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부모님 생애노정 - 2권 한국 해방과 섭리출발 제3절 흥남감옥 수난 (1948.2.22 ~1950.10.14)
2. 흥남 비료공장의 처참한 강제노동
흥남 덕리 특별노무자수용소 투옥 1948.6.21.~1950.10.14.
6월 21일, 이날은 옛날에 선생님이 감옥에 들어갔던 날이라구요. 1948년…. 선생님은 북한 공산당의 감옥에 들어가서 2년 8개월 동안 중노동을 했습니다. 무슨 노동이었냐면, 비료공장의 일이었습니다.
소비에트 혁명 후 많은 러시아인들은 강제노동에 시달렸습니다. 공산주의의 이론은 그들 앞에 어떠한 유산계급이나 반 공산주의 분자들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속으로는 그들이 모든 반대자들을 죽이고 싶어하지만, 세계의 여론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공산당들은 그들을 강제노동에 동원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든 노동으로 그들이 죽을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북한에서 감옥에 있을 때, 선생님은 강제노동수용소에 갇혔습니다. 김일성은 소련의 경험을 본받아서 모든 죄수들을 3년 동안 힘든 노동에 동원했고, 그들을 죽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아침 신검(身檢)과 10리 길 도보 출역(出役) 04:30~09:00
아침에 출역하게 되면 감방에서 전부 나오는 거예요. 마당에 나와 가지고 전부 다 불법 소지품이 있지 않나 해 가지고 점검하는 거예요. 검신하는 거예요. 이래 가지고 아홉 시에 작업이 시작된다면 십리 길 가는데 한 시간 내지 한 시간 20분이 걸린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밥을 먹고 하면 두 시간 이상 걸립니다. 그러니 출역하게 되면 보통 새벽 네 시 반에 일어나 가지고 아홉 시 작업에 닿게끔 이렇게 되거든요. 그러면 이제 나가서 척 앉으면 말이에요, 아주 머리가 빙빙 도는 거라구요. 머리가 빙빙 돌고 일어 서려면 일어설 수가 없는 거예요.
두 시간씩이나 신검身檢을 받을 때는 살을 에이는 듯한 추위를 당했습니다. 차라리 일터에 나가서 일하는 것이 얼마나 자유로운지 모릅니다. 흥남은 바다 바람이 불면 자개돌이 날아오는 곳입니다. 쏘아 들어오는 바람이 얼마나 원수인지…. 자기도 모르게 워워워 떠는 것입니다. 암만 소리내지 말라고 해도 그렇게 되는 거예요.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음, 더 추워라, 더 추워라, 더 추워라’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걸 극복하기 위한 싸움을 한 거라구요.
매일 아침 감옥을 떠날 때 손에 손을 잡고 네 줄로 서야 하고 옆에는 소총과 권총으로 무장한 경비원들이 있습니다. 만일 느슨해지거나 손을 잡지 않은 것이 발견된다면 탈출하려는 것으로 고발당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머리를 똑바로 쳐들 수 없었습니다.
또 아침 먹고 나가는 데도 가면서 자꾸 헛다리가 디뎌집니다. 4킬로미터를 걸어가는데 헛다리가 다섯 여섯 번, 어떤 때는 열번 이상도 헛다리가 디뎌집니다. 기운이 없어 그래요, 기운이. 그 다리를 끌고 가서 일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런 역사가 있기 때문에, 어려울 때는 언제나 그걸 생각합니다. 그럴 때, 정신이 아득할 때 나는 하늘의 사람이라는 명제를 세워놓고 끝까지 넘어 갔어요.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 흥남공장’ 강제 노역 09:00~17:00
우리가 일하던 공장이 흥남 비료공장이었습니다. 그 비료공장에 가면 암모니아가 콘베이어를 통해서 내려와 산같이 쌓입니다. 이것이 뜨거운 것인데 시간이 많이 지나면 녹아 가지고 얼음과 같이 굳어집니다. 콘베이어를 통해서 큰 광장 복판에 쌓이는데 그 모습이 딱 폭포 같아요. 폭포수가 떨어지는 것처럼 하얀 게 쭉 떨어지는 겁니다. 이게 높이가 한 20미터 돼요. 그런 비료산이 있는데 그걸 퍼담는 겁니다. 큰 광장에 800명이 나가고 900명이 나가서 하는데 대개 큰 산을 둘로 갈라놓은 것 같아요.
참으로 힘든 중노동이었습니다. 한 조의 하루 책임량은 천 삼백 가마니로서 8시간 이내에 끝내지 않으면 식량이 반으로 줄어들게 되어 있었습니다. 한 조가 열명인데 열명의 책임량이 40킬로짜리 천 삼백 가마니를 담아야 합니다. 골무를 끼지만 가마니를 묶다 보면 구멍이 다 뚫어져 빠져 버린다구요. 하루 책임량이 한 사람 앞에 130개라면 이건 중노동입니다. 일반 사회 사람은 70개 80개도 못하는데 배의 기준으로 하라니 그것은 죽으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것을 항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소련 배에 싣는 것입니다. 몇만톤씩 싣는데 그걸 매일 계산해서 해야 합니다.
몸은 유산에 해를 입습니다. 머리가 빠지고 피부를 짜보면 물이 나옵니다. 6개월이 지나면 반드시 각혈을 합니다. 대개 폐병이라고 생각하고 낙담하기 때문에 죽어버립니다. 기껏 1년 반이나 2년밖에 견디지 못합니다. 살이 전부 다 갈라져 가지고 뼈가 보일 정도로 피가 나는 거예요. 그래도 매일같이 암모니아 비료를 날랐다구요. 보통 면 제복은 일주일 이내에 다 뭉개지는 거예요. 목면 같으면 말이예요. 그런데서 반 년만 일을 하게 되면 세포가 전부 다 죽어서 짜면 물이 난다구요. 아침에는 피가 뚝뚝 흐르고, 그렇게 전부 다 갈라진다구요.
하루에 점심때 되기 전까지 중간에 15분 쉬고, 그다음 점심때에 한시간 쉬고, 그다음에 오후 중간에 15분 쉬어요. 이렇게 해서 한 시간 반 정도 쉬는 시간이 있는데, 점심때가 되게 되면 전부 해체해서 자기 반끼리 밥을 먹습니다.
변소는 어떻냐 하면, 그런 큰 공장에서는 구덩이에 시멘트를 쭉 해 놓고 홈을 파 가지고 바닥에 폐수가 나가는 구멍을 뚫어 놓은 거예요. 그래 가지고 변소로 쓰는 겁니다. 그러나 현장에 가서 똥을 싸게 된다면 할수없이 암모니아 비료더미 산에 삽으로 푹 파고 거기에 주저앉아 가지고 싼다구요. 그게 아무래도 비료가 되니까, 집어넣는 거예요. 턱 주저앉아 가지고 대포 쏘듯이 싸는 거예요. 푸다다닥! 그거 오래 할 수 없다구요. 그렇게 갈긴다 이겁니다.
전심 전력을 투입한 작업
선생님은 흥남 감옥에서 비료가마니를 묶어 내면서 그곳이 최후의 전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노동하는 가운데서도 노동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치 않습니다. 노동 시간이 기도의 시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그러한 일을 하려고 태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항상 선생님은 마치 선생님이 복귀섭리를 하는 것처럼 모든 심정과 모든 성의를 그 일에 쏟았습니다. 선생님은 작업하는 동안에 항상 선생님이 영계에서 경험했던 것을 생각했고, 훗날 선생님의 후손들과 선생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보여 줄 영화에서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선생님은 휴식시간이라는 벨이 울려도 못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뭐 철근 같은 사나이다’이런 말을 많이 들었다구요. 내가 손을 대는 일은 참 기뻐서 하는 거예요. 누구보다도 좋아서 한다구요. 그것이 앞설 뿐이지 딴 것 없다구요. 결국은 뚫고 나간 거예요. 아무리 어려운 감옥이라도 뚫고 나가야 돼요. 나는 여기서 죽더라도 ‘너는 지지 않고 이기고 죽었다’하는 그런 사상을 남겨야 된다고 생각했다는 거예요.
그때의 체중은 19관 3백(72Kg)이었습니다. 다른 수인들은 모두 야위어 가는데, 선생님은 야위질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연구 대상이었습니다. 선생님은 감옥에 3년 가까이 있으면서도 단 한 번 학질을 앓아 본 것 외에는 병이라곤 몰랐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아무리 아파도 약을 먹기는커녕 금식까지 하면서 일을 했습니다. 그때에 학질을 열 두 죽(24일)을 앓았으나 조금도 쉬지 않고 일을 했습니다. 힘든 일을 피하겠다는 사람은 그 일에 견디지 못합니다.
가장 어려운 일 자청
감옥에서의 생활은 아무리 괴롭다고 하더라도 남에게서 은혜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절정에 설 수 있는 방책입니다. 남들로부터 혜택을 받는 것은 탕감의 길에서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걸 알았기 때문에 감옥에 들어가자마자 어느누구도 못 하는 제일 어려운 일을 내가 책임진다고 한 것이 첫 결의였어요. 책임을 지는 데 있어서는 몇 배까지 책임진다, 벌써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비료 산더미를 자꾸 파들어가기 때문에, 멀리서 그것을 저울 있는 데까지 옮겨 놓으려면 시간내에 책임을 못 한다구요. 한 4미터 정도 파들어가 가지고 저울에 한번 올리려면 5분이상 걸리기 때문에 냉큼 못 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누가 들어가서 저리로 던져야 되는데 그 힘든 것을 누가 하겠어요. 그래서 선생님이 그걸 책임졌다구요.
그중의 30퍼센트는 내가 했어요. 제일 어려운 일을 하면서 반원들을 수습해 가지고 다섯 시에 끝나는 것을 언제든지 열두시 반에 끝내는 것입니다. 1천 3백 가마니 책임량에 합격만 되면 그 다음엔 노는 것입니다. 12시까지 끝내고 점심 먹고 쉬게 될 때의 그 쾌감이라는 건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우리같은 사람은 거기에 있어서 챔피언이 되다 보니까 일하는 사람이 모두 내 뒤만 따라 다녔다구요.
감옥에 있어서 구세주가 못 되는 것이 평화시대에 구세주라고 한다면 그는 가짜 구세주예요. 뭐 ‘옥중의 성자’라고 해서 흥남 감옥에 있던 사람이 나에 대해서 쓴 책(김인호, 《서울로 오는 길》)이 있는 것을 내가 알고 있지만 말이예요. 옥이 나에게는 무서운 곳이 못돼요. 채찍이 제 아무리 무섭고, 그 환경이 제 아무리 모질다 하더라도 그 사랑을 흠모하는 마음을 점령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부르고, 아버지를 부르고, 하나님을 위하는 향심을 꺽어 내지 못했어요. 그 힘을 중심삼고 나는 종적인 단계를 해방할 수 있는 터전을 공고히 닦은 것입니다.
맨살 감추기
흥남 감옥에 들어가 비료공장에서 일할 때, 그렇게 더운 오뉴월 복중에도 대님을 매고 했습니다. 정강이도 내 놓지 않았습니다. 내 몸을 통해서 땀을 흘려 가지고 하나님 앞에 바쳐 드려야 할 거룩한 길이 남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하여 정성을 다하는 데서는 누구한테도 이 몸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유산乳酸 하게 되면 알지만 가마에서 찐 것같이 김이 무럭무럭 납니다. 그러니 동지달에도 옷을 벗고 전부 다 팬티 바람으로 일을 해야 할 상황입니다. 그러한 비료공장에서 일하면서도 장바지를 입고 일했다구요. 그런 더운 곳에서도 내가 아랫도리를 안 보이게 했습니다. 수절하는 여인 이상의 그런 훈련을 해 나왔습니다. 내가 아는 본향집을 향해서, 고향의 전통을 향해서…. 아무리 감옥살이가 험하더라도 내 갈 길을 막지 못해요. 사탄세계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그 기준으로 일신을 바치는 것이 아니면, 그것을 지켜 가지 않으면 안 되는 남자로서의 정조, 여자만의 정조가 있는 것이 아니예요? 남자도 가졌습니다.
모범 노동자상 수상
내가 책임량을 못 해본 적이 없다구요. 그리하여 감옥에 들어간 사람으로서 소장에게까지 특별대접도 받아 보았습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전부 다 우러러 보았다구요. 일하는 사람들이 수십 명도 아닌 8백 명, 1천 명 이상인데 그들이 나 하나를 중심삼고 나를 선정해 가지고 수백 명의 실적을 올릴 수 있는 재료로 삼는 것입니다.
몇 개월후, 선생님은 최고의 노동자로 불리웠습니다. 매일 조원들은 탈출음모를 꾸미지 못하도록 바뀌었습니다. 조가 바뀔 때, 모든 죄수들은 그 최고의 노동자가 있는 곳으로 오기를 바랬습니다. 선생님의 뒤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모범 노동자상을 받았습니다. 노동자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상은 어떻게 되었는지…. 그런 것을 갖기도 싫어서 관리도 안 했지만 말이예요. 그것을 내가 원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구요, 전부 다 자기들이 주었지. 공산세계의 감옥에 들어가 가지고 모범 노동자로서 일등이 됐으니 세계 어디에 가도 문제가 없다는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