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정리:2002.2.3(일)
07:30삼정마을-08:00이현상아지트-11:00갈림길-12:00연하천산장-중식-13:30출발-14:00총각샘-14:50토끼봉-15:15빗점골 갈림길-15:30범왕능선 갈림길-17:00뒷당재-17:35삼정마을
아마 이번 빗점골 산행은 나 홀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빗점골은 날씨가 맑을 때도 근접하기가 어려웠고, 비나 눈이 온 직후는 산행을 생각조차 하기 싫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고생 끝에 올랐던 빗점골-형제봉, 빗점골-토끼봉, 빗점골-총각샘의 산행에서 빗점골은 나에게 부담스럽고 성스러운 영역의 두려움으로 남아 있었다. 선등을 서주신 김O훈님. 눈길을 정확히 찾았던 강 선생님. 젊은 건각을 뺨칠 미모의 K 님께 감사의 말을 드린다. 그리고 빗점골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다행스럽다.
김O훈님은 야생화를 찍으며 지리산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깊은 지리 산꾼이다. 야생화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김O훈님으로부터 산행 제의를 받고 고민에 빠졌다. 그동안 망설였던 것은 나의 오만으로 산행을 꺼려온 것은 아니었다. 며칠 전에 구례에서 만나자는 제안이 있었고, 이번 산행은 김O훈 님이 원하는 빗점골-연하천 루트로 잡았다. 강 선생님과 일행이 참석한다는 이메일을 받았지만, 그동안 온라인 접속을 못 해 혹시 일정이 변경되었는지 상황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계속되는 여행과 산행에 피곤했지만 처음 만나 뵙는 분들과 산행에 긴장이 되어 거뜬히 일어났고 시간에 여유가 있어 오랜만에 국도를 따라 구례로 향한다.
옥과를 지나 곡성을 향하면서 짙은 새벽 안개에 나의 애마는 좀처럼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이런 지독한 안개는 처음이다. 6시 10분. 약속 시각 전에 도착하여 주차하고 구례터미널 안으로 성큼 들어선다. 다행히 늦지 않았군. 일찍 식당 문을 오픈한 김밥집에서는 따끈한 어묵 국물이 하얀 수증기를 내뿜으며 끓었고, 김밥을 쏜살같이 말고 있는 아주머니의 능숙한 손놀림을 신기한 듯 바라다본다. 으음. 앞으로 아침 일찍 구례를 지나는 산행 때는 이곳에서 김밥 도시락으로 챙겨야겠군.
잠시 기다리다 터미널 밖으로 나가니 검정 무쏘 차가 금방 정차하였고 김O훈님이 차에서 내린다. 안녕하세요. 사진보다 무척 젊게 보이십니다. 덕담을 듣는다. 강 선생님과 K 님과도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핸들을 잡은 강 선생님은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로 해박한 지리산 소식을 토해낸다. 강 선생님은 경남 사천이 고향이다. 김O훈 님과 K 님은 침묵을 지키고 있고 강 선생님과 대화는 계속 이어진다. 어느덧 섬진강 변을 달리던 차는 화개로 꼬부라졌고 신흥마을과 의신마을을 지나 삼정마을로 향한다. 하지만 더 이상 차는 오를 수 없다. 도로가 새로이 포장공사가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삼정마을까지 콘크리트 포장이 될 것 같다. 지리 산꾼들의 마음은 편치 않다. 이러다가 지리산 구석구석에 온통 도로가 만들어져 지리산이 망가지지는 않을까.
7시 40분. 산행이 비로소 시작된다. 의신마을부터 삼정마을까지 사오십여 분 걸리는데 시간을 꽤 많이 단축하였다. 삼정마을을 지나 네 명의 산꾼은 빗점골의 속살을 파고든다. 개인적으로 오랜만에 많은 인원과의 산행이다. 아직은 서먹서먹하지만, 지리산을 오르면서 차츰 친숙하고 가까워지겠지.
이현상 아지트에서 휴식을 취한다. 이현상 아지트라. 길가에 안내판만 달랑 2개 걸어 놓고 아지트라니 너무 우습지 않은가. 젊은 시절 태백산맥, 지리산, 남부군 등 무수히 분단문학소설과 빨치산 수기를 읽었던 나는 믿기지 않는다. 남로당 서열 4위.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 이곳에서 숨어 지냈다는 이야기인가. 이현상 최후 격전지를 지나 직진 길로 올라 합수골을 만난다. 좌측의 깊은 계곡은 토끼봉으로 오르는 왼골이다. 삼태골은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우측은 절골이 길게 이어진다. 강 선생님은 합수내와 오른쪽의 절골 사이의 산비탈 로 연하천 산장으로 오르는 루트를 정확히 찾아 오른다. 된비알이 초반부터 시작된다. 무겁게 꾸려진 배낭이 어깨를 찍어 누른다. 으음. 아침밥도 먹지 않고 나왔는데 중간에 퍼져 스타일 구기는 게 아닐까. 내 생각은 화개장터나 구례터미널에서 함께 아침 식사를 생각했고, 설마 그 이른 시간에 모두 아침을 해결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산등성이로 오르는 산죽 길이 계속 이어진다. 지리산의 남녘 의신 일대는 따사로운 햇살에 눈이 녹아 이제 한겨울의 느낌은 들지 않는다. 우측으로는 빗점골의 상류인 절골이 우리를 따라오며 이어진다. 수량도 풍부하다. 동쪽으로는 형제봉 지능선이 뻗었고 왼쪽은 명선봉에서 떨어지는 능선이다. 이현상 아지트를 출발한 지 한 시간가량 지나자 눈에 찍힌 몇몇 발자국이 점차 사라지고 운행 속도도 떨어진다.
강 선생님과 K 님은 정석대로 색바랜 노란색, 빨간색 표지기를 찾아 계곡에서 조금 떨어진 좌측의 능선 너덜을 미로 찾듯 올랐고, 김O훈 님과 나는 얼어붙은 계곡을 따라 주의하며 걷는다. 드디어 명선봉과 형제봉 사이의 낮은 마루금이 정면에 나타나 푸른 하늘을 열었고 덕분에 힘을 얻는다. 한참을 오르다 표지기가 끊긴다. 간간이 이어지던 발자국과도 완전히 이별을 고하고 만다. 하지만 염려할 필요는 없다. 빗점골의 지리를 훤히 꿰뚫고 있는 강 선생님이 있으니. 다행히 표지기를 반갑게 다시 만나고 마루금이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으음. 예상과는 달리 수월한 산행이군. 겨울의 빗점골을 이렇게 손쉽게 오를 수 있다니. 그러나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지리산을 많이 다녔다는 사람이 후미에 서서 아무런 보상도 없이 따라 오르니 체면이 말이 아니다.
나의 소극적인 성격이 그런 걸 어쩌나. 이해해 줄 테지. 삼정마을을 출발한 지 벌써 4시간이 지난다. 11시가 되어 마지막으로 계곡이 Y자로 갈린다. 왼쪽 계곡 쪽의 능선 사이 길을 선택해 마지막 힘을 쏟는다. 한참 올랐던 너덜이 끝나고 자잘한 잡목들과 눈밭의 산죽 사이로 산행은 이어진다. 선등을 섰던 K 님과 김O훈 님과 교대해 앞으로 나선다. 땀을 뻘뻘 흘리고 이십여 분간 치고 올라가니 연하천산장에서 벽소령으로 내려오는 길의 펜스가 보인다. 지금의 시각은 정확한 정오. 예상외로 깔끔한 성공적인 빗점골 산행이다.
연하천 산장엔 따사로운 정오의 겨울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다. 산장 앞은 산님 몇 팀이 점심을 먹고 있고, 낯선 연하천 산장지기는 막 도착한 우리 일행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귀엽던 꼬마 진돗개는 크게 성장하였다. 오랜만에 맛있는 점심이 될 것 같다. 배낭을 풀어 따뜻한 순두부 국물을 만들고, 김O훈님이 준비해온 맛있는 찌개에 점심을 먹으며 서로의 정을 담아 건배를 한다. 강 선생님이 준비해온 정갈한 밑반찬 맛에 자꾸 소주가 당긴다. 서울에서 어제 내려와 방금 연하천 산장에 도착해 점심을 준비하는 중년의 산님도 합석하여 자리를 함께한다. 맛난 점심을 먹고 시간을 살피니 1시 30분. 겨울 산행인 만큼 하산 시간이다. 하산은 예정대로 토끼봉에서 능선을 타고 내려서다 범왕능선으로 갈아타고 삼정마을로 내려서기로 한다.
연하천을 떠나 눈 덮여 파묻힌 나무계단을 오르며 명선봉을 지난다. 주능 길엔 때때로 종주 산행을 하는 산님도 만나는데 조망을 즐기며 상쾌한 산행은 계속된다. 얼마 전까지도 없었는데 총각샘 안내판을 만들어 놓았다. 총각샘은 나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 아래로 빗점골의 최상류 삼태골이 있고 조난 직전에서 탈출한 곳이니 잊을 수 없는 곳이다.
화개재에서도 그렇고 총각샘을 지나서도 그렇고 토끼봉은 늘 오르기가 힘들다. 앞서간 김O훈님과 K 님은 보이지 않는다. 바람 한 점 없는 따사로운 햇살 속에 토끼봉은 질퍽하게 녹아있다. 토끼봉에서 바라본 삿갓 모양의 노고단이 근사하고 묘향암이 보이는 반야봉이 지척이다. 오후 3시가 되어 토끼봉에서 하산이 시작된다. 토끼봉에서 칠불사 구간은 반달곰 출현 지역으로 통제구역이다. 우리는 토끼봉 능선으로 하산하다 범왕능선으로 갈아타고 뒷당재에서 삼정마을로 하산한다. 내려서다 좌측의 빗점골로 빠지는 샛길을 확인한다. 이 길은 지난여름 빗점골에서 필O님과 올라왔던 길이다. 토끼봉을 출발한 지 40여 분. 능선이 갈린다.
오른쪽으로 떨어지는 능선은 칠불사가 있는 범왕골로 하산하는 길이고, <등산로 아님> 표지판 너머는 신흥마을까지 뻗어있는 범왕능선이다. 이 능선부터는 러셀이 돼 있지 않아 무릎까지 빠진다. 다행히 하산이라 체력의 소모는 없다. 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바라본 지리산 주능이 길게 이어진다. 하산이지만 오랫동안 산행으로 지쳐 눈밭에 퍼질러 앉는다. 좌측 아래를 바라보니 삼정마을과 이현상 아지트로 가는 길이 선명하다. 사거리의 뒷당재에 도착한다. 우측 길은 범왕마을로. 직진 길은 신흥마을 앞의 봉우리로 이어진다. 좌측 길로 내려서자 아담한 산죽 사이로 정겨운 길이 이어지는데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보기 좋게 다듬어 놓았다. 지리산에 해박한 강 선생님은 누군가의 선산이 바로 이 근처에 있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내려서다 그 길을 버리고 우측의 계곡으로 내려선다. 정상적인 길은 아니었지만 산 아래 가깝게 삼정마을이다.
삼정마을 앞 빗점골에서 내려오는 계류를 만나 몸을 닦고 복장을 추스른다. 쌍계사 입구 식당에서 조촐한 자리를 마련해 빙어 튀김과 파전을 안주 삼아 대화 꽃을 피우며 산행을 정리한다. 아쉽지만 곧 지리산과 이별의 시간이다. 우리가 구례로 향했던 시간은 이미 캄캄한 밤이었다. 화개면 식당과 상가는 도시처럼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입춘이 지났으니 앞으로 남쪽 자락 화개는 지리산에서 가장 빨리 꽃이 피는 마을이 될 것이다.
첫댓글
대간 종주를 하다가 갈림길이 나오면 저 길로 가면 어떤길이 나올까 언제나 궁금해지다가 요즘은 궁금해지지 않아요.....
왜냐하면 저 위에서 내려다보면 같은 숲이므로.....
그렇게 나만의 위안으로 다른길을 갈수없답니다.
지금 가는 이 길 하나만으로도 이미 지쳐가고있어서 오늘의 숙제를 무사히, 안전하게 마치는것이 목표여야하는것을 절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