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총회 기간에 경건회를 이끌어 갔던 사람은 한국전쟁 때 필리핀으로 피난했다가 돌아온 나요한(那約翰, J. Abernathy) 선교사였다. 그는 매시간 소명자를 부르는 설교를 했다. 나는 그 설교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면서도 나는 손을 들고 나가지 못했다. 손을 들고 결심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세상의 부귀영화를 저버리고 한 평생 고생스런 주의 사업에 몸을 바치는 결단식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3일째 되는 날, 마치 주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것 같아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다. 나는 참을 수 없는 마음을 누르고 무거운 손을 들었다. 선교사는 나에게 일어서라고 했고,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일어섰다. 모두 박수를 쳐 주었다. 나는 나의 이름을 밝히고 선교사는 내 이름을 기록했다. 이상하게도 선교사는 그 일 뒤에는 결심자 초청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놀라운 깨달음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은 나를 불러내기 위해서 3일 동안 매일 부르고 찾으셨던 것이 아닌가!” 나는 참으로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이는 1951년 5월 23일 본 교단 총회석상에서 일어난 일생일대의 큰 사건이었다. 이 일은 주님의 소명에 단순히 손만 들어 응답한 것이 아니고 마음과 몸까지 바치기로 굳은 결심을 엄숙히 내린 사건이다. 이 결심에는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오직 주님의 구령 사업을 위하여 불고가사(不顧家事) 불고처자(不顧妻子)를 해야 한다는 뜻이 들어있는 것이다. 이는 선배 목사님들을 통해 이미 많이 들었던 것이고 또한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실이었다.
당시 사회적으로 각계각층의 직업 선호도 가운데 목사직은 이발사직 다음인 27번째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목사 직업은 선호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목사직은 주님의 소명을 받지 않고는 가히 자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소명을 확인한 지 한 달이 지난 뒤, 총회로부터 전도사 임명을 받았다. 그리고 또 한달 뒤 충서지방의 죽림(竹林)교회의 초빙을 받고, 7월초에 나는 아내와 집을 떠나 임지 교회로 부임했다. 그때 내 나이는 25세였다. 사실 나는 장남으로서 부모를 봉양할 책임이 있었지만 떠나는 발길이 무겁지 않았다. 부모님께서 일찍부터 우리 형제들이 하나님의 사업에 쓰임 받기를 기도하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것은 항상 나와 함께 계셔서 나를 부르시는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계획하신 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 때 나를 죽림교회로 이끌어준 분은 광천교회의 담임목회자인 신혁균(申爀均) 목사였다. 광천교회와 불과 5km 정도 거리를 두고 있는 죽림교회는 충남 보령군 청소면 죽림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교회는 김관제(金寬濟) 씨가 자기 뒷산에 초가삼간의 건물을 마련하고 교역자를 초빙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교회가 세워지게 된 동기는 이러했다. 김관제 씨는 난치질병으로 신음하던 가운데 백방으로 고치려 했으나 실패하고 절망 가운데 있었다. 그러다 그는 마을에서 6km 떨어진 담산교회의 노파 교인의 전도를 받아들여 교회에 출석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산길을 걸어 교회에 도달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어서 언제나 그는 11시 예배가 끝난 뒤에 도착하여 기도를 받곤 했다. 아침 일찍 출발해도 산길을 걸으며 중간중간 수 십 번씩 쉬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매 주일 산을 넘을 때 쉬는 횟수가 줄어드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얼마 뒤에는 쉬지 않고 산을 넘어갈 수 있었고, 예배시간도 지킬 수 있었다. 가족들은 그의 병이 나아간다는 사실을 알고 기뻐했고, 그의 부모는 자신의 땅을 내놓고 교회를 세우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죽림교회에 부임하여 지낼 곳을 소개받았다. 어느 초신자의 반 칸짜리 방이었다. 온기도 없는 방에 삶의 터전을 잡고 교회를 돌아보았다. 교회는 산 중턱에 세워져 있었다. 교인수라고 해야 청년 몇 명과 부인 대여섯, 어린이까지 합해서 10여 명뿐이었다. 식량은 김관제 집사와 그 모친 안집사의 집에서 공급해 주었다. 하지만 땔거리를 구하기 위해서, 나는 지게를 지고 산에 나무를 하러 가야 했다. 교회 가까운 곳에 산이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편리했다. 산에 올라가보면, 늘 동네 청년들이 땔나무를 하러 먼저 올라와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볼 때마다 “전도사님도 나무하러 오셨네” 하면서 그들이 거둬들인 나무를 내게 나눠주곤 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나는 전도사로서 산에 나무하러 올라가는 일이 창피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다 어렵게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를 돌아보며 위로하면서 살아 나갔다.
전도사가 교회에 상주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지역 주민들은 교회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나는 먼저 주일학교를 부흥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목회란 것은 교회생활의 연속임을 깨달았다. 어렸을 때 주일학교 생활, 교사생활, 전도와 심방생활 등이 목회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같은 마을에 초등학교 분교가 있었기 때문에 어린이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주일학교는 빠르게 성장했다. 청장년도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 소식이 퍼지자 인근에 있는 담산교회에서 도와달라는 요청이 왔다. 그 때는 대부분 교회에 담임목회자가 없던 시절이었다. 노인들이 인도하여 겨우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나는 담산교회를 겸임하게 되었다.
죽림교회 개척한 지 1년 뒤(1952년). 신혁균, 김종률 목사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