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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모든 영적 거짓말의 공통된 유전자>의 줄거리:
몇몇 개별 성도의 문안 인사를 끝마친 사도 바울은 마지막으로 로마 교회 전체의 안부를 걱정하게 됩니다. 교회를 해치는 거짓 교훈에 대한 경계심을 불러 일으키고자 합니다. 거짓 교훈의 발생은 지도자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자들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대신에 자기 배를 섬길 때 예외 없이 생겨나는 열매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거짓 교훈에는 공통적인 유전자가 있습니다.
모든 영적 거짓말의 공통된 유전자
(로마서 16:17~27)
17.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18.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19.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20.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모든 영적 거짓말의 공통된 유전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모든 영적 거짓말의 공통된 유전자”
본문은 17~20절, 21~24절, 25~27절의 세 단락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실제로 로마 교인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17~20절까지가 되겠습니다. 21~24절은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이 로마 교인들에게 안부를 전하는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25~27절까지는 편지의 마무리인 송영 부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17~20절을 중심으로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읽은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 전체의 안부를 묻습니다. 앞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에 있는 몇몇 교인의 이름을 거명하며 문안 인사를 하는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어서 로마 교회 전체의 안부를 걱정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개인의 안부와 로마시 안에 있었던 가정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로마 교회 전체의 안부를 걱정하며 마지막으로 경계심을 북돋아 주는 말씀을 붙입니다.
17절을 보면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문안 인사를 하다가 갑자기 어조를 바꾸어서 단호하게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로마 교회 안에 들어와 영적인 거짓말을 하는 모든 자들을 피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영적 거짓말쟁이들을 피할 수 있는 길은 “너희가 배운 교훈 속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교훈이라는 말이 재미있습니다. 교훈이란 미리 알고 있는 복음의 지식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복음에 대한 지식을 새롭게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이 복음의 지식을 교훈으로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교훈이란 실제 행동과 생활의 지침이 되는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복음에 관한 지식이 교훈이 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지식으로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되고 바로 생활하기 위한 지침이 되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과 그 복음에 관련된 영적인 사실들을 로마서를 통해 제시하였습니다. 이러한 배움이 곧 영생과 인생을 살 수 있게 하는 지침입니다.
이러한 지침을 기준으로 삼으면 거리가 벌어지거나 틈새가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분쟁”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틈새가 생기게 한다는 뜻입니다. 영생을 살고 인생을 살기 위한 복음적 지침으로부터 생각의 틈이 생겨서는 안 됩니다. 이 복음적 지침과는 다른 소리를 해서 마음과 의식의 눈과 귀를 다른 쪽으로 돌리려고 하는 자가 있다면 그들은 피해야 될 영적인 거짓말쟁이들입니다. 이 영적 거짓말쟁이들을 단호히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교회에 주는 안부의 말씀입니다. 교회가 안전하게 지켜지고 유지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영적 거짓말쟁이들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영적 거짓말쟁이들을 설득시키려고 한다든지 전향시키려고 한다든지 개조하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은 버리고 피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영적 거짓말쟁이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거짓말을 하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고쳐줘야 할 대상이 아니라 피해야 될 대상입니다. 물론 몰라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지식을 이야기하는데도 받아들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자꾸 딴 소리를 한다면 얼굴을 마주하여 대화하기를 피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교회가 성립하기 위한 최소한의 필수요건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교회와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의 차이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본래 하나님의 교회와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는 구분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굳이 표현상의 차이점을 들어보자면 하나님의 교회는 온 지구상에 하나뿐인 교회를 일컫습니다. 쉽게 말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한편 사도 바울은 지역마다 몸으로 모이게 되는 만남과 모임을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전체 하나님의 교회로서의 의미가 아닌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성립하기 위한 최소한의 요건은 “예수님 이름”과 “두 사람”뿐입니다. 최소한 두 사람이 필요한 이유는 한 사람은 전체 하나님 교회 안에 소속되지만 혼자서는 모임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교회 다니지 말고 교회 하나씩 세우자”라는 제목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예수님 이름”과 “두 사람”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가 없습니다. 이름에는 가리키는 실체가 있습니다. 예수님 이름이란 그리스도로서 이루신 연쇄과정 안에 계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이라고 부를 때에는 언제나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향하는 부름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부를 때에도 십자가로부터 출발해 연쇄과정을 거쳐서 지금 보좌 우편에 계신 그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부를 수 있습니다. 또 “두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 두 사람은 각각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수님과 하나가 된 사람입니다. 이 요건이 충족될 때에 교회는 성립이 됩니다.
교회가 갖는 진리의 기준이자 지침은 복음의 지식입니다. 진리는 단순한 지식이 아닙니다. 행동과 생활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지침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이것을 교훈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에 계신 예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얻게 되는 생활지침이란 무엇일까요?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별세의 사건입니다. 이러한 복음을 지침으로 삼는다는 것은 가정이든 직장이든 학교든 무조건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그 현장에서 마음이 세상을 떠나야 함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공백을 가지고 있기에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져서 만족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이라는 이름을 부를 때에 마음은 몸이 있는 삶의 현장을 반드시 떠나야 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하는 지침으로써의 복음의 지식입니다. 마음이 몸을 떠나서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 안에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이 켜지게 됩니다. 영광이 켜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의식과 마음에서 1등으로 느끼게 되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일하게 스스로 있는 분이십니다. 그 외의 모든 것들은 있게 된 것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유일한 좋음이십니다. 이러하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이 의식과 마음에서 켜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님께서는 이 땅에 남아있는 몸을 아버지의 생각을 따라 움직여 가십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성립하기 위한 최소한의 요건은 “예수님 이름”과 “두 사람”뿐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함을 통하여 삼위일체 되심 안으로 부름을 받고 들어가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 안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 두 사람만 있으면 그리스도의 교회는 성립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의 교회를 공격하는 영적인 거짓말쟁이들이 있습니다. 다시 17절을 보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분쟁으로 번역된 헬라어 디코스타시아(διχοστασία)는 떨어져 있게 만들다, 분리되게 하다, 틈새를 만든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고 걸려 넘어지게 하는 모든 자들을 피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지침으로 알고 따를 때 교회는 지켜질 수 있습니다. 지침은 행동과 생활의 원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복음의 지식을 알고 그대로 따를 때 모든 영적인 거짓말쟁이들로부터 교회를 지켜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세분화하여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적 거짓말을 분별하기 위한 기준을 크게 두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차원과 몸의 차원입니다. 마음의 차원에서 거짓말쟁이들을 분별해야 하고, 몸의 차원에서 거짓말쟁이들을 분별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유튜브에는 엄청난 숫자의 영상이 올라옵니다. 서점에는 엄청난 숫자의 책들이 판매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확신컨대 90% 이상은 영적인 거짓말쟁이들의 말입니다. 제가 검토해본 것은 아니지만 과오를 염려하지 않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영적인 거짓말은 마음의 차원과 몸의 차원 두 부분에서 나타납니다.
첫 번째로 마음의 차원에서 나타나는 거짓말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모든 영적 거짓말쟁이들은 참으로 노골적이지만 교활하게도 지금 살아서 이루어져야 할 이 땅과 천국의 연결을 끊고자 합니다. 다시 말해 철저하고도 교묘하게 이 세상을 사랑하도록 만듭니다. 복음의 지식을 따르자면 우리의 마음은 이 세상을 떠나 하늘을 향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영적 거짓말쟁이들은 결코 자신의 마음도 이 세상을 떠나지 않으며 우리의 마음도 이 세상을 떠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 20절을 보면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라는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뱀이 사탄으로 상징되는 이유는 배를 땅에 붙이고 기어 다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기쁨과 만족을 얻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이 마음이 어떤 식으로든지 세상을 절대로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모든 영적 거짓말쟁이들이 가진 공통된 유전자입니다.
모든 이단은 지금 마음이 세상을 등지고 떠나 하늘로 가야 함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단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합니다. 기독교의 기성교단들조차도 지금 이 시간 우리의 마음이 하늘로 가야 한다는 지침을 지향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하늘로 가야 할 때는 미래가 아닌 지금입니다. 마음의 차원에서 진리의 기준을 제시해보면 영적 거짓말쟁이를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따라 유일한 기쁨이시고 유일한 있음이신 하나님이 계신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는 사실을 권면하지 않는다면 영적 거짓말쟁이입니다.
두 번째로 몸의 차원에서 나타나는 거짓말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복음의 지식을 기준으로 삼을 때에 몸의 차원에서도 영적 거짓말쟁이와 이단을 식별해낼 수 있습니다. 마음이 삶의 현장을 떠나 세상과 별세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가게 됩니다. 그럴 때 몸은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지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몸에 하나님의 복사판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시고,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생각대로 몸을 움직여가시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이 말하는 몸의 차원에 대한 지침입니다.
우리의 몸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은 단 하나도 멋대로 이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자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너무 힘들지 않느냐?”라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따라서 하늘로 올라갈 수 있으면 됩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이 1등이 되시는 영광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으면 우리의 몸은 오직 성령님을 따라서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이것은 점차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지만 이 상황을 지향하지 않는다면 영적 거짓말쟁이들입니다.
영적 거짓말쟁이들은 몸의 차원에 대해 거짓말을 합니다. 삶의 현장을 떠나 스스로 고립된 상황을 만들어냅니다. 예를 들어 중세에 극성했던 수도원 운동이 그러합니다. 수도원 운동은 교회사 속에 존재했던 일이기 때문에 그로부터 생겨난 긍정적 요소들을 찾고 좋게 생각하고자 하였습니다. 학문의 발전이나 그밖에 유익한 점들이 있기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보자면 세속을 떠나 수도원을 만들고 그 울타리 속에서 평생을 산다는 것은 이단입니다. 마음이 수직으로 하늘로 가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서 사람들과 구분되는 평면상의 울타리를 만들어냅니다. 담장과 울타리를 만들어 구역(sect)화 되어서 세상과 구분됨을 거룩함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안에서 구역을 만들어 스스로를 가두었을 뿐입니다. 모두가 이단입니다. 거룩함이란 이 지구의 수평면상에서 세워진 울타리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럴 때 대제사장이나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 같은 높은 계층의 사람들도 만나셨고 평민들도 만나셨고 세리나 죄인과 창녀들도 만나셨습니다. 스스로 울타리를 치시고 구분하셨던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단을 비롯한 영적 거짓말쟁이들은 자꾸 이 세상에서 특수한 방식으로 울타리를 만들고 구분하여 그것을 거룩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몸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영적 거짓말쟁이들의 공통적 특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시고 골방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다만 이것은 마음이 세상을 떠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드리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러나 몸을 이 세상과 구분하여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서 거룩함을 주장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온갖 사람들이 섞여 있는 현장에서 함께 계셨습니다.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께로 보내셨고 몸을 산 제물로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과 함께 있는 현장에서 아버지의 생각을 따라 말씀하시고 행동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하실 수 있었습니다. 절대로 몸으로 울타리를 쳐서 그 안에서 거룩함을 이야기하신 적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성도의 거룩함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알 수 있습니다. 몸이 세상에서 사람들과 섞여 살아가는 중에도 마음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드릴 때 거룩함은 생겨납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자기 안에서 발생하는 생각으로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마음을 하늘로 보내 몸을 산 제물로 바친 사람은 지금 하늘에서 보내 주시는 따끈따끈한 하나님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구분된 거룩함을 유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게로 와야만 거룩해진다.”라고 말하는 모든 사람은 영적 거짓말쟁이입니다. 우리는 몸이 있는 삶의 현장에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의 몸을 움직이실 수 있도록 해야만 합니다. 그 외의 다른 말을 가져다 붙인다면 모두 영적인 거짓말쟁이들입니다.
그렇다면 영적 거짓말쟁이들이 교회에 들어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18절을 보면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자기에게 집중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고 자기들의 배를 섬긴다고 하였습니다. 간단히 말해 자기 배를 채우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은 자기의 배를 공복으로 놔둬야 한다는 것일까요?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도 자기 배는 채워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섬긴다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그리스도에게로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말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하나님으로 배불렀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들을 원치 않기에 하나님의 소망만으로 배부르게 됩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원치 않는 이유는 이 세상 것을 더 먹을 필요가 없을 만큼 하나님에 대한 소망만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 이름 덕분에 하나님으로 배부른 상태에서는 다른 사람의 마음도 예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으로 들어가기를 바라며 밀어붙이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자기 배를 섬기는 자들의 모습은 이와는 다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말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미끼로 삼아서 사람들의 마음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기고자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김으로써 자기의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은 예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 예수님과 하나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으로 배부르기에 만나는 사람들도 나처럼 되기를 바라며 그리스도에게로 밀어붙입니다. 그러나 자기 배를 섬기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이름을 미끼로 삼아서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집중시킵니다. 그 사람들로 자기의 만족을 얻고 배부르려고 합니다. 이때 나타나는 일이 영적 거짓말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이 세상을 떠나지 못하게 하려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에서의 성공과 형통과 복을 약속합니다. 어떤 교단에서는 이것이 노골적으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지만 다른 교단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장로교처럼 겉으로 거룩한 체할지라도 이 세상에 대한 바람이 작은 것은 아닙니다. 영적 거짓말쟁이들은 이러한 바람을 건드리지 않습니다. 마음은 자기에게 남아있게 하고 몸은 이 세상 소망을 향하여 달려가게 만듭니다.
오늘 우리는 두 가지 지침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마음 차원의 지침과 몸 차원의 지침입니다. 영적 거짓말쟁이들은 이 두 차원에서 틈새를 벌어지게 합니다. 마음이 지금 당장 세상을 떠나야 함을 권면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영적인 거짓말쟁이들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몸이 어떤 단체나 울타리 안으로 들어와야만 한다고 말한다면 거룩함을 가장한 영적인 거짓말쟁이들입니다. 두 가지 지침만으로도 교회는 유지될 수 있습니다. 온라인교회 모임에서 더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사도 바울의 염려는 현실이 되어 2000년 기독교 역사를 지배하게 됩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영적인 거짓말쟁이들에 의해서 1000년 중세교회와 현대교회는 잠식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형태는 없어지고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의 자취 역시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염려가 현실이 되어 교회라는 이름은 난무하지만 진정한 교회는 사라져버리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십자가 복음을 붙잡고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되찾으실 것을 믿습니다. 저희들만이라도 온전한 교회의 모습을 지켜나갈 수 있기 위하여 영적 거짓말쟁이들에 대한 민감한 분별력을 허락해주시고, 과단성 있는 마음을 주셔서 결별을 주저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