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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열등감이 모든 탐심의 어머니>의 줄거리 :
왜 그냥 지금 내게 속한 집이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유물들 보다 더 좋은 것을 탐내지 말라고 하지 않으시고, 굳이 이웃의 집이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유를 탐내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이웃의 것이 아니면 그런 것들을 탐내도 괜찮은 것이라는 뜻일까요? 제10계명의 방점은 '소유'에 있지 않고 '이웃'에 있습니다. 이웃의 소유물을 탐내지 말라는 뜻은 그런 소유물을 지닌 이웃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즉 열등감을 금하시는 계명입니다.
열등감이 모든 탐심의 어머니
(출애굽기 20:17)
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모든 탐심의 어머니는 열등감입니다. 열 번째 계명은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대할 때 궁금증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굳이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이웃을 언급하실 필요 없이 ‘더 좋아 보이는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를 탐내지 말라, 네 종들보다 더 건강하고 일을 잘하는 종들을 탐내지 말라, 네 소나 나귀보다 튼실한 소나 나귀를 탐내지 말라, 아주 좋게 보이는 물건들을 탐내지 말라’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고 하셨으니 이웃의 소유만 아니면 탐내도 괜찮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꼭 이웃의 소유가 아니라도 내 눈에 좋아 보이는 대상과의 만남은 언제 어디서나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굳이 탐낸다는 말까지도 필요 없을 정도입니다. 가질 수 있는 것을 가지려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심지어 남종이나 여종까지도 그 대상에 포함됩니다. 지금이야 종이 없지만 당시에 종은 소유물이었기에 탐낼 수 있는 대상으로 언급된 것입니다. 이처럼 탐냄이란 결국 눈으로 보기에 좋아 보이는 물건이나 대상을 갖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굳이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우리는 앞서 도둑질 계열의 범죄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주인 되신 권리가 미치지 않는 대상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을 제멋대로 무시하고 등진 채 내가 가지고 싶다고 욕구하거나 이미 있는 것에 대해 소유 의식을 갖는 것은 모두 도둑질입니다. 이렇게 보면 도둑질 계열의 범죄들과 탐심 계열의 범죄는 비슷한 것처럼 보입니다. 도둑질이나 탐냄은 결국 어떤 대상을 갖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십계명이 말하는 도둑질 계열의 범죄들은 내 것으로 삼고 싶은 대상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한편 탐심 계열의 범죄는 내부 사정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도둑질 계열의 범죄들에 대해 굳이 이웃을 언급하시지 않았습니다. 내 것으로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은 이웃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둑질 계열의 범죄는 갖고 싶어 하는 대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에 굳이 이웃이라는 말이 필요 없는 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탐심 계열의 범죄에 대해서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말씀의 초점을 대상이 아닌 이웃에게 맞추고 계십니다. 예를 들어 이웃에게 훌륭한 남종이 있다면 남종 자체를 갖고 싶어 하는 바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훌륭한 남종을 갖고 있는 이웃의 처지에 서고 싶어 하는 것이고, 그런 남종을 가지고 있는 자기의 모습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보다 피부에 와닿는 또 다른 예를 들어봅니다. 친구가 1억 로또에 당첨이 되었습니다. 이때 당첨권을 훔치고 싶어 한다면 도둑질 계열의 범죄입니다. 그런데 ‘왜 나는 이런 당첨권 하나도 얻지 못할까?’라고 신세를 한탄한다면 탐심 계열의 범죄입니다. 당첨권을 가진 친구 앞에서 당첨권이 없는 자기에 대해 열등감을 느낍니다. 이제 열등감을 극복하려면 당첨권을 갖고 있는 친구의 자리에 서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도 로또 당첨권이 있어야 합니다. 열등감이 싫어서 로또 당첨권을 탐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탐심 계열의 범죄에는 열등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탐심 계열의 범죄가 도둑질 계열의 범죄와 다른 점은 자기애(愛)를 기반으로 삼는 것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기애에 기반한 탐심이 왜 하나님 앞에서 범죄가 되는 것일까요? 쉽게 이해하기 위해 또 다른 예를 들어봅니다. TV 광고를 보면 유명한 배우들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굉장한 몸값을 지급하며 유명 배우를 내세워 광고를 만드는 데에는 소비자의 열등감을 부추기고자 하는 의도가 있습니다. 누구나 아는 유명한 배우가 나와서 음식을 맛있게 먹고, 옷을 입고, 제품을 즐겁게 사용합니다. 이제 광고를 보는 사람들은 그 제품이 내게 없어서 즐겁지 않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 제품의 없음이 광고 모델에 비해 나를 열등하게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광고는 이런 식으로 탐심을 유발하여 판매를 촉진합니다. 영상 속 광고 모델과 나의 차이를 극복하여 내가 광고 모델의 처지에 서기 위해서는 이 제품을 가져야 한다는 느낌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광고를 보기 전까지는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광고 모델이 제품을 가지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자 적어도 그 제품과의 관계에서는 열등감이 생깁니다. 그리고 해당 제품을 사서 광고 모델의 처지가 되고자 하는 탐심이 생겨납니다. 물론 모든 광고에는 필요성을 알리는 정보 전달의 기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정보만 가르쳐준다고 해서 그것이 구매욕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구매욕을 불러일으키는 결정적 조건은 탐심입니다. ‘이 물건이 없는 너는 열등하다’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하여 이 세상에 대해 죽으면 하얀 마음이 됩니다. 마음이 탕자처럼 이 땅에서 뒹굴고 다니던 생활을 청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버는 것이 우리의 천직입니다. 하나님 벌기는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를 악물고 해나가야 합니다. 그 이유는 죄의 체질로 인해 마음에 끊임없는 죄의 중력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체질은 내 마음을 시시각각 하늘에서 삶의 현장으로 끌어내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대화할 상대자로 삼고, 아버지의 있음과 좋음으로 내 마음을 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있음의 존재감을 키우고 아버지의 좋음의 충만감으로 채우는 일에 수고하고 애를 쓰지 않으면 마음은 죄의 중력에 의해 하늘에서 땅으로 곧바로 내려오게 됩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가지려는 마음의 움직임이 활성화되는 동안에는 세상에 대해서 없음을 부족함으로 느끼는 열등감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대상을 가진 이웃에 대해서도 ‘나도 저 이웃처럼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됩니다. 문제는 선민들조차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가지는 열등감은 모든 탐심의 어미입니다. 내게 없는 것을 이웃이 갖고 있다고 생각할 때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고, 없음이 부족함으로 느껴지면서 열등감이 생겨납니다. 이처럼 열등감에서 비롯된 말과 행동은 모두 탐심 계열의 범죄입니다. 예를 들어 돈이 많은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와 만날 때마다 내가 돈이 없다는 사실을 크게 실감하여 열등감이 생깁니다. 이러한 열등감에서 비굴할 정도로 친구의 비위를 맞추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되었다면 탐심 계열의 범죄가 발생한 것입니다. 열등감을 뒤집으면 우월감입니다. 내가 친구보다 돈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를 만날 때마다 우월감이 생겨서 우쭐합니다. 이 또한 탐심 계열의 범죄가 발생한 것입니다. 열등감과 우월감은 같은 종자입니다. 앞뒤가 똑같은 붕어빵과 같습니다. 열등감을 뒤집으면 우월감이고, 우월감을 뒤집으면 열등감입니다. 그러므로 열등감이나 우월감을 갖고 말하고 행동한다면 전부 탐심 계열의 범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뿐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땅에서 뒹굴고 있는 한 없음을 없음으로 끝내지 못합니다.
이제 우리는 도둑질 계열의 범죄와 탐심 계열의 범죄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가 크게 드러나는 현상이 유행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2절에서 우리 마음이 예수님을 믿어서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입고 승천하기 전의 모습을 “그때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세상 풍조는 곧 유행입니다. 유행하는 물건이 좋게 여겨져서 그것만 가지면 만족하리라는 욕구로부터 샀다면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도둑질 계열의 범죄입니다. 한편 유행하는 물건을 갖지 못함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며 샀다면 탐심 계열의 범죄입니다.
열등감의 원인은 무엇인가 내게 없음을 부족함으로 실감하는 것입니다. 다만 사람은 무엇인가 없는 상황을 무조건 부족함으로 실감하지는 않습니다. 집 앞에 내놓은 쓰레기가 없어졌다고 해서 부족함을 느끼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배설물로 여기던 세상의 가치들을 사람들은 여전히 좋아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세상의 가치가 없음을 부족함으로 실감하지 않습니다. 부족함으로 느끼지 않기에 열등감도 생기지 않습니다.
또 사도행전 26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앞에 섰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사도 바울이 부족함을 느끼지 않았던 상태가 어떤 것인지 잘 드러납니다. 사도 바울은 왕과 총독이 선 법정에서도 예수님을 전했을 뿐이지 자기변호를 할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왕과 총독은 사도 바울이 너무나 많은 지식 때문에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사도 바울의 태도는 명확합니다. 29절을 보면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자면 사도 바울은 확실히 미쳤습니다. 몸은 포박되어 있는 상태였고, 삶의 형편을 보면 거지와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는 자가 세상의 좋은 것을 다 갖고 있는 왕과 총독 앞에서 자기처럼 되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법정에 선 상황에서 이웃은 왕과 총독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왕과 총독이 가진 그 어떤 가치에도 열등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없으나 없음을 부족함으로 느끼지 않았습니다.
이로부터 제10계명인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말씀에 담긴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윤리적인 문제를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의 모든 가치를 가진 왕과 총독을 보며 ‘저들은 분명히 많은 것을 가졌다. 그러나 나는 이를 악물고서라도 저들을 부러워하지 않으리라.’라는 마음가짐으로 버텼던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에게 세상 가치가 없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상 가치가 없음과 마음에서 부족함으로 실감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머리 둘 곳 없이 사셨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도 예수님께서 그러한 처지를 부족함으로 실감하셨다는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가치에 대해 부족함을 느끼며, 있게 하려는 행동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느끼는 열등감의 원인은 마음에서 느끼는 부족함입니다. 부족함이란 무엇인가 없다는 사실을 실감함입니다. ‘나는 남에 비해 부족하기에 열등하다.’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부족함은 그 자체로 열등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이나 스데반 집사님과 같은 경우를 보면 세상 것이 없다는 사실이 부족함으로 느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세상 것이 다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것저것 없는 것이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없다는 사실이 열등감이 될 이유는 없습니다.
사도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세상의 가치가 없음을 부족함으로 느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초대 교인들은 박해를 피하여 카타콤에 들어가 살아갈 때 지상으로 나갈 자유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이 카타콤에서 생을 마칠 수 있었던 이유는 없음을 부족함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지상에서 사람들이 누리는 자유가 없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없음이라는 객관적 사실에 대해 주관적으로 부족함을 느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자기의 죽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자 마음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들이 부족함을 실감할 수 있는 대상은 하나님뿐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만을 추구하며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는 순간 또한 그러했으며, 예수님께서 머리 둘 곳 없이 사명을 수행하실 때도 그러했으며, 사도 바울이 이방 세계에 복음을 전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추구할 대상은 하나님이었습니다. 부족하다고 느껴서 내게 없으면 안 된다고 여긴 대상은 하나님 한 분이었습니다.
우리는 죄의 체질로 인해 세상 가치의 없음을 부족함으로 느낍니다. 돈이 조금만 없으면 마음에서 부족함을 느끼며 열등감을 가집니다. 그러나 돈이 없음은 객관적으로 없음일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음을 부족함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몸이 아프다면 건강이 없는 것은 객관적 사실입니다. 건강 없음이 마음의 부족함으로 느껴져야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뒤로 기존에 유익하다고 여기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배설물로 여기던 것들이 내게 없다고 해서 부족함으로 느낀다면 이로부터 열등감이 발생하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있고, 십자가 사건이 있고, 부활과 승천의 사건이 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거쳐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시고, 성령님이 계시고, 천국이 있습니다. 내가 몸으로 살면서 느끼는 없음을 마음에서까지 부족함으로 느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선민은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자들입니다. 구약에서는 상번제의 어린양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어 하얀 마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심을 통해 상번제의 원형인 십자가 사건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내 죽음으로 받아들여서 하얀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갖는 것을 평생의 천직으로 알고 이를 악물고 온 마음을 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대할 때 세상 가치의 없음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해 이웃이 가진 것을 내가 못 가졌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부족함을 느낀다면 올바른 선민의 마음가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선민의 삶을 인도하실 때는 얼마든지 세상 것이 없는 상태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없음 자체는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부족함으로 실감하는 것은 주관적인 마음의 문제입니다. 부족함을 느낀다면 열등한 처지에서 벗어나 좋은 것을 갖고 있는 이웃의 처지에 서기를 바라게 됩니다. 이로부터 제10계명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말씀을 어기는 범죄가 발생합니다. 열등한 처지에서 벗어나 이웃과 동등하거나 우월한 내가 되기 위해서는 이웃이 가진 것을 탐내게 됩니다. 그 대상은 다양합니다. 이웃의 집, 이웃의 아내, 이웃의 종들, 이웃의 가축까지 갖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용납하실 수 없는 탐심입니다.
우리는 십계명이 세상 사람들이 아닌 선민에게 주시는 계명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에게 당신을 알려주셨고, 당신을 가질 대상으로 허락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선민이라면 하나님 가지기에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선민들이 하나님 가지기에 열을 내지 않는다면 세상 것들에 탐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가지지 못한다면 세상 것들이 없음을 마음에서 부족함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열등감에 절어서 자기에게 없는 것을 가진 이웃의 처지에 서고 싶어 하며 이웃이 가지고 있는 세상 것을 탐내게 됩니다. 탐심은 단순히 이웃의 물건을 가지고 싶어 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세상 것을 좋게 여겨서 갖고 싶어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도둑질 계열의 범죄입니다. 탐심은 세상 것이 없음을 부족함으로 느끼는 열등감에서 발생하는 범죄입니다.
동창회를 갔는데 나는 10년 된 국산 소형차를 타고 왔는데 친구들은 다 외제 차를 타고 왔습니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난다는 즐거운 마음은 싹 가시고 마음이 부글부글 끓습니다. 학교 다닐 때는 내가 공부도 제일 잘했는데, 공부도 못하던 애가 제일 좋은 차를 끌고 다니는 것을 보니 기분이 나쁩니다. 없는 것을 부족함으로 느끼자 열등감이 생겨나고 이제 탐심이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열등감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죄와 저주에 찌든 상태에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가지도록 허락된 선민에게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세상 것의 없음을 마음에서 부족함으로 여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 가치를 휴지처럼 취급하는 무서운 죄악입니다. 세상 것이 없음으로 인해서 나를 열등하다고 여기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이분의 마음이 어떤 식으로든 충만한 상태라고 가정해 봅니다. 차가 30년 된 국산 소형차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친구들이 외제차를 타고 왔어도 관심이 가지 않습니다. 외제차 없음을 마음에서 부족함으로 느끼며 열등감을 가지지 않게 됩니다. 모든 열등감의 이유는 마음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은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마음에 하나님이 없음이 열등감의 원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가져야 할 소유라는 측면에서 하나님을 휴지처럼 취급합니다. 그리고 자기 형편을 이웃들과 비교하며 열등해지지 않으려면, 그들이 가진 것을 나도 가져야 한다고 여깁니다. 이러한 탐심은 무서운 범죄입니다.
열등감의 모든 이유는 마음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릅니다. 사람은 하나님으로 채워야 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음으로부터 부족함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모르기에 눈에 보이는 세상 것들의 없음을 마음의 부족함과 연결합니다. 애초에 연결이 잘못 되었기에 부족함의 해결은 불가능합니다. 내가 돈을 좀 벌었다 싶어도 더 많이 번 사람을 볼 때 열등감이 생깁니다. 돈을 많이 번 사람 위에는 더 많이 번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돈을 최고로 많이 번 사람이라고 해서 마음이 채워진 것은 아닙니다. 열등감은 없음에서 비롯된 부족함이 핵심입니다. 문제는 하나님 없음으로부터 모든 종류의 없음을 부족함으로 실감하게 된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돈이 없음은 없을 뿐이지 마음의 부족함으로 실감할 이유는 아닙니다. 부족함으로 실감하는 이유는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마음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 있으면 객관적으로 돈이 없어도 부족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돈이 없어야 되기 때문에 없게 하신 것입니다. 건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여기저기 아픈 곳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마음에서 부족함으로 느끼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 없음만이 부족함의 이유임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끊임없는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진다면 부족함의 대상도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더 많이 갖지 못하는 것을 부족함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더 많이 갖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특징은 이웃의 것을 탐내지 않습니다. 항상 이웃에게 뭔가를 줄 수 없을까를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거지와 같은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은 세상의 모든 가치를 다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에게 무엇인가를 주지 못해 안달이 났습니다. 그렇기에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라고 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을 보면 베드로가 성전 미문의 걷지 못하던 자를 걷게 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6절을 보면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돈이 없었기에 구걸하는 자에게 줄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냥 지나가도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굳이 무언가를 주고자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있는 것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습니다.
이처럼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진 자들은 타인을 부러워하는 마음을 갖지 않습니다. 만나는 이웃의 객관적 처지가 나보다 낫든 말든 내게 있는 것을 주고자 합니다. 하다못해 식사 자리에서 식대를 내려 하는 것은 돈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마음이 채워진 사람이 식대를 내려고 합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진 사람은 자꾸 무엇인가를 주려 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자면 주제를 넘는 행동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물론 부자가 돈 많음의 우월감을 드러내려고 식대를 내려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우월감과 열등감은 근본이 똑같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절대 기쁨으로 식대를 내지 못합니다.
마가복음 12장 41~44절을 보면 두 렙돈을 헌금한 과부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부가 생활비 전부를 헌금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과부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이유 없이 생활비 전부를 헌금으로 바칠 수는 없습니다. 마음이 채워지지 않았는데 자기 돈을 남을 위해 쓴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바리새인들이 헌금을 했던 이유는 헌금을 투자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헌금을 하면 하나님께서 더 많이 주실 것이라 여겼을 뿐입니다. 하나님으로 마음이 채워지면 내일 끼니가 없어도 그것을 마음에서 부족함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탐심은 무서운 죄입니다. 그렇기에 탐심을 끊어낼 수 있고 극복할 수 있다면 그 은혜는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잠시도 떨어져서는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의 마음을 하늘로 끌고 가셔서 하나님과 마주하게 하십니다. 그럴 때 내가 없음을 느껴야 할 대상은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마음에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이 커지고 하나님 좋음의 만족감이 커질 수 있도록 있는 힘을 다하는 동안에는 세상에서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해보실 수 있습니다. 거지 나사로와 같은 처지에 놓일 수 있으면 놓여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없음이 부족함을 유발한다는 확고한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동안 돈이 없으면 걱정했습니다. 건강이 없으면 걱정했습니다. 자녀의 형통이 없으면 걱정했습니다. 그 걱정의 정도를 하나님께 쏟아붓는 것입니다. 세상 것이 없으면 안 된다는 강박감과 불안감과 두려움을 모두 하나님께 쏟아붓는다면 어마어마한 자유가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다윗은 시편 23편 1절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 것이 나에게 없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인도하심을 따라 내가 모르는 이유에서 세상 것이 없을 수 있지만 그것은 내 마음의 부족함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이 세상 누구에게서도 열등감을 가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십자가가 나의 운명인 한 열등감을 가지지 않는 것이야말로 나의 운명이고 탐심을 끊어내는 것이 나의 운명입니다. 이 세상을 향해 언제나 풍족한 마음을 가지고 주지 못해 안달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계명 하나하나를 뒤집어 보고, 깊이 보고, 방향을 바꿔 보면 복음 아닌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십계명의 복음을 온전히 활성화하여 내 것으로 삼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