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장군 시랑리 해동용궁사 서남쪽 바닷가 절벽 끝에 우뚝 서 있는 시랑대(侍郞臺)는 예부터 기장 제일의 명승지로 일컬어 왔다. 철새인 비오리가 많이 몰려왔대서 원앙대(鴛鴦臺)로 불러오던 것을, 영조 9년(1733) 58세의 늦은 나이에 기장 현감으로 좌천되어 온 권적이 가끔 찾아와, 일출 등으로 빼어난 동해의 경치를 벗하면서 이곳을 시랑대라 이름 짓는다. 그리고 금석문으로 각자한 후 칠언절구의 한시를 남겼다.
'귀양살이 이곳은 봉래산에 가깝고, 이내 몸은 이조의 시랑에서 왔다네/붉은 글자 석 자가 푸른 벽을 밝히어/오래도록 전해질 시랑대의 글씨.'
해동용궁사 절벽 끝 우뚝 선 시랑대
철새 몰려 원앙대로 불리던 곳
기장현감으로 좌천된 권적이 명명
미랑 스님과 용왕 딸 사랑 전설 전해져
제룡단 만들고 미랑대로 부르기도
바위 부식 바다로 기울어 안타까워 이는 세로로 각자된 시랑대 글씨 바로 옆에 새겼다. 권적은 암행어사 박문수의 호남 관찰사 임명을 반대하다가 영조의 눈밖에 나 정3품 당상관에서 정6품의 기장 현감으로 좌천되었으니, 귀양살이 따로 없는 좌천의 서러움을 시로 남겼다. 이 외에도 시랑대 바위에는 칠언율시와 칠언절구 등의 많은 한시가 새겨져 있었다는데, 오랜 세월 자연 현상으로 인하여 훼손되고 불과 6수만 알아볼 수 있게 남아 있을 뿐이다.새겨진 여러 각자 가운데 기장의 수각교 증축을 감독하였던 호장 이후서의 초서체 시는, 비록 권적의 시를 차운하였지만 각자들 중 가장 빼어난 글씨로 평가되고 있기도 하다.
동해의 파도가 넘실거리는 시랑대 앞은 수십 길 낭떠러지인 데다, 근처에는 기암괴석들이 첩첩이 날카롭게 솟아 병풍처럼 둘러 서 있다. 시랑대 옆 더 넓은 대는 사오십 명이 앉을 만한 자리인데 북쪽 암벽에 제룡단(祭龍壇)이라 각자되었다. 풍광이 빼어나고 바다가 열린 이곳에 기장 사람들이 천신과 해룡에게 제사 지내며, 기우제와 풍어제를 올려 어부들의 무사귀환을 빌고 가족들의 액운을 쫓으며 행운을 빌었던 곳이었다(기장현 읍지, 형성조).
원앙대(시랑대)엔 미랑 스님과 용녀의 애틋한 사랑 얘기가 전해 온다. 기우제를 지내고 원앙대 풍경에 빠져 있는 미랑 스님 앞에 불현듯 나타난 용왕 딸과의 사랑 얘기이다. 임신한 용녀가 용왕의 눈을 피해 원앙대에서 탯줄 끊을 가위 등으로 해산을 준비하지만, 인간과 사통하여 아기를 낳으려고 한다는 소식에 분노한 용왕이 성난 파도를 일으켜 용녀와 아기를 덮친다. 불쌍하게 여긴 옥황상제가 천마를 보내어 용녀를 구출하여 천상의 옥녀로 삼았지만, 용녀를 구하려고 파도에 뛰어든 미랑 스님은 생사를 알 수 없다. 대 위엔 스님의 짚신과 탯줄 가위 모양의 흔적이 자국으로만 남아 전해올 뿐이다.
훗날 사람들이 용녀를 위해 이 대에 제룡단을 만들고 제사 지내며 이 대를 미랑대라 불렀다. 지금도 원앙대 동굴에 파도가 치면 미랑을 찾는 용녀의 절규가 들린다고 한다. 용궁사에서 시랑대에 이르려면 12지 신상을 지나서 해동선원 표지판을 따라 계단을 올라 왼쪽 숲길로 들어 바닷가 벼랑을 타야 한다. 제룡단이 있는 넓은 단에는 난간이 설치되어 있지만 문제는 시랑대의 글 쓴 바위이다. 사진에서 보듯이 바위 아랫부분의 부식과 탈락으로 시랑대가 바다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이다. 기장 팔경의 으뜸이며 바위에 새겨진 시문 또한 금석문으로 문학적으로 가치 높은 것일진대 시랑대를 찾는 이를 안타깝게 한다.
주경업 부산민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