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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 26일 주일 설교
설교 제목:
“내면의 힘, 세상의 정의: 영성훈련의 두 날개”
https://youtu.be/5C9gSuIXgkg?si=etRfxVSAt3wUO2pR
성경 본문:
미가 6:6~8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설교 목적:
구원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것은 단 한번의 회심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친 구도의 여정이라면, 그 내용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지와 편견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되는 것이며 그것은 증오와 갈등의 인간관계를 사랑과 평화의 관계로 발전하게 하는 것이며, 그것은 허무와 냉담의 삶을 의미와 기쁨으로 충만하게 채우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그런 길을 걸을 수 있을까? 그것은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 즉, 하나님께 가까이하는 것이다. 이런 삶을 영성의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영성(Spirituality)은 다양한 의미를 포함하며 여러 분야에 적용되는 말이지만 그 본질은 하나님께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다. 마커스 보그는 이런 영성훈련이 진행되는 동안에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게 되고 그리스도인 다움을 분명하게 형성하게 되며, 인격적으로 성숙을 경험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그는 자신의 책, ‘기독교의 심장’에서 영성훈련의 방식에 대하여 소개하는데 그것은 기도와 예배, 성경읽기와 독서, 그리고 봉사와 헌신 그리고 자선과 사회 정의에 동참하는 것 등이다.
나는 이번 설교에서 구도의 길을 걷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라고 할 때 그 여정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볼 것이다. 그것은 구도의 여정에 필요한 활동과 그 의미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나는 나의 영성훈련을 돌아보고 우리 시대에 더욱 강화되어야 할 영성훈련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설교 개요
1. 영성훈련이란 무엇인가?
2. 영성훈련의 목적
3. 영성훈련의 방법
4. 행동하는 영성, 미가서의 결론
1. 영성훈련이란 무엇인가?
신학교에서 영성훈련이라는 과목이 있었습니다. 27년 전의 일이라 분명하지는 않지만 예수님의 생활에 대하여 배웠던 것 같습니다. 교회 생활이나 신자들 사이에서 ‘아무개는 영성이 깊다’는 말이나 ‘아무개는 영적인 사람이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 반대로 ‘육신적인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몹시 나빠졌습니다. 그것은 군대에서 군인에게 ‘빠져가지고~’라는 말을 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여기서 빠졌다는 말은 사기 또는 군인정신 같은 것을 잃어버린 군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신자에게 영성이 깊다 또는 영적이다는 말은 군인에게 군인정신이 투철하다는 의미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돌아보니 신앙생활을 하는 내내 영성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던 것 같습니다. 최근에 읽은 마커스 보그의 책, 기독교의 심장에는 영성훈련과 관련된 대목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방법은 훈련이다.’ 저는 이 말이 영성훈련을 설명한다고 생각합니다. 영성이 깊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려면 하나님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훈련을 깊이 오래 해야 합니다.
영성훈련에는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 훈련은 반복적인 연습을 통해서 습관으로 형성될 때 효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사실 모든 종교에는 이런 저런 종류의 반복적인 활동이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인이라면 누구나 따라야 할 행동 지침이며 계율입니다.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정해진 기도문과 기도 시간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번 기도를 드리고 그 기도의 내용과 양식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개인마다 다를 수 있지만 유대인의 기도시간은 아침에 약 한 시간, 오후에는 약 30분, 그리고 저녁에는 약 40분 정도 소요된다고 합니다. 불자들도 계율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들에게는 108배를 비롯하여 8정도(八正道), 그리고 염불과 독경, 명상 등 여러가지 수행이 있습니다. 이슬람교 신자들도 하루에 다섯 차례 기도하는 것은 전 세계 어디에서나 공통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처럼 종교인에게 수행은 그들의 영성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개신교회의 경우에는 종교적인 수행을 행위구원론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종교개혁 시대의 영향이 지금까지 남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개신교인들은 구원이란 믿음으로 받는 하나님의 은혜며 결코 사람의 행위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신앙은 믿는 것이지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렇게 하려면 훈련이 필요하므로 믿음과 훈련, 즉 수행은 반대가 아닙니다. 오히려 훈련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마커스 보그가 가장 먼저 주장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랜 연구를 통해서 구원에 대하여 정의하기를, ‘구원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를 위하여 계획하신 참 인간의 삶을 회복하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참 인간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그런 삶은 어떻게 성취될 수 있을까?’ 이것은 제가 오랫동안 고민하는 주제입니다. 그런 삶은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고 그 결과 이 세상이 더 나은 곳으로 변화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렇게 하려면 훈련이 필요하다고 마커스 보그는 제안합니다.
마커스 보그가 제안하는 훈련의 의미는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적으로나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보통 교회와 같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가입하여 공동체 생활에 참여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l 예배, 제자훈련, 공동으로 자선과 봉사활동에 참여하기
l 그리스도인으로서 양육을 받기
l 경건훈련을 받기(기도, 규칙적인 성경읽기)
l 자선과 사회정의에 동참하기
몇 달 전에 저는 10년 동안 섬기던 교회에서 담임목사직을 사임하고 가정에서 아내와 단 둘이 매일 저녁 독서와 성경읽기, 성경암송에 정성을 들이고 있습니다. 사역을 중단하고 나서 생긴 허전함을 달래고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 시작한 일이 이제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교회에 속하여 사역을 할 때는 이런 여유와 혜택을 누리지 못했는데 이렇게 하고 보니 이것이 우리에게 영성훈련이 된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처음에는 그 동안 암송하던 성경구절을 복습하고 한두 구절씩 늘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62구절이 되었고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조 계보도 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경읽기를 위해 우리는 시편과 역사서, 그리고 예언서를 한 장씩 읽고 있으며, 최근에는 아브라함 헤셸의 책을 성경처럼 네댓페이지씩 읽으면서 토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매일 저녁에 모여 연습을 하다 보니 어느덧 마음 속에 있던 상처가 사라지고 뭔가 모를 뿌듯함이 마음을 채우는 것 같아서 참 좋습니다. 다시 교회를 맡아 사역을 하게 된다면 이런 즐거움을 다른 사람들도 맛볼 수 있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오늘 설교에서 저는 그리스도인이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동참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영성훈련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커스 보그의 책 기독교의 심장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가겠습니다.
2. 영성훈련의 목적
영성훈련이 하나님과 관계를 깊게 하는 연습이라면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얻게 되는 유익은 무엇일까요? 즉, 영성훈련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가장 큰 유익은 그 훈련의 과정에서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자기 정체성이 분명해진다는 점입니다.
사실 우리는 때때로 환경의 변화에 따라 자기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것을 경험합니다. 제가 이번에 담임목사직에서 사임을 하고 나면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이 정체성의 혼란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목사인데 교회도 없고 교인도 없고 예배당도 없습니다. 나는 목사가 맞나요? 교회가 없는 목사가 어디에 있나요?’ 이런 생각이 저의 마음을 무겁게 했습니다. 누구나 관계의 단절을 통해서 겪게 되는 혼란이 이런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정체성과 관련하여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의 시가 유명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의 시 「나는 누구인가? (Who Am I?)」는 ‘영성훈련’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매우 깊은 울림을 줍니다.
이 시는 본회퍼가 나치 정권에 저항하다가 체포되어 갇혔던 테겔(Tegel) 감옥에서 1944년 7월에 작성되었으며, 사형 집행을 불과 몇 달 앞둔 극한의 상황에서 쓰인 자기 정체성에 대한 처절하고도 궁극적인 고백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Wer bin ich? / Who Am I?)
디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나는 누구인가?
그들은 종종 내게 말하네,
내가 감방에서 나올 때의 모습은
침착하고 명랑하며 당당하여
마치 고향 영지에서 나오는 영주 같았다고.
나는 누구인가?
그들은 종종 내게 말하네,
내가 간수들과 이야기할 때의 모습은
자유롭고 친근하며 분명하여
마치 내가 그들을 지휘하는 사람인 듯했다고.
나는 누구인가?
그들은 또한 내게 말하네,
내가 이 불행한 나날들을 감당하는 모습은
차분하고 미소 지으며 자랑스러워서
마치 승리에 익숙한 사람 같았다고.
나는 정말로 남들이 말하는 바로 그 사람인가?
아니면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아는 바로 그 사람에 불과한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불안하고,
갈망하며, 병들어 있고,
누군가 내 목을 조르는 듯 숨 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빛깔, 꽃, 새들의 노래에 굶주리고,
친절한 말과 인간적 친밀함에 목마르고,
전제적인 권력과 사소한 모욕에 분노로 떨고 있으며,
엄청난 일이 일어나기를 고대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저 멀리 있는 친구들을 무력하게 염려하고,
기도하기에도, 생각하기에도, 일하기에도 너무 지치고 공허한 채,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 연약하고 지친 나.
나는 누구인가? 이 사람인가, 아니면 저 사람인가?
그렇다면 나는 오늘 이 사람이고, 내일은 저 사람인가?
아니면 내 안에 이 두 사람이 동시에 존재하는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위선자이고,
나 자신에게는 애처롭고 한탄할 만한 약골인가?
아니면 내 안의 무언가가 이미 승리한 전투에서조차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는 패잔병과 같은가?
나는 누구인가?
이 외로운 질문들이 나를 조롱하네.
오 하나님, 내가 누구이든 당신은 나를 아십니다.
당신이 아시듯,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나치의 감옥에서 죽음을 앞두고 있는 시간에 본회퍼는 이처럼 처절하게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사람의 정체성은 주변 환경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는 문화라는 강력한 영향력 아래서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본회퍼가 갇혀 있던 감옥과 같은 강력함으로 각 사람의 정체성을 형성합니다. 마커스 보그는 미국 문화의 핵심 가치를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그것은 외적인 매력과 업적과 재력입니다. 그것을 각각 Attractiveness, Achievement, Affluence로서 3A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또한 외모 지상주의, 성과 지상주의, 물질 지상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도 사람들이 지극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도 몸매를 가꾸는 일과 유명해지는 것, 그리고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오늘날 문화가 사람의 정체성을 이 세 가지 요소로 규정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누구나 매력적인 외모를 가질 수 없고, 누구나 성과를 낼 수도 없으며, 모두가 부자가 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이런 문화적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회의와 혼돈을 겪을 수 있습니다. 상황이 바뀜에 따라 외모와 능력과 재력은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대의 문화를 본받고 그것을 좇아 살아갈 때에는 반드시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파국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교계 안에서도 정체성의 문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실 모든 사람은 성장 과정에서 상처를 입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부모 아래서 자란 사람일지라도 그의 인생에 상처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더구나 모든 사람은 사회화 과정에서 우리의 문화가 미치는 영향력에 따라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늘 인간은 죄인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설 때마다 자신이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게 되면 사람은 마음에 큰 상처를 입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종교라는 감옥에 더 깊이 갇히게 됩니다. 이것이 제가 청춘 시절에 경험한 개신교회의 신앙생활입니다.
개신교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이단이나 사이비 집단에 미혹되는 이유는 그들의 자존감이 심각하게 상처를 입고 있으며 그들의 정체성이 매우 희미하며 어둡기 때문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강력한 거짓말을 거부할 능력이 없으며 그들을 따뜻하게 받아주는 사람들의 미혹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양의 탈을 쓴 늑대를 구분할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이나,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를 수도 없이 듣지만 ‘우리 모두는 죄인으로 태어나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라는 메시지가 워낙 강력하여 건강한 정체성을 확립하기 어렵게 됩니다. 저도 그런 상황을 뼈저리게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저의 인생에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마치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과 같고, 이전에 알던 하나님 대신에 새로운 하나님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그것입니다.
저는 인생이 무엇과 같은가 생각해 봅니다. 인생은 처음에는 모든 것을 수용합니다. 태어날 때 우리는 백지와 같아서, 주변의 말과 행동, 문화와 가치관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이 세상은 어떤 곳인지에 대한 그림이 그려집니다. 그런데 그 그림은 쉽게 편견과 왜곡이라는 판정을 받습니다. 현실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인생의 절반은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고 나머지 절반은 그 그림을 고치는 과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것이 구도의 길이며 신앙생활에서 영성훈련은 바로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영성훈련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면 우리는 이 세상의 문화가 우리 안에 그려준 그림을 바르게 수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자신을 다시 그리고, 그분의 사랑 안에서 참된 자아를 찾아갑니다. 그것이 곧 영성훈련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깊은 은혜입니다.
3. 영성훈련의 방법
우리가 외모 지상주의, 성과 지상주의, 물질 지상주의라는 세속적 가치관이 그려준 왜곡된 자화상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구도의 길을 걸으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훈련해야 할까요?
마커스 보그는 영성훈련의 방법이 곧 ‘하나님께 관심을 기울이는 활동’이라고 설명합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영역—내면의 훈련(Inward Practice)과 공동체의 훈련(Outward Practice)—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내면의 훈련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에 집중하는 활동입니다. 이것은 곧 우리가 ‘하나님은 나의 것’이라고 고백하는 훈련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기도와 규칙적인 성경 읽기입니다.
제가 사역을 중단한 뒤 아내와 함께 저녁마다 했던 영성 훈련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전에는 공적인 사역과 교회 일정에 매여서 개인의 경건 생활을 깊이 누릴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매일 저녁, 약속된 시간에 성경을 읽고, 암송하고, 헤셸의 책(안식)을 읽으며 토론합니다. 이러한 반복적인 행위가 우리의 내면을 단단하게 하고 풍성하게 변화시켰습니다.
기도는 단순히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아뢰는 행위를 넘어섭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주의를 집중하는’ 행위이며, 기도의 시간만큼은 세상의 3A—외모, 성과, 물질의 압박—로부터 해방되어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라는 본회퍼의 마지막 고백을 깊이 새기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 집중할 때, 비로소 내면의 새장 속에 갇힌 듯 불안하던 자아(본회퍼의 시 4연)가 잠잠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규칙적인 성경 읽기와 독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세상이 우리에게 심어놓은 거짓된 그림을 걷어내고,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우리의 본질적인 가치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진리의 거울입니다. 제가 성경 구절을 암송하고 왕조 계보를 외우는 행위는 단순히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진짜 지도’로 세상의 ‘가짜 지도’를 수정하는 작업이었던 것입니다.
둘째, 공동체의 훈련은 내면의 변화를 세상 속에서 실현하는 활동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나도 사랑하는’ 훈련입니다. 마커스 보그는 이 훈련에 예배와 봉사, 자선과 사회 정의에 동참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내면의 훈련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께 더 가까이하는 삶’이 자신을 넘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으로 향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기도와 금식의 내면적 훈련에 깊이 몰두하셨지만, 동시에 병든 자를 고치고, 가난한 자를 돌보며, 사회 구조적인 죄악과 맞서 싸우셨습니다.
진정한 영성 훈련은 종교적 행위로 끝나지 않고 사회적 행동으로 확장됩니다. 주일에 드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집중하고 힘을 얻었다면, 주중에는 그 힘으로 자선과 봉사 활동에 참여하고, 불의한 세상 앞에서 침묵하지 않고 정의의 목소리를 내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에 동참하는 공동체의 영성 훈련인 것입니다.
4. 행동하는 영성, 미가서의 결론
여기서 저는 자신을 반성해 봅니다. 사실 저에게는 민주화 운동에 대한 채무의식이 있습니다. 저는 87학번으로서 1987년에 있었던 민주화 운동의 결과로 이루어낸 6.29선언과 대통령의 직선제 선출에 아무런 기여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뿐 아니라 촛불혁명이나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에 대하여 분명한 애도를 표하지 못했습니다. 나아가 지난 겨울 응원봉을 들고 시위에 참가한 시민들이 이루어낸 빛의 혁명에 동참하지도 못했습니다. 어제 토요일에는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열린 시위에 갈 마음이 있었지만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검찰개혁에 이어 사법개혁이 시급한 과제임을 저도 깊이 공감하고 있음에도 행동에 나서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자신을 돌아볼 때 저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생각납니다. 그 이야기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눈앞에 죽어가는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도 지나쳤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일이 더 급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자신들의 종교적인 일이 방해를 받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바로 그런 상황에 빠진 것 같다는 자괴감이 듭니다.
무엇이 문제일까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저는 여전히 자신의 정체성을 다지느라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더 이상 자기를 돌아보는 일일랑 그만두고 이제는 행동에 나설 때라고 생각합니다. 더 늙기 전에, 더 늦기 전에 사회의 정의를 바로잡으려는 의로운 시민들의 대열에 합류할 것을 다짐해 봅니다. 그런 사람이 되라고 교회라는 조직에서 나오게 하신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2025년에 개인적으로 많은 일이 있었는데 어쩌면 금년에 일어난 모든 일은 바로 이 일을 실행하는 것이 그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미가를 통하여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종교적인 열심이 아니라 정의와 자비와 진정한 신앙임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본문인 미가 6장 8절의 말씀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은 제사와 헌금이 아닌, 삶을 요구하십니다. 영성훈련을 통해 내면의 힘을 기릅시다. 그것은 분명한 정체성과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영성훈련에 힘쓰는 이유는 이것을 바탕으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에서 자비를 행하고 정의를 실천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과 영성훈련의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우리가 사는 공동체를 더 낫게 만드는 일임을 명심하고 기도하고 연구하고 행동합시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가까이하는 사람임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낼 것입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