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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내가 이렇게 미국에 와서 나이 칠십이 넘도록
골프치고 책보고 글쓰며 사는 것은
다 ~
李承晩(이승만), 朴正熙(박정희) 같은 애국자들이
자기 자신과 가족을 희생해서
열심히 싸우고 일하신 덕분으로 생각한다.
지도자의 이런 자기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국민들이 잘 사는 것이다.
보라! 북한을~
북한은 이승만을 거부하고 그 대신
나이 33세의 게릴라 부대장,
아니면 소련군 장교 金日成(김일성)이
건국을 한 나라이다.
김일성은
1948년 36세에 정식으로 집권해서
1994년 82세에 심장마비로 죽을 때까지
46년간 평생 부귀영화를 맘껏 누리다 죽었다.
그 자식, 손자에까지 이어서
3대가
조선의 임금도 못 누린 富貴榮華(부귀영화)를
누리고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다.
이 지구상에서 제일 경치가 아름다운
곳곳에 별장을 두고
세상에서 제일 예쁜 북한 처녀들을
곳곳에서 모아와 기쁨 조로 데리고 즐기며 산다.
그 대신
백성들은 대부분 죽을 지경이다.
외국에는 脫北(탈북)하기 전엔 구경하기 어렵다.
골프도 구경 못 하고 산다.
아니 쌀밥, 고기 구경도 제대로 못 하고 산다.
겨우 겨우 입에 풀칠하며, 헐벗고, 추위에 떨며 산다.
어디에서 ~
나이 칠십에 책을 보고 음악을 즐기겠나?
나는 또 고마운 분이 우리 부모님이다.
1945년부터 1948년 建國期(건국기)에
소련의 赤軍(적군)이
젊은 게릴라 부대장 김일성을 내세워 펼친
온갖 달콤한 선전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셨다.
처음부터 일관되게
“李 박사같은 애국자는 없어” 하시면서
그 분에 대한 믿음을 지키셨다.
이승만 대통령을 믿고 대한민국을 선택하여서~
돌아가실 때까지
단 한 번도 대한민국을 욕하거나 비난하지 않으셨다.
항상
"내 나라가 있어 좋다"고 하셨다.
그 덕분에 오늘날 내가 이렇게 행복한 노후를 보낸다.
그때 ~
아버님 친구분들 중에는
그만 김일성의 달콤한 선전에 속아 넘어가
월북을 하시어 가족들과 생이별은 물론이고,
본인도 글 한줄 책 한권 못 써보고
탄광에서 사상 개조 교육을 받다 돌아가신 분들이 꽤 있다.
그런데
나와 가족들에게 이런 행복을 마련해 주신
그 분들은
정작 고생만 잔뜩 하시다가 돌아가셨다.
이승만 대통령은
나이 30에 異國(이국) 땅에 단신으로 유학가서
美國(미국) 전 지역의 교회를 돌아다니며
강연을 해서 생활비를 마련하고,
교민들의 성금을 받아 세계를 돌아 다니며
일본의 횡포와 한국민의 억울한 실정을
세계인들에게 호소하며 살으셨다.
그러다가 56세 때에
서른이 넘은 외국인 여성을 만나서 결혼하고서야
겨우~ 가정을 꾸리고 끼니도 제대로 드시며,
혼자서 외로이~ 밤을 지새우며 타자기 치다가
잠자리에 드는 고생을 면하셨다.
나이 70에 해방을 맞아~
40년 만에 고국 땅에 돌아와서
1948년부터 1960년까지 12년간~
돈 하나 없는 가난한 정부를 맡아서
난방 하나 제대로 못하시고 사셨다.
거기다가
1950년부터 1953년까지 3년 동안은
세계에서 가장 참혹하고 춥고~ 힘든 전쟁을 치르면서
나라를 지키려고 잠 한번 편안히 못 주무시고
피난 생활을 다니셨다.
그것도 모자라서
끝내는 李起鵬(이기붕) 등 자유당 간부들이
자기네 권력을 유지하려고
저지른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서
물러나 하와이에서 5년간 투병을 하다
외로이 돌아가셨다.
朴正熙(박정희)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나이 23세부터 엘리트 군인의 길을 걸으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군인 생활을 하다가
44세에 혁명을 일으켜서
나이 62에 믿었던 부하의 총탄을 맞아 죽을 때까지
18년간 한시도 쉬지 않고
경제개발, 국토개발, 자주 국방,
새마을 운동을 계획하고 지도하였다.
그 결과
세계 最貧(최빈)의 못사는 농업국가를
선진 공업국가로 바꾸었다.
그러고도
노벨 평화상이나 명예 박사학위를 받기는커녕~
많은 국민들과 세계인으로부터 長期(장기) 독재자라는
욕만 잔뜩 먹고 가셨다.
우리 아버님(注: 소설가 金東里 선생)도 그러시다.
나보다 노래도 잘 하시고 달리기도 잘 하셨다.
기억력도 훨씬 좋으셨고 친구도 많으셨다.
붓글씨, 소설, 詩(시) 쓰기는 천부적이시었다.
나라의 온갖 문학상을 다 받으셨다.
정말~
나보다 키가 작으신 것 하나 빼고는
재주와 인품 등 모든 면이
나보다 월등하셨다.
그래도
미국 여행 한번 못 하셨고 골프도 못 즐기셨다
나이 오십 되시기까지 자가용 차가 없으셨고
항상 가계부를 쓰시며 새 옷을 안 사셨다
그렇게 검약하셨다.
이런 분들에 비하면~
정말 나는 내 재주보다도 내 노력보다도
훨씬 과분하게
편안하게 잘~ 살아왔고
지금도 잘~ 산다.
내가 과분하게 받는 것은
누군가가 자기 몫을
못 가지거나
안 가지고
나에게 남겨 주신 까닭이 아니겠나?
다시 말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나에게 주신 선물이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李承晩(이승만),
朴正熙(박정희),
아버님 이 세 분들이
당신들이 받을 몫을 안 받으시고
나에게 선물로 주신 것 같다
새해에 차례를 지내게 될 때
이 세 분들께
술 한 잔씩 올리고
명복을 빌어야겠다
고맙다고~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2016. 12. 31. 金平祐
- 注:
이 글은 金平祐(김평우) 변호사가
작년 12월31일 저에게
미국에서 작성한 글을 보내온 것입니다
2017 /01 /16 월 11:15 조갑제 Twitter https://t.co/ctXdh6rTEC via @chogabje1 에서 -
김 평 우 ...
2009.02 ~ 2011.02 제45대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2006 서강대학교 법학대학 교수
2000 ~ 2002세계한인변호사회 회장
2000 ~ 2001현대증권 부사장
1997 ~ 1999대한변호사협회 사무총장
1982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
1981 미국 뉴욕 휘트만&랜솜 법률사무소
1979 청주지방법원 충주지원 판사, 서울지방법원 판사
1967 제8회 사법시험 합격
~ 1979 하버드대학교 법과대학원 수료
~ 1967서울대학교
~ 1963경기고
1945 경남 사천 출생
첫댓글 "탄핵을 탄핵한다"2017년 1월 26일 발행 저자·金平祐김평우1945년生, 경기고 졸업, 서울대 법대(1967: 수석 졸업), 사법대학원(1967~1969) 졸업, 軍법무관(1969~1972), 판사(1972~1979: 서울, 충주), 美 하버드 법대 석사 및 비지팅 스칼라(1979~1980), 변호사 개업(1981~2006), 현대증권 부사장(2000~2001), 서강대 법대 교수(2006~2008), 45대 대한변호사협회 협회장(2009~2011), 한국·미국(일리노이) 변호사 자격, 2012년부터 UCLA 비지팅 스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