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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르타스]
어린 당나귀가 있고 나는 그 곁에 있습니다./ 나는 어쩌자고 고집 세고 욕심 많은 이놈과 있게 되었나요. 곁에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서로를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요./ 언젠가 그를 버리게 될지 모른다는 예감이 몹시도 슬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곁에 있다는 것에 오늘 나는 이토록 사무쳐 있습니다./ 독한 술을 들이켜고 한숨 잘 잤으면 싶습니다./ 아침이면 어디로 떠나고 없기를 바랍니다. 어미에게 갔건, 바람이 났건,/ 그러나 아마 그런 기특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시인의 말」 1연).
그리 친숙하지 않은 당나귀가 별스럽게 친숙하게 여겨지는 것은 순전히 백석과 김사인 덕분이다. 7년 전 김사인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를 받아들었을 때 백석의 당나귀가 오버랩 되면서 하, 했다. 깊은 서정성을 배경으로 삶의 이야기들을 조곤조곤 풀어내는 한 편 한 편들은 제각기 날개를 달아 자신만의 방식으로 날고 있었는데, 그 벅차고 가슴 울울거리던 순간들이 7년이 지난 어느 날 불현듯 다시 소환되는 감흥이란! 마치 처음처럼.
나에게 10월은 그 어느 달보다 유난스럽다. 10월은 그동안 별고 없던 마음자리를 온통 뒤흔드는 마력에 가까운 위력을 지녔는데, 이는 아마 10월, 시월이 시월(詩月)이어서 그런 것 같다. 2022년 詩月 들어 또렷하게 꽂히는 시집 한 권, 『어린 당나귀 곁에서』. 세월의 이랑과 고랑을 제법 지나온 탓인지, 겸손한 마음을 새로이 환기해야 할 때가 되었는지, 김사인 시인의 시집은 詩月 들어 그리 내내 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뒤흔드는 것이다.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설렘과 불안이다.
『어린 당나귀 곁에서』를 새로이 마주하고 든 생각은 아, 결국은 사랑이구나, 하는. 70편의 시 모두가 사랑시구나, 하는 생각. 사람이든 아니든, 살아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호명할 수 있는 모든 것에 골고루 눈길을 거두지 않는 사랑이구나, 하는 생각. 아름다운 시들을 만나는 행운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 그리하여 좋은 것들에 그저 묻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지는.
김사인 시인은 드러나지 않아도 그저 소중한 사람들을 소환한다. “핸드폰도 인터넷도 없이,/ 시를 써 장에 내는 일도 부질없어/ 조금만 먹고 거북이처럼 조금만 숨 쉬었을 것” 같은 김태정 시인(「김태정」), “젊은 스님의 애잔한 뒤통수와 어린 연둣빛 잎들과 살구꽃 지는 봄밤 같은 것을/ 어떻게든 견뎌보려”던 박영근 시인(「박영근」), “헌 우체부 자전거는 훔쳐 타고/ 달밤 무지개 길을 씽씽 달려/ (야호! 엉덩이 높이 들고 오두방정도 떠시면서)/ 술벌갱이라고들 소문이 도는 하늘님 영감네 동네로 마실을 가”곤 했던 신현정 시인( 「바보 사막」), “바바리는 걸치고서/ 인걸들 하나둘 저물어가는/ 인사동 고샅을/ 밤마다 순찰 돌았”던 여운 화백(「인사동 밤안개」) 들을 정성스레 소환한다. 그리고 김남주 시인에 대한 기억도 퍼올린다(“사람이 통째로 칼이 되기도 한다./ 한이 쌓이면 증오가 엉기면/ 퍼렇게 날 선 칼이 된다./ 나중에는 날이다 뭐다 할 것도 없이/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된다.”, 「칼에 대하여」).
이 지상을 떠난 이들을 기리는 김사인 시인만의 방식이 “새삼 슬픈 시늉을 하지는 않겠다.”(「김태정」)는 다짐에서 나와서 숙연하다. 애도의 방식이 정갈하고 단아하다. 그래서 그가 소환하는 과거의 사람들은 과거에만 머물지 않고 현재 속에서도 여전히 새록새록 숨 쉬고 있는 것이겠다. 이러한 영원한 현재는 유년시절 기억 어디쯤에서 의미 있는 주름을 잡고 있을 “어린 날의 내 우상 중국집 전씨”(「중국집 전씨」)에게도 보이고, “체육 선생님이나 쓰던 흰 호각을 휘리릭 휙 불면서/ 보기 좋게도 부산하던 사람” “회인 차부 고진각 씨”(「회인 차부 고진각 씨」)에게서도 발견된다.
사람에 대한 애정 어린 시상은 장소와 결합될 때 훨씬 더 내밀하게 채색된다. 목포에 가면 “옛날 애인”의 안부가 궁금하고(「목포」), 통영에 가면 “너우니댁” “먼촌 처가 할매 할배들”, “어진 막내처제”(「통영」)들이 그립다. 유년 시절을 배경으로 소환되는 이름들은 “당당 멀었던 키 큰 미루나무”를 배경으로 우루루 쏟아져, 부르다 목 놓아 잠길 것 같다(“병승이네 갑윤이네”, “으싱이 현석이네”, “창식이 병조네”, “경범이네 택수네”, “화석이 인자네”, “통석이 치석이네”, “기순이” “종관이” 들, 「미루나무 길」). 삼천포에 가면 “갯가로 시집간 딸아이”와 “토수(土手)질 간 사위놈”(「삼천포 1」)이 생각나고, “마실을 길게도 가”는 “할망구”(「삼천포 2」)도 나타난다. 영동에 가면 “평복이 누나 영숙이 누나” “형님들”이 떠오르고, “윤 아무개”에게서는 “간간이 지나는 사람들이/ 다 조금씩 먼저 간 그를 닮았다”는 생각이 신기하게도 드는 것이다. 아, 앞에서도 잠시 등장한 “여운 화백”은 “인사동”「인사동 밤안개」)에 가면 당연히 만날 수 있다. “선운사 풍천장어집”에 가면 “촘촘히 잘도 묶은 싸리비와 부삽으로/ 오늘도 가게 안팎을 정갈하니 쓸고/ 손님을 기다”리는 “김씨”를 볼 수 있다. “누가 알든 모르든/ 이십년 삼십년을 거기 있는” “김씨”(「선운사 풍천장어집」)의 우직함을 마주할 수 있다. “머나먼 고비사막”으로 가면 “낙타들과 놀고 계시”는 “어머니”, “꾀죄죄한 양들을 돌보시”는 “어머니”, “빨갛게 그을은 그곳 아낙들의 착한 수다 들어주고 계시”는 “어머니”(「고비사막 어머니」)도 뵐 수 있고, “아버지”는, “젊은 서른여덟” “아버지”는 “설 쇠고 올라오던 경부선 상행” “대전역 출찰구”(「비둘기호」)에 가면 뵐 수 있다. “대서소”에 가면 “유 서기”와 “생쥐처럼 눈이 작던 그 아내”(「대서소」)도 만날 수 있다. “대전시 가양동 420 부여솜틀집”에 가면 “뭉친 솜 무거운 솜 오줌 절은 솜/ 깃털같이 풀어주던 오직동 씨”가 있다. 아, “산업대한 카시미롱 바람에 한방 먹고/ 마누라 곗돈 빵구 냈다는 소문 뒤로/ 다신 시장통에 안 보이더니” 지금 가면 혹 만날 수 있으려나. “서부시장”에 가면 우우, 익명의 그러나 우리 모두의 얼굴도 만날 수 있다. “세상 같은 것 믿지 않”고 “바랜 머리칼과 눈빛뿐”이어서 “믿고 자실 것도 더는 없는 일”에 “인생 그까이꺼 연속극만도 못한 거”, “고등어 속창보다 더 비린 거”「서부시장」)라고 훑어버리는 사람들의 민낯들을.
사람에 대한 근원적인 사랑은 김사인 시인의 시적 토대라는 생각. “사람 사는 세상을 여여(如如)하게 또는 엄숙하게 수락하는 마음자리가 김사인 시의 본향(本鄕)이”라는, 최원식 선생(「발문」)의 말에 심하게 공감하게 되는.
생각이 여기까지 흐르다 문득 진심을 다해, 성심을 다해 사람을 사랑하는 시인의 따스한 시선은 어쩌면 평생 “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아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 “‘다 공부지요’/ 라고 말하고 나면/ 참 좋습니다” 이런 심성을 가진 시인이어서 결 고운 눈매로 사람들을 품을 수 있었겠다는 생각. “날이 저무는 일/ 비 오시는 일/ 바람 부는 일/ 갈잎 지고 새움 돋듯/ 누군가 가고 또 누군가 오는 일/ 때때로 그 곁에 골똘히 지켜섰기도 하는 일” 이 모든 것을 “‘다 공부지요’ 말하고 나면 좀 견딜 만해집니다”(「공부」)라는 시인의 고백이 훈훈하게 퍼져나가는.
이러한 공부에 대한 태도가 시인이 지닌, 사람과 동물을 구분하지 않는 심층 생태적 색채가 농후한 우주적인 시선으로 확산되는 것은 그러므로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김사인 시인
때가 되자/ 그는 가만히 곡기를 끊었다./ 물만 조금씩 마시며 속을 비웠다./ 깊은 묵상에 들었다./ 불필요한 살들이 내리자/ 눈빛과 피부가 투명해졌다./ 하루 한번 인적 드문 시간을 골라/ 천천히 집 주변을 걸었다./ 가끔 한자리에 오래 서 있기도 했다./ 먼 데를 보는 듯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시간을 향해/ 귀를 기울이는 듯했다./ 저녁별 기우는 초겨울 날을 골라/ 고요히 몸을 벗었다 신음 한번 없이/ 갔다.// 벗어둔 몸이 이미 정갈했으므로/ 아무것도 더는 궁금하지 않았다./ 개의 몸으로 그는 세상을 다녀갔다.
- 김사인, 「좌탈(坐脫)」
특히 마지막 행! 앞의 모든 시행들이 “개의 몸으로 그는 세상을 다녀갔다.”, 이 마지막 행으로 수렴되는 순간, 숙연해지고도 엄숙해진다. 들뜨면서도 평온해진다. 어두우면서 동시에 환해진다. ‘개’에게도 윤회의 경건한 가치를 부여할 줄 아는 시인에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인다. 너나 구분 없이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짊어진 죽음도 삶의 일부로 기꺼이 환원되는 것을 보면 내 짐작이 맞으리라. 단순한 혼용이 아니라 각자의 무게를 견디고 우뚝 선 스스로의 가치의 발현. 이는 “올봄엔 꽃잎 질 때 따라갈 거라?”(「삼천포 2」) 해학적이고도 따뜻한 건넴에서도, “둥근 봉분 하나”에 따뜻한 서사를 덧입히는 태도에서도 예견되어 있었다(“순한 등/ 그 등에서는 어린 새도 다치지 않는다/ 감도 떨어져/ 터지지 않고 도르르 구른다/ 남모르게 따뜻한 등/ 업고 가만히 자부럽고 싶은 등/ 쓸쓸한 마음은 안으로 품고/ 세상 쪽으로는 순한 언덕을 내어놓고/ 천천히 걸어 조금씩 잦아든다”, 「둥근 등」).
뭔가 잃은 듯 허전한 계절입니다.
나무와 흙과 바람이 잘 말라 까슬합니다.
죽기 좋은 날이구나
옛 어른들처럼 찬탄하고 싶습니다.
방천에 넌 광목처럼
못다 한 욕망들도 잘 바래겠습니다.
고요한 곳으로 가
무릎 꿇고 싶습니다.
흘러온 철부지의 삶을 뉘우치고
마른 나뭇잎 곁에서
죄 되지 않는 무엇으로 있고 싶습니다.
저무는 일의 저 무욕
고개 숙이는 능선과 풀잎들 곁에서.
별빛 총총해질 때까지
- 김사인, 「무릎 꿇다」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이긴 한데, 『어린 당나귀 곁에서』 가운데 한 편을 꼽으라면 단연코 방금 인용한 「무릎 꿇다」이다. 시가 환기하는 분위기를 보면 스산한 바람이 스며드는 늦가을이나 초겨울에 마음을 더 파고들 법한데, 「무릎 꿇다」의 시어 하나 하나들은 웬일인지 한낮의 볕이 따사로운 오늘 따라 더더욱 글을 쓰는 내내 유영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행과 연의 구분이 두드러지게 그대로 옮긴다. 어쩌면 「무릎 꿇다」 위 시 한 편 때문에 『어린 당나귀 곁에서』 시집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별스러울 것도 없는 시어와 드러내놓고 팽팽한 긴장감을 주는 시적 사건도 없는데, 읽는 내내 가슴이 벅차면서 마침내는 눈물을 부른다. “방천에 넌 광목처럼/ 못다 한 욕망들도 잘 바래겠”다는 다짐도 무겁지 않아 오히려 무겁고, “마른 나뭇잎 곁에서/ 죄 되지 않는 무엇으로 있고 싶”다는 소망도 가볍지 않아 가볍다. 고해성사는 분명 아닌데, 그러니까 죄를 고백하는 것은 맞는데 회개까지 감히 바라지 않는 마음자리가 “무릎 꿇고 싶”은 마음에 가 닿는 것이다. 투영하고 진솔한 것에 대해 생각한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그래서 오히려 위선적이지 않은 태도에 대해 생각한다. 마침내 내 유서로 쓰고 싶은 시라는 생각. 묘비명의 글로도 좋겠다는 생각.
이 글을 시작할 때 인용한 「시인의 말」 1연에 이어 2연이 불쑥 치고 들어온다. 세상사 바람을 겸손하게 받아들여 순응하는. “절망을 수락하되 절망에 투항하지 않는, 희망을 무서워하는 것 자체가 희망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갈애(渴愛)로 되는 혼의 모험(최원식, 「발문」)”, 여기에 느낌표를 더한다. 이 세상에서 숨 쉬고 있는 또는 숨죽이고 있는 모든 이들이여, “어린 당나귀 곁에서” 내내 그리 계시길.
어느 날 갑자기 새날이 오리라고 바라지 않습니다. 가는 데까지 배밀이로 나아갈 뿐입니다, 지렁이처럼. 욕될 것도 자랑일 것도 더 이상 없습니다. 내게도 당나귀에게도./ 모과나무 너머 파란 하늘이 고요하고 귀합니다./ 숨을 조용히 쉽니다./ 손발의 힘도 빼고 가만히 있습니다(「시인의 말」 2연 ).
문선영 서평위원/동아대·국문학
당나귀 [류시화]
- 천상병 시인, 당신은 어디에 있으며 거기서도
시를 쓰고 있는가
1.
당나귀는 가난하다
아무리 잘생긴 당나귀라도 가난하다
색실로 끈을 엮어
목에 종을 매달고도 당나귀는 대책없이 남루하다
해발 5천 미터
레에서 카루등라 고개를 넘어 누브라 밸리까지
몇 날 며칠을 당나귀를 타고 간 적 있다
세상의 탈것들은 다 타 보았지만
내가 나를 타고 가는 것 같은
내가 나를 지고 가는 것 같은
기분은 처음이었다
당나귀 등에 한 생애를 얹고 흔들리며 벼랑길 오르는 동안
청춘을 소진하며
어찔한 화엄의 경계 지나오는 동안
한 소식 한 당나귀에게서 배웠다
희망에 전부를 걸지도 않고
절망에 전부를 내주지도 않는 법을
그저 위태위태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당나귀여, 너는 고난이 멈추기를 갈망하지도 않는다
나도 너처럼 몇 생을 후미진 길로 걸어 다녔다
그러나 그곳이 폐허는 아니었다
자학이 아니라 자족이었다
바람이 불었으나 너무 오래 걸어 무릎에서
새어 나오는 바람이었다
나의 화엄은 당나귀와 함께 벼랑이었다
2.
인사동 귀천에서 만난 한 시인은
시를 끌고 가는 힘이 부족하다고 고백했다
절망의 힘으로도 끌고 가기 힘들다고
밖으로 나오니
새 한 마리
가볍게 생을 끌고 피안으로 날아간다
일생의 힘으로 시를 끌고 간
천상병 시인이 눈 내리는 귀천을 끌고 턱없이 웃으며
하늘 모퉁이로 가고 있다
시보다도
한 생을 끌고 가는 힘이 턱없이 부족했다
인사동 벗어나기 전 뒤돌아 보니
눈보라 속 당나귀들이
저마다 자신을 지고 서역의 고개를 넘고 있었다.
영역
신현정 시인
산기슭 집을 샀더니 산이 딸려 왔다
산에 오소리 발자국 나있고
족제비가 헤집고 다닌 흔적이 역력하다
제비꽃 붓꽃 산나리 피고
멀리 천국에 사는 아기들이 소풍 와서는 똥을 싸고 갔는지
여기 저기 애기똥풀꽃 피고
떡갈나무는 까치부부가 독채를 들었다
풀섶에선 사마귀 둘이 덜컥덜컥 턱을 부딪히며 싸우는데
허 나도 질세라
집 있는 데서 오십 보 백 보는 더 걸어나가서
오줌이라도 누고 오고 그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