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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만 보고 그리고 하나님만 본다>의 줄거리:
선천적 시각장애인이 보게 되는 사건으로 인해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다시금 예수님이 안식일 규정을 어기셨다는 비난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해서 요한복음은 의도적으로 시각장애와 빛과 안식을 관련지으려 합니다. 즉 진정한 안식은 삶의 모든 일을 하지 않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느라 의식이 삶에 대해 맹인 되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만 보고 그리고 하나님만 본다
(요한복음 9:13~34)
13. 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14.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15.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으니 이르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16.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17. 이에 맹인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만 보고 그리고 하나님만 본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만 보고 그리고 하나님만 본다”
제목의 의미를 좀 더 명확하게 하자면 첫 번째 “하나님만”은 주격 조사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 번째 “하나님만”은 목적격 조사입니다. 즉, “이 세상과 나의 삶은 하나님만 보신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만 본다.”라는 뜻입니다.
질문을 하나 드려봅니다. 이 세상과 나의 삶을 보는 일에 하나님의 눈 이외에 나의 눈이 보태질 필요가 있을까요? 여러분께서도 함께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뉴스를 통해 보이는 대한민국의 정치상황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내가 봐야할 필요가 있을까요? 나는 대한민국의 정치상황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면 되지 않을까요? 나의 재정상황도 하나님이 보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재정상황에 대해 내 눈이 동원되어야만 할까요? 나는 나의 재정상황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만 보면 되지 않을까요?
믿음이란 바로 이렇게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정치상황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나는 하나님만을 보며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에 갖고 계신 생각과 뜻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됩니다. 내가 정치상황을 직접 보며 생각과 뜻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재정상황이나 건강상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만 보며 하나님께서 나에게 갖고 계신 생각과 뜻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상황을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나의 몸에 자라는 머리카락도 셀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머리카락을 이루고 있는 세포 수까지 아십니다. 우리 몸에 있는 수십조 개의 세포 하나하나에 CCTV가 달려있다고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이 세상을 세밀하게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 이외에 누가 더 세상을 잘 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눈에 나의 눈을 보태야겠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력은 퇴화되다가 마침내 상실되어야만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력이란 육체의 오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복하여 말씀드리고 있는 의식의 시선과 마음의 시선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이 세상은 영영 보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세상을 의식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육체의 죽음이 다가와서 이 세상 것에 대한 나의 의식의 시선이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기 이전에, 살아있는 동안에 의식의 시력은 자발적으로 없어져야만 합니다. 죽기 전에 의식에서 세상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을 신앙의 목표로 삼을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보는 시력이 상실될수록 천국을 보는 시력은 점점 더 향상되어 갑니다. 오감으로 포착되는 그 어떤 대상보다 천국과 하나님의 있음과 천국과 하나님의 좋음이 더 뚜렷이 보일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만 합니다. 천국과 하나님에 대한 시력이 정점에 이를 때에 세상을 보는 시력은 완전히 상실됩니다.
세상 시력은 다운되고 천국 시력은 up 되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표입니다. 세상을 안 보고자 애써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수천조 개의 CCTV를 달아놓은 것처럼 세밀하게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보고 계십니다. 세상을 보고 계신 하나님의 시력에 대해서 누구의 시력도 보탬이 될 수 없습니다. 의식과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자 하는 것은 시력의 낭비입니다. 우리의 의식과 마음의 시력은 세상을 보는 일에 낭비되어서는 안 됩니다. 봐야될 것만을 보며 합당하게 사용되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의식과 마음의 시력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 보는 일에 다 써야 합니다.
내 삶은 하나님만 보시면 됩니다. 내가 보아야 할 것은 삶이 아닙니다. 우리의 목적은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변수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문제도 보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변수가 생기든 어떤 일이 일어나든 의식의 눈으로는 하나님만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전체와 나의 삶 전체를 수천억 개, 수조 개의 CCTV로 관찰하고 계시고 세포 하나하나까지 관찰하고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의식의 시선을 보태고자 하는 것은 낭비이고 죄악입니다. 나의 시력이 하찮기 때문이 아니라 가장 소중한 것을 보기 위해 준비된 시력이기 때문입니다. 의식과 마음의 시력은 오직 천국과 하나님의 있음을 보고 천국과 하나님의 좋음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고 해서 일어난 갈등을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자인 사도 요한은 이 갈등을 통해서 우리의 의식과 마음의 시선이 교정되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안식일 규정을 어기심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갈등을 통해 안식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줍니다. 즉, 안식과 보는 것, 안식과 빛으로 연관하여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선천적 시각장애인이 보게 되는 사건은 안식일에 일어났습니다. 이에 대해 주님께서 의도하신 바를 사도 요한이 받아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식을 바르게 이해할 때에 의식과 마음의 시선교정 또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전에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 또한 안식일에 이루어졌던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건을 통해서 가르쳐주신 것을 떠올려봅니다. 안식은 쉽게 말해 평강과 행복입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모여 있던 환자들은 물이 첫 번째로 동할 때 들어가면 낫는다는 미신적인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는 곧 안식의 내용인 평강과 행복을 이 세상에서 미신적인 가치체계를 통해 추구하고 있었음을 상징합니다. 돈이 많으면 행복하다, 건강하게 오래 살면 행복하다는 등의 신념체계와 가치체계는 모두 미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을 통하여 사람들이 이러한 미신과 행복을 묶어버림으로써 참 안식에 이르지 못하고 있음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선천적 시각장애인이 보게 된 놀라운 표적이 안식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이 안식일에 일어났기에 다시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며 예수님께서 비난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진정한 안식의 상태를 이루고 계셨던 분은 예수님 한 분뿐이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규정은 좋아하지만 안식상태는 거부하는 모순에 빠져있었습니다. 이들은 진정한 안식상태를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누리고자 하지도 않은 채 오직 안식일 규정을 지키는 일에만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이로부터 깨달을 수 있는 중요한 영적 원리가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은 단순히 예수라는 한 사람을 거부하는 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갖고 있는 마음은 예수님에 대한 태도로 표현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 어떻게 행동하고 말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드러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거부하면 실제로 천국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비난은 예수님을 보내시고 예수님과 하나이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비난이 됩니다. 이러한 전제를 놓고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선천적 시각장애인을 고치신 사건으로 예수님을 거부함은 곧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안식을 거부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안식일 규정은 모든 일을 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규정의 근본취지는 단지 행위 차원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은 있음을 느끼는 의식과 좋음을 느끼는 마음의 문제와 연관이 있습니다. 의식과 마음 그리고 하나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있음을 느끼는 의식으로는 하나님만을 보고, 좋음을 느끼는 마음으로도 하나님만을 보는 상태가 바로 안식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의 상태를 비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지금 하나님의 존재감이 나의 의식과 마음에 대해 VVVIP가 되어계신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사시는 동안에 안식일에만 하나님과 마주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과 마주하시는 안식상태를 유지하고 계셨습니다. 그러하셨기에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안식일 규정을 초월하실 수 있었습니다. 안식일 규정이란 안식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안식상태에 도달해 계셨기에 안식일 규정에 얽매일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일이든 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의식이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셨고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좋음만을 느끼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은 안식상태가 이루어질 때는 하나님의 모든 생각과 뜻이 그대로 다 전달되어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만 보고 계시면서 하나님의 생각과 뜻대로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나님을 밝히 보시는 동안 세상에 대해서는 맹인이셨습니다.
선천적 시각장애인을 고치셨던 예수님께서 정작 세상에 대해서는 스스로 맹인이셨다는 것이 갖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안식의 상태를 유지하고 계셨던 예수님의 의식과 마음의 시선은 항상 천국과 하나님께 고정되어 계셨습니다. 세상에 대해 보시지 않았으니 세상에 대해서는 완전히 맹인이셨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처럼 세상에 대해 맹인이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관계 맺는 모든 사람이 머물러야 할 안식의 상태입니다. 안식의 상태는 세상에 대해서는 시력이 없어지는 맹인의 상태임과 동시에 천국에 대해서는 최고조의 시력이 되는 상태입니다. 천국에 대해 최고조의 시력이 된다는 것은 의식으로는 천국과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마음으로는 천국과 하나님의 좋음을 느끼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의식과 마음의 시선이 최고조로 천국을 향해 있는 동안 세상에 대한 시력은 퇴화한 끝에 마침내 상실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세상에 대해 완전한 맹인의 상태에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역사를 이루어내십니다.
바리새인을 비롯한 유대종교인들이 이토록 예수님을 싫어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들은 예수님과 안식일 문제로 계속해서 부딪힙니다. 의식과 마음의 시선의 방향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의식과 마음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은 세상이었습니다. 의식으로는 이 세상의 있음을 느끼고 마음으로는 이 세상의 좋음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세상을 보고 있으면서도 더욱 보고 싶어 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렇기에 세상의 가치들을 갖는 수단으로써 안식일 규정을 좋아하였으나 정작 하나님을 갖는 안식의 상태를 좋아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싫어했던 이유는 하나님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조차 싫어할 정도로 지긋지긋하게 여겼습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의식과 마음의 시선을 보낸다는 것입니다. 그토록 싫어하는 대상으로 하나님을 관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5장 8절에서 이사야 29장 13절 말씀을 인용하시며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내용이 오늘 본문에서 안식과 연관하여 확인됩니다. 안식은 의식과 마음의 시선이 하나님에 대해 극대화된 상태입니다. 한편 안식은 상대적으로 세상에 대해서는 시력이 완전히 퇴화하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안식의 상태에 계신 예수님을 싫어하였습니다. 의식으로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마음으로 하나님의 좋음을 싫어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의식과 마음으로 바라보고자 하였던 것은 하나님이 아닌 세상이었습니다. 보고 있으면서도 보고 싶어 할 정도로 세상을 좋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바리새인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세상의 75억 인구가 이러한 상태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의식과 마음의 시선교정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안식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세상에 대해서는 의식과 마음이 맹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앙생활의 목표가 되어야만 합니다.
안식은 세상은 보이지 않고 하나님만 보이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 성경의 예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욥은 일시에 열 명의 자녀를 잃었고, 모든 재산을 잃었으며,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왓장으로 몸을 긁어야만 할 정도로 지독한 질병에 걸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던 아내는 욥을 욕하며 떠났습니다. 사회적 존경과 명성 또한 사라졌습니다. 친구들까지 와서 욥을 비난합니다. 욥은 욥기 1장 21절에서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라고 하였습니다. 거지 나사로와 같은 알몸인 상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욥기 42장 5절을 보면 이러한 상태를 거치고 난 욥이 고백하기를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욥이 도달한 안식의 상태였습니다. 욥은 의식이 바라보고 마음으로 좋음을 느낄 세상의 가치들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게 됩니다. 욥은 세상에서 의식할 거리가 아무것도 없었고 좋아서 추구할 거리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의식의 시선과 마음의 시선이 세상을 향하여 적용할 대상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세상을 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세상에 대한 맹인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안식의 상태입니다. 그렇게 세상에 대한 의식과 마음의 시선이 다 죽어버린 맹인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을 때 비로소 하나님과 천국이 보이게 됩니다.
야곱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은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적인 가치에 대한 추구가 강했습니다. 그렇기에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서 장자권을 탈취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야곱은 형에게 쫓겨 하란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피하게 됩니다. 이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려던 의도와는 다르게 야반도주를 하며 인적이 끊어진 루스 들판에서 돌베개를 베고 자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의식할 소유가 없었고 마음으로 좋아할 수 있는 대상이 없었습니다. 깜깜한 밤에 루스 들판에서 잠들어야 했던 것처럼 인생이 암흑 속에 잠겼습니다. 그런데 비로소 그때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을 보게 됩니다. 창세기 28장 12~13절에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께서 의식으로 천국과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마음으로 천국과 하나님의 좋음을 느끼고 싶으시다면 안식의 상태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안식은 이 세상에 대해 의식과 마음의 시선이 죽은 상태입니다. 세상에 대해 맹인이 된 상태입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맹인이 되어서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마음으로 추구하지 못할 때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9절에서 기도를 가르쳐주시며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만 보이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보이는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의식과 마음의 시선은 세상에 대해서 맹인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의식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볼 수 있고 마음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좋음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규정을 지키고자 행위적으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의식과 마음은 항상 이 세상을 향해서만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단지 행위를 하지 않음으로써 안식일을 지켰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대해 맹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시각장애인 체험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시각장애인을 가깝게 느끼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배려를 목적으로 하는 체험입니다. 이 체험을 하신 분의 기록을 본 적이 있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는 가게에서 콜라 하나를 사려고 해도 마음대로 고를 수가 없습니다. 만져보는 것만으로는 상표도 모르고 내용물도 알 수 없습니다. 체험을 해봄으로서 비로소 시각장애인들이 얼마나 큰 어려움을 일상적으로 느끼는지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안식은 바로 세상에 대한 시각장애인 체험과도 같습니다. 이 안식상태를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의식의 시선과 마음의 시선을 빼앗아가려는 세상 것들 앞에서 십자가를 붙들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붙들 때 세상에 대해 맹인이 됩니다. 십자가를 붙들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의식과 마음의 시선이 하늘로 도달하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 대해 맹인이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보면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의식과 마음의 시선이 세상에 대해 맹인이 되고 하나님만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이 세상을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수천억 개, 수천조 개의 CCTV보다도 더욱 세밀하게 세상을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만 보고 있으면 세상에 대해 완전히 맹인이 되더라도 말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안식의 상태로 들어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안식의 상태는 시각장애인 체험과도 같습니다. 삶에서 건강 문제, 돈 문제, 배우자 문제, 자녀 문제, 부모님 문제와 같은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시각장애인 체험과 같이 이러한 문제들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보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훨씬 더 나의 가족들을 사랑하시고 나의 삶을 사랑하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수천억 개, 수천조 개의 CCTV와 같이 세밀하게 나의 삶을 보고 계십니다. 이 세상을 보는 일에 나의 의식과 마음의 시력을 보탤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시력의 낭비이기 때문입니다.
의식과 마음의 시력은 창조하실 때부터 하나님을 바라보는 용도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거짓 아비 행세를 하며 우리를 속여서 세상을 보게 하였습니다. 그것이 체질이 되어버린 결과 사람들은 세상에 안주하고자 안정지향성을 띄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지옥행 사형수들의 성향일 뿐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끊임없이 변수를 주시는 이유는 안식으로 이끄시기 위함입니다. 안식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안에만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이 세상에 대하여 시력이 완전히 상실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만 보시면 됩니다. 나의 의식과 마음의 시선으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 볼 수 있으면 됩니다. 세상은 하나님만 보시고, 나는 하나님만 보는 삶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이 세상에 대해 시각이 완전히 상실된 상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비록 그렇지 못하더라도 세상이 뿌옇게 보이는 퇴화상태가 될 수 있도록 은혜 내려 주시옵소서. 점점 더 온전한 안식상태로 들어가 하나님 아버지만을 볼 수 있는 진정한 안식의 주인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