신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해에 따르자면 8장 중보자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에 이어 효력 있는 부르심으로 나와야 하지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제9장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하여 정리합니다. 그리고 이후 제10장에서 효력 있는 부르심에 대하여, 제11장 칭의에 대하여, 제12장 양자에 대하여, 제13장 성화에 대하여 등 구원의 서정의 내용을 다루는데, 왜 구원의 서정에 앞서 자유의지 문제를 다루는가? 정요석 교수는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 참고). “성령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사신 구속을 선택된 자들에게 적용하시는 일을 하신다. 성령님이 선택된 자들에게 구원을 적용하시어, 선택된 자들 안에 믿음을 일으키시고, 그들을 효과적으로 부르시고,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신다면(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30문 참고), 그때 선택된 자들은 무엇을 할까? 로봇처럼 성령께서 입력하신 대로만 행동할까? 아니면 자신들의 의지로 자유롭게 행동할까? 바로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구원론을 다룰 때 제일 먼저 자유 의지를 살펴본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9장은 인간의 네 가지 상태와 관련해 자유의지를 설명하는데, 1항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으며, 자유의지라는 말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정리합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에 본성적 자유를 부여하셨습니다. 그것은 선악에 대해 강제적으로나 [인간] 본성의 어떤 절대적 필연성으로 말미암지 않도록 작정되었습니다(마17:12, 약1:14, 신30:19).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4장 2항은 인간 창조에 대한 설명인데,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식과 의와 참된 거룩이 부여된 이성적이며 죽지 않을 영혼을 지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고백합니다. 계속해서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기록되어 그것을 이룰 능력을 지니게 하셨으나, 범죄의 가능성 아래, 변화에 종속된 그들 자신의 의지의 자유에 놔두셨다.”고 고백합니다. 즉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의지의 자유를 가진 자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9장 1항은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에 본성적 자유를 부여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작정 혹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의지라는 부분을 어느 정도 정리해 두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작정 혹은 주권에 대한 강조로 인해 인간의 의지가 약화 되어 해야 할 의무까지 하지 않는 일이 있는가 하면, 인간의 의지에 대한 강조로 인해 하나님의 작정 혹은 주권이 약화 되어 구원이 마치 인간에게 달린 것처럼 말하는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인간의 의지조차 하나님께서 만들어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는 것과,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의 작정 혹은 하나님의 주권을 벗어난 인간의 자유의지는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작정 혹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인하여 무시되거나 없는 것처럼 할 수 있는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이성호 교수의 경우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해설한 책(비록에서 아멘까지)에서 자유의지와 관련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성령의 구원 사역을 이어주는 훌륭한 가교역할을 한다고 설명하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자유의지는 단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은혜의 참된 의미를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아주 중요한 개념이라는 점에서 그렇다고 합니다. 김영규 교수의 경우도 이 자유의지와 관련해 ‘은혜의 한 형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Cf. Biblia Hebraica et Graeca, editio princeps, Seoul, Research Institute for the Bible and Reformed Theology, 2002, Preface, I: "Even the free will of all creatures within it is only a form of the divine grace which is from the beginning ever poured by the mighty power of God."), 자유의지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그것조차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도록 하기 위한 형식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는 계속해서 살펴볼 내용 속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어쨌든 신앙고백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의지에 본성적 자유를 부여하셨다고 고백하면서,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그것은 선악에 대한 강제적 필연성으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억지로 선을 행하도록 하시는 것도 아니고, 또 억지로 악을 행하도록 하시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억지로 선과 악을 행하도록 한다면 그것은 이미 ‘자유’라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7장 1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 대하여 ‘임의로’ 대우한 것처럼, 인자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임의로’라는 단어는 사전적 의미로 ‘어떤 제한 없이 마음대로’라는 뜻입니다. 자기들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렇게 임의로 대우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을 받으시는데, 고난 받고 죽으시는 모든 내용은 이미 영원 전부터 작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작정되었다고 해서 거기에 강제성이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은 완악하게 했다는 표현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완악하기 싫은데 하나님께서 그를 억지로 완악하게 만들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본래부터 그는 완악한 자였고, 그런 그를 벌하신다고 할 때 죄를 죄로 벌하시는 방식으로 완악하게 하셨다는 것이지, 완악하기 싫은데 억지로 완악하게 만드셨다는 것은 아닙니다. 야고보서 1장 14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성경이 하나님의 시험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 시험은 결코 강제성을 띤 것이 아닙니다. 혹 시험을 받고 넘어지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욕심 때문이지, 하나님께서 넘어지게 만들기 위해서 억지로 무엇을 하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에 본성적 자유를 부여하셨다고 할 때 둘째, 그것은 인간 본성의 어떤 절대적 필연성으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교하자면 하나님의 본성은 절대적인 필연성을 가집니다. 예를 들어(이성호, 비록에서 아멘까지 참고)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존재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존재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면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존재 방식 자체가 절대적인 필연성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존재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룩과 반대되는 속성을 가질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물론 피조물 가운데도 주향성(走向性)이라는 게 있습니다(정요석,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 참고). 주향성의 사전적 뜻은 “생물이 외부로부터 받는 자극에 대하여 행하는 무의식적인 행동”인데, 예를 들어 동식물이 빛의 자극에 대하여 빛을 향하거나 피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할 때 그것은 그것들이 갖는 본성의 어떤 절대적 필연성으로 말미암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주신 자유의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성적인 영혼을 지닌 존재로 창조하시며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식과 의와 진리의 거룩함을 부여하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른 지식과 의와 진리의 거룩함을 인하여 외부의 충동에 대하여 이성적인 반응을 보이지, 결코 인간 본성의 어떤 절대적 필연성에 따라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유의지는 대한 논의는 보편적으로 죄의 문제와 관련해서 언급이 됩니다. 그래서 타락 이전의 인간의 의지의 성격이 무엇인지, 또 타락 이후의 인간의 의지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언급하게 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4가지 상태의 인간의 의지에 대하여 말하는데, 2항은 타락 이전, 무죄의 상태에서의 인간의 의지에 대하여 설명하고, 3항은 타락 이후, 죄의 상태에서의 인간의 의지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게 되는 택자와 관련해서는 4항의 내용이 중요합니다. 거기서 신앙고백서는 죄인을 회심시켜 은혜의 상태로 옮기실 때의 인간의 의지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5항은 은혜의 상태 정도가 아니라 영광의 상태가 되게 하셨을 때의 인간의 의지를 설명합니다.
먼저 타락 이전, 무죄의 상태에서의 인간의 의지에 대하여 신앙고백서는 2항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무죄의 상태에서 인간은 하나님께 선이 되며 그가 매우 기뻐하실 일을 의지하고 행할 자유와 권세를 가졌었습니다(전7:29, 창1:26). 그러나 변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상태로부터 타락할 수 있었습니다(창2:16,17, 3:6).
이 내용은 신앙고백서 제4장 2항에서 언급하고 있는 인간 창조에 대한 내용과 다르지 않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식과 의와 참된 거룩이 부여된 이성적이며 죽지 않을 영혼을 지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기록하셨습니다. 기록된 율법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위로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아래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법을 새기셨습니다. 이것을 양심의 법이라고 합니다. 타락하기 이전 인간은 이런 양심의 법을 이룰 수 있는 능력도 지니게 하셨습니다. 이 내용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제9장 2항에서 무죄의 상태에서 인간은 하나님께 선이 되며 그가 매우 기뻐하실 일을 의지하고 행할 자유와 권세를 가졌다고 고백합니다. 전도서 7장 29절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라고 말할 때 정직이라는 말은 반의적인 의미에서 사람에게서 거짓된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의지를 가지고 얼마든지 선이 되고, 그가 매우 기뻐하실 일이라면 얼마든지 의지하고 행할 수 있는 자유와 권세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고백서 4장 2항에서도 언급하는 것처럼 범죄의 가능성 아래에 두셨습니다. 자유의지라는 말처럼 이렇게도 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할 수 있는, 다시 말해 변할 수 있는 상태로 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피고 있는 9장 2항에서는, 그러나 변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상태로부터 타락할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이미 창세기 2장에서 선악과 명령을 하신 것 자체가 이런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둔 것입니다. 명령하셨지만 그 명령에 순종할 수도 있고, 또 순종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순종이 아닌 불순종하고 말았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뱀의 유혹을 받은 여자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나무를 보면서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다고 여긴 상태부터가 이미 그 마음의 변화를 일으킨 것입니다. 전도서 7장 29절은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지만 사람이 많은 꾀들을 냈다고 할 때 정직한 상태에서 변하여 타락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작정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아담 안에서의 타락까지 구속을 위한 방편의 내용으로 있습니다. 즉 타락은 하나님의 작정의 필연성 안에 있습니다. 작정하셨기 때문에 그 일은 필히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고백서가 9장에서 자유의지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죄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는다는 측면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죄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이 아닌 인간에게 있다는 그 정당성을 제시하는 방향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항에서 자유의지가 주어졌고, 그것은 결코 강제성이나 어떤 필연성을 배제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때 강제성이나 어떤 필연성을 배제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작정 밖에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럼 어떻게 죄가 들어오게 되었는가? 2항은 의지가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래 창조될 때의 의지는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있었지만, 전도서 7장의 말씀처럼 거짓이 없는 정직한 상태로 있었지만, 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타락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록 하나님의 작정의 필연성을 따라 타락했다 할지라도, 타락의 원인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거나 핑계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인간의 타락은 그들에게 부여하신 자유의지의 방치로 말미암은 것이요, 그렇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의 의지를 따라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타락하게 되었을 때 타락 이후, 죄의 상태에서의 인간의 의지에 대하여 신앙고백서는 3항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죄의 상태로 타락함으로 인간은 구원을 수반하는 어떤 영적 선에 이르는(혹은 이르고자 하는) 의지의 모든 능력을 전적으로 잃었습니다(롬5:6, 8:7, 요15:5). 따라서 본성적인 사람(혹은 자연인)은 모두 영적 선을 싫어하고(롬3:10,12), 죄 가운데 죽고(엡2:1,5, 골2:13), 그 자신의 힘으로는 자신을 회심시키거나 그와 관련해 자신을 예비시킬 수 없습니다(요6:44,65, 엡2:2-5, 고전2:14, 딛3:3-5).
이 부분은 제6장 인간의 타락과 죄와 그에 대한 형벌에 대한 부분에서 살핀 바 있는 내용입니다. 제6장 1항에서 우리의 첫 부모는 사단의 간계와 시험에 의해 유혹받아 금지된 열매를 먹음으로 범죄했다고 고백합니다. 2항에서 4항은 그 결과에 대한 내용인데, 먼저 2항은 이 죄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 떨어져 죄 가운데 죽게 되었고, 영혼과 육체의 모든 기능들과 부분들이 전적으로 오염되었다고 고백합니다. 3항에서는 모든 인류의 뿌리인 그들은 일반적 출생에 의해 그들로부터 내려오는 그들의 모든 후손에 이르기까지 이 죄책이 전가되었고, 죄 가운데 동일한 죽음과 부패된 본성이 전달되었다고 고백합니다. 4항에서는 이 원래의 부패로부터 모든 자범죄들이 나오는데, 우리는 이 부패로 인하여 전적으로 모든 선을 싫어하고, 행할 수 없고, 대적하며, 그리고 모든 악을 향해 전적으로 기울어진다고 고백합니다.
특별히 의지와 관련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9장 3항은 6장 4항의 내용을 가지고 와서 죄의 상태로 타락함으로 인간은 구원을 수반하는 어떤 영적 선에 이르는 혹은 이르고자 하는 의지의 모든 능력을 전적으로 잃었다고 고백합니다. 타락하기 전에는 의지의 능력이 있었습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실 때 먹지 않고자 하면 먹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먹고자 하면 먹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먹지 말라 하신 명령에 불순종하여 먹었을 때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은 죄의 상태로 타락하여 구원을 수반하는 영적 선과 관련된 모든 의지의 능력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고 말합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는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말하며(엡2:1), 또 골로새서 2장에서는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다고 말합니다(골2:13).
그러므로 신앙고백서는, 따라서 본성적인 사람(혹은 자연인)은 모두 영적 선을 싫어하고, 죄 가운데 죽고, 그 자신의 힘으로는 자신을 회심시키거나 그와 관련해 자신을 예비시킬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영적 선에 대해서는 싫어하고 또 죄 가운데 죽었는데 어떻게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회심시키거나 회심을 위한 준비를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실은 신앙고백서가 인용하고 있는 여러 구절들을 통해 분명히 가르칩니다. 먼저 요한복음 6장 44절입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65절로 가면 다시금 반복하여 말씀합니다.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서 말한 내용도 다르지 않은 말씀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니 다른 종교들처럼 공로사상에 바탕을 둔 교리라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면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은혜와 같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돌리는 교리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보다 어리석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자기 의지에 뭔가를 돌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 3항과 같은 의지를 말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교리를 누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6장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성부 하나님께서 이끌지 않으시면, 그가 오게 하여 주지 않으면 아무도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갈 수 없습니다.
디도서 3장 3절 이하 5절도 보면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의 지혜, 우리의 힘, 우리의 능력, 우리의 열심, 이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따라’입니다.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을 준비할 수 있고, 회심할 수 있습니다.
강조하여 말씀드리지만 인간의 전적 부패는 이처럼 의지까지의 부패를 말합니다. 왜 펠라기안주의를 반대하고, 반펠라기안주의를 반대하고, 알미니안주의를 반대합니까? 그들은 언제나 인간의 자리를 마련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의지를 앞세운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아닌 다른 많은 종교도 사실은 인간의 의지를 앞세웁니다. 그러나 3항의 내용은 인간의 자리, 인간의 의지를 철저히 부정합니다. 인간에게 의지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아담 안에서 타락한 자들의 그 의지는 그 스스로의 힘으로 회심하거나 회심할 준비를 갖추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전적 부패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부분을 완전히 잃어버렸는가? 그렇게까지 말하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인 은총 아래에서 선을 장려하고 악을 제어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사랑 부분에 있어서는 나타나지 않을지라도 이웃 사랑에 있어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관련된 것에 대해서는 결코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먼저 찾고 구하는 법이 없습니다. 인간의 부패가 전인의 부패요, 의지까지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내용은 어디까지 확장해 가느냐? 인간의 의지에 따른 공로사상이나 신인협력과 같은 교리, 그리고 소위 공로에 따른 상급론과 같은 내용까지 거절하게 됩니다. 그만큼 중요한 내용입니다.
이어 4항에서는 하나님이 죄인을 회심시켜 은혜의 상태로 옮기실 때의 인간의 의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회심시켜 은혜의 상태로 그를 옮길 때, 하나님은 죄 아래 놓여 있는 본성상 노예의 신분으로부터 그를 자유케 하시며(골1:13, 요8:34,36),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그가 영적 선에 속한 것을 의지하거나 행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빌2:13, 롬6:18,22). 그러나 그의 [여전히] 남은 부패 때문에 그는 선에 속한 것을 완전하게 행하지도 의지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악에 속한 것만을 행하고 의지합니다(갈5:17, 롬7:15,18,19,21,23).
3항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은 그 자신의 힘으로는 자신을 회심시키거나 그와 관련해 자신을 예비시킬 수 없습니다. 때문에 회심을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죄인을 회심시키셔야 합니다.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이 죄인을 회심시켜 은혜의 상태로 그를 옮길 때, 하나님은 죄 아래 놓여 있는 본성상 노예의 신분으로부터 그를 자유케 하신다고 고백합니다. 회심하기 전 타락한 모든 인류는 본성상 노예의 신분입니다. 요한복음 8장 34절의 말씀처럼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죄인을 회심시키실 때, 요한복음 8장 36절의 말씀처럼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닙니다.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자유롭게 됩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은 이런 변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럼 죄의 종으로 있다가 자유롭게 되면, 다시 말해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지면 타락 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6장 5항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 본성의 부패는 현세 동안 중생된 자들 안에도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중생되었다는 것이 타락 이전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이후 우리는 누구도 타락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9장 2항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무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9장 3항의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중생되었다는 것은 죄인이 회심했다는 것이고, 더 이상 본성상 노예의 신분, 죄의 종으로 있지 않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종으로 있을 때는 영적 선을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죄의 종이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영적 선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9장 4항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영적 선에 속한 것을 의지하거나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죄인을 회심시켜 은혜의 상태로 그를 옮긴 후에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그가 영적 선에 속한 것을 의지하거나 행할 수 있도록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빌립보서 2장 13절이 그 내용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회심하여 죄의 종에서 자유함을 얻었지만, 우리 안에서 여전히 부패한 본성이 남아 있습니다. 이 사실을 9장 4항 마지막 부분에서 말합니다. 그러나 그의 여전히 남은 부패 때문에 그는 선에 속한 것을 완전하게 행하지도 의지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악에 속한 것만을 행하고 의지한다. 그리고 이러한 고백의 내용은 특별히 로마서 7장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먼저 15절을 보시면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8절과 19절입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1절에서는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회심하여 중생되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악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23절에서는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한 마디로 중생된 자의 상태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으면서도 선에 속한 것을 완전하게 행하지도 의지하지도 못하는 상태, 오히려 악에 속한 것만을 행하고 의지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상태에 두셨는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거저 그가 영적 선에 속한 것을 의지하거나 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인간의 의지란 하나님의 은혜의 한 형식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선을 행했다면 그것은 내 의지 없이 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런 의지조차 하나님께서 이끄셔서 내놓으신 것이라는 겁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이 그것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너희 안에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분이시다. 즉 너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고자 한다면, 분명 너희의 의지를 따라 행하는 것이지만, 그런 의지를 주시고 만들어 내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생된 자라 할지라도 그 스스로는 영적 선에 속한 것을 의지하거나 행할 수 없습니다. 3항을 설명하면서 인간의 의지에 따른 공로사상이나 신인협력과 같은 교리, 그리고 소위 공로에 따른 상급론과 같은 내용은 거절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지만, 여기서는 더더욱 분명하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개혁신학에 있어 인간의 자유의지와 관련해 3항과 4항은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왜 우리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하는가? 3항과 4항의 내용을 받아들인다면 인간이 받아야 할 영광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4항은 성화의 주체 자리에 인간이 개입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 돌려야 마땅함을 분명히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내용이 인간의 의지를 무시하거나 없는 것처럼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의지까지 주셨습니다. 그러나 타락했다는 사실,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사실, 의지까지도 타락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의지를 회복시켜 주실 때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를 하나님의 은혜를 담는 형식으로 사용하십니다. 인간의 의지의 가치는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데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9장 5항은 영화의 상태에서의 인간의 의지에 대한 내용인데, 간략하고 설명합니다.
인간의 의지는 오직 영화의 상태에서 선만 행하도록 완전하고 변함없이 자유롭게 됩니다(엡4:13, 히12:23, 요일3:2, 유24).
여기서 영화의 상태란 단지 죽음 이후의 상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중생된 자가 영광의 몸을 취한 상태입니다. 이 내용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32장에서 살피게 될 것입니다. 그때 인간의 의지는 4항에서처럼 남은 부패 자체가 없습니다. 남은 부패로 말미암아 악에 속한 것만을 행하고 의지한다면, 그런 남은 부패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더 이상 악에 속한 것만을 행하고 의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적으로 선만을 행하게 됩니다.
이런 내용은 우리의 소망이 어디 있는지를 보게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슬퍼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비록 우리가 은혜의 상태로 옮겨졌지만, 여전히 남은 부패가 있어서 선에 속한 것을 완전히 행하지도 의지하지도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게 되는 것, 그의 거룩하심처럼 거룩하게 되는 것, 아들의 형상과 동일한 형상을 갖는 것이지만, 그렇게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슬픔입니다. 그러나 영화의 상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때는 주의 은혜가 얼마나 우리를 채우시는지 악에 속한 것은 일절 우리로부터 걷어 내십니다. 그래서 오직 선만을 행하도록 완전하고 변함없는 자유함 가운데 있게 하십니다. 우리는 바로 이 상태가 되기까지 지상에서 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역사하시기를 바라면서, 특별히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신다고 할 때 성령은 말씀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에 말씀을 통해 역사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주 앞에 서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