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한 강 작가를 추천한 ‘선정위원회의 지성’을 지인분들과 공유함으로써 석별의 아쉬움을 대신하고저 합니다.
과학자들이 추정하는대로 ‘악의 평범성’에 충실한 자들 30%와 연약하지만 선하고 정의로운 사람들 70%가 공존하는 지구촌에서 한 강 작가가 글쓰기를 통해 불의한 세력에 맞섰다면, ‘전사 그리스도’로 불리우는 아르헨티나의 의학도 체 게바라는 남미여행을 통해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불평등한 이 세계의 모순을 먼저 치료하는 것이 더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쿠바 ‧ 아프리카의 콩고 ‧ 남미의 볼리비아 등의 혁명에 투신하였습니다. 이는 마치 가룟의 유다가 예수님의 길인 구원은 영원의 일 ‧ 주로서 미래의 일 ‧ 속죄의 길임에도 불구하고 육체의 일 ‧ 사회국가의 일 ‧ 현재의 일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지상에 건설하여 세계만민을 다스리는 일이라 판단하여 실제적으로 스승의 길과 도저히 양립할 수 없었던 것과 궤를 같이합니다.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유다의 대실망이 그를 재촉하여 대반역으로 몰아갔다고 성경 주해자 우찌무라 간조는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로 와서 스승에게 배우고자 함이 아니라 자기의 사상 – 내, 그를 적에게 넘겨 줌으로서, 어쩌면 그는 최후의 결심을 촉구하기에 이를지도 모른다. 그는 좋은 기적을 행했으니, 기적으로서 자기 몸을 구하리라 – 을 실행케 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단 한차례도 유다에게 노를 발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방법으로 회개를 돕습니다. 하지만 억지로 회개를 일으키지 않으십니다. 사람에게 자유의지가 있는 이상 이것은 하는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의 존귀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조차도 사람의 자유를 중히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최후까지 유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유다를 비난해야 할 것이냐, 동정해야 할 것이냐, 우리는 알지 못한다해도 결코 그를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는 끝까지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도 또 우리에게 거스리는 자를 대함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유다를 대하셨듯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회개에 지나치게 늦은 때는 없습니다. 또 회개는 대 용기를 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로서 회개 같은 것은 없습니다. 회개는 오만의 정반대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미국 코넬대학교 한인교회 대학생들의 “때리면 저항하지 않고 맞아야 하고, 겉옷을 원하면 속옷까지 벗어주는 이 한심한 종교에 우리는 고심하고 있다.”는 고백을 되뇌일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지만 ‘십자가의 도가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의 죄는 하나님의 성지(聖旨)를 취소시킬 수가 없어서 유다의 반역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속죄의 피를 흘림의 기회가 되었음에 있습니다. 하지만 죄는 죄로서 공적(功籍)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 그분 자신이 하나님과의 평화,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평화이며 우리 내면의 평화입니다. 비록 삶의 고난을 견디는 데 꼭 필요한 평안을 줄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지만, 성신의 인도를 받아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해줄 수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