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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
世順 |
선조님 |
공 적 사 례 |
1 |
18 세조 |
휘,(諱) 익자표 (益 標)귀성부사공, (龜城 府使公) 贈병조판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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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유년시절(幼年時節)부터 조부님 (병사공)의 투구와 갑옷을 갖추고 병정놀이를 하실 정도로 건장(健壯)하여, 점점 위풍이 당당 하고 호연지기(浩然之氣)가있어, 호협(豪俠)한 기질로 장차에 국가의 간성(干城)으로서 으뜸가는 무장(武將)이 될 것을 주위에서는 미리 짐작들 하였으리라. 과연 공은 숙종 40년(1714년) 11월 18일에 무과(武科)에 당당 하게 급제 하셨지만, 불의의 사고로 4년 후에 임관(任官) 되어 여러 관직을 거처서 경종 원년(1721년)에 “귀성도호부사 겸 병마첨절제사(龜城都護府使 兼 兵馬僉節制使)“를 지내시다, 억울하게도 ”박필몽“이란者의 무고(誣告)로 참형(斬刑)을 당하셨으나, 공께서는 당시에 그 참화를 모면(謀免)할 수도 있었는데, 역모죄(逆謀罪)로 연루(連累)된 노론 사대신(老論 四大臣)중 은인(恩人)인 김창집(金昌集 公) 등의 의리(義理)를 외면 할 수가 없어. 용약(勇躍) 유명(幽冥)을 함께 하셨으니, 당대(當代)의 세인(世人)들을 놀라게 하신 의리 대장부(義理 大丈夫)로서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관심 있는 후손들은 인터넷으로 ”양익표(梁益標)를 찾아보면 의리를 중시(重視)하는 공의 높은 기개(氣槪)가 열거(列擧)되어있다. 뒤 늦게나마 정조(正祖) 8년(1784년) 8월에 국왕이 노론 삼무신(老論 三武臣)이신 공에게 ”병조참판”으로 추서(追敍)증착(贈爵) 복권(復權)케 하고, 이어서 “포충 윤음(褒忠 綸音:충성스런 신하를 칭찬하는 임금님의 말씀)“을 내리셨으며, 철종 14년(1863년)에 ”자헌대부,병조판서(資憲大夫, 兵曹判書)“로 증작 되셨으니 병사가문에 무상의 영광이라 하겠다. 요즈음 병사공의 9代손에 전직 교장 동규(東奎)가 어렵게 입수(入手)한 “판서공 원정(怨情 : 상소문)”을 토대로, 지금까지 자손 들이 자세히 몰랐던 사실을 조목 조목 밝혀 내서 판서공의 충절(忠節)에 관한 자세한 책자를 완성하고, 인터넷으로도 볼 수있게 하있으니 그 성의가 가상 하도다. 차제에 판서공 문중에서는 이분에게 적극적인 격려와 후원이 있기를 바랍니다. 연락처는, ☎ 062-654-0694, HP, 010-5191-0394 |
2 |
19 세조 |
휘(諱) 기字혁 (基 爀) |
공의 선고(先考)께서 억울한 역모죄로 서울에서 참형을 당하셨으니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지경에서, 공은 그 시신(屍身)을 수습하여 멀리서 도보(徒步)로 고향 송곡리 다전 뒷산 까지 운상(運喪) 하여 어렵사리 장사(葬事)는 마쳤으나, 맨 몸으로 낙향(落鄕)한 식구(食口)들은 초근모피(草根木皮)로 연명(延命) 해야 할 형편이기에 조상님 들의 제사를 지낼 형편이 못 됨으로, 도리(道理)없이 출가한 고모(판서공의 여 동생) 의 몫이였었다. 오호(嗚呼)라!! 공께서는 역대 조상님 중에서 형용 할 수 없는 많은 고생을 하셨음을 짐작 하고도 남음이 있다.. 공의 묘소(산소)는 겸백면 덕음 마을 건너에, 손자 만경 현령공과 이웃 하고 있으며 공의 묘비는 구비(舊碑)가 낡아서 문재(門財)로 새로 세우는데, 8代孫 동원 (東元)의 노고(勞苦)가 컸었다. |
3 |
20 세조 |
휘, 주자하(冑厦) 별호 (別號) 효자공 따슨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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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판서공의 손자로서 뒤 늦게 정조(正祖) 8년(1784년)에 국왕이 “귀성부사공”을 “병조참판“으로 증작(贈爵)케하고 설원 복권(雪冤 復權)케 함으로, 노론 三 무신(老論 三武臣)으로, 충신의 반열(班列)에 오르게 되니, 유공한 자손이라하여 공의 장남인 휘, 철자진(喆 鎭)께서 ”만경현령” 으로 부임 하는 날에, 식량이 없어서 아침을 굶겨서 보내셨던 부모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하지만 제사 때 쓸, 주먹만한 맷쌀 봉지가 천장에 매달려 있었건만, 얼마나 제사를 중시(重視)하고 효성 스러웠으면 이토록 모졌을까?. 공의 사후(死後)에 제삿날이 엄동(嚴冬)의 추운 계절인데도 그 날 만은 유별나게 봄날처럼 따스하니 지금도 “따슨 할아버지”로 호칭 한다. 공의 묘비와 상석(床石)이 낡고 초라해서 6代孫 호, 송파(松坡) 휘, 천자승(千承)이 사재(私財 )를 들여, 새로 설치 하면서, “효자공”으로 작호(作號) 하였었다. 앞으로 후손 들은 공의 확고(確固)하신 효심(孝心)을 영원토록 기억 하고 거울 삼아야 할 것 이다!!. 묘소는 “송곡리 다전 마을”에, 공의 8代孫인 국립 과학수사 연구관, 후열(鍭烈)의 생가(生家) 옆에 모셔있다. |
4 |
21세조
21 세조 |
휘 철자진 (喆 鎭)만경현령공, (萬頃縣令公) |
공은 증조부님(판서공)의 덕택으로 무시험 특별 채용(특채) 즉, 음직(蔭職)으로 정조23년(1799년)4월 11일부터 임관(任官) 하여, 여러 관직을 거처서, 순조(純祖)6년(1806년)에 “통훈대부 만경 현령(通訓大夫 萬頃 縣令)” 벼슬에 오르셨다. 그때 부터 옹색(壅塞)한 가난도 면하고, 집안의 안정도 되 찾은 것 같다. 공의 묘소는 겸백면 덕음마을 건너, 조부님(휘,기자혁)의 묘소와 이웃 하고있다. 묘비가 낡아서 5代孫 호 매헌(梅軒) 휘, 만자승(萬承)이 사재(私財)를 들여서 새로 세웠다. (참고사항) 만경(萬頃)은 호남의 곡창 지대인 현재의 전북“김제(金堤)이며 현령(縣令)은 현감(縣監) 보다 더 높은 직위(職位)임 |
5 |
24 세조 |
휘, 두字환 (斗 煥) 참군공 (參軍公) 오위장공 (五衛將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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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공의 6代 종손(宗孫) 이시시며, 다잠공 휘, 덕자환(德煥)의 큰 형님이신 공은 철종(哲宗) 9년(1858년) 8월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합격)하여, 고종(高宗) 2년(1865년) 5월부터 관직이 시작 되어, 4번쩨의 최종(最終) 관직(官職)이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겸 五위장(折衝將軍 僉知中樞府事 兼 五衛將)“이시다. (참고사항) (1) 처음 받으신 벼슬이 “참군(參軍)이였음으로 지금 까지도 후손은 참군할아버지“로 부른다. (2) 공께서는 너무 빨리 젊어서 돌아 가셨으므로, 더 높은 벼슬은 못 하셨지만, 공께서 생전에 서둘러서 ”병조참판공“을 철종 14년 (1863년) 2월 9일 에,”자헌대부 병조판서(資憲大夫 兵曹判書)“로 증작 (贈爵)토록 하셨으니 병사 가문에 크나큰 영광이였섰다. 그 때부터 다전에 모셨던 ”별묘(別廟) “를 없에고 겸백면 덕음 마을의 종가에 ”부조묘(不祧廟)“가 탄생 되었으며, 아울러 다전 마을 앞에 ”신도비(神道碑)“가 서게 되었다. (3) “신도비”는 송곡리 다전 마을 앞 쇠중거리에 거창하게 세워저 있다, |
(參考事項)
(1)부조묘(不祧廟):정2품직,이상의관작(官爵)을가진분으로,나라에서,허가 된 사당
이며 체천(遞遷)을 할 수 없다.
(2) 별묘(別廟) : 가묘(家廟:집안의 사당)에 모실수 없는 신주를 별도로 모시는 사당.
(3) (체천(遞遷) : 代가 끊긴 신주(神主)를 代가 끊기지 않는 자손의 집으로 옮기는 일.
(4) 신도비(神道碑) :종2품 이상의 관작을 가진 분의 무덤 동남쪽 큰 길 가에 세운 비석.
(5) 유허비(遺墟碑)또는 유장비 : 선인(先人)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 그를 기리기 위해서 세운
비석
(二) 근대(近代)에 병사공의 선산 및 종중 운영에 유공한 분들
순서 |
해당 된분 |
공 적 사 례 | ||
1 |
휘, 덕자환 (德 煥)
참봉공 (參 奉), 호,다잠공 (茶 岑) 택 호 강 진 (康 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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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사화(辛壬士禍)때 역모죄(逆謀罪)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한 후 부터는 병사공의 후손들이 모두 생활이 곤궁(困窮)한 형편에 그나마 병사공의 산소의 거리가 멀어서 선산 관리가 방치 상태(放置 狀態)였지만, 당시에는 기차나 자동차가 없을 때이므로 공께서는 머나 먼 한양(서울)을 거처서 일산(교하)까지 구종(驅從)을 거느리고 틈틈히 왕래 하시다가. 그 때 마침 유능하신 종제(從弟) 휘, 치자환(治煥)의 도움을 받어서 병사공의 부자 양위(父子 兩位)분의 묘비(墓碑)와 석물(石物)을 서기 1910년에 처음으로 설치(設置) 하였는데, 그 비용은 전액 공께서 독담(獨擔) 하셨었다. 그렇지만 구비(舊碑)에 보면 “德煥과 나란히 治煥 立” 라고 기록 되어 있는데 사실은 종제께서 건장(健壯)하시고 작업 인부(作業 人夫)들의 지휘 감독(指揮 監督) 능력이 뛰어 났으므로 공께서 종제의 노고(勞苦)를 치하(致賀)하는 뜻으로 연명(連名)으로 기록 하였고, 그 비용의 뒷 바라지는 모두 공의 장남이신 전은공(田隱公) 휘, 회字수(會水)의 몫 이었다. (참고사항) (1) 병사공의 부자분의 구비(舊碑)의 비문은 명필(名筆)이신 휘 덕자환(德煥)의 친필(親筆)이다. (2) 덕자환(德煥)께서 세우신 비석은 모두 여섯주(柱) 1) 병사공 부자 (父子)분의 묘비 2) 양가(養家) 18세조 휘, 익자주 (益柱)는 (공 의 6대조부) 3) 19세조 휘 기자혁(基爀)공의 5대조부 4) 양가(養家) 21세조 휘, 철저진(喆鎭) 5) 생가(生家) 21세조 휘,국자진(國鎭) 6) 18세조 병조 판서공 휘 익자표(益標)의 신도 비(神道碑) (3) 공의 장남이신 전은공(田隱公)은 본래에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세인(世人) 들의 추앙(推仰)을 받던 중에 다전 동구(茶田 洞口) 에 효자비(孝子碑)가 3주 가 서있다, 부친 휘, 덕자환(德煥)의 모선사업(慕先事業)에 거액(巨額)을 지 원(支援) 하였고 이어서. 전은공께서 가신동 대종가(大宗家)의 제각(祭閣)의 보수(補修)를 비롯, 조상들의 부족한 제위답(祭位畓)을 보충 확보 하셨고, 선고(先考)께서 못 다 하신 조상들의 묘비도 빠짐없이 세우셨는 데 이에 대한 비용도 모두 아드님 전은공 께서 독담 지원(獨擔 支援)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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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휘, 치자환 (治 煥) 호, 덕흥공 (德興公) 택 호 예 동 (禮 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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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께서는 기골(氣骨)이 장대(壯大)하시고 신언서판(身言書判)을 겸전하시어, 위풍이 당당 하셨다. 위에 기록 된 대로 종형(從兄)님 휘, 덕자환(德煥)께서 병사공 부자분의 묘비 입비(立碑) 작업시에도 강력하고 탁월한 지휘 능력을 발휘 하셔서, 석물을 설치 하는데 크게 활동 하셨고, 판서공공의 신도비 비문(碑文)도 공께서 받아 오셨으니 그 공이 크다. 여담(餘談)으로, 공께서 해방 되기 직전에, 국도에서 박실로 들어가는 진입(進入)도로를 새로 냈는데, 지금도 그 때 로폭(路幅)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 ||
3 |
휘, 회자수 (會水) 호. 전은공 (田 隱) 택 호 호음동 (虎吟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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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참봉공 휘, 덕자환(德煥)의 장남으로 신언서판(信言書判)을 겸전 (兼全)하시고 당대에 유명하신 한학지(漢學者)로서 확고한 숭조정신을 발휘 하여 모선사엽(慕先事業)에 열중(熱中)하셨다. 평소에 근검성실(勤儉 誠實)하여 병사공의 가문에서 제일 부유(富裕)하였기로, 부친 참봉공, 휘, 덕자 환(德煥) 명의(名義)로 병사공을 비록 하여, 내리 5대의 묘비와 석물(石物)을, 그리고 “신도비(神道碑)” 까지 세웠으며, 많은 재위답(祭位畓)을 헌성(獻誠)하신데 이어서, 그 아래로 누락 된 곳은 공의 명의로 동일 한 방법으로 부조(父祖)에 이르기 까지 헌성 하셨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동부육군(東部六郡)에서 명성(名聲)이 높았음으로, 마을 앞의 신도비 아래 효자비(孝子碑)가 3주(柱)나 서있다. 공은 효행으로 세인(世人)들의 많은 추앙(推仰)을 받은바 있다. | ||
4 |
휘,인자승 (仁承) 호,옥정공 (玉 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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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한학자로서, 확고(確固)한 숭조정신(崇祖精神)으로, (1) 병사공 실기(實記) 2) 귀성부사공 실기(龜城府使公 實記) (3) 양씨 세장첩(梁氏 世藏帖)등을 발간 하여, 문중에 배포(配布) 하여 병사 가문의 명예를 선양(宣揚)하였고, (4) 공이 앞장 서서, 문재(門財)로 판서공의 묘비를 새로 세우는데 공이 많으 셨다. | ||
5 |
휘,백자 (百 承) 호,애산공 (艾山) 택 호 한 실 (大 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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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선친(先考)전은공(田隱公) 휘, 회자수(會水)를 닮아서 신언서판(身言書判)을 겸전(兼全)하여 해방전 부터 6.25 전쟁 때 까지 서울 재판소(현재의 서울 중앙,지방법원)에 재임(在任)중에, 확고(確固)한 숭조정신을 벌휘하여, 선친 전은공 휘, (會자水)의 뒤를 이어 받아 틈틈이 산소를 들러 보시고 산직(山直)에 대하여 사기진작(士氣振作)과 지도 단속을 강화 하여 선산 및 제반(諸般) 관리에 만전(萬全)을 기(期) 하셨었다. (침고사항) 공은 선고 휘 회字수(會水) 전은공(田隱公)을 닮아서 신언서판(身言書判)을 겸전(兼全)하셨고, 한학(漢學)과 서예(書藝)의 능력이 탁월(卓越)하였고 일찍이 경성 법학전문학교(京城 法學專門學校)를 졸업하고 해방전에 경성 재판소(京城 裁判所)의 민사 형사 (民事 刑事) 兩 課長을 두루 역임(歷任)하신 경력(經歷)이 있슴 | ||
6 |
휘. 성자승 (聖承) 호, 죽곡공 (竹 谷公) 택 호 (宅 號) 서 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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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다잠공, 휘, 덕字환(德煥)의 손자로서 종형님 휘,百자承의 뒤를 이어1950년 6, 25전쟁 때부터 2002년까지 50여년간을 병사문중에 헌신하셨다, 그 동안 문중의 재정이 어렵기에 사전(私錢)을 써 가면서 선산 관리를 하던 중에, 전란때 폭격으로 인하여 선산의 등기서류가 전소(全燒)되어, 등기가 멸실(滅失)되었음을 뒤 늦게 공께서 확인한 즉시 당질 동관(東冠)판사와 힘을 합하여, 등기회복에 공로((功勞)가 크다. 공은 그뿐만 않이라 투철한 숭조정신으로 선조님들의 빛나는 행적(行蹟)과 고증(考證)을 집대성(集大成)하여 선세유적(先世遺蹟)이란 책자를 편찬 해서 문중에 배포(配布)하고 병사공을 중심으로 上下 조상님들의 위상과 명예를 드 높였었다. (참고사항) 공은 천성(天性)이 근면성실(勤勉成實)하며 두뇌명석(頭腦明晳)하여, 수준 높은 한학(漢學)을 비롯 보학(譜學)에도 능통(能通)하는 한편, 일찍히 경성 상과학교(京城 商科學校)를 졸업 하고, 일본인이 경영(經營)하는 “마쓰시다 전기회사(松下 電機會社)에 재직(在職)중에 타고난 수리적(數理的)인 소질(素質)을 발휘하여 독학(獨學)으로 전기학(電氣學 전공(專攻)하여 일제말엽(日帝末葉)에 일본국(日本國)의 체신대신(遞信大臣)이 주관하는 전기주임 자격검정시험(電氣主任 資格檢定試驗에 치열한 경쟁(競爭)을 뚫고 당당히 합격하여, 일약(一躍) 고향의 보성강 발전소 공무과장(工務課長)으로 영임(榮任)한 후에 소장(所長)으로 승진(昇進)하였다. 끝으로 청평발전소 소장(淸平 發電所 所長)을 역임(歷任)후 퇴임 하시고, 바로 병사공 문중사에 착수(着手)하여 50여년간을 헌신(獻身)하면서 ”선세유적(先世遺蹟)까지 완성(完成)하였으니 양병사의 후손으로, 유래(由來)없는 효손(孝孫)이며 공로자임을 억겁(億劫)의 세월 속에 영세불망(永世不忘)하리라. |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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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만자승 (萬 承) 호,매헌공 (梅軒公) 택 호 오 서 (梧 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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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중년 이후부터 숙원사업(宿願事業)인 병사공 께서 생거(生居)하셨던, 옛터를 복원(復元) 하고 병사공깨서 직접 축조(築造)하신 연못이 남의 소유로 되어있으니, 문중의 돈이 없어서, 종파(宗派)인 휘, 철자진(喆鎭) 망경현령공파(萬頃縣令公派)에서 출염 하여,어렵게, 사,들여 그 옆에 병사공의, 유적비(유허비)를 6척(尺)의 체석(体石)에 용두구대 (龍頭龜臺)로, 거창하게 세웠는데 비문(碑文)도 공께서 작성 하셨다. (2004년 9월에 세운 일산 묘갈비도 유허비와 크기가 꼭 같다) | ||
8 |
판사, 법원장, 동 관 (東 冠)
호(號) 다 담 (茶 潭) |
그는 다잠공 휘, 덕字환(德煥)의 증손자에 매헌공 휘, 만자승(萬承)의 삼남(三男)으로 서울 남부 지원 판사(判事)로 재임중에 ,당숙 휘, 성자승(聖承)과 협력 하여, 6,25 전쟁중에 병사공 종중의 토지(土地) 등기(登記)가 일부 멸실(滅失)되것을 발견하여 이를 어렵게 회복(回復)하였었다. 또한 서울 고법 부장판사(민사)재임중에는 선산의 인접 기독교 공원묘지 측 에서, 선산의 땅을 침탈(侵奪)한 사실을 밝혀 사건을 명쾌(明快)히 처리 하였으므로, 가난한 종중에서 돈이 없어서 종토세(綜土稅)도 내기 힘든 형편에. 거액의 배상금을 받아 문중운영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시기는 2002년 여름철이고 배상액은 “5억8천만원“이다. 이어서 그는 2015년에 제 5대 병사공 종중 회장으로 제임중에 경기도 파주시 동패리의 선산에 주택공사로 부터 토지 수용령이 내렸으니, 이에 따라, 토지(묘지) 배상금을 101억원을 보상(補償) 받은 후, 같은 해 5월에 병사공의 부자 양위(父子 兩位)분을 다전 후산(茶田 後山)으로 환향 이장(還鄕 移葬)하기에 앞서 묘지의 위치 선정(墓地 位置 選定)을 비롯, 이에 따른 대역사(大役事)를 완수(完遂) 하기까지 그 책무(責務)를 다 하는데 노고(勞苦)가 많았었다. (참고사항) 광주 고교 수석 졸업, 서울대학 법대졸업, 사법고시 제14기 합격자 70명중 4등, 대구고등법원 민사(民事) 부장판사, 서울 고등법원 민사(民事) 부장 판사, 창원 지방법원장, 의정부 지방법원장, 서울 중앙 가정법원장, 퇴임 후에 변호사로 활동중 |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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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원 (東 元) 호, 송정 (松 亭) 택 호 고 전 (庫 田) |
송정은 투철한 숭조정신으로 병사공 유적 보호위원회(遺保會)회장 재임중에, 문장(門長)이신 휘, “萬자承” 호, 매헌공(梅軒公)의 지시를 받고, 유서 깊은 병사공의 옛터를 되 찾고 복원 하여 환경을 정리 하고, 그 주변에 유허비(유장비)를 세우는데, 기금(基金)이 없어서, 병사문중의 종파(宗派)인 만경현령공파(萬頃縣令公派)를 중심으로 어렵게 모금(募金) 하여 힘 든 일을 완수 하였으니 그 공이 크다. (참고사항) 공은 새마을운동의 기수(騎手)로서 향리(鄕里)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 하므로 다전(茶田)의 동구(洞口)에 공적비가 서있으며, 한때 보성양씨 대문중의 회장시에도 입조성조(入寶城祖) 휘 응字덕(應德)의 묘소의 둘래석을 문재(門財)로 설치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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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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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동칠 (東 七) 택 호 (宅 號) 안 정 (安 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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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공의 11代孫이며 위의 송정 東元의 친 동생인 고인 “동칠(東七”)은 필자(筆者)유승이 제2대 종회장 임기(任期)때, 부회장(副會長)으로 활동중에, 그는 잠시도 가정을 비울 수 없는 형편이 였는데, 가사(家事)를 포기하고, 제 1차로, 2003년 5월에 산소 전면(山所全面)의 토목공사(土木工事) 때는 물론, 제2차의 2004년 9월의 묘갈비(墓碣碑)를 수립(竪立)할 때는 국지성(局地性) 호우(豪雨)중이였는데 이를 극복 하고, 고생이 막심 하였다. 그는 확고(確固)한 숭조 정신을 바탕으로 대의(大義)를 중시(重視)하고 천성이 근면 성실(勤勉 成實)하고, 청렴결백(淸廉潔白)하여 공사(公私)를 분명히 하고, 자신의 공적을 감추여 멸사봉공(滅私奉公)하는 기질(氣質)의 소유자다. 그는 한때 송곡리 가신동(可信洞)입구에 서 있는 보성 양씨의 세천비(世阡碑)의 기초가 장마철에 허물어 진것을 발견하고 자신이 보성 양씨 대문중 (寶城 梁氏 大門中)의 재무이사(財務理事)로 재임중에 문재(門財)를 절약(節約)하기 위하여 남의 눈을 피하여 그 무거운 짐돌을 단독(單獨)의 힘으로 옮겨서 복구(復舊)작업을 완수 하는 사례를 빼 놓을 수가 없다. 그는 경기도 파주시 동패리 산소의 대역사(大役事)를 완료한지 얼마 후에 경운기 사고로 유명(幽冥)을 달리하니 애석(哀惜)하기 한이 없으며 고인의 명복(冥福)을 비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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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창 열 (昌 烈) 택 호 화 곡 (禾 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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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조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전통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전남일보사 편집국장 및 논설 실장직 에서 정년 은퇴한 후에, 위의 동칠 부회장과 같이, 전 종중 총무 이사로 활동 할 때, 2003년 5월에 일산 산소를 비롯 하여 주변의 환경 정리와, 지반(地盤)의 정리등 힘든 공사를 단행 하였다. 그는 선두에 서서 심혈(心血)을 기울여, 솔선 수범하고 작업 지휘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화곡,(昌烈)은 앞서 기록 되신 “참봉공, 호, 다잠공. 휘 德자煥”의 현손(玄孫)이며, 전은공(田隱公) 휘, 회 字수(會水)의 증손(曾孫)으로 자랑스러운 봉사 종손(奉祀宗孫) 이다, (참고사항) 전남대학교 농대, 농경학과 졸업, 광주일보 및 전남일보에서 편집국장(編輯局長)및 논설위원(論說委員) 경력 |
12 |
故,동윤 (東允) 택 호 (안 정) |
전 종중 재무이사로 있을 때, “간암 말기” 증세 였음에도 추호도 굴 하지 않고, 공원 묘지측의 변상금 처리와, 지적에 관한 재확인 측량(測量)과, 각종 행정 업무 처리 및 임기 만료로 인한 사무인계 등 책무를 신명(身命)을 바처서 완수 하였다, 중환자로서 너무나 과로(過勞) 하여, 얼마 후에 유명(幽冥)을 달리 하니 심히 애석 하다, 고개 숙여 고인의 명복을 빈다. |
을 (金谷)으로 * 한실을 (大谷) 으로 * 한밭을 (大田)으로 * 깐치내를 작천(鵲川)으로 바꿔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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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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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유 (東 洧) 택 호 (宅 號) 경 주 (慶 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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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東洧)는 다잠공, 휘, 덕字환(德煥)의 증손자로서, 그는 평소에도 각별한 숭조정신을 발휘 하였고, 제3대 종중 회장 임기중에는 동패리 선산을 재 측량(再 測量)하고 경내(境內)에 외부 침입(侵入)을 막기 위하여 휀스(철제 울)을 설치하는 등, 선산 관리에 만전을 기했다. 그는 한때 자영(自營)의 사옥(社屋) 일부를 병사공의 회관(會館)으로 종중에 제공 헌성(提供 獻誠)하였스므로 당시 종원(宗員)들 간에 칭송(稱誦)이 많았었다. (참고 사항) *조부님 (祖考) 휘, 회字선(會宣) 字, 성거(聖擧)께서는 (高宗 15년. 1879년 11 월 12일생) 천재적(天才的)인 두뇌를 타고 나셨으며, 공께서 젊은 시절에 고 향, 전남 보성군(寶城郡)을 위시(爲始)하여 이웃 동부 6군(東部 6郡 (* 보성 * 순천 * 여수 * 광양 * 곡성 * 고흥)등지(等地)에 최초(最初)로 * 미제 (美製)싱거,재봉틀 * 목화 씨를 분리(分離)하는 기계와 * 솜을 타는 기계 * 배를 짜는 기계 배틀, 그밖에도 다양한 근대화 된 기구(器具) 등을 도입(導 入)하는 등, 기계화(機械化)산업(産業化)의 기수(騎手)로서 눈부신 활동을 하 셨다. * 선친(先考) 휘, 길자승(吉承)께서도 타고 난 명석(明晳)한 수리적 (數理的)이며 과학적(科學的)인 명석(明晳)한 두뇌(頭腦)를 지녔으 며, 전기학(電氣學을 전 공(專攻)하여 일제 치하(日帝 治下)에서 최초로 생긴 방송국인 조선 방송협회(朝鮮 放送協會)의 일본인 (日本人)을 압도 능가(凌駕)한 기술부장(技術部長)을 역임(歷任)중 해방 (解放)을 맞이하여 서울의 “연희 방송국장”으로 승진 (昇進) 한 공은, 필자(筆者)가 서 너살(3-4세) 때, 1930 여년 무렵에 공은 다전 본가(茶田 本家)에 요즈음의 광석(鑛石) 라디오를 가설 한 후, 당시 보 성군 일대(一帶)에 말도, 노래도, 일기 예보도 하는 신(神) 들린 점쟁이 기계(機械)가 있다는 소문은 마치 “전설의 고향”을 방불(彷佛)하게 하였다, * 동유(東洧)는 부조(父祖)를 닮아서 두뇌명석(頭腦明晳)하고 근면 성실(勤勉 成 實)하며 타고난 과학적인 두뇌(頭腦)를 발휘하여 “벤처 산업”에 성공하여 산업훈장 금탑장 (産業勳章 金塔賞)을 받은 영재(英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동유를 포함(包含)하여 의 상하 삼대(上下 三代)가 공(共)히 현대화 산업(現代化 産業)에 공헌(貢獻)한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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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잠공 휘, 덕字환(德煥)의 증손자에, 죽곡공(竹谷公)의 장남이며 그는 부친의 많은 모선 업적(慕先 業績)을 거울삼아서 평소에도 투철한 숭조 정신을 발휘하여 자진(自進)해서 산소 관리와 시제(時祭)에 따른 범사(凡事)에 솔선수범(率先垂範) 주도(主導)하였섰다. 특히 그는 제4대 종중회장 임기 중에는 주택공사로부터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동패리의 선산(先山)의 토지(土地)에 관한 수용령이 발표됨에 따라, 토지의 보상(補償)과 墓地 이장(移葬)문제로 불철주야(不撤晝夜) 동분서주(東奔西走)하며 책무수행(責務遂行)에 전력(全力을 다 하였스므로 병사공이 부자 양위(父子 兩位)분을 2015년 5월 초에 환향 이장(還鄕 移葬)할 수 있게 모든 기반업무(基般業務)를 완료(完了)하였으니 그 노고(勞苦)가 컸었다. (참고 사항) (1) 그는 두뇌명석(頭腦明晳)하고 성실 근엄(誠實 謹嚴)하며, 부모님 생전 (生前)에 지극 정성을 다 하여 공경하므로, 요즈음에 보기 드문 효자 였다. (2) 고려대학교 법대 행정과를 졸업하고 수협 전북,지회장 및 수협 본부의 중역(重役)을 두루 역임(歷任)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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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정 (東 井) 택 호 여 주 (驪 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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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월 (東 月) 택 호 이 천 (利 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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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본문 6번에 기록된, 애산공(艾山公) 휘, 백字승(百承)의 4男으로 천성이 총명(聰明)하고 성실 결백(誠實 潔白)한 은행가(銀行家)출신이며 2002년도부터 2015년도 까지 종회 재무이사(財務理事)로 재임중에 회계질서를 분명(分明)히 하여 추호(秋毫)도 손색(遜色)없이 문재(門財)관리에 노고가 많았다. 특히 그는 증조고(曾祖考) 다잠공, 휘 덕字환(德煥)을 비롯 조고(祖考) 전은공(田隱公), 휘, 회字수(會水) 선고(先考) 애산공(艾山公), 휘, 백字승(百承)에 이여서 본인까지 포함, 4대가 병사 선조(先祖)님의 모선사엽(慕先事業)에 유례(類例)없이 헌신(獻身)하여 그 공이크다, (참고 사항) 그는 西江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경영학 석사에, 주택은행 지점장의 경력이 있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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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열 (鍭烈)
택 호 딘 양 (丹 陽) |
병사공의 12대손인 그는 남 다른 봉사정신(奉仕精神)과 숭조정신(崇祖精神)을 발휘(發揮) 하여 2002년도 부터 지금까지 종회 총무이사(總務理事)로 책임의식(責任意識)이 강하며, 한결 같히 종중의 운영관리에 솔선수범(率先垂範)하여 크게 공헌(貢獻)하였다. 그 밖애도 많은 업적 중에서 선조님들의 수 많은 고증자료(考證資料)인 선세유적(先世遺蹟)을 비롯 각종 문서 사진(文書 寫眞)등을 컴퓨터에 내장(內藏)하여 영구보존(永久保存)케 하였으며, 또한 “양후열 법문서 감정원 건물 일부를 종회 회의실로 제공 하는 등, 눈부신 활동과 현신(獻身)을 하고 있다. (참고사항) 그는 편모슬하(偏母膝下)애 지극한 효행(孝行)을 하면서, 국립 과학수사 연구소 법문서 연구관(法文書 硏究官)으로 보직(補職)에 법문서 과장(法文書 課長)의 경력, 현재 볍문서 감정원장(法文書 鑑定院長)으로 활동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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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모 (東模)
동 모 (東 模) |
그는 병사공 8대 종손이신 전 참군공(前 參軍公) 후, 오위장공(後, 五衛將公) 휘. 두字환(斗煥)의 증손자로서 12번에 기록된 유공자 고 동윤(故 東允)의 친 동생으로 심성(心性)이 온순 착실(溫順 着實)하고 남 다른 숭조정신을 발휘하여 보성군 득량면 다전(茶田)부락 소재(所在) 병사공의 유적의 보호관리는 물론 병사공 환향 이장(還鄕 移葬)작업에도 솔선수범 (率先垂範) 혈노(血勞)하였고, 병사공의 종가에서 봉사(奉祀)할 그의 양가(養家)인 9대조부님 휘, 익字주(益柱)부터 내리 증조부님 오위장공. 휘, 두자환(斗煥)까지 7代의 시제(시향)와 산소관리를 동모(東模)가 단독(單獨)으로 도맡아 주관(主管)하고 있는 유일한 효손으로 후세에 귀감(龜鑑)의될 숨은 큰 일꾼이다. (참고사항) 보성군 득량면 예당 농업 협동조합장 경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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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조 (東 祖) |
병사공의 11대손인 그는 두뇌명석(頭腦明晳)하고, 타고난 봉사정신과 확고한 숭조정신을 발휘 하여 필자가 제2대 회장 임기중 2003년도에 경기도 파주시 동패리에 소재(所在)한 병사공 부자 양위(父子兩位)분의 묘역(墓域)의 토목공사를 비롯 묘갈비(墓碣碑)와 둘래석(병풍석), 망주(望柱), 상석(床石) ,경계석(境界石) 새로 설치(設置)하는데 작업중에 늦 여름철의 국지성 호우(局地性 豪雨)로 인하여 당사자 동조를 비롯하여 당시 부회장인 故 동칠(東七)과 작업 인부들도 노고(勞苦)가 막심(莫甚) 하였고, 이어서 2015년 봄철에 병사공의 부자 양위분의 환향이장(還鄕移葬) 대역사(大役事)에도 솔선수범(率先垂範) 진두지휘(陣頭指揮)하는데 혈로(血勞) 하였다. * 주(註) 혈노(血勞)란 몸에 피가나도록 부지런히 수고 했다는 뜻이다. |
후기 여적(後記 餘滴) (1) 기록된 당사자(當事者)의 순서는 항렬(行列)에 관계없이 횔동 당시 시점 (時点)을 기준으로 했다. (2) 글에 한자(漢字)를 병기(竝記)힌 이유는 옛부터 동북아시아권(東北亞圈)은 영원 토록 한자문화(漢字文化)를 공유(共有)할것을 예견(豫見)했음이다. (3) 기재 내용이 수정(修正)해야 할 곳이있으면 필자(筆者)가 의식(意識)이 있 는 사전(死前)에 즉시 요청(要請) 바란다. (4) 우선 다전(茶田)마을의 역사적인 근거를 전후 세대 젊은이 또는 이곳에서 태어나지 않은 자는 잘 모르므로 세대적 갈등 씨앗이 되고 있다. 이곳 뒷산 언덕에는 옛날부터 차밭처럼 차나무가 자생(自生)하고있는차밭밑에 마을에서 유래(由來)하여 마을 이름을 "차밭밑"으로 불러 오다가 약 20년전에 5,16 군사혁명 직후, 새마을 운동이 전개(展開) 되면서 부터 전국의 옛날의 마을 이름(동명:洞名)을 일제히 한자음(漢字音)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예를 들서 * 차밭밑을 다전하(茶田下)로 않고 다전(茶田) 으로 * 터꼴은 기동(基洞)으로 * 가신꼴은 가신동(可信洞)으로 *중꼴을 중동 (中洞)으로 *섭밭물을 신전(薪田)으로 * 쇠실을 금곡(金谷)으로 * 까치내 는 작천(鵲川)으로 * 한실은 대곡(大谷)으로 * 한밭은 대전(大田)으로 * 대내를 죽천(竹川)으로 바꿔 부르게 됨었음을 요즈음 전후 세대(戰後世代) 젊은이들은 잘 모르므로 갈등이 심하다. . 심지어는 병사공의 부자(父子)분의 묘역(墓域)을 꼭 다전 마을을 부각 할려면 "다전마을 묘원" 또는 "다전부락 묘원" 또는 "차밭마을 묘원"으로 해도 되는것을 병사공의 7대종손이신 다전공(茶田公)의 묘인것 처럼 외람 되게 다전묘원(茶田墓苑) 이라니 언어도단이며, 하루빨리 가까운 석물점에 의뢰하여 茶田 을 삭제(削除)하고 "차밭"으로 수정(修訂)하지 않으면 천추 의 불효손이 될것이다. 수정 요령은 간단하다. 비용도 저렴하다. 미리 예고 하면 출장비만 지급 하면 된다. 지하의 선조님께서 얼마나 분노(憤怒)하고 계실까. 이어서 그도 모자라서 공의 제각의 현판을 외람되게 "다전제 (茶田濟) 라니, 다전공(茶田公)을 모시는 제각으로 탈 바꿈을 하게되니 병사공을 욕 되게하는 문중의 대참사(大慘事)로서 불공(不恭)스런 천하 무도(天下無道)한 못된 후손이였음은 심히 남 부끄럽고 개탄스럽다. 소위 고학력자라고 자칭(自稱)한 후손으로서 자신의 조상의 족보상(族譜上) 계보(繼譜)도 모르면서 엄중(嚴重)한 문중사를 문장(門長)들과 사전 협의도 없이 함부로 이와 같은 우(愚)를 범하게 되니 실로 한심 스럽다. 그래도 제각 현판에 관해서는 15년간 재무이사로서 성실하게 활동중인 동월(東月)의 막판 제보가 있어 천만 다행이였다. 생각 할수혹 손에 땀을 쥐게한다. 부끄럽게도 병사공 의 무지(無知)한 몇명의 후손이들이 자랑스런 입보성조(入寶城祖) 휘,(諱) 응字덕(應德)의후손으로 현조(顯祖)이신 병사공을 2015년 5월 말에 다전(茶田)마을로 환향 이장(還鄕 移葬)을 중심으로 위와 가튼 큰 사고를 범(犯)했섰는데 병사가문의 젊은 외손으로 창녕 조씨 조석현(曺錫鉉)군은 출중(出衆)난 시인(詩人)에 탁월(卓越)한 한학자(漢學者)로서 보학(보학(譜學)에도 능토(能通) 하므로 외가 양씨의 족보(族譜)상의 제 11세조 학포공(學圃公)을 비롯한 현조(顯祖)님들을 모두 달달 외우고 있스먀 나아가서 그는 디전에서 태어났스므로 지금도 차밭및 동명을 기억하고 있으면서 차밭및 부락의 역사적인 차 문화에관한 저서(著書)를 발간 (發刊) 했는데 외갓집 대표로 내가 거기 서두(序頭)출간사(出刊辭)를 덧 붙혔다. 부끄럽게도 우리문중에는 인물 빈곤(人物 貧困)으로 현재 생존자(生存者)중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석현(錫鉉)의 절반이 능력만 있섰다면 이러한 남들의 치소(恥笑)사태는 면(免)했슬것을...... ................................................................................................... 앞으로 후손들은 이상(以上) 열거(列擧)된 분들의 높은 공적(功績)을 잊지 않고 본 받기 위해서 후일(後日)에 병사공의 제각을 짓게 되면 그 문전의 잘 보이는 곳에 꼭 공적비를 세우도록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서기 2017년 1월 28일
.前. 제주양씨 병사공파 종중회장 茶村 유승(瑬承) (拙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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