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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생명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백대영
마르따와 마리아와 라자로 이렇게 삼 남매가 유대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라자로가 병들었습니다.
마르따와 마리아가 예수님께 심부름꾼들을 보내어서 소식을 알렸는데 예수님께서 그 마을로 가신 때에 이미 라자로가 죽은 후 4일째였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 “나는 그 부활이고 그 생명(life)이니 내 안으로 믿는 자는 비록 그가 죽을지라도(even if) 살 것이고. 지금 살고 내 안으로 믿는 모든 자는 그 영원 안으로 죽지 아니할 것이니 너는 이것을 믿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따가 예수님께 말하기를 “예 주여 당신은 그 크리스트시며 그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 세상 안으로 오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요 11:27).
요한복음 11장 28절에 “그 선생님께서 오시고 너를 부르시노라.”라고 마르따가 그녀의 자매 마리아에게 말하였습니다.
이것을 말한 그녀가 가버렸고 그 자매 마리아를 비밀로 불러 말하기를 “선생님께서 오시고 너를 부르시노라.”라고 하였습니다(요 11:28).
요한복음 11장 29-31절에 “그녀가 빨리 일어나고 그에게로 왔으나. 예수께서는 마르따가 그에게 만난 장소에 그가 여전히(yet) 계셨으므로. 그녀와 함께 집에 있고 빨리 일어났고 나간 마리아를 보았으며 그 유대인들이 그녀가 거기 울기 위해 무덤으로 떠나가는 것을 추정하여 그녀에게 뒤따랐으므로.”라고 하였습니다.
마리아가 예수께서 계신 곳에 와서 그의 발을 향하여 떨어져 말하기를 “만일 당신이 여기에 계셨으면 나의 형제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요 11:32).
그가 말씀하셨기를 “어디에 너희가 그를 놓았느냐”라고 말씀하셨으며, 그들이 말하기를 “주여, 오시고 보소서.”라고 대답하였습니다(요 11:34).
본문 11장 34-37절은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요 11:35).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지 않으셨다면 눈물을 흘릴 일이 없었을 것인데,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심으로써 슬픈 일을 겪고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라자로 때문에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연약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시는 일을 절대로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셨으며 사람의 모양으로 발견되심으로써 인성의 모든 것에 복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감정을 밖에 드러내셨으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영혼의 아픔을 드러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고 친구의 죽음을 보시고서 느끼시는 그 마음속의 고통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의 친구에 관한 생각으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이 예수님의 정서에 그대로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깊은 정서에 들어가셔서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슬퍼하셨고 불신앙의 모습을 보시고서 슬퍼하셨고 예수님께서는 슬퍼하는 자매들을 보시고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통하여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하나님을 감정을 초월한 존재로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몇백 년 전에 그리스 사람이 그리스 문화를 남겼는데 그리스 문화를 영어로 “헬레니즘(Hellenism)”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성경이 바로 이 그리스어로 기록된 것입니다. 그 당시 그리스어는 오늘날 영어처럼 그 세계에서 국제 통용어였습니다. 이런 그리스 사람들이 하나님을 감정을 초월한 존재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크리스천들과 함께 우시고 고통 느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의 눈물을 주목(注目)하여 바라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눈물을 아시고 그것을 통하여 감동하십니다. 눈물 어린 간구처럼 하나님을 이길 수 있는 기도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눈물을 제거하시는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슬픔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는 분이 아니시며,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셨는데, 우리가 예수님의 눈에 보배롭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는 금과 은이 보배가 아니라 그 사랑하시는 자들이 보배입니다. 예수님께서 금이나 은 때문에 죽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금이나 은이나 다이아몬드나 진주 같은 그런 보물보다 우리가 예수님께 더 보배로운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님의 보혈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셨으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귀중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셔서 사람은 귀합니다. 사람의 몸과 혼과 영(靈)은 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에 하나님께 가치 있습니다.
사람의 관점으로 볼 때 사람은 절망적이고 자신의 난제를 풀지 못하나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35절은 3개의 단어로 쓰였는데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입니다. 가장 짧은 절이지만, 참으로 매우 많은 뜻을 생각하게 하는 절입니다. 이 구절은 위로의 말씀이요, 우리가 살필 가치가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으로 우정을 가지셨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셨으며 예수님께서는 참된 동정심을 가지셨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동정심(同情心)”은 “동일(同一)한 감정(感情)의 심장(心臟)”을 뜻하며 “남의 어려운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몸과 영혼은 본래 사람의 몸과 영혼처럼 구성되어 있었기에, 그 몸이 조성될 때 슬픔을 표현할 수 있는 눈물샘이 준비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샘에서 눈물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으며 예수님께서는 죄의 결과를 보시고서 아픔으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셔서 이런 때의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슬픈 일을 당했을 때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기 경상도 사람들은 이 사내자식이 눈물을 흘린다면서 더 때립니다. 사람을 그렇게 교육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울 수 있는 자가 되어 울어야 하는데 울지 못하는 자로 자라면 감정에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남자셨잖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 앞에서 모든 사람이 보는 때에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남자는 울면 안 된다는 것은 유교적인 가르침입니다.
유교적인 자들은 사내자식이 왜 우냐고 딱 세 번 울어야 한다고 하나, 우리는 여자처럼 남자가 울고 그러냐면서 아이들을 키워서는 안 됩니다. 눈물 흘릴 줄 모르는 사람으로 키우면 그 아이는 괴물이 될 수 있습니다. 정말로 슬픈 일을 보면 울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정이 메마르고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키워서는 안 됩니다. 남자가 여자처럼 슬플 때 운다고 비판하면서 키우지 아니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큰 사람은 감정 없는 괴물이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슬플 때 그것을 보고 같이 울 수 있는 사람이어야만 하며 슬픈 일을 당할 때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남자가 운다고 비난하면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지 못하는 자가 됩니다. 사람을 이렇게 키우면 안 되는 것입니다.
슬픈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불쌍히 여겨 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것이 인간적인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들에서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눈먼 자의 눈을 연 사람이 이가 죽지 않도록 하게 행할 수 있었지 아니한 것이냐?”라고 하였습니다.
이미 지난 일을 ‘했더라면’이라고 말하는 것은 허망한 논증입니다. 유대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이와 같은 허망한 논증을 말하였습니다. ‘라자로가 죽지 않게 행할 수 없었느냐?’라고 유대인들은 말하였습니다. ‘했더라면 좋았을걸’이라는 말은 다시 돌릴 수 없어 별 유익이 없습니다. ‘과거에 내가 이렇게 했더라면 좋았을걸’, 이것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자책(自責)하며 자신을 괴롭히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전에 그러지 않았으면 자신의 삶이 달라졌을 것으로 상상합니다. ‘만일 내가 과거에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지금 내 삶이 달라졌을 것인데, 왼쪽을 선택하지 않고 오른쪽을 선택했다면 내 인생이 더 좋았을 텐데’, ‘과거에 이렇게 했더라면 좋았을걸’이라고 후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후회해도 되돌리지 못하잖습니까? 돌이키지 못하잖습니까?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것은 지금 후회해 봤자 아무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라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과거는 우리가 어떻게 하지 못하는 것이며, 과거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내가 과거에 이 사람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내 인생이 좋았을 텐데’, ‘내가 왜 과거에 그렇게 했을까?’, 이렇게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되돌리지 못하는 일을 지금 후회한들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능력이 있으신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고난 가운데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시고 나쁜 일들도 합하여 좋게 만드실 수 있는 능력을 갖추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과거에 내가 어떻게 ‘하였더라면’이라고 후회할 필요가 없으며 지금 우리의 상황이 나아질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 된 지금 현재, 우리가 죽은 것 같은 환경 속에 처하여서 절망적인 상황이 된 지금 현재, 예수님께서는 모든 죽은 상황을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죽은 영혼들을 살리실 것을 믿고서 기도하고 기대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썩은 죄인의 영혼도 살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 예수님께서 구원하실 수 없으실 만큼 죄인이 멀리 가지 못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사랑하는 자들의 구원에 부족함이 없으십니다.
다시 그 자신 안에 매우 분노하시는 예수님께서 그 무덤으로 오셨으나 그것은 굴이고 돌이 그것 위에 놓여 있습니다(요 11:38).
11장 38-44절은 라자로를 살리시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그 돌을 들어 올려라”라고 말씀하셨고 그 죽은 자(the deceased)의 자매인 마르따가 그에게 말하였기를 “이미 냄새가 나니 이는 네 번째 날임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요 11:39).
누가 죽은 지 오래되어서 냄새나는 시체를 살게 할 수 있을 것입니까? 이처럼 회심하지 않은 죄인들은 모두 그 허물과 죄로 죽어 있습니다.
이런 죽은 영혼도 예수님께서 부르시면 그 무덤 안에서 나옵니다.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기에 절망적인 영혼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마땅히 스스로 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죽은 자를 살릴 수 없으나 무덤을 막은 돌을 들어 올릴 수 있으며 우리가 죽은 영혼을 살릴 수 없으나 그를 교회에 데리고 올 수 있습니다. 죽은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있지만 말고 강권하여서 데려와야만 합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나님께서는 하시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죽은 영혼을 막고 있는 돌을 들어 올린 후에 살려 달라고 맡겨야 합니다. 죽은 영혼을 교회로 데리고 와 말씀을 듣게 하는 것은 사람이 할 일이며, 죽은 영혼이 살아나기 원하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여야 합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하고 그 영혼이 살아날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무능함을 핑계로 삼아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회심하지 않은 자가 회심하기 위해 먼저 믿은 자가 할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라자로를 살리시기 위해 가서 우셨고 기도하셨습니다.
마르따와 마리아는 그 형제를 위해 예수님께 그의 소식을 알렸습니다. 이렇게 우리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예수님께 기도하여 알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을 놓고 그 구원을 위해 중재기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볼 때는 어떻게 절망적인지를 예수님께 아뢰어야 하며, 그러나 이 문제가 예수님께 불가능한 일이 아닌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덤 앞에 놓인 돌을 들어올려야 하며, ‘무지’의 돌입니다.
다음에 우리가 들어올려야 할 돌이 있고, 절대 ‘오류’의 돌입니다. 불신자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고 그들이 살아나는 것을 막고 있는 이 오류의 돌을 들어올려야 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들어올려야 할 돌이 있고, ‘선입견’의 돌입니다. 불신자들은 예수님과 크리스트교를 잘 모르며 선입견을 품습니다. 불신자들은 기독교를 알지 못하면서도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욕합니다.
우리는 이런 돌들을 치우고 최선을 다하면서 교회로 데려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살리실 수 있으시고 살리실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라고 내가 너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1:40).
사람들은 ‘나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면 믿겠습니다’라고 말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먼저 믿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41-42절에 “당신께 감사하니 나를 들으셨기 때문이나. 항상 들으시는 것을 아나 주위에 둘러선 무리 때문에 내가 말씀드렸으니 나를 파견하신 것을 그들이 믿었기 위한 것입니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을 예수님께서 아십니다(요 11:42). 그러나 주위에 둘러선 무리 때문에 예수님께서 크게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말씀하신 때에 그가 큰 소리에 소리치셨기를, “라자로야 밖에 오라(come forth).”라고 명령하셨습니다(요 11:43).
그러자 그 손발을 띠들에 묶임을 받은 죽은 라자로가 무덤에서 나왔고 그의 그 얼굴은 수건에 둘러맴을 받았습니다(요 11:44).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셨음을 확신하고 감사하시고 큰 소리에 죽은 자를 향하여 “라자로야 밖에 오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처럼 평소에 하나님과 대화하고 기도의 응답을 경험하며 살 때, 우리의 삶에서 죽은 영혼들이 일어나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할 것입니다.
윤형주가 상업적 광고 노래(Commercial Message song)를 지었는데, 그것들은 없어지겠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니’라는 노래는 남을 것입니다. 우리가 재능을 갖고 예수님을 위해 행하면, 영원한 상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죽은 라자로가 살아났다네’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를 풀고 그를 가버리기에 허락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1:44).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은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고 사람은 할 수 없으나 그 손발을 띠에 묶임을 받은 라자로를 푸는 일은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라자로처럼 죽은 지 오래되어 영적으로 썩은 자들이 있는데, 그 성품은 혐오스럽고 포악하고 그 언어와 행동은 비열하고 천박합니다. 그들이 다시 정직하게 되고 순전하게 회복되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완전히 썩은 자도 회복시키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썩은 자도 살리시는 기적을 행하실 수 있으십니다. 영적으로 전적으로 썩은 자가 변하여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됐고 죽은 라자로가 살아났고, 예수님 나에게도 말씀하셔서 새롭게 새롭게 변화시켜 주실 수 있으시며, 예수님께서는 소망 없는 자녀들과 친척들을 변화시켜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죽은 영혼들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아들, 우리의 딸, 오빠, 언니, 누나, 부모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죽은 상태입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이기실 수 없으십니다.
어떤 과부가 억울한 일을 당하였는데 착하지 않은 재판관이 있습니다. 과부가 그 재판관에게 맨날 가서 ‘내 억울함을 풀어 주소서’라고 하지만, 그 재판관은 좋지 않은 재판관이라서 과부의 처지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과부가 매일 같이 재판관에서 찾아와서 그렇게 울며 조르니까 그 재판관은 귀찮아서라도 그 일을 해결해 줘야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좋은 분이시지 않습니까? 좋으신 하나님께 우리가 매일같이 찾아가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할 때에, ‘저 영혼을 살려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들어 주십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 라자로의 무덤 앞에 눈물을 흘리셨던 것처럼, 우리도 자녀들의 영혼을 위해, 오빠의 영혼을 위해, 언니의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돌을 굴리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잖습니까? 그들의 손을 잡고 교회에 데리고 오는 일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안 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대신해 주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손을 잡고 데려오는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눈물로 기도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무덤 앞의 돌을 옮긴 후에 사랑하는 영혼을 살려 달라고 기도하여서 응답받는 성도들이 다 됩시다!
1) 권해생, 『요한복음』, 고신총회 설립 60주년 기념 성경주석, 391.
2)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201-204.
3) Brown, 『앵커바이블 요한복음 Ⅰ: 표적의 책』, 901.
4)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341-342.
5)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351.
6)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352-356.
7)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361.
8)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362.
9)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363-365.
10)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370.
11) Spurgeon, 『요한복음Ⅰ』, 스펄전 설교전집, 884-885.
12) Spurgeon, 『요한복음Ⅰ』, 스펄전 설교전집, 886-887.
13) Spurgeon, 『요한복음Ⅰ』, 스펄전 설교전집, 889.
14) Spurgeon, 『요한복음Ⅰ』, 스펄전 설교전집, 892-893.
15) Spurgeon, 『요한복음Ⅰ』, 스펄전 설교전집, 894.
16)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224.
17)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225.
18)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226.
19)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233.
20)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238-240.
21) 권해생, 『요한복음』, 고신총회 설립 60주년 기념 성경주석, 376.
22)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242.
23)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243.
24)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244.
25)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245.
26)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246.
27)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247.
28)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248.
29)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249.
30)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250.
31)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252-253.
32)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254-255.
33)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2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