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 시 | 11월 18일 오후 13시(일요일) |
만남 장소 | 지하철 4호선 길음역 3출구 |
트레킹 코스 | 길음역 3출구 ⇨ 미아리고개 ⇨ 아리랑고개 ⇨ 성북구민회관 ⇨ 숲속다리 ⇨ 하늘교 ⇨ 북악팔각정 ⇨ 창의문(자하문) ⇨경복궁역 |
소요시간 및 난이도 | 트레킹 약 4시간(휴식시간 포함) 12Km(난이도 중하) |
진행자 | 이길헌(010-5251-0083) 김현회(010-8579-9988) 지종학(010-5233-2253) 김남선(010-5811-1188) |
길 안내자 및 해설자 | 세계일보 조사위원 서울포럼 권오철 . 이광우. 장동인. 명인식 |
참석방법 | 카페에 들어가서 닉네임 또는 실명/연락처/하고 싶은 말 적어주세요..^^ 댓글로 신청 |
준비물 | 식수, 트레킹복장, 트레킹화, 개인 안전장비, 썬 크림, 날씨에 따른 준비물, 간단한 간식 |
트레킹 중 안전에 대하여 | - 역사문화지리트레킹은 순수 비영리 트레킹으로 카페운영진과 트레킹진행자는 같은 회원으로 일시적으로 봉사하는 것으로 트레킹 중 일어나는 모든 사고는 참석한 회원 각자의 책임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카페 운영진이나 진행자에게 민, 형사상의 법적, 금전적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 항상 회원 여러분이 스스로 자신의 안전에 최대한 주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참석신청 자체가 위 사항을 확인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 진행 측 차원에서는 보험이 없으므로 필요시 개인적으로 여행자보험가입해주시면 됩니다.
|
기타 | - 정시에 출발 - 회비는 없음 - 도보 종료 후 식사 시는 n/1 원칙 - 당일 트레킹 일정은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 자세한 사항은 국제경영컨설팅 홈페이지(www.kukjec.com) 또는 카페주소(http://cafe.daum.net/trekking7)를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
* 세부 지도
▢북악스카이웨이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의동의 창의문(자하문)에서부터 성북구 정릉동 입구에 이르는 도로.
경복궁의 진산을 이루는 북악산의 북쪽 능선을 따라 북동쪽으로 이어져 있으며 도로총길이 11.8㎞, 너비 10~16m의 2차선 도로이다. 도로의 굴곡이 매우 심해 도로변에 반사경과 수은등 등의 안전시설을 갖추고 있다. 높이 342m인 도로 정상에는 북악팔각정휴게소가 있어 북악산과 서울특별시의 경관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또한 도로의 남쪽으로 옛 성터가 이어져 있으며, 도로변에는 10만 여 그루의 관상수가 우거져 있는 등 수려한 경관을 이루어 서울시민의 관광도로로 이용되고 있다. 주변에는 세검정·정릉·삼청공원·경복궁·국립중앙박물관 등이 있다. 이 도로는 자하문 쪽에서는 인왕산길과, 정릉 쪽에서는 성북동길과 이어진다.
북악스카이웨이는 서울의 내4산의 하나인 북악산 줄기에 길을 내어 수도방위와 관광도로로 건설된 데서 유래되었다. 북악산길의 다른 이름이었다.
이 길은 1968년 1월 21일 북한무장공비의 청와대 침투사건 이후 수도권 경비 강화와 산책로를 위해 개통된 것이다. 1968년 2월 9일 서울특별시에서 수도 방어와 관광도로인 ‘스카이웨이’ 건설계획을 발표하고, 사직동에서 돈암동 구간을 2월 21일에 착공하여 9월 28일 완공하였다. 이 길은 1972년 11월 26일 한양천도 578주년 기념일에 북악로로 이름 붙여졌다. 1984년 11월 7일 서울특별시공고 제673호에 의해 북악로는 지리적 위치와 교통 흐름을 감안하여 창의문을 기준으로 북악산길과 인왕산길로 분리되었다.
▢미아리고개
돈암현(敦岩峴), 적유현(狄踰峴), 호유현(胡踰峴)
성북구 돈암동에서 미아리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미아 제7동 불당골에 미아사라는 절이 있어 미아동의 동명이 생겼고, 이 고개가 미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또 일제 때 미아동에 공동묘지가 조성된 후 미아리고개라 칭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원래 이 고개를 되너미고개라 하였다. 병자호란 때 되놈〔胡人〕들이 넘어왔다가 넘어갔다고 해서 붙인 이름으로 되너미재,적유현,호유현이라고도 했으며 돈암동고개,돈암현이라고도 하였다. 이 고개는 여러 차례 깎여져 낮아지고 폭도 넓어졌지만 옛날에는 몹시 험준했다. 1950년 6,25전쟁 때 북한군이 탱크를 앞세워 이 고개에서 아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으며, 3개월 후 9,28 서울수복 때 쫓겨 가던 북한군이 이 고개를 넘어 퇴각하면서 많은 애국인사들을 북으로 끌고 간 후 돌아오지 못하게 되자 ‘한 많은 미아리 고개’라는 이름이 붙기도 했으며, 한과 슬픔을 담은 ‘단장의 미아리고개’라는 대중가요가 나와 심금을 울리기도 하였다. 이 고개는 1964~1966년도 시행된 도로 확장공사로 낮추어졌으며, 1964년에 돈암동~미아리간 1300m의 확장공사를 실시하여 폭 8m를 25m로 확장하였고 나머지 구간 1,786m도 1966년에 폭 8m에서 25~35m로 확장하였다.
출처: 서울역사편찬원
◯ 단장(斷腸)의미아리고개
-시대: 현대
-저작자: 반야월작사, 이재호 작곡
-창작/발표시기: 1957년도
-성격: 대중가요
-유형: 작품
-분야: 예술체육/대중음악
-소장/전송: 이해연
▷구성 및 형식
사단조, 2/4박자, 27마디 가창부, 2절 가사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 이해연 노래로 녹음되어 1957년에 오아시스레코드에서 음반이 발매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어린 딸을 잃은 작사자의 경험이 창작 배경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0년대 중후반에 발표된 수많은 전쟁 관련 대중가요 가운데에서도 손꼽히는 대표작이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미아리 눈물 고개 님이 넘던 이별 고개/화약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매일 때/당신은 철사줄로 두 손 꼭꼭 묶인 채로/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고개
아빠를 그리다가 어린 것은 잠이 들고/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 때/당신은 감옥살이 그 얼마나 고생하고/십 년이 가도 백 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오소/울고 넘던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고개
가사 외에 초판 간주 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대사도 있는데, 노래를 부른 이해연이 대사도 직접 녹음했다.
여보 당신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계세요/어린 용구는 오늘밤도 아빠를 그리다가 이제 막 잠이 들었어요/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 때 당신은 감옥살이에 얼마나 고생을 하세요/십 년이 가도 백 년이 가도 부디 살아만 돌아오세요/네 여보 여보
▷현황
전쟁 관련 가요의 대표작인 동시에 작사가 반야월의 대표작으로도 인정되어 1996년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노래비가 건립되었다.
▷의의와 평가
한국전쟁 직후에 두드러졌던 비극적 사실주의 대중가요의 경향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참고문헌
• 『한국 가요사 2』(박찬호, 미지북스, 2009)
• 『한국대중가요사』(이영미, 민속원, 2006)
• 『이재호 작곡집』(김점도 엮음, 삼호출판사, 1996)
▷출처: 서울 역사편찬원
▢아리랑 고개 길 유래
아리랑고개는 돈암 4거리(성북구 동소문동 5가 76)를 기점으로 하여 동소문동과 돈암동을 지나 정릉길과 교차하는 아리랑시장 앞까지에 이르는 폭 15m 길이 1천4백50m의 지선 도로이다. 예전에는 정릉(貞陵)으로 가는 길의 고개라 하여 정릉고개로 불렸으나, 1926년 이후 아리랑고개로 불렸다. 아리랑 고개로 불리는 데는 춘사 나운규와 연관이 있다.
그 연유는 일제 때의 영화인 나운규(1902∼1937)가 이곳에서‘아리랑’영화를 촬영했기 때문이다. 1926년 10월 단성사에서 개봉됐던 영화 아리랑은 조국을 잃은 백성의 울분과 설움을 보여주어 민족의 저항의식을 고취, 한국영화의 신화로 남아있는 작품이다.
춘사 나운규는 아리랑에서 주인공인 미친 영진역으로 출연했고 그외 연출 각본까지 혼자 도맡아 했다. 아리랑의 서두에는‘고양이와 개’라는 부제격의 자막이 들어있다. 이것은 억압받는 조선과 억압하는 일본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나운규의 민족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나운규는 아리랑으로 전국적인 인기를 얻으며 당시 최고의 감독이자 배우로 부상한다.
1935년 일제는 정릉 일대의 그윽하고 아름다운 경치를 이용해 청수장 등 고급요정을 꾸며 놓고 시내 사람들을 손님으로 유치하기 위해 이 고개를 닦고 아리랑 고개라는 표목을 고개 마루턱에 세웠다. 또 아리랑고개 너머에 좋은 놀이터가 있다고 널리 선전하여 사람들을 끌어들였다고 한다.
아리랑고개를 넘으면 정릉이 나오고, 정릉에서 정릉천을 따라 북쪽 골짜기로 들어가노라면 유원지로 이름난 정릉골짜기가 나온다.
현재 성북구에서는 2004년도 ‘성북아리랑 시네쎈터’독립영화관을 건립하여 역사문화를 창달하는데 심혈을 기우리고 있다.
돈암동에서 아리랑고개를 넘어가려면 도로 왼편에 정덕초등학교가 있는데 이 학교를 오른쪽으로 끼고 올라가면 산골짜기에 흥천사라는 절이 나타난다.원래 80칸의 이 절은 흔히 새 절, 신흥사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원래 이 절은 조선 초 현재 세종문화회관 별관 자리에 세워져 있었다. 그후 조선중기 정조 18년(1794) 9월에 이곳으로 옮겨 세워진 것이다.
태조 이성계는 총애하던 신덕왕후 강씨가 세상을 떠나자 너무 상심하여 10일간이나 조시(朝市)를 정지하며 애도했고 그의 장지를 경복궁에서 바라다 보이는 현재 영국대사관 자리에 정하고 정릉이라 불렀다.
정릉은 태종이 등극하자 현재 정릉동으로 이장되었다. 이는 태종이 방번, 방석을 낳은 신덕왕후를 미워하는 까닭에 태종 9년(1406) 5월 도성내에 능을 둘 수 없다해서 이장된 것이다. 새로 지은 신흥사는 현종 10년(1669) 정릉에서 너무 가깝다 하여 정릉동 함취정(含翠亭) 옛터에 옮겨지었다가, 정조 18년(1794)에 현 위치로 옮겨지었다.
현재 흥천사에 있는 명부전과 극락보전은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또 이 절은 영친왕과 깊은 인연이 있다. 영친왕의 어머니인 엄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 끝에 영친왕을 가졌다고 하며 영친왕이 5세때 쓴 친필 목본이 보존되어 있다.
신흥사는 요즘 사찰이름보다 그 아래에 연회장이 밀집해 있어 회갑연 등 각종 연회장소로서 신흥사 회갑잔치라고 하면 서울의 명물이 되어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이곳 연회장에 참석하는 손님들로 일대가 교통이 정체된다고 한다.
▷출처: 서울 역사편찬원
▢북악스카이팔각정
서울특별시 종로구 북악산로 267 (평창동)
북악 팔각정은 철따라 그 자체가 다르게 보이고 새롭게 느껴지며 독특한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으로, 1,652,900m²(50만평)의 넓고 쾌적한 해발 342m 북악산 위에 한국 전통미를 살린 한옥형 정자로서 천혜의 입지조건을 갖춘 서울 도심속의 관광 명소이다. 한식, 양식, 음료를 즐길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 규모 - 부지 6,883㎡(2,085평), 건물(팔각정)652㎡(197평)
▢창의문
조선시대 4소문 중의 하나이며, 북문 또는 자하문이라고도 한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검정 근처에 있다.
창의문(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1396년(태조 5) 도성을 쌓을 때 북서쪽에 세운 문으로, 돌로 쌓은 홍예 위에 정면 4칸, 측면 2칸 구조의 문루가 있다. 4대문 중 북대문인 숙정문이 항상 닫혀 있었으므로 경기도 양주 등 북쪽으로 통행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문을 거쳐서 왕래했다. 인조반정 때 능양군을 비롯한 의군이 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 반정을 성공시킨 유래가 있는 곳으로서, 누문 다락에는 인조반정 때의 공신의 명단을 적은 게판이 있다. 1958년 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 세부 사진
* 식사 장소 (트레킹 회비는 없습니다. 단 저녁 식사 시 식사비는n/1입니다.)
- 삼백집 : 서울 종로구 사직로 133-3 경복궁역 4번 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