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옥천지역사건 종합
[제공 신기철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국민보도연맹사건>
옥천에서는 7월 12일부터 18일까지 국민보도연맹사건이 발생했다.
연행된 주민들은 옥천경찰서 유치장과 각 지서 창고로 연행되었으며, 총살은 7월 17일부터 시작되어 20일까지 이어졌다. 희생 장소는 동이면 평산리 들미, 군서면의 월전리 말무덤재, 군서면 용머리 바위, 군서면 오동리의 강당뜰 등이었다. 당시 5개의 유치장에 30여 명씩 갇혀 있었으므로 희생자의 수는 모두 150여 명에 달했을 것으로 보이며, 창고와 운동장에도 100~150여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이후 한 트럭에 40~50명씩 실려 가 총살당했다.
<미군폭격 피해>
옥천지역은 미 24사단에 의해 9월 27일 수복되었는데, 10월 5일 옥천군 청산면의 청장년들은 청산지서 등 면 시국대책위원회가 ‘국군들의 밥이라도 해 줘야 한다’라는 요구에 따라 땔감을 가지러 갔다가 돌아오면서 노루목재에서 쉬는 중이었다. 이때 노루목재에 정찰기 1대가 맴돌았으며, 정찰기가 떠난 후 미 전투기 4대가 나타나 이들에게 네이팜탄 폭격과 기총사격을 가해 50여 명이 사망했다. 생존자들은 당시 날씨가 좋아 희생자들이 민간인들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 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증언한다.
같은 날 노루목재 근처 마을 뿐 아니라 청산면소재지 시장터의 주민들도 기총사격을 당해 여러 명이 희생되었다. 당시 옥천에 주둔하던 국군은 인민군 미1군단의 예비사단이었던 국군 1사단으로 보인다.
당시 미군은 국군 1사단을 예비사단으로 두고 후방의 패잔병 소탕을 맡겼으므로 이들의 요청에 의해 출동한 정찰기의 정찰 후 미 공군의 폭격이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1‧4후퇴시기 피해>
1‧4후퇴시기에도 민간인이 집단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옥천경찰서로 연행되었던 주민 100여 명이 여러 대의 트럭에 실려 1951년 2월 5일 옥천읍 장야리 뽕나무골에서 집단희생되었다. 옥천읍 삼청리에서는 부역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2살 곽영희를 비롯하한 10여 명의 마을 주민이 옥천경찰서로 연행되었다.
동이면 세산리에서는 국민보도연맹사건을 피해 살아남았던 세산리 정광용이 세산리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 이 때문에 피신하던 중 체포되어 옥천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청산면 백운리에서는 인민군 점령기 여성대표로 활동했던 백운리 황임이가 옥천경찰서로 연행된 후 희생되었다. 1951년 4월 2일에는 옥천경찰서로 끌려갔던 교평리 김일학이 고문후유증으로 사망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상 옥천지역에서 발생한 것으로 확인된 사건은 다음 <표>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