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도모’라는 말을 쓴다.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 대책과 방법을 세운다는 뜻이다. 단어 스스로가 앞으로 나아가는 정진의 의미를 품고 있어 ‘후퇴’한다거나 ‘죽음’ 따위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 죽음을 도모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2020년 미국에서, 2021년 한국에서 개봉된 로저 미첼 감독의 영화 <완벽한 가족>이다.
영화는 스펙터클하거나 구성이 특이하거나 배경이 화려하지는 않다. 시종일관 조용하게 돌아간다. 그런데 영화의 엔딩 자막이 올라간 후의 느낌은 몹시 시끄럽다. 먹먹함이 가시질 않는다.
수잔 서랜든이 분한 주인공 릴리는 루게릭병을 앓고 있다. 병세 악화로 곧 마지막을 맞이하게 될 것을 직감한다. 그녀는 자신이 죽는 것보다 자신이 자기의 죽음을 주도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더 두렵다. 식사도 못 하게 될 지경에 이르자, 의사인 남편과 함께 이미 계획해 놓았던 존엄사를 실행하기로 한다. 그 실행을 앞두고, 식구들을 집으로 불러 모으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릴리는 일 년 중 가장 요란스러울 수 있는 하루, 크리스마스 파티를 명목으로 가족들을 한 식탁으로 불러 모은다. 그리고 조용히 죽음을 선포한다. 릴리의 ‘죽음 선포’를 두고 남편과 두 딸과 사위 그리고 가족보다 더 가까이 지내 온 친구가 등장하여 각자의 상처를 꺼내놓기 시작한다. 이 또한 한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것이 아니라 각자 구석에서 조용히 주고받는다. 건드리면 무너져 내릴까봐 내놓지 못했던 문제들이 드러난다. 이별을 위한 시간까지는 하루, 저마다의 갈등과 화해를 위한 몸부림이 치열하다. 그렇게 릴리는 계획을 완수하고, 남은 자들은 다시 뿔뿔이 각자의 삶으로 흩어진다. 바닷가 한적하고 아름다운 집은 실루엣으로 남는다. 전체를 관통하는 스토리는 이것이 전부이다.
영화는 철저하게 현재에 집중하면서 생략과 거리두기에 치중한다. 릴리는 오랜 세월을 함께한 친구-남편과 오랫동안 불편한 관계로 지내 온-에게 사후에 자기 자리를 메워주길 유언한다. 이것은 꽤 비중 있는 이슈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런 사탕 같은 소모성 소재는 아주 과감하게 생략해 버린다. 그동안 수면 아래에 있던 모녀와 자매 그리고 부부간의 갈등과 갈증만을 수면 위로 올린다.
그래서였을까. 영화가 끝날 때까지 나는 완벽한 가족이란 한국어 제목에 설득이 되지 않았다. 전혀 완벽해 보이지 않는 가족을 두고 완벽하다는 단서를 붙인 이유를 찾느라 보는 내내 골몰해야 했다.
영화의 영어 제목은 ‘블랙버드’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블랙버드가 가지고 있는 엄청난 뜻을 기대하며 정보를 탐색했다. 한국어로 검은지빠귀인 이 새는 번식기에만 암수가 같이 살고 그 외에는 무리 지어 생활한다는 정보 외에 특별한 것이 없다. 비틀즈가 같은 제목으로 노래했던 그 시대 (60년대)를 잊지 못한 감독이 그 시대의 격렬함을 추억하려고 했다는 재미있는 기록이 있는데, 그다지 설득력 있어 보이진 않는다. 결국 영화의 원작을 찾기로 했다.
원작은 덴마크 영화 ‘사일런스 하트’이다. 아무리 봐도 ‘완벽한 가족’으로 이해하기엔 거리가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완벽한 가족?’이어야 한다. 물음표가 생략된 역설인 거다. 한국인의 정서를 고려한 제목인지 제작자의 계산인지는 알 수 없으나 꽤 절묘하다.
영화는 불안전하고 삐걱거리는 관계를 마주하면서 가족의 의미를 완성해 간다. 가족이란 틀을 지키려고 수많은 진실과 과정을 덮어두었던 엄마라는 한 여자는 호들갑스럽지 않게 관객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다. 조용하지만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회피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릴리가 선택한 죽음은 마치 흩어져 있던 빛들을 모으는 돋보기 같다. 구름에 가려져 있거나 비에 젖어 있던 가족 간의 상처를 한곳에 모으고 있다. 상처와 상처가 모여 연소 되는 설정은 다소 진부할 수 있다. 하지만 릴리의 가족은 릴리의 계획된 죽음 앞에서 각자가 가진 빛의 역할을 완수한다. 나는 이 지점에서 극적인 것이 극적이지 않게, 가장 알맞은 모습으로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본다. 태풍의 눈이기도 하고 회오리 속의 안정 같기도 하다. 세상을 향해 흩어져 있던 존재의 조각들이 다시 엄마라는 밑그림 속으로 들어와 완성되는 안도감 같은 것이다
가족이란 울타리는 참 이중적이란 생각을 해 본다. 더 많이 양보해야 하고, 더 많이 사랑해야 하고. 더 많이 참아내야 하고, 더 많이 바라고, 더 많은 상처를 주고받는 이기적인 집단. 하나의 결핍에 다른 결핍이 덧대지면서 가슴은 더 멀어지는 경험을 적잖이 했다. 준 사람은 없는데 받은 사람만 있는 ‘상처’라는 형체 없는 총알은 대책이 없었으니까. 나는 엄마라는 타이틀로 인해 아이들과도 수없이 상처를 주고받았다. 아니, 일방적으로 주었다는 말이 맞겠다. 엄마는 상처조차도 받으면 안 되는 존재이어야 하니까.
잘 포장된 상자 속에 불편하게 엉겨있는 릴리의 가족에게서 나의 현주소를 발견한 것인지 모른다. 영화의 마지막 자막을 따라가다가 나는 나의 엄마와 나의 딸에게 말을 건네고 싶어졌다. 잘 숨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적절한 들킴이 필요한 속마음을 꺼내 위로를 주고받고 싶었다. 언젠가 내게도 닥칠 죽음이라는 명제 앞에서 내가 취해야 할 역할을 생각했다. 어떠한 가족도 완벽할 수는 없다. 단지 완벽해지도록 노력하는 것뿐이다.
죽음을 앞둔 마지막 크리스마스 이브에 나는 남겨진 가족을 위해 과연 무엇을 도모할 수 있을까.
유금란 / 시드니에 거주하면서 수필과 시를 쓰고 있다. 산문집으로 <시드니에 바람을 걸다>, 해외 5인 공저 <바다 건너 당신>이 있다. 재외동포문학상, 동주해외신인상 수상. <문학과 시드니>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