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레
데라다 도라히코
조모는 분카(文化] 12년(1815)에 나서 메이지(明治] 22년(1889), 내 나이 12세의 연말에 병몰했다. 이 조모에 대한 여러 가지 추억의 화상(畵像) 중에서 나에게 가장 친밀과 그리움을 느끼게 하는 것은 옛날 우리 집 그을음 앉은 거실에서 소매 없는 하오리를 입고 물레를 잣고 있는 늙은 여인의 모습이다. 가문(家紋)이 든 옷을 입고 찍은 사진이나 그것을 모델로 하여 그린 유화 같은 것을 보아도 어쩐지 진짜 조모인 것처럼 생각되지 않으나, 그저 기억의 인상에만 남아 있는 이 '물레의 조모상(祖母像)'은 돌아가신 지 46년인 오늘에도 실로 놀라우리만큼 선명함을 가지고 눈앞에 나타난다.
이 물레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에는 이미 역사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집 아이들도 누구 하나 실물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산업박물관 같은 곳이 있다면, 거기에 참고품으로 진열되어야 할 물건인지도 모른다.
조모가 사용하던 물레는 그 당시에도 이미 짙은 암갈색으로 그을은 옛 것이었다. 아마도 조모가 시집올 때 가져온 세간 중의 하나였거나, 혹은 또 증조모의 손때가 묻은 것을 소중하게 물려내린 것인도 모른다. 어떻든 조모는 우리 집에 시집와서 몇 십 년간 이 물레 잡은 손을 아마 몇 천만 번 혹은 몇 억 번을 돌렸을 것이다.
나도 어린애다운 호기심에서 몇 번 조모에게 배운 이 물레로 실을 잣는 흉내를 내본 기억이 있다. 솜을 탄 것을 지름 약 1센티미터, 길이 약 20센티미터의 원통형의 꼬치를 만들어 가지고 왼손 손가락 끝으로 집는다. 그 솜꼬치의 앞부리에서 솜의 섬유를 조금만 끌어내어 그것을 물레가락의 꼬챙이 끝에 말아두고 오른손으로 물레자루를 잡고 적당한 속도로 돌리면 가락이 급속도로 회전하여서 솜꼬치 끝을 꼬이게 한다. 그렇게 하는 한편 왼손을 뒤로 뽑아내면 금세 솜꼬치 끝에서 가느다란 실이 생겨 뻗어나간다. 왼손을 뻗을 수 있을 때까지 뻗은 곳에서 일단 손을 치켜올려 지금 뽑아낸 실을, 미리 가락에 끼워 둔 죽관(竹管)에다 감는다. 그리고는 왼쪽 손목을 숙여서 다시 가락 끝의 쇠꼬쟁이에 실을 걸어 물레를 돌리면서 또 새로이 실을 뽑아내는 것이다.
대개 자루 잡은 손을 세 번 돌리는 동안에 왼손을 다 뻗게 되어 수십 센티의 실이 자아지고, 그것을 감아낸 다음에 다시 같은 일을 반복한다. 이러한 조작 때문에 물레의 소리에는 특유한 리듬이 생긴다. 그것을 옛사람들은 '비잉, 비잉, 비잉, 야'라는 말로 형용했다. 돌리는 손의 1회전이 '비잉'이고 그것을 3회 되풀이한 뒤 '야' 라고 하는 데서 실이 감겨지는 것이다. '비잉’부에서는 물레의 가락과 그것에 연결된 실이 급속으로 진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일종의 악음(樂音)이 발생하는데, 실이 감겨질 때에는 진동이 중지되기 때문에 음에 포즈가 오는 것이다. 요컨대 아마 생각해 낼 수 있는 한도에서는 가장 간단한 4박자의 멜로디가 이 물레라고 하는 ‘악기'에 의해서 연주되는 것이다. 그 멜로디는 실로 옛날 일본 여성의 이상이 되었던, 한없는 인종(忍從)의 덕을 찬미하는 노래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오른손과 왼손의 운동을 재치 있게 대응시켜 코디네이트시키는 호흡이 여간 어렵지 않은 것으로, 그것을 잘못하면 실의 굵기가 고르지 못해서 불규칙적으로 마디가 불거져나온 꼴사나운 것이 되어버린다. 나도 한두 번 시험해 보고 어이가 없어서 그만 단념해 버렸던 것이다.
1년인가 혹은 2년 동안 뒷밭에 목화를 심은 적이 있었다. 당시 어린 나의 눈에 비친 목화 꽃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었다. 화관(花冠)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꽃받침이나 잎이나 줄기까지도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색채의 배합을 보여 주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관상식물로서 현대의 도시인에게 애완되어도 좋을 것 같은데, 어릴 때 우리 집 밭에서 보았을 뿐 그 뒤 어디에서도 이 꽃을 다시 본 기억이 없다. 하기야 지금에 와서 목화를 심어 본들 도저히 장사도 뭣도 되지 않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런데 통계상으로 보면 국내 목화 생산이 1,000톤 미만으로 되어 있으니 어디에선가 아직 심고 있기는 하는 모양이나 수십만 톤의 수입량에 비하면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꽃철도 지나고 목화다래가 열려 이윽고 그 껍질이 활짝 핀 순백의 솜덩어리를 토해내는 좀 추운 늦가을 조모랑 어머니와 함께 손에 손에 어레미를 안고 목화밭에 가 그 수확의 기쁨을 즐겼다. 좀 어둑어둑해진 저녁에도 이 새하얀 목화송이만은 둥실 밭 위에 떠오르는 듯이 보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럴 때 고향에서 ‘아오기타'라고 부르는 가을 바람이 바로 옆에 있던 대밭을 뒤흔들고 목화밭으로 불어 내려왔었던 것 같다.
따온 목화송이 속에 싸여 있는 씨를 빼낼 때는 씨아라고 하는 기구에 넣는다. 이것은 말하자면 간단한 롤러로서, 참나무로 된 두 개의 반대로 돌아가는 원통 틈새로 목화송이를 밀어넣으면 목화의 섬유 부분은 먹혀들어가 저쪽으로 떨어지고, 딱딱해서 롤러의 틈으로 통과할 수 없는 종자만이 벌거숭이가 되어 이쪽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롤러가 전부 목재로, 그 주요부가 되는 두 개의 가락이 직경 1센티미터 반 정도였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이 한쪽 끝 귀에서 서로 물려서 반대 방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나선의 홈이 깊이 파여 있었다. 옛날 목수들이 이러한 나선을 잘도 파낸 것이로구나 하고 생각하니 좀 이상하다.
그런데 이 물리는 귀가 꽤 삐걱거려서 그 마찰을 덜기 위해 호롱불의 등유를 솜조각에 조금 묻혀 급소 급소에 발라 주었다. 그리고서 씨아손을 돌리면 일정한 리듬으로 '규르 규르 규르' 하고 특별한 역음을 내는 것이었다. 씨아를 빠져나오느라고 남작하게 눌린 목화조각에는 종자의 껍질 색소가 연보라색 선이 되어 어슴푸레하게 묻어 있었다고 기억된다.
이렇게 하여 종자를 빼낸 목화를 모아서 목화 타는 것을 업으로 하는 집에 보내어 거기에서 물레에 걸 수 있게 만들어 온다. 이 목화 타는 작업은 한 번도 본 일이 없으나 이야기에 들은 바로는 고래심줄을 맨 활줄로 목화의 작은 덩어리를 끈기 있게 튀겨서 부풀게 하여 그 섬유를 일단 공중에 날려 가지고 그것을 다시 재워서 얇은 막상(膜狀)으로 만들어 두루마리를 말듯이 말아가지고 원통 모양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꼬치솜이 물레에서 실로 자아지는 셈이다.
시골길을 걸어가노라면 길가 농가의 헛간 2층 같은 곳에서 목화타는 무명활 소리가 들린 적이 있었다. 그것 역시 4박자의 선율로 ‘팡 팡 팡 야’ 하고 울려 오는 것이었다. 아마 지금은 어디에 가도다시 들어 볼 길 없는, 전원의 음악 중의 하나였다고 생각된다.
메이지 28년 청일 전쟁 중, 예비역으로 소집되어 나고야의 후방사단에 근무하고 있던 아버지를 찾아 놀러갔을 때, 처음으로 방직회사의 공장이라는 것을 견학하고 매우 놀란 일이 있다. 조모가 한평생을 두고 물레로 자아냈을 만한 대량의 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계의 방추에서 단시간에 한꺼번에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기에는 저 잔잔한 억양이 있는 4박자의 ‘자장가' 대신에 기계적으로 조율된 변화 없는 잡음과 신음 소리의 교향악이 연주되고 있었다.
조모가 자아낸 실은 토리에서 다시 한 번 4각의 실감는 얼레에 감아서 타래로 만들어 그것을 물집에 넘겨주어 물들여 온 것을 베틀에 올려 짜는 것이었다.
뒤꼍 부엌의 토방 한구석에 만든 마루에 베틀 한 대가 놓여 있었다. 그곳에 앉아 ‘쨩 쨩 짜끼 짱’ 하는 이것 또한 4박자인 조음을 내면서 짜고 있던 어머니의 모습이 어슴푸레한 꿈같이 기억에 남아있기는 하지만 내가 좀 성장한 후에는 별로 이 베틀을 사용하지 않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 누이 집에서는 그의 시어머니가 훨씬 뒤에까지, 나의 중학 시절까지도, 이 베짜기를 유일한 낙으로 삼아계속하고 있었다. 나무껍질을 삶아서 실을 물들이는 일까지도 손수 하는 것을 도락으로 삼고 있었던 듯하다. 순수한 고풍의 초목 염색으로서, 화학 염료 같은 것은 이 노인에게는 꿈에도 알 수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이 노인이 짠 이불감이 지금도 누이 집에 남아 있는데 그 색이 조금도 바래지 않았다고 조카인 Z가 자못 감탄하면서 말하고 있었다.
언젠가 긴자의 시세이도 누상(樓上)에서 처음으로 야마자키다케시 씨의 초목 염색 직물을 보았을 때 웬일인지 눈물이 날 것 같은 그리운 느낌이었다. 그리움에는 아마 나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무의식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 금년 초여름에는 마쓰자카야 (松坂屋)의 전람회에서 옛 줄무늬 수직물(物)의 컬렉션을 보고 같은 그리움을 느꼈다. 가능하다면, 다음 출판 예정인 수필집 표지에는 이 무명을 쓰고 싶어서 점원에게 의논해 보았더니 옛 것을 있는 대로 사방에서 주워 모은 것이어서 같은 물건을 몇 필씩 갖추기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기에 유감스럽지만 단념했다. 새로 짜게 한다면 상당한 값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도 아름다운 것이 현대의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아름답게 여겨지지 않게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 새삼 이상스럽게 생각된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최근에 본, 신발명 방법에 의하여 제작되었다고 하는 유색(有色) 발성 영화 〈라 쿠카라차〉의 저 악쓰는 것과 같은 색채들과 비교하면 옛 수직 무늬의 색채는 진정 '노래하는 색채'가 아닌가고 여겨진다.
화학 약품밖에는 달리 약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는 시대가 지나면 옛날의 초근 목피가 다시 그 새로운 과학적 의의와 가치를 인정받게 될 시대가 차츰차츰 돌아올 것 같아 보인다. 정작 그 시대에 이르렀을 때 혹 초목 염색의 수직 무명이 가장 스마트한 도시인의 새로운 유행 취미의 대상이 된다고 하는 기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긴자(銀座]에서 초목 염색물이 전시되고, 백화점에 수직 무명이 진열되고 하는 현상이 그 전조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강철제 혹은 듀릴루민제의 물레나 베들이 가정 부인의 적어도 하나의 소일거리로서 사용되는 일이 장래에 절대로 있을 수없는 일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일이리라. 실제로 고관, 부호 모모씨들은 일요일에는 농부들의 흉내를 내려고 일부러 시골에 내려가는 일이 유행하기 시작한 작금에는 더욱 그러한 공상을 불러일으킬 만도 한 것이다. 옛날 하급 사족(王族)의 가정 부인들은 물레를 잣고 베를 짜는 것을 부끄러운 천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얌전한 자부심으로 알았으며 혹은 오히려 최대의 낙으로 삼고 있었던 것 같다.
피크닉보다도 댄스보다도 부인들의 어떠한 모임에 뛰어다니는 것보다도 이 편이 훨씬 더 몸에 배는 즐거움이 되리라는 것은 무엇을 ‘만들어내는 기쁨'을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현대에도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서양의 물레를, 오페라 〈날아가는 네덜란드인〉의 한 막에서의 실연을 통해 본 일이 있는데, 역시 서양의 춤과 같이 경쾌하고 밝아서 일본의 물레와 같은 가락은 아무 데에도 없었다. 또 슈베르트의 가곡 〈물레의 그레체헨〉은 6박자로, 그 반주의 저 특징 있는 6연음의 출렁이는 물결은 물레의 회전을 상징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만 보더라도 서양의 물레와 일본의 물레는 전혀 다른 시의 세계에 속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리라.
물레의 추억에 얽혀 있는 어린 시절 전원생활의 기억은 참으로 물레에서 자아내는 실과도 같이 끊일 줄을 모른다. 그리하여 이런 것들을 생각하고 있노라면 내가 우연히도 가난한 사족의 자식으로 태어나 자연 속에서 자랐다고 하는 아무런 자랑거리도 될 수 없는 이 일이 세상에 다시없는 행운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 데라다 도라히코(寺田寅彦:1878~1935)
일본 수필가. 동경 대학 졸업. 물리학자. 수필집으로는 〈도라히코집〉, 〈물질과 말〉, 〈증발 접시〉, 등이 있다.
과학자다운 예리한 관찰력과 풍부한 문학적 소양 그리고 고아한 인품이 잘 나타난 수필을 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