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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孤雲) 최치원의 숨결을 찾아서
가을은 심신을 지치게 할 정도로 왕성했던 여름을 지나 한 해의 후반을 바라보는 계절의 고빗길에서 느끼는
서늘한 생존 감각을 통해 찾아온다. 세월 앞에서 유한한 존재임을 새삼 자각하고 겸손함을 깨닫기 위한 여행.
문득 문득 떠오르는 삶에의 의문들이 있다면 더욱 값지다. 인생은 과연 무엇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그토록
오랜 질문에 나는 몇 마디나 대답거리를 찾아내며 살아왔는가? 결코 버릴 수도 떠날 수도 없는 나의 소중하고도
사소한 일상들은, 거미줄 같이 얽힌 인간관계들은 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우리들의 가을 여행은 이 모든 끈적끈적한 일상들을 과감히 떨쳐 버리고 계절의 감각을
온 몸으로 한껏 받아들이며, 더러는 지치고 조금은 흩어진 마음을 맑고 풍요롭게 할 문학과 예술을 찾아 나서는
행복한 발걸음인 것이다.
‘시의 도시’로 가는 길목에 응당 시 한 수가 있어야겠는데, 우선 반사적으로 이 고장 출신 시인 이은상(1903~1982)의
<가고파>와 이원수(1911~1981)의 <고향의 봄>이 떠오른다. 어느 나라 어느 고장에고 고향을 그리는 시와 노래가
없으랴마는 특히 마산에는 고향과 관련한 작품이 많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이 고장 특유의 산수와 풍속이 고향의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일 것이고, 둘째는 산수와 풍속에 민감하고 재능이 뛰어난 인걸-시인들을 많이 배출했기 때문일 것이다.
멀리 세월을 거슬러 신라시대에 이곳을 고향으로 둔 고운 최치원(857~ ?)이 지은 시 한 수를 첫머리에 소개한다.
그의 자취를 따라 마산에는 월영대가 있고, 부산에는 해운대가 있으며, 가야산에는 농산정이 있다.
월영대
秋夜雨中(가을밤에 비는 내리고)
秋風唯苦吟이나 (가을바람 부는데 외롭게 시를 읊으니)
世路少知音이라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적구나)
窓外三更雨요 (창문 밖에는 깊은 밤중 비는 내리는데)
燈前萬里心이라 (등불 앞에 내 마음은 고향으로 달리네)
신라의 천재라 일컬어지던, 고운 최치원이 나이 열두 살에 당나라에 유학 가서(869년) 외로움을 달래며 부른 노래다.
그는 18살에 빈공과에 합격한 후, 22세에는 토황소격문을 초하여 문명을 떨치고 28세에 귀국하게 된다. 귀국 후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등을 지내며 문란한 국정을 개혁하려 노력했으나 뜻을 펴지 못하고 외직을 자청하기도 하며 지방을 유랑하다가,
38세 때 가야산 홍류동 계곡에 농산정(籠山亭)을 짓고 은거하게 된다. 그는 만년에 이 정자 아래 갓과 신발을 벗어 놓고
자취를 감춰 신선이 되었다는 우화등선(羽化登仙)의 전설이 중국에까지 전해져 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고운의 대를 이은 여러 훌륭한 이 고장 출신 시인들이 많은데, 세인들에게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좀 더 신선한 고향의 감성을 불러내기 위해, 김용호(1912~ 1973) 시인의 한 작품을 소개하기로 한다.
고향으로 간다
어느 간절한 사람도 없는 곳
고향으로 간다
머나 먼 날 저버린
고향으로 내가 간다
낡은 옷 훌훌이 벗어 버리고
생미역 냄새 함뿍 마시며 고향으로 간다
잃어 버려, 끝내 잃어 버려
없는 고향이라 포개 둔 그리움이 한결 짙어
눈 감아도 뛰놀던 옛 어린 시절
좁은 골목골목들이 서언하게 다가오는구나
세월이 흘러
내 또한 흘러
맴도는 지점에서 소용돌이가 되는 황혼 무렵
통곡은 이미 사치스러운 것
무딘 신경에
새론 출발의 기적을 울리며
고향으로 간다
없는 고향이라 사뭇 그리워
그 그리움을 캐러 고향으로 내가 간다
없는 고향이라 사뭇 그리워
김용호 시인은 마산에서 태어나고 마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런데 왜 그는 ‘잃어 버려 끝내 잃어 버려......//
......없는 고향이라 사뭇 그리워 / 그 그리움을 캐러 고향으로 내가 간다’고 했을까?
어느 누군가가 이야기했다. ‘현대인들은 모두 고향을 잃어 버린 사람들’이라고. 태어난 곳이 고향의 전부는
아니지 않은가? 거기는 어머니 품속처럼 따뜻한 옛집과 눈에 익은 산천이 있어야 하고, 정다운 사람들이 있어야
할 텐데, 그런 고향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추강(秋江) 김용호 시인은 엄혹한 일제강점기 치하에서 일본으로 가서 명치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돌아왔다.
그 과정에서 또는 그 후 한국의 각박한 도시 생활 속에서 ‘고향 상실감’을 뼈저리게 맛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간다. 실제 고향에 대한 실망감도 있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에게 고향 시편은 여러 편이 있다.
혹자는 필자에게 아전인수격으로 ‘제 고향 찾아가는 것 아닌가’ 할 것이다. 감히 그럴 수 있겠는가? 필자는 고향 잃은
떠돌이일 뿐 고향이 없다. 단지 마산은 전란이 가져다 준 유랑의 젊은 시절 한 타향이었지만, 그렇다고 마음 속
고향인 것까지 숨길 생각은 없다.
여러분 중 어느 누구에게 물어도 마음의 고향 하나쯤 숨겨 두고 있다 하지 않겠는가?
천상병(1930~1993) 시인의 잘 알려진 시 한 편을 보자.
귀 천(歸 天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천 시인은 마산 인근 바닷가 진동에서 태어났고 초등학교를 일본에서 자랐으며, 6·25가 일어나던 해에 마산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상대에서 수학한 후, 1952년에 ‘문예’지로 등단했다. 1967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면서
현실적 일상으로부터 유리되어 걸식을 하다시피 하며 세상을 등지고 산 일은 유명하다. 그가 노숙을 일삼으며
방랑시인이 되어 오래도록 행방불명일 때 죽은 줄로만 알고 <새>라는 제목으로 유고시집(1971)이 나왔던 일은,
우리 문학사의 이면에 뚜렷하고도 슬픈 그림자로 남아 있다. 그가 남긴 시집 <새> 속에 실린 <고향>의 한 대목을 보자.
(전 략>
사실은 사람마다 고향타령인데
나도 그렇고 다 그런데
태어나기 전의 고향타령이 아닌가?
무(無)로 돌아가자는 타령 아닌가?
경남 진동으로 가자는 말이 아니라
태어나기 전의 고향-무로의 고향타령이다
초로(初老)의 절감(切感)이다
야경(夜景)이 더 아름다운 호수해(湖水海)
마산은 신라시대 때부터 골포(骨浦)-->굴자군-->합포현으로 불려 왔으며, 고려 때는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아직 시내 한복판에 몽고정이 남아 있다. 조선 태종 때는 창원도호부가 설치되었고
선조 때는 이순신 장군이 합포해전을 치른 곳이기도 하다. 1663년 현종 이후 마산포로 불려지기 시작하여 마산이란
명칭의 근거가 되었다.
동쪽으로 창원시, 진해시와 접하고, 서쪽으로 진주시, 고성군과 북쪽으로 함안군, 남쪽으로는 진해만에 잇닿아 있다.
배경이 되는 무학산(767m)을 중심으로 하여 구릉성 산지가 에워쌌는데 마산만 연안을 남북으로 시가지가 형성되었다.
마산은 한 마디로 경남 중남부 진해만 안쪽에 자리 잡은 항만 공업도시이다. 19세기 말엽에는 개화항으로,
그 후 1960~1970년대에는 자유당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3·15 마산의거와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난 민주화 운동의
발상지로 근현대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 1970년대 이후 마산수출자유지역이 조성되어 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으며,
2010년 7월 1일 진해시, 창원시와 통합하여 창원시로 새롭게 출발함으로써 제2의 도약을 꿈꾸고 있는 항구 도시다.
통합 후 마산의 북부지역은 마산회원구, 남부지역은 마산합포구로 분구되었다.
마산의 바다는 산과 바다와 섬과 하늘로 이어지는 거대한 호수의 경관을 연출한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막혀 있질 않고
저 멀리 진해만으로 트여 있으며, 눈을 지그시 감고 자세히 보면 태양양의 넓은 이마도 조금 보인다. 그래선지 모든 걸
다 갖춘 낮 경치가 분명히 볼 만하지마는 밤경치가 더욱 아름답다고들 한다. 그리하여 결국은 이은상의 <가고파>를
길러냈을 것이다. 이 시는 원래 10수의 연시조로 발표되었다. 첫째 수 중장에서 그는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라고 노래했다. 마산 바다는 언제나 잔잔한 호수였던 것이다. 제1~4수는 애창 가곡으로 널리 불렸기에 여기서는
제5, 6, 7, 10수를 소개하기로 한다.
가 고 파
물 나면 모래판에서 가재 거이랑 달음질하고
물 들면 뱃장에 누워 별 헤다 잠들었지
세상 일 모르던 날이 그리워라 그리워
여기 물어 보고 저기 가 알아 보나
내 몫의 즐거움은 아무 데도 없는 것을
두고 온 내 보금자리에 가 안기자 안기자
처자들 어미 되고 동자들 아비 된 사이
인생의 가는 길이 나뉘어 이렇구나
잃어진 내 기쁨이 길이 아까워라 아까워
(중 략)
거기 아침은 오고 또 거기 석양은 져도
찬 얼음 센 바람은 들지 못하는 그 나라로
돌아가 알몸으로 살꺼나 깨끗이도 깨끗이
낭만과 서정의 시인들을 길러낸 바다
마산은 서정의 도시, 감성의 도시답게 짙은 낭만과 서정의 시인들을 많이 길러내었다. 일제강점기 말 민족 문화
암흑기에 뚜렷한 존재로 국문학사의 맥을 이어 준 <문장>지는 앞서 옥천기행에서 정지용 시인과 함께 살펴보았다.
1939년, 까다로운 정지용 시인의 극찬을 받으며 <문장>지로 등단한 화인(花人) 김수돈(1917~1966) 시인이 마산
출신이다. 그는 1942년 동경 일본대학을 졸업한 후 경남여중을 거쳐 경남대학교 강사를 지냈으나, 극도의 가난과
녹익은 정감 속에 살다 중년에 세상을 떠남으로써 시적 재능을 모두 발휘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술과 꽃과 여인을
끔찍이도 사랑했던 그의 시 한 수를 감상해 보자. 이 시는 <고향>과 함께 1939년에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문장’지에
실린 작품이기도 하다.
소 연 가(召 戀 歌)
꽃향이 야음(夜陰)의 품에 안겨
끝이 없는 넓은 지역을
돌고 돌며 퍼져 와
추억이 남아 있는 먼 추억을 건드리면
나는 아직도
너를 사랑하고 있는 것을
분명히 알고 만다.
새 주둥이 같은 입술이
빨간 열매를 쪼으려던 유혹에
너도 여인이므로
타박타박 고개 숙인 채 걸어간 것을
지금은 다시 돌아오렴
열리인 창 앞을 좇는 제비같이
너도 나를 찾아오라
3·15와 부마항쟁의 도시 마산
경치로 보아 야경이 아름다운 것은 밤이 낮보다 더 많은 것을 숨기고 잉태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래서 더욱 신비롭고
궁금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역사의 암흑시대, 불온한 시대의 밤은 어떤가. 1950년대 말, 자유당의 이승만 정권 부패와 영구 집권을 위한
부정 선거가 횡행하던 1960년 3월 15일은, 바로 4·19민주혁명의 도화선이 된 의거일이다. 2003년에 국립묘지로 승격되고
2010년에 드디어 국가기념일로 승격 제정된 3·15묘역에는 불의의 총탄에 희생된 김주열 등 12명 민주열사들의 혼백이
잠들어 있다.
그리하여 마산은 앞서 말한 대로 야경이 더 아름답듯이, 세상 현실이 어둡고 험할수록 더 밝은 빛을 발하며 깨어 있기에,
어두운 세상일수록 더욱 빛나고 아름다운 도시인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얘기하면, 이른바 3·15부정 선거에 항의하는 시민과 학생들로 이루어진 평화적 시위대는, 이들을 강제
해산하려는 경찰과 투석전으로 맞섰고, 발포로 인하여 희생자가 발생하자 경찰서와 국회의원, 서장 집을 습격함으로써
주모자로 구속된 26명은 혹독한 고문을 당하기에 이른다.
그 후 4월 11일 행방불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군의 처참한 시신이, 마산 앞 바다에서 어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 소식이 시민들에게 알려짐으로써 분노한 시민과 학생들의 거센 봉기가 촉발되었고, 그 불길이 전국으로 번져 마침내
3·15는 4·19민주혁명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독재 정권이 단말마의 신음소리를 숨기고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을 무렵,
3·15 마산사건을 정면으로 다룬 시로서는 처음으로 김춘수 (1922~ 2004)의 다음 작품이 신문에 발표된다. 김춘수는
통영에서 출생했으나 일본대학 유학 후 마산고 근무, 경남대 강의, 마산문협지부장을 맡는 등 마산과 깊은 인연을
쌓으며 살았다.
베꼬니아의 꽃잎처럼이나
- 마산사건에 희생된 소년들의 영전에 -
남성동파출소에서 시청으로 가는 대로상에
또는
남성동파출소에서 북마산으로 가는 대로상에
너는 보았는가......뿌린 핏방울을
베꼬니아의 꽃잎처럼이나 선연했던 것을......
1960년 3월 15일
너는 보았는가......야음을 뚫고
나의 고막을 뚫고 간
그 많은 총탄의 행방을......
남성동파출소에서 시청으로 가는 대로상에
또는
남성동파출소에서 북마산으로 가는 대로상에서
이어졌다 끊어졌다 밀물치던
그 아우성의 노도를
너는 보았는가......그들의 앳된 얼굴 모습을......
뿌린 핏방울은
베꼬니아의 꽃잎처럼이나 선연했던 것을......
(국제신보,1960. 3. 28)
그의 시 중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꽃>,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등이 있으나 여기에 짧은 시 한 편을
더 소개하고자 한다.
인동(忍冬) 잎
눈 속에서 초겨울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다
서울 근교에서는 보지 못한
꽁지가 하얀 작은 새가
그것을 쪼아 먹고 있다
월동하는 인동 잎의 빛깔이
이루지 못한 인간의 꿈보다도
더욱 슬프다
의기(義氣)의 고장에 세워진 시비들
동마산 IC를 돌아 내려오면 5분 이내에 국립3·15민주묘지로 오르는 비스듬한 언덕 길 한 쪽에 3·15 50주년(2010년)에
세운 추모시비 11기가 있고, 다시 조금 올라가면 동쪽 언덕 아래 40주년 기념으로 세운 조각시비(김동숙 조각, 명제;
역사의 장) 앞 뒤로 10편의 시가 각인되어 있다. 책 갈피마다 시 한 편씩이 담겨 있고 끝에 두 쪽은 남겨두었는데,
이는 장차에 나타날 추모시를 기다리는 뜻을 담았다 한다. 여유로우면서도 이채롭다.
조각시비
마산항이 멀리 보이는 산호공원 오르는 길에는 이은상, 이원수, 김수돈, 정진업, 이석 등 이 지방 출신 유명 시인들의
시비가 있어, 고향 바다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어루만져 주고 있지만, 버스가 닿지 않고 동선과 시간이 맞지 않아
가 보지 못함이 아쉽기만 하다.
우리 국문학사는 조선조 단종 왕위 찬탈에 항거했던 사육신충의가를 비롯해 일제강점기에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썼던
자랑스런 저항시를 여러 편 가지고 있다. 저항시에는 피 냄새가 배어 있다. 격한 감정으로 인해 예술적 완성에는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안위를 내던지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용기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곳 시비들 중에서, 같은 해 4·19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마산의거의 희생을 추모하며 신문에 발표한 정공채 시인
(1934~2008)의 시 등 몇 편의 시를 소개한다.
하늘이여
지금 하늘이여
총을 맞은 이 땅의 봄이 마산에서
마산에서 핏빛으로 안타깝게 타고 있습니다
꽃같이 피어오르는 소년을
남쪽 바다 부두 앞 수면 위로
실종된 얼굴에 포탄을 박아 십칠 세를
떠올렸습니다
(중 략)
이제 거칠은 구름을 하늘에서 거두시고
총을 맞은 한국의 봄을 마산에서 살리소서
(국제신보, 1960. 4. 14)
조각시비
한국의 봄이, 핏빛으로 안타까이 타고 있는 마산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읊고 있다.
다음은 밀양에서 태어나 마산에서 소년기를 보고 마산고를 졸업한 이제하(1938년~ )의 시다. 그는 시인, 소설가,
화가로서 전방위 예술가라 부를 수 있는 작가다. 지금도 도예, 영화평론, 노래, 목각 등의 방면으로 영역을 확장해
가며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는 기인이라 할 것이다.
다시 바다
갈 수 없구나 청산가리 극약
품에 품지 않고서는
프로펠러 달린 최루탄
눈에 꽂지 않고서는
오늘도 어제도 내일도
김주열이 헤엄치는
저기 저
바다
(중 략)
솥뚜껑만한 *화경(火鏡) *편집자 주: 화경(火鏡) - 불을 일으키는 거울. 볼록렌즈
한 손에 쥐고
멍하니 바라보는
저기 저
바다
(1975. 5. 10, <저 어둠 속 등빛들을 느끼듯이>)
역시 많은 추모시의 한가운데에 김주열의 혈흔이 아직도 진하게 배어 있음을 본다.
의거 당시에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항쟁에 참가했다가 허벅지에 관통상을 입고, 겨우 목숨을 건진 시인 한 사람이
있다. 나중에 성장하여 1980년대에 현대문학으로 등단하게 된 변승기(1945~ ) 시인이다. 필자와의 오랜 인연
때문에 거절하지 못하고 답사 길을 동행해 주었으며, 본 기행 때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길 안내를 해 주기로 했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그는 3·15의거기념사업회 사무국장과 부회장을 맡으며 마산을 민주의 성지로 만드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고, 50년이 지난 오늘까지 그 성지 곳곳에 예술을 통해 참다운 진혼의 의미를 새겨 넣고 있다.
그의 시로는 <한 마리 외로운 새야>, <풀잎> 연작 등 감동적인 작품들이 많으나, 3·15의거 당시 부상당한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한 산문이 있어, 여기 싣기로 한다.
대동맥 절단으로 검게 썩어 가는 다리
(전략) ‘탕, 탕, 탕, 탕’
순간 나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몽둥이로 호되게 얻어맞은 것 같은 착각과 함께
몸이 붕 뜨면서 고꾸라지고 만 것이다. 아차 내가 총을 맞았구나. 허벅지에서 뜨뜻한 물기가
배어나왔다. 피였다.
“규식아, 규식아 내가 총 맞았다. 빨리 병원으로 데려가 줘.”
나는 친구를 부르며 도움을 청했다. 친구는 다른 일행과 함께 담을 넘으려다 급히 나에게로
다가와 부축하려 했다. 그 순간 우리에게 다가온 경찰관들이 몽둥이로 마구 때리면서,
×같은 새끼들, 집에 곱게 박혀 있을 것이지, 이 새끼들 죽어 봐라“하며 마구 짓밟았다.
그때부터 나는 심한 출혈로 정신이 가물가물해지고 있었다.
(뒤에 안 일이지만 내 허벅지를 관통한 총알이 대동맥을 절단해 버려 출혈이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규식아 병원으로, 병원으로 좀......”
“이 새끼, 병원 좋아하네. 빨리 업어. 따라와.”
경찰관의 말에 나는 친구의 등에 업혀 끌려가기 시작했다. 병원으로 가 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지만 경찰관은 오히려 우리를 시청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친구는 시체같이 축 늘어진 나를 업고
빨리 걸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경찰은 찰가닥 장전 소리와 함께 내 등에 총구를 들이대고는,
“이 새끼들 빨리 가지 않으면 둘 다 쏘아 죽여 버린다.”
나는 희미해져 가는 의식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지만, 손아귀에 꼬옥 잡고 있던 학생모를 어느 틈에
놓치고 말았다.
(3·15의거 증언록, ‘우리는 이렇게 싸웠다’ 2010. 11. 30)
항구의 갯내음-여인의 향기를 맡으며
서울에서 새벽밥을 먹고 서둘러 떠났건마는 오전에는 시비 감상과 참배 후, 곧장 선창가로 나가 점심을 먹어야 한다.
여느 때 기행에 비해 바쁜 진행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여유로운 여행길이 좋은 줄은 알지만 번번이 서두르게
될 공산이 있어 회원들에게 적잖이 미안스럽기도 하다.
또한 항구를 방문했다면 크고 작은 배들이 무지개빛 뱃고동을 울리며 떠나고 닿고 갈매기들이 끼룩끼룩 나는 모습을
보아야 제격일 텐데, 이곳에서 유일하게 40여 명이 식사할 곳은 항구와 큰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 복잡한 시장통을
지나서 수많은 일행이 움직이며 항구 구경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된다. 시장 분위기와 사투리 그리고 항구
특유의 바다 내음을 맡으며 만족해야 할 것 같다. 대신에 버스를 타고 가고 오는 길을 바닷가와 항구가 보이는 곳으로
차를 이끌기로 안내자와 합의해 놓았다.
마산항 원경
여기서, 경남 사천 출생이지만 20대부터 성호초교, 마산상고에서 교편을 잡으며 마산과 깊은 연을 맺었던 시인
조향(1917~1984)의 시 한 편을 감상해 보자.
마 산 항
하얀 돛배가 돌아오면
작은 항구에는 불이 켜진다
자주빛 어스름으로 빛나는 무학(舞鶴)의 산허리에
꼬리 긴 문어연이 흔들거리고 있는 이른 봄
어두운 다리 밑에서 비럭지의 무리가
거미들처럼 기어나올 무렵
점토빛 매축지(埋築地)에 서커스의 천막이 흔들리면서
손님을 부르는 슬픈 클라리넷의 노스탈자!
죄그만 부두
부선(艀船) 위에는 인간들이 붐비고 하얗게 탁해진 먼지 냄새
<스미레>호의 기적이 이 밤을 흔들 무렵
먼 추억의 피안-그대의 *하렘에는
작은 사랑의 불꽃이 갑자기 피어 오른다 <시집 ‘바다의 층계’, 1952>
*하렘(harem):'출입금지 지역‘을 뜻하는 아랍어. 1. 이슬람 사회에서 부인의 방 2. 메카 등 이슬람의 성지
해방 직후 또는 6.25 전후의 공간에서 어렵고 혼란했던 사회의 모습이, 시골 ‘죄그만 부두’를 통해 바람에 흔들리듯
보인다. 가난에 찌든 ‘점토 빛 매축지’의 ‘하얗게 탁해진’ 항구 풍경 가운데서, 그래도 시인의 눈은 ‘하얀 돛배’와
‘꼬리 긴 문어연’을 놓치지 않는다. 따뜻한 마음으로는 ‘노스탈자’와 ‘사랑의 불꽃’ 한 줄기씩을 건져 올린다. 특히나
‘서커스의 천막’과 ‘슬픈 클라리넷’이 황량한 부두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배경이 된 것은, 아마도 그가 1955년에
전위극단 <예술소극장> 대표를 지낸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
항구의 제 일감은 역시 뭐라 해도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만나는 사람들마다에서 길거리 좌판에서 풍기는 갯내음이다.
‘갯내음은 바다라는 여인이 풍기는 향내다’ 이렇게 중얼거리고 싶은데 아무래도 여인들의 눈치가 보인다. 동서를
막론하고 바다의 상징은 여인 아닌가? 그런 시장통을 잠시 걸어 들어가면 ‘둥지횟집’이 나온다. 2층이라 휘 둘러보면
어디쯤 항구의 돛대가 보일 것 같아 기웃거려도 허사다.
9~10월은 전어철이라 그 회맛이 일품이라고 이 지역 미식가가 일러 주었기에, 보조금까지 들여가며 점심 준비를 한
보람이 있으리라 믿기로 한다.
조각의 뜰이 있는 음악관으로
동선이나 여정의 시간 때문에 매우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 합포구 상남동 노비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마산문학관엘
들리기 어렵게 된 점이다. 서울 마산 오가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데다가 오전에 민주묘지 참배 후 한 군데 더 가기도
어렵고, 문신미술관 다음으로 들르기에는 출발 시간이 너무 늦어질 것 같아서 아쉬운 선택을 하게 된 점에 대해 양해를
구해야 할 것 같다. 버스에서 내려 언덕길을 올라가며 걷는 시간만 적게 걸린다면 좋겠는데......
식사 후에는 서민들의 부산스럽고도 짙은 삶의 향기 풍겨나는 시장 구경을 잠시 한 다음, 마산음악관으로 향한다.
가는 길에 서쪽 부둣가에 위치한 ‘김주열 열사 추념 표지석’이 있는 곳을 지나며 간단한 설명으로 참관을 대신하기로 한다.
그러나 아리따운 젊은이 한 사람의 죽음이 세상을 바꿔 놓은 현장을 정성스럽게 세세히 살펴보지 못함은 끝내 아쉽다.
곧이어 펼쳐질 항만 확충 공사로 어수선하여 실망을 안겨 줄까 염려스러워서라고 한다면 궁색한 변명일지도 모르겠다.
차를 타고 5분여 거리에 마산음악관과 마산조각공원이 나란히 있다. 6년 전에 개원한 이곳은 이 지역 출신 작곡가로서
‘선구자’, ‘그리움’ 등 우리들 귀에 익은 가곡을 지은 조두남(1912~1984)과 대중가요 ‘울고 넘는 박달재’의 작사가인
반야월(1917~ ) 그리고 ‘산토끼 토끼야’의 동요작가 이일래의 유품과 음악 사료들이 전시된 소박한 전시관이다.
지난 57회 음성기행에서도 그랬듯이 여기서도 또 한 번, 간악한 외세 침략의 역사 앞에 속절없이 희생된 예술가들의
나약함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는 일제 침략자들에 대한 새삼스런 분노와 끊임없이 고통 받으며 희생당한 분들에 대한
추모와 연민을 지그시 억눌러야 하는 고통을 잠시나마 감수해야 할 듯싶다.
그 리 움 고진숙(고경택) 시, 조두남 곡, 김화용 노래
기약없이 떠나가신 그 님을 그리며 / 먼 산 위에 흰 구름만 말없이 바라본다
아 돌아오라 아 못 오시나 / 오늘도 해는 사산에 걸려 노을만 붉게 타네
귀뚜라미 우는 밤에 언덕을 오르면 / 초생달만 구름 속에 얼굴을 가리운다
아 돌아오라 아 못 오시나 / 이 밤도 나는 그대를 찾아 어둔 길 달려가네
이 노래에는 오색 그림처럼 아름답고 무채색 전설처럼 슬픈 사연이 담겨 있다.
1950년대 말, 고진숙(1934~ )은 마산중고교 음악교사(1960년에 자유문학에 <학>으로 시인 등단)였다. 당시 <선구자>
등으로 이미 유명세를 누리던 17세 위인 조두남을 만난 어느 날, 그는 고진숙에게 자작시 ‘울지 마라 봉선화’를 보여 주며,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개작을 부탁했다 한다. 진숙은 고심 끝에 ‘어느 여대생에 대한 슬픈 추억’을 떠올리며 하룻밤
사이에 이 가사를 지었다 한다.
사연인즉 이렇다. 그는 황해도 사리원 태생인데, 8·15 이후 식구들과 월남하여 서울에 살다가 6.25가 일어나자 서둘러
부산으로 내려와 고교 1학년생으로 힘겨운 피난살이를 할 무렵. 무대는 피난민들이 들끓던 부산시 수정동. 부산진역
위쪽 구봉산 비탈 동네, 이른바 달동네인데 가까이는 부산항이 보이고 영도 뒤로는 수평선이 바라보이는 태평양이니,
눈물겨운 피난살이만 아니라면 최고의 경관이 펼쳐진 곳이다.
그는 비탈길을 오르내리며 만난 피난민인 E여대생을 마음 속 깊이 흠모하게 된다. 그녀는 폐병으로 학업을 멈춘 채
연고자도 없이 방직공장엘 다니는 얼굴 창백한 여인이다. 기숙사인 천막촌을 방문해 가며 문학, 음악의 해박함에 놀라며
연상의 여인에게 사모의 정이 더욱 깊어갈 무렵, 그녀는 문득 행방을 감추게 되고 그 해 가을이 지난 어느 날 그녀가
폐결핵으로 끝내 죽고 말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어느 전후 소설의 한 대목이 아닌가 하고
착각할 정도이다.
조두남 작곡, 윤해영 작사, 박인수 노래의 <선구자>는 너무나 잘 알려지고 널리 불려진 만큼, 잃어버리게 된 아픔도 크고
깊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조각공원 뜰에는 우리나라 유명 조각가들의 작품 18점이 잔디밭 사이사이에 보이는데, 그늘에서 잠깐 가을바람을 쐬며
현대 조형 감각 속으로 거닐어 보시는 것도 좋을 듯하다. 다른 기행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조각과의 만남이 비중의 절반은
되는가 보다. 다시 무학산 중턱 언덕을 잠시 올라 창원시립문신미술관으로 발길을 옮긴다.
조각과 회화 현대미술의 두 거장을 한 눈에
때마침 문신미술관에서는 <아름다운 동행전>(8/26~10/30)이 열리고 있으니, 멀리 마산을 찾은 우리들에게 남다른
안복(眼福)이 있다 할 만하다.
<아름다운 동행전>은 거침없는 열정과 창작열로 세계무대에서 활약한 두 예술가 이응노(1904 ~1989)과 문신
(1923~1995) 즉 회화와 조각의 만남이다. 창원시립문신미술관과 대전광역시이응노미술관이 공동 기획으로 현대미술의
두 거장을 만나게 한 뜻깊은 자리다.
“이들은 한국적인 감수성과 현대성이 조화를 이룬 독자적인 작품을 기반으로 세계무대에서 활약하였으며,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우리 민족의 시대적인 아픔과 오랜 타국생활에서 겪은 외로움을 오직 작품을 향한
일념으로 극복해 내었다. 격동의 시대를 함께 산 이 두 예술가는 치열한 작가 정신과 열정, 미지의 세계를 향한
충만한 도전정신 등 예술가적 기질뿐 아니라 그들이 지나온 다이내믹한 삶의 궤적에서도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 이러한 요소들과 두 작가의 인연이 이번 전시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중략)
두 작가는 일본유학과 국내활동 그리고 프랑스 진출을 통해 현대미술의 새로운 흐름을 수용하고 장르와 소재의
경계를 넘어 다양한 작품을 실험하였으며, 그 결과 그들만의 개성적인 작품 세계를 세계미술의 중심지인 파리에서
인정받았다. 이번 전시를 통해 이응노의 문자추상과 군상, 문신의 시메트리(*편자 주; sym-metry, 좌우의 균형,
대칭, 부분과 전체의 조화를 뜻함.) 조각 등의 작품으로 이들이 이룩한 독자적 예술의 남다른 성취와 우리 미술의
발자취와 성과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아름다운 동행’ 리플릿 중에서)
문신미술관 아름다운 동행전
두 예술가의 만남은 196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1년 2월 추운 겨울이었다. 일주릴째 끼니를 잇지 못한 채
거의 탈진 상태로 파리시내를 배회하던 문신이 만난 첫 번째 동양인이 이응노부부였으며, 이들은 그에게 흰 쌀밥에
깍두기를 대접해 주었다 한다. 참으로 극적인 만남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고령으로 생존하고 있는 김흥수 화백을
소개시켜 라브넬성에 정착하게 되는 행운을 가져다 준 운명적인 은인이기도 한 것이다.
이들은 1970년 남 프랑스 뽀르-바카레스 국제현대조각심포지엄에 참여하여 뜨거운 태양 아래 여러 달 동안 함께
작업하여 10m가 넘는 토템 조각-문자 추상 조형물과 시메트리 조각상을 세웠는데, 40여 년이 넘는 지금도 남 프랑스
지중해 바닷가에서 영원하고도 행복한 만남을 이루고 있다.
이 작품 제작 당시 문신의 친필 원고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이응노와 나는 총 240일에 달하는 제작 기간 동안 매일 아침 5시부터 밤 8시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무거운 쇠망치를
내리쳤다. 건너편에서 작업하던 이응노가, 내리쬐는 햇볕 아래에서 몇 번이고 주저앉아 호흡을 진정시키는 것을 보면서,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워서 작업을 멈추고 달려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동행전 전시 작품들
추산야외조각공원에 초가을 쉼표 하나
문신미술관이 있는 곳이 추산공원이다. 이 공원 안에는 문신미술관 외에 창원시립박물관, 그리고 이 일대에 꾸며진
추산야외조각미술관이 자리 잡은 곳이다.
2010년 가을, 창원시는 이 지역 출신의 조각가 문신의 예술혼을 기리고 창원시를 문화 예술의 르네상스로 만들기 위해
제1회 문신국제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여기에는 10명의 세계적인 조각가들의 작품이 초대되었는데, 이들의 작품을
영구적으로 설치함으로써, 추산공원 일대를 예술과 자연이 살아 있는 새로운 공간으로 변모시켰다.
추산야외조각공원
여기 초대된 작품들의 선정 기준은 첫째; 문신미술과의 미학적 연계성, 둘째; 설치 장소 및 환경과의 어울림, 셋째;
국제 미술계의 인지도, 넷째; 시민들의 문화 향수 요구와 대중적 경향에의 적합성, 다섯째; 작품의 조형성이었는데,
매우 까다로운 조건이 아닐 수 없다.
이들 중 몇몇 작가의 작품을 간략히 소개할까 한다.
장 뤽 빌무스(프)는 지름 6.9m의 원형 지반에 높이 7.6m의 가로등을 둘러놓은 작품을 선보였다. 라는 제목의 이 작품의
계단형 지반에는 대중들이 앉아 휴식할 수 있으며, 밤에 불이 켜지면 거대한 빛으로 감싸인 새장 분위기가 조성되어
꿈과 낭만의 공간이 된다. 일상적인 오브제인 가로등을 예술적 차원으로 변모시킨 창의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쉬 빙(중)은 <石-徑>이란 문자도(文字圖) 설치 작품을 출품했다. 뜻을 알 수 없는 자기만의 문자를 개발했다는 괴짜
예술가인 그의 작품들은 상형문자에 기반을 둔 중국문화권에 대한 인문학적 정취를 풍긴다. 천안문 사태를 계기로
중국을 떠나 미국에 이주해서 작품 활동을 벌이는 이단아적 존재다. 공원 내 산책로를 따라 설치된 64개의 바위 표면에
자신이 발명했다는 특유의 문자로 번안한 이은상의 <가고파> 싯귀는 푸른 물빛의 고향 바다 이미지와 오버랩되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사색과 명상의 분위기로 안내하게 될 것이다.
데니스 오펜하임(미)은
높이 3.8m의 분수 조각은 물과 빛이 함께 하는 환경 조형물이다. 그는 1960년대부터 대지미술과 퍼포먼스 등의
실험미술을 주도해 왔고, 1970년대부터는 조각과 건축이 결합된 작업에 몰두하여 대중적 미감을 사로잡는 국제적
유명 작가이다.
또한 일본의 환경미술작가 가와바다 타사시의 나무 위 새 둥지와도 같은
철조두상 , 중국의 왕루옌이 출품한 길이 6.4m 높이 3m의 대형 삼각자는 눈금의 숫자나 형태의 왜곡을 통해 문명비판적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그 밖에 우리나라의 원로 조각가 박종배, 박석원의 작품과 로버트 모리스, 세키네 노부오의 독특한 작품들이 멀리 마산항을
바라보며 문화 예술의 르네상스를 견인하고 있다.
우리는 온통 예술과 문화가 꿈틀거리는 이곳에 의미 있는 초가을 쉼표 하나를 찍으려 한다. 시를 읊조리며 맑은 노래도
흥얼거리면서 항구를 떠나는 아쉬움을 달래게 될 것이다.
고향 바다의 복원과 문화예술 르네상스의 꿈
마산은 특히 문학과 음악을 통해 편안하고도 아름다운 고향 바다의 꿈을 깊이 간직하고 있으나, 일제강점기의 침탈
상흔으로 일부 훼손된 상처도 함께 안고 있다. 사회적 갈등 요인이 되고 있는 이 상처는, 3·15라는 미증유의 역사적
사건으로 인해 그 빈자리가 메워지고 있으며 근원적으로 치유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산 문학기행에서
3·15의거를 주제로 한 저항시 즉 참여시가 더욱 중요하게 조명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그 이후 중공업, 조선, 기계산업의 전초기지가 되어 근대화의 현장으로서 소임을 다하는 가운데,
그 후유증으로 마산 앞바다 역시 깊은 상처를 해저에 가라앉힌 채 신음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오염을 치유하고 복원하기
위한 사업도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니 이보다 반가운 소식이 또 어디 있겠는가? 명실상부한 ‘고향 바다’의
복원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마산이 겪은 오래고 오랜 일월의 세월과 험난하고도 아름다웠던 풍상의 역사를 가까이서 지켜보아 온 증인이 있다.
바로 호수해 가운데 그림처럼 떠 있는 돝섬이다. 돝은 도야지의 고어인데, 섬의 누운 모습이 도야지를 닮았다 예부터
전해져 오는 이름이다. 이 섬에서는 해마다 국화축제가 열리는데, 이 고장 토박이 시인 이광석(1937~ )의 시 한 수를
전별시로 싣는다.
돝 섬
섬이라 부르지 말자
바다 한가운데 뛰어내린
신라의 달이라고 생각하자
고운(孤雲) 최치원이
달빛에 취해 시상(詩想)을 빠뜨린 월영대(月影臺)
그 바다가 품고 그 바다가 키워 갈
마산의 꿈 마산의 미래가
자연산 도다리처럼 파닥이는
가고파 1번지, 마산의 솟대라고 생각하자
누가 너를 섬이라고 부르는가
마산 사람들 곧고 바른 자존심
켜켜이 뿜어내는
오, 한 마리 등 푸른 고래여
이광석 시인은 이곳에서 태어나 1059년에 청마 유치환 선생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하였으며, 경남신문사
편집국장과 주필, 마산문인협회장 등을 지낸 원로 시인이다. 그의시 <돝섬> 속에는 마산의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담겨 ‘한 마리 등 푸른 고래’로 살아 숨쉬고 있는 듯하다.
창원시는 마창진 세 도시 통합과 함께 서비스, 금융, 문화콘텐츠 산업으로 서서히 탈바꿈하고 있다. 예술가들의 열정과
이상이 간직된 미술관 뜰에서 잔잔하고 푸른 호수 바다를 바라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긴다. 역사와 감성의 도시 마산의
잠재력을 활용한 새로운 비젼 제시와 지역공동체의 결속 통합을 꿈꾸는 곳에 마산의 행정 문화 예술의 좌표가 세워져
있음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에필로그
2010년 11월에 문학기행을 맡기 시작하면서 생활에 여러 가지로 생긴 변화 중에 가장 큰 것은 ‘세월이 왜 이렇게
빠른가’ 하는 것이다.
문학을 합네 하고 시작한 지가 20대 초반을 기준으로 40년이 넘었지만, 만약에 싫었다면 별 실속도 없이 지금까지
버텨 올 이유가 있겠는가? 형체도 없는 문학이란 험한 바다 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면서도 세월의 빠름을 걱정하는 것은
역시 문학 앞에서 더욱 겸허해야 한다는 생각의 집약이고, 그 바다와 고난 자체를 경외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문학기행을 맡은 후 첫 번째 변화는 문학 앞에서 자신을 더욱 새롭게 하고 진중하게 만들었다.
생활상의 변화나 건강상의 변화 등이 많겠지만 다 그만두고 중요한 두 번째는, 본인의 골방 밖 넓은 문학 세상으로
좀 더 눈을 크게 떠야겠다는 것이다. 새삼스럽기도 하고 만시지탄이기도 하지만, 작자는 당연히 자신의 작품 밖에
다른 훌륭한 선배 작가와 작품이 있음을 거듭 자각해야 하고, 그들을 통해 자신의 작품 세계를 끊임없이 담금질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독자의 실체를 인지하고 그들과도 소통해야 한다는 깨달음이다.
이 얘기를 길게 쓸 수 있는 지면이 아니기에 짧게 줄일 수밖에 없다. 결국 ‘사색의향기 문학기행’은 필자의 인생 후반기에
참으로 많은 자각을 안겨 주었다.
(윤고방 선생 블로그에서 퍼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