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강목 제11하@@@[정독하여 읽기] >경오년 원종 11년(송 도종 함순 6, 몽고 세조 지원 7, 1270) 춘정월 왕이 몽고 동경(東京)에 있었다. 왕이 가는 길에서 종신(從臣)에게 묻기를, “동경행성(東京行省)이 만약 폐립에 관해서 물으면 어찌 대답하랴?” 하니, 승선(承宣) 허공(許珙), 대장군(大將軍) 이분희(李汾禧), 장군 강윤소(康允紹) 등이 임연(林衍)의 뜻에 따라 말하기를, “표주(表奏)와 같이 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11일(신해)에 왕이 동경에 이르니, 국왕(國王) 두연가(頭輦哥) 등이 사람들을 물리고 지필(紙筆)을 갖추어서 왕에게 폐립의 까닭을 비밀히 써주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손에 병이 있다고 사양하고 쓰지 않으매, 역관(譯官)을 시켜서 물으니 왕이 말하기를, “표문(表文)에 아뢴 바와 같습니다.” 하였다. 행성은 그것이 거짓인 줄 알았으나 다시 묻지 않았다. ○ 김방경(金方慶)이 몽고 장수 몽가독(蒙哥篤)과 함께 서경에 와서 진수(鎭戍)하였다.
전에, 세자가 임연이 난을 일으켰음을 듣고 몽고에 청병(請兵)하매, 몽가독《원사(元史)》에는 망가도(忙哥都)로 되어 있다 을 안무사(按撫使)로 보내어 서경에 와서 진수하게 하였는데, 군사를 거느리고 떠나려 할 때에 중서성(中書省)이 세자에게 이르기를, “이제 몽가독이 서경에 오래 주둔하여 대군(大軍)을 기다리면, 임연은 이미 배명(背命)하였으므로 반드시 군사의 식량을 대어 주지 않을 것이니 연에게 가담하지 않는 자를 뽑아서 데려가야 하리다.” 하였다. 그때에 김방경이 표문을 받들고 몽고에 갔는데, 이장용(李藏用)이 말하기를, “방경은 두 번 북계(北界)를 진수하여 백성에게 끼친 은애가 있으니,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방경이 말하기를, “관군(官軍)이 서경에 이르러서, 만약에 대동강을 건너간다면, 왕경(王京)이 절로 소란하여질 것이니, 황제의 명을 받아서 강을 건너가지 말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매, 드디어 몽주(蒙主)에게 아뢰니, 몽주가 윤허하고 관군에 조(詔)하기를, “대동강을 건너는 자는 죄준다.” 하였다. 가다가 동경(東京)에 이르러, 왕이 이미 복위하여 입조(入朝)한다는 것을 듣고서, 그대로 머물러 기다렸다. 최탄이 서경에서 반하여 여러 성의 수령을 죽였을 때에도 박주수(博州守) 강빈(姜份), 연주수(延州守) 강천(姜闡)만은 예대(禮待)하고 말하기를, “김공의 덕을 내가 어찌 감히 잊으랴!” 하였는데, 두 사람은 다 방경의 친족이었다. 이때에 와서, 방경이 몽가독과 함께 서경에 이르니, 부로(父老)가 와서 음식 대접을 하고 울며 말하기를, “공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어찌 탄ㆍ신(愼 한신(韓愼))의 일이 있었겠습니까!” 하였고, 탄 등도 조석으로 뵈러 왔다. 탄 등이 몽고 군사로 인연하여 속으로 빈틈을 타서 나라를 삼킬 뜻을 두고, 몽가독에게 후하게 선물하여 속여서 꾀었으나, 방경이 그때마다 계략으로 막았다. 이에 앞서, 연(衍)은 왕이 청병(請兵)하여 구도(舊都)를 회복할 것을 염려하여, 명을 거역하고자 지유(指諭) 지보대(智甫大)를 시켜 황주(黃州)에 주둔하고, 신의군(神義軍)으로 하여금 초도(椒島)에 주둔하여 방비하게 하였다. 탄 등이 그 꾀를 알고 몽가독에게 몰래 말하기를, “연 등이 관군(官軍 몽고군(蒙古軍))을 죽이고 제주에 들어가려 하오. 청컨대, 관인(官人)이 사냥 나간다고 말을 퍼뜨리고서 경군(京軍)이 왕래하는 상황을 서로 알리고서, 우리가 주사(舟師 수군)로 보음도(甫音島)ㆍ말도(末島)보음도는 강화부(江華府) 서쪽 30리에 있고, 말도는 강화부 서쪽 5리에 있다 로 나아가고, 관인은 군사를 거느리고 착량(窄梁) 착량은 지금 손돌항(孫突項 : 손돌목)이라 부르며, 강화부 동남 갑관(甲串 : 갑곶) 하류에 있는데, 포구가 좁아서 이름이 되었다 으로 가면, 저들이 나아가지도 물러가지도 못할 것이오. 이미 그 실정을 알고 나서 황제에게 갖추 아뢰면, 왕경(王京)을 빼앗을 수 있고 자녀(子女)와 옥백(玉帛)은 남의 것이 아니될 것이오.” 하니, 몽가독이 기뻐서 승낙하였다. 몽가독탄의 내상(內廂)으로 있는 오득공(吳得公)이라는 자가 이것을 알고 방경에게 밀고하였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방경이 몽가독에게 가니, 제군(諸軍)이 다 모였다. 방경이 말하기를, “이제 어디로 사냥가시오?” 하니, “황주ㆍ봉주(鳳州)로 갔다가 초도에 들어갈 것이오.” 하매, 방경이 말하기를, “황제의 분부가 계신데 어떻게 강을 건너오?” 하니, 몽가독이 말하기를, “강물 건넌 것을 죄주시면, 내가 홀로 당하리다.” 하매, 방경이 말하기를, “내가 여기에 있는데 관인(官人)이 어찌 강을 건널 수 있겠소. 그렇게 하려면 황제의 명을 여쭈어 보아야 하오.” 하였다. 방경이 비밀히 보대(甫大) 등에게 일러 군사를 물리게 하니, 몽가독이 방경의 충직(忠直)이 천성에서 나옴을 알고 크게 공경하고 존중하여 사실대로 고하기를, “왕경을 멸하려는 자는 탄 등뿐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있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참언(譖言)이 들어가지 않아서 국가가 편안하였다.
2월 왕이 몽고의 경도(京都)에 이르렀다.
왕이 연도(燕都)에 이르러 몽주(蒙主)를 뵙고 방물(方物)을 바치고 시연(侍宴 황제가 베푼 잔치에 참석한 것을 지칭한다)하였다. 그때에 임유간(林惟幹)이 강 화상(康和尙)을 통해서 폐립한 일을 미봉하니, 몽주가 칙교(敕敎)하기를, “이 일은 세자와 이장용(李藏用)이 이미 갖추 아뢰었으므로 짐이 잘 안다.” 하매, 유간이 아뢰기를, “이는 곧 장용이 한 짓입니다.” 하니, 몽주가 말하기를, “네 말은 다 망령되다.” 하고, 장용 등으로 하여금 대변(對辨)하게 하매, 장용이 사실대로 응대하니 드디어 유간의 목을 얽어매 두고, 중서성(中書省)에 명하여 임연에게 첩(牒 공문을 보내다)하기를, “곧 상표(上表)하여 분명히 밝혀라.” 하였다. 왕은 연이 두려워서 종신(從臣) 백문절(白文節)에게 표문(表文)을 짓게 하되 ‘병 때문에 왕위를 사양하였다.’고 사연을 만들게 하매, 문절이 붓을 놓고 울며 간하니, 왕이 감동하여 깨닫고서 사실대로 아뢰게 하였다. 문절은 늘 게으른 듯하였으나, 이때에 와서 사람들이 그에게 지절(志節)이 있음을 알았다. 왕이 도당(都堂)에 상서하여, 세자에게 공주를 맞이하게 하기를 청하고 또 군사가 함께 구경에 이르러 수내(水內 강화도를 가리킨다)의 신민에게 초유(招諭)하여 죄다 나와 살게 하고 권신(權臣)을 제거하기를 청하니, 몽주가 말하기를, “청혼은, 이제 다른 일 때문에 와서 청하는 것이 옳지 않으니, 왕이 환국하여 사신을 보내야 허락하리라.” 하고, 나머지는 다 들어주었다. ○ 몽고가 서경(西京)을 동녕부(東寧府)로 삼고 자비령(慈悲嶺)으로 경계를 그었다.
전에, 최탄(崔坦)이 몽고 군사 3천을 청하여 서경에 와서 진수(鎭戍)하니, 왕이 입조(入朝)하는 길에 이를 듣고 최동수(崔東秀)를 보내어 몽고 도당(都堂)에 글을 부치기를, “반민(叛民) 최탄 등을 내가 한 번도 문죄(問罪)하지 않은 것은 상조(上朝 몽고를 가리킨다)에 투항해 붙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까이 용안(龍顔)을 뵙고 한 마디 아뢴 뒤에 군사를 보내어도 늦지 않거늘, 어찌 임금이 몸소 황제 계신 곳에 나아가는데 군사가 국경을 넘어 들어와서 백성이 놀라게 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바라건대 천총(天聰)에 갖추 아뢰소서.” 하였다. 이때에 와서, 몽주(蒙主)가 최탄ㆍ이연령(李延齡)에게 금패(金牌)를, 현효철(玄孝哲)ㆍ한신(韓愼)에게 은패(銀牌)를 내려 내속(內屬)하게 하고, 서경을 고쳐 동녕부라 부르고 자비령곧 절령(岊嶺)이다 으로 경계를 그으매 왕이 상표(上表)하여 서경과 여러 성을 회복하여 본국에 붙여주기를 청하였으나, 그때 몽가독의 군사가 이미 떠나고 도당이 또 전후군(殿後軍)을 보낼 것을 의논하므로, 왕이 아뢰기를, “전후 대군이 우리 나라에 이르면, 아마도 백성이 놀라 숨어서 공억(供億)을 대지 못할 것이니, 후군을 멈추소서.” 하였으나, 몽주가 윤허하지 않으매, 왕이 또 아뢰기를, “대군을 고경(古京)에 주둔하고 국경을 넘어가지 말게 하심이 마땅합니다.” 하고, 또 달로화적(達魯花赤)과 함께 가기를 청하니, 몽주가 윤허하였다. 【안】《원사(元史)》에 이렇게 되어 있다. “지난해 11월에 고려의 도통령(都統領) 최탄 등이, 임연(林衍)이 난을 일으켰기 때문에 서경 50여 성을 이끌고 입부(入附)하며, 단사관(斷事官) 별동와(別同瓦)를 보내어 왕준(王綧)ㆍ홍다구(洪茶丘)의 관하(管下)인 실과차 호내첨군(實科差戶內僉軍)에게 역마로 달려가 알리고 동경(東京)에 이르러 추밀원(樞密院)에 붙이니, 3천 3백 인을 얻었다. 고려의 서경 도통(西京都統) 이연령이 군사를 더 청하여, 망가도(忙哥都)를 보내어 군사 2천을 거느리고 가게 하였고, 추밀원이 고려를 정벌하기를 의논하였다. 당초에 마형(馬亨)이 말하기를 ‘고려는 기자(箕子)에게 봉해 준 땅이요, 한(漢)ㆍ진(晉)이 다 군현(郡縣)으로 삼았거니와, 이제 내조(來朝)하기는 하였으나 그 마음은 헤아리기 어려우니, 군사를 엄하게 하고 길을 빌어 일본을 취한다고 명목을 삼고서, 승세(乘勢)하여 그 나라를 엄습해서 군현으로 정하는 것이 낫다.’ 하고, 형이 또 말하기를 ‘이제 이미 말썽이 났으니 정벌하지 말아야 하거니와, 만일 정벌하다가 이기지 못하면 위로는 국위를 손상하고 아래로는 사졸(士卒)을 손상할 것이오. 혹 상표(上表)하여 정상을 말하거든 그 죄를 용서하고 그 공헌(貢獻)을 줄여 주어서 그 백성을 어루만지면 아마도 성화(聖化)에 느껴 따를 것이오. 남송(南宋)이 평정된 뒤에 저들이 딴뜻을 갖거든 군사를 돌려 주토(誅討)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오.’ 하였고, 추밀경력(槪密經歷) 마희기(馬希驥)도 말하기를 ‘지금의 고려는 곧 옛 신라ㆍ백제ㆍ고구려 세 나라를 아울러 하나가 된 것이오. 대저 번진(藩鎭)은 권도(權道)로 나누어야 제어하기 쉬우니, 떼어서 둘로 만들어 그 나라를 나누어 다스려 스스로 서로 매여 견제되게 해 두고서, 천천히 좋은 꾀를 의논하면 또한 처치하기 쉬울 것이오.’ 하였다.” ○ 왕과 세자가 연도(燕都)를 떠났다.
왕이 몽고 군사와 함께 환국하여 구경(舊京)을 회복해서 도읍하기를 청하니, 몽주가 동경행성(東京行省)의 국왕(國王) 두연가(頭輦哥)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함께 가게 하매, 16일(병술)에 왕과 세자가 연도를 떠났다. 【안】《성경지(盛京志)》에 이렇게 되어 있다. “중서좌승(中書左丞) 조벽(趙璧)이 의논드리기를 ‘고려가 강화도 안으로 옮겨 있으면서 그 험한 것을 믿으므로 권신(權臣)이 꺼리는 바가 없어서 마음대로 제 임금을 내쫓았었으나, 이제 임연(林衍)이 죽었고 왕은 실로 죄가 없으니, 군사를 보내어 호위해 돌아가서 고경(古京)에서 나라를 회복하게 하면, 군사와 백성을 안식하게 하는 상책이 될 수 있습니다.’ 하니, 황제가 이를 들어 주었다.” ○ 큰 지진이 있었다. ○ 임연이 죽으매, 그 아들 유무(惟茂)를 교정별감(敎定別監)으로 삼았다.
연이 명을 거역하고자 별초(別抄)를 보내어 제도(諸道)의 주군(州郡)을 순행하면서 백성에게 여러 섬으로 들어가 살도록 독촉하더니 근심으로 등에 종기가 나서 죽었다. 순안후(順安侯)가 연의 아들 유무를 교정별감으로 삼으니 유무가 도방(都房) 6번(番)을 모아서 제 집을 지키게 하고, 계속하여 국명(國命)을 잡았다. 연은 천졸(賤卒)에서 발신(發身)하여 권흉(權兇) 중에서 더욱 무식하고 잔포(殘暴)하였다. 유무가 일관(日官) 오윤부(伍允孚)를 불러서 나라를 진정할 방책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병이 위중해져서 의약을 구하는 것과 같아 어찌할 길이 없습니다.” 하였다. 최씨는 이렇게 적었다. “연이 임금을 폐위하고 황제의 명을 거역하여 죄가 가득차니, 하늘이 호된 벌을 내려서 죽였다. 국가의 대계를 아는 자가 있었더라면, 그 죄를 밝히 다스려 저자에서 환시(轘屍 주검의 두 다리를 각각 수레에 매고 양쪽으로 찢는 것)하고, 젊은 아들형제를 다 법으로 처치해서 뿌리를 끊었어야 옳을 것인데, 도리어 국병(國柄)을 계속 잡게 하여 반란의 계제를 삼게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3월 초하루(경자)에 일식이 있었다.
하5월 자은사(慈恩寺) 못의 물이 피처럼 붉었다. ○ 몽고가 탈타아(脫朶兒)를 달로화적(達魯花赤)으로 삼아서 보냈다.
행성(行省)을 설치하여 동방의 일을 총령(摠領)하게 하고, 부이(副貳)와 경력(經歷) 등의 벼슬을 두었는데, 모두 과기(瓜期 임기)가 있었다. ○ 어사중승(御史中丞) 홍문계(洪文系), 직문하성사(直門下省事) 송송례(宋松禮)가 임유무(林惟茂)를 죽이고 정사를 왕실로 되돌렸다.
몽고가 저지두(諸之豆)《원사(元史)》에는 철철도(徹徹都)로 되어 있다 등을 보내와서 임연의 부경(赴京)을 독촉하게 하고, 왕은 환국하는 도중에 정자여(鄭子璵)ㆍ이분희(李汾禧) 등을 먼저 보내어 나라 안의 신하들에게 모두 다 구경으로 옮기도록 유시하고 이르기를, “사직의 안위(安危)가 이 한 거사에 달렸으니 각기 마음껏 다하여야 하리라.” 하였다. 유무가 명을 거역하고자 하니, 참정(參政) 유천우(兪千遇)가 항거하여 말하기를, “왕과 세자께서 상국의 군사를 인도하여 오시는데, 성문을 닫고 거역하는 것이 어찌 신하의 의리이겠으며, 굳게 지키려 한들 되겠소?” 하였다. 유무가 언짢아서 백관을 불러서 의논하니, 다들 말하기를, “임금의 명은 어길 수 없소.” 하였다. 유무가 분노하여, 제도(諸道)의 수로방호사(水路防護使)와 산성별감(山城別監)을 나누어 보내어 백성을 모아 지켜서 명에 거역하게 하고, 또 장군 김문비(金文庇)를 시켜 야별초(夜別抄)를 거느리고 교동(喬桐)에서 지켜 왕사(王師 왕의 군사)를 막게 하였다. 그때에, 야별초가 사방으로 나가 백성에게 섬의 산성(山城)에 들어가 지키도록 독촉하였는데, 경상도 안찰사(慶尙道按察使) 최간(崔簡), 동경 부유수(東京副留守) 주열(朱悅), 판관(判官) 엄수안(嚴守安)이 모의하여 별초를 잡아서 김주(金州)에 가두고 왕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왕이 국경에 들어왔다는 것을 듣고 사잇길로 해서 행재소(行在所)로 갔다. 전라안찰(全羅按察) 권단(權㫜), 충청안찰 최유엄(崔有渰)이 왕의 전유(傳諭)를 보고 느껴 울고서 곧 주현(州縣)에 효유(曉諭)하였다. 단은 수평(守平)의 손자이고, 유엄은 자(滋)의 아들이다. 유무는 어려서 아비의 권세를 이어잡았으므로 매사가 그 처부(妻父) 이응렬(李應烈)과 송군비(宋君斐) 등에게서 결정되니, 연(衍)의 사위인 홍문계(洪文系)ㆍ송송례(宋松禮)가 겉으로는 순종하나 마음으로는 늘 분개하였다. 유무가 명에 거역하려 하여 안팎 인심이 어수선한데, 왕이 이분성(李汾成)을 보내어 문계에게 비밀히 유시하기를, “경은 대대로 벼슬한 집 후손이니, 마땅히 의리와 형세를 헤아려 사직을 이롭게 하여 조상을 부끄럽히지 말라.” 하니, 문계가 재배(再拜)하고서 분성에게 말하기를, “명일 부문(府門) 밖에서 나를 기다리시오.” 하였다. 곧 송송례와 모의하여 삼별초를 모아 사직을 보위하는 대의로 타이르고, 유무의 집 동문을 부수고 돌입하여 유무와 그 자부(姊夫) 최종소(崔宗紹)를 잡아 저자에서 참하고, 이응렬 등 6~7인을 귀양보내고 유인(惟栶)을 죽이니, 조야(朝野)가 크게 기뻐하였다. 연의 처 이씨(李氏)와 그 아들 유간(惟幹)ㆍ유거(惟柜)ㆍ유시(惟㮛) 등을 몽고로 잡아 보내고, 사자를 보내어 왕에게 유무를 죽인 것을 고하고, 드디어 왕실에 정사를 돌리고 도방(都房)을 죄다 파하였다. 최씨는 이렇게 적었다. “정중부(鄭仲夫) 이래로 권신(權臣)이 대대로 국명(國命)을 잡으매, 임금이 적국처럼 두려워하여 감히 항거하지 못하니 그 누적된 관습이 이미 오래이나, 이제 연이 이미 죽고 유무는 한낱 작은 아이일 뿐인데, 왕이 그 죄를 성토하지 못하고 한두 신하를 시켜 겨우 죽였다. 위복(威福)이 이토록 떨치지 못하니, 앞으로 있을 권간(權奸)의 참란(僣亂)한 마음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 왕이 몽고로부터 돌아와 구경(舊京)에 환도(還都)하였다.
16일(을묘)에 왕이 용천역(龍泉驛)지금의 서흥(瑞興) 남쪽 22리에 있다 에 머물렀는데, 홍문계(洪文系) 등이 행재소에 가서 군신(群臣)이 표문(表文)을 올려 하례하고, 또 유천우(兪千遇) 등을 보내어 어가(御駕)를 맞이하게 하였다. 23일(임술)에 재추(宰樞)가 모여 구경에 다시 도읍하기를 의논하고 정한 날짜를 방(榜)으로 고시하였으나, 삼별초는 딴마음을 품어 순종하지 않고 마음대로 부고(府庫 관부의 창고)의 물건을 꺼내므로, 왕이 상장군(上將軍)정자여(鄭子璵)를 보내어 강도(江都)에 들어가 삼별초에게 도타이 타이르게 하였다. 27일(병인)에 왕이 구경에 이르러 사판궁(沙坂宮)에 들고, 비빈(妃嬪)도 강도로부터 이르렀다. 그때에 막 고경(古京)에 돌아와서 의관(衣冠)이 갖추어지지 못했으므로, 왕과 백관이 다 융복(戎服 군복)으로 종사하였고, 또 해우(廨宇 관부의 청사)가 없으므로 다 막을 치고서 거처하였다. ○ 몽고가 왕준(王綧)을 귀국하게 하였다.
준은 볼모로 들어간 지 여러 해 만에 드디어 몽고의 장수가 되었는데, 뒤에 홍다구(洪茶丘)에게 참소당하여 그가 거느리던 병마(兵馬)를 빼앗겼다. 이때에 와서, 처자를 데리고 본국에 와서 살았다. ○ 삼별초(三別抄)를 파하였다.
당초에, 최우(崔瑀)가 나라 안에 도둑이 많음을 걱정하여 용맹한 군사를 모아 밤마다 순행하며 포악을 금하게 하니, 이 때문에 야별초(夜別抄)라 불렀는데, 도둑이 여러 도(道)에서 일어나게 되매, 별초를 나누어 보내서 잡게 하니, 그 군사가 매우 많아져서 드디어 좌ㆍ우로 나누고, 또 몽고로부터 도망해 돌아온 우리 나라 사람으로 한 부대를 만들어서 신의군(神義軍)이라 불렀으니 이것이 삼별초이다. 권신이 정권을 잡으면, 이들을 조아(爪牙)로 삼아 봉록(俸祿)을 후히 주고 사사로운 은혜를 베풀기도 하며 또 죄인의 재물을 적몰하여 주었으므로, 권신이 턱짓만 해도 앞을 다투어 힘을 다하였다. 김준(金俊)이 최의(崔竩)를 죽이고, 임연(林衍)이 김준을 죽이고, 송례(松禮)가 유무(惟茂)를 죽인 것이 다 삼별초의 힘에 의지한 것이다. 왕이 구경에 다시 도읍하게 되매, 삼별초가 도리어 딴마음을 품으므로 장군 김지저(金之氐)를 보내어 파하게 하였는데, 지저가 그 명적(名籍)을 가지고 돌아오니, 삼별초가 그 명적을 상국에 알릴까 두려워서 더욱 반심(叛心)을 품었다.
6월 배중손(裵仲孫)ㆍ노영희(盧永禧) 등이 삼별초를 데리고 반(叛)하여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왕으로 세우고서 강화(江華)를 크게 노략하고 바닷길로 해서 남으로 달아났다. 직학(直學) 정문감(鄭文鑑)이 그때에 죽었다.
조정이 삼별초를 파하매 군정(軍情)이 위구(危懼)한데, 장군 배 중손이 노영희등을 타일러 군중의 마음이 이반(離叛)한 것을 틈타 난을 일으키고, 사람을 시켜 국중(國中)에 외치기를, “오랑캐 군사가 크게 이르러 백성을 죄다 죽이니, 나라를 돕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구정(毬庭)에 모이라.” 하니, 잠시 사이에 나라 사람이 크게 모였으나, 혹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 다투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물속에 빠지기도 하므로, 삼별초가 사람의 출입을 금하고 강을 순행하며 크게 외치기를, “배에서 내려오지 않는 자는 다 베겠다.” 하니, 이를 들은 사람은 다 두려워서 내렸으나, 혹 배를 띄워 고경으로 향하는 자도 있으므로, 적(賊)이 작은 배를 타고 쫓아가며 활을 쏘니 다들 감히 움직이지 못하매, 곧 금강고(金剛庫)의 병기를 꺼내어 군졸에게 나누어 주어 성을 둘러 굳게 지키게 하였다. 중손ㆍ영희는 삼별초를 거느리고서 승화후 온을 핍박하여 왕으로 삼고, 관부(官府)를 임시로 설치하여 대장군 유존혁(劉存奕), 상서좌승(尙書左丞) 이신손(李信孫)을 좌우 승선(左右承宣)으로 삼았다. 적이 처음 난을 꾀할 때에, 장군 이백기(李白起)가 순응하지 않으매 그를 죽였다. 장군 현 문혁(玄文奕)이 구경으로 달아나매 적이 배로 뒤쫓았으나, 문혁이 홀로 활을 쏘되 나는 화살이 잇달고 그 아내는 곁에서 화살을 뽑아서 대어 주니, 적이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다가, 문혁의 배가 잘못하여 얕은 여울에 걸리자 적이 쫓아가 팔뚝을 쏘아 맞혀 배 안에 쓰러지매, 아내가 말하기를, “나는 의리상 쥐새끼 같은 놈들에게 욕보지 않겠다.” 하고, 드디어 두 딸을 데리고 강에 빠져 죽었다. 적이 문혁을 잡았으나 그 용맹을 아깝게 여겨 죽이지 않았는데, 그 뒤에 문혁이 구경으로 도망해 돌아왔다. 적은 또 직학 정문감을 승선으로 삼았으나, 문감이 말하기를, “적에게서 부귀를 누리느니보다 차라리 지하에서 몸을 깨끗이 가지리라.” 하고 곧 물에 빠져 죽고, 그 아내 변씨(邊氏)도 물에 빠졌다. 전 평장(平章) 유경(柳璥), 참정(參政) 채정(蔡禎), 추밀부사(樞密副使) 김연(金鍊), 녹사(錄事) 강지소(康之邵)ㆍ이승휴(李承休), 한림(翰林) 안향(安珦) 등이 달아나서 벗어났다. 그리고 나서 강화를 지키던 군사가 많이 도망해 뭍으로 나가매, 적이 지켜 내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곧 배를 모아 공사(公私)의 재화와 자녀를 다 싣고 남으로 내려가니, 잇단 배가 무려 1천 척이나 되었다. 그때에, 백관이 다 나가서 왕을 맞이하였는데, 그 처자들은 다 적에게 노략당했으므로 통곡 소리가 하늘을 진동하였다. 이승휴가 왕에게 말하기를, “적이 착량(窄梁)을 반쯤 지나거든 정예 군사를 보내어 적의 배를 가로질러 끊고 강도(江都)를 굳게 지키면, 적의 앞선 자는 형세가 외롭고, 뒤처진 자는 근거를 잃게 되니, 격파할 수 있습니다.” 하였으나, 왕이 그대로 따르지 못하였다. 전사인(舍人) 이숙진(李淑眞), 낭장(郞將) 윤길보(尹吉甫)가 노예를 모아 구포(仇浦)지금의 광주(廣州) 서쪽 90리 남양(南陽) 경계에 있다 에서 여적(餘賊)을 뒤쫓아 쳐서 5인을 베고, 부락산(浮落山)지금은 미상 에 이르러 바닷가에서 군사를 뽐내니, 적이 바라보고 두려워서 오랑캐 군사가 이미 온 것으로 여겨 드디어 달아나매, 숙진과 낭중 전문윤(田文胤) 등이 부고(府庫)를 봉하고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니, 무뢰한 자가 마음대로 하지 못하였다. ○ 유경(柳璥)을 평장사 판병부(平章事判兵部)로 삼았다.
경이 귀양가 있던 강화에서 가족을 데리고 배를 타고 고경(古京)으로 돌아오다가 적에게 붙들려 적과 함께 있었다. 경이 열병에 걸린 듯이 거짓으로 구역질을 하며 처자가 있는 작은 배에 가서 식히겠다고 청하매 적이 허락하니, 경이 뱃줄을 끊고 떠났는데 적이 뒤쫓았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왕이 경이 적에게 붙들렸다는 것을 듣고 그가 모주(謀主)가 될까 염려하였었는데, 경이 도보(徒步)로 왕을 뵈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 이 벼슬을 제수하였다. ○ 몽고가 강화를 노략하였다.
왕이 환국할 때에 두연가(頭輦哥)가 백주(白州)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그의 장수 타랄대(朶剌歹)를 보내어 군사 2천을 거느리고 강화에 들어가 재물을 수탈하고 다시 사람을 시켜 불태우니, 불탄 강화 재물은 이루 셀 수 없었으며, 두연가는 곧 홍다구(洪茶丘)를 보내어 전라ㆍ경상ㆍ동계(東界) 3도(道)를 순시하게 하였다. ○ 참지정사(參知政事) 신사전(申思佺)과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김방경(金方慶)을 남적추토사(南賊追討使)로 삼았다.
방경이 군사 6천여를 거느리고 몽고의 송만호(宋萬戶) 등 군사 1천여 인과 함께 쫓아가 치다가 바다 가운데에 이르러 바라보니 적이 영흥도(靈興島)지금의 남양(南陽)인데 일명 연흥(燕興)이다 에 정박하였으므로, 방경은 치려 하였으나 송만호가 두려워서 말리니, 적이 달아났다. 적중에서 도망해 돌아온 남녀가 아울러 1천여 인이었는데, 송만호가 적의 무리로 생각하여 모두 사로잡아서 돌아갔다. 방경이 돌려보내 주기를 행성(行省)에 청하였으나, 돌아오지 않은 자가 많았다.
추8월 세자를 몽고로 사신보냈다.
절일(節日)을 축하하고, 또 배 중손의 반역한 정상을 아뢰고, 또 서경(西京) 이북의 여러 성을 돌려주기를 청하여 말하기를, “최탄(崔坦) 등의 죄악은 천지에 용납되지 않습니다. 말을 꾸며서 망령되이 아뢰어 강역을 나누려고 생각한 것이나, 소방(小邦)은 땅이 궁벽하고 작은데, 또 서경 이북을 갈라서 따로 경계를 만들면, 함께 하여 직공(職貢)을 닦을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옛적에 삼반(三叛)이 노(魯)나라에 들어간 것을 《춘추(春秋)》에 비평하였습니다. 바라옵건대, 성자(聖慈)는 우리의 옛 강토를 돌려주소서.” 하였으나, 회보하지 않았다. 이 뒤로 해마다 아뢰었으나, 끝내 허락받지 못하였다. ○ 전 추밀부사(樞密副使) 송의(宋義), 장군 윤수(尹秀)가 반역하여 몽고로 들어갔다.
전에, 고종(高宗)이 강화로 도읍을 옮길 적에는, 송의가 몽고에 사신을 따라갔다가 도망해 돌아와서 〈몽고가 우리 나라를 치려는 것을 알려서 도읍을 옮기도록〉 실로 용동(聳動)한 것이고, 임연(林衍)이 조오(趙璈)를 죽일 때에는, 윤수가 〈조오가 임연을 죽이려고 꾀하는 것을〉 실로 알려준 것이었는데, 이때에 와서 두 사람은 전의 일을 추후에 다스리게 될까 두려워서 반역하여 몽고에 투항하였다. 윤수는 송의의 생질이다. ○ 배중손 등이 진도(珍島)에 들어가 웅거하였다.
적이 진도에 웅거하여 군사를 조종하여 노략하고, 또 여러 고을에 격문을 전하여 섬에 들어가 지키라고 하매 남방이 소동하였는데, 김주수(金州守) 이주(李柱)는 군사를 버리고 달아나고, 동경 판관(東京判官) 엄수안(嚴守安)이 임시로 고을 일을 맡아서 백성을 진무(鎭撫)하였다.
9월 신사전(申思佺)이 죄 때문에 면직되었다.
사전이 적을 치려고 생각하지 않으므로 혹 그 까닭을 묻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이미 재상이 되었는데, 적을 격토하여 성공한들 다시 무엇이 되겠는가?” 하더니, 나주(羅州)에 이르러서는 적이 온다는 것을 듣고 달아나 돌아왔으며, 전주 부사(全州副使) 이빈(李彬)도 성을 버리고 도망했는데, 다 죄를 받아 면직되었다. ○ 적이 장흥부(長興府)를 노략하였다. ○ 적이 나주를 쳤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그때에, 적의 형세가 매우 치열하므로 고을들이 풍문만 듣고도 맞아들여 항복하였다. 적이 나주에 이르니, 부사(副使) 박부(朴琈)가 망설이고 결단하지 못하였는데, 주리(州吏 나주 호장(羅州戶長)을 가리킨다) 정지려(鄭之呂)가 개연히 말하기를, “성에 올라 굳게 지키지 못하겠거든 차라리 산골짜기로 군사를 피할 것이지 무슨 면목으로 수리(首吏 장관)로서 나라를 저버리고 적을 좇으시오?” 하니, 성품이 본디 용감한 사록(司錄) 김응덕(金應德)이 그 말을 듣고는 분연히 성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금성산(錦城山)지금의 나주(羅州) 진산(鎭山) 에 들어가 지키되, 가시나무를 꽂아서 책(柵)을 만들고 군졸을 이끌어 격려하였다. 적이 포위하여 공격하자 상처를 싸매고 사수하니, 적이 무릇 이레 밤낮으로 성을 쳤으나 끝내 빼앗지 못하였다. 응덕이 또 진도에서 적과 싸워 배 1척을 노획하고 다 죽였다. ○ 김방경(金方慶)이 몽고 장수 아해(阿海)와 함께 진도(珍島)를 쳤다.
그때에 몽고가 아해를 원수(元帥)로 삼아 보내어 군사 1천을 데리고 와서 방경과 함께 적을 쳤다. 때마침 적이 나주(羅州)를 포위하고 군사를 나누어 전주(全州)를 치니, 나주 사람들이 전주 사람들과 함께 항복하자고 의논하였는데, 전주 사람들도 그렇게 할까 망설였다. 방경이 도중에서 이를 듣고는, 거느린 군사를 버려 두고 밤낮으로 남으로 달려가서 먼저 전주 사람들에게 첩(牒)하기를, “모일(某日)에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그 고을에 들어가겠으니, 군량을 장만하고 기다리라.” 하니, 전주에서 첩으로 나주에 알렸다. 적이 이를 듣고 드디어 포위를 풀고서 갔는데, 이때부터는 다시 노략하지 않았다.
동10월 사유(赦宥)하였다.
구경(舊京)에 다시 도읍하였기 때문이다.
11월 아해(阿海)가 김방경(金方慶)을 잡아 가두었다가, 그 뒤에 석방하였다.
방경과 아해가 삼견원(三堅院)지금의 해남현(海南縣) 서쪽 60리에 삼기원(三岐院)이 있는데, 이곳인 듯하다 에 주둔하여 진도(珍島)를 마주보고 진을 쳤다. 적의 배에는 괴상한 짐승의 그림을 그렸는데 강을 덮어 물에 비치며, 마치 나는 듯이 움직였다. 싸울 때마다 적(賊)은 북을 치고 외치며 돌진하는데, 서로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여 여러 날을 버티었다. 마침 참소하는 홍찬(洪贊)ㆍ홍기(洪機) 등이 있었는데, 적중에서 도망하여 돌아와 말하기를, “방경이 적과 내통하였다.” 하므로, 아해가 방경을 잡아 가두었다가 묶어서 달로화적(達魯花赤)에게 보내니, 보는 사람들이 다 울었다. 방경이 그곳에 이르러 찬과 대면하여 밝히니, 찬이 무망(誣罔)으로 복죄하매 방경을 석방하였는데, 왕이 상장군(上將軍)을 제수하여 위로하고 타일러서 다시 적을 토벌하게 하였다. ○ 적이 제주(濟州)를 함락시켰는데, 영암부사(靈巖副使) 김수(金須), 장군 고여림(高汝霖)이 그때에 죽었다.
처음에, 안찰사(按察使) 권단(權㫜)이 영암부사 김수를 보내어 군사 2백으로 제주를 지키게 하고, 또 장군 고여림을 보내어 군사 70을 데리고 잇달게 하였는데, 적이 제주를 공격하게 되니, 수와 여림 등이 힘써 싸우다가 죽었다. 나주 사람 진자화(陳子和)는 키가 크고 용맹하며 그때 나이 19인데, 곧바로 적 가운데로 들어가 그 장수 곽연수(郭延壽)를 베고서 나오니, 사졸들이 기뻐 날뛰었다. 그리고 나서 다시 들어갔다가 적에게 죽었다. 적이 승세를 타고 관군을 죄다 죽이고서, 드디어 제주를 함락시켰다.
12월 유경(柳璥)을 파면하고, 정당문학(政堂文學) 유천우(兪千遇)를 인물도(仁勿島)《여지(麗志 : 고려사 지)》에는, 당성군(唐城郡)에 인물도가 있고, 능성군(綾城郡)에 인물도가 있으나, 지금은 다 미상하다 로 귀양보냈다.
처음에, 나장(螺匠) 목동(木同)이 양민(良民)을 노예로 알고 달로화적(達魯花赤)에게 팔았으므로, 재추(宰樞)가 그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는데, 경ㆍ천우가 유사(有司)에 첩(牒)하여, 노예를 면하여 양민이 되게 하였더니 달로화적이 원망하여 왕에게 고하니, 왕도 그들이 마음대로 결단한 것을 노하여 죄주었다가 얼마 안되어 다 소환하였다. ○ 세자가 몽고로부터 돌아왔는데, 단사관(斷事官) 불화(不花)ㆍ맹기(孟祺) 등이 함께 왔다.
그때에, 추밀부사(樞密副使) 원 부(元傅) 등이 세자를 따라 몽고에 들어가 ‘행성(行省)이 우리 나라에 출배(出排)할 때에 침탈한 것이 많다.’고 아뢰니, 몽주(蒙主)가 대면해서 밝히게 하였는데 부 등의 말이 꺾였고, 또 출배 뒤에 송(宋)의 상선(商船)이 와서 정박하였는데, 국가가 비밀히 사신을 보내어 다녀오게 한 것을 행성이 알고서 몽주에게 고하니, 몽주가 단사관 불화ㆍ맹기 등을 보내어 세자와 함께 돌아왔다. 하조(下詔)하여, 성실하지 않은 일이 많으며 참소를 듣고 행성을 무고하고 남송ㆍ일본과 교통하였다는 등의 일을 매우 꾸짖고, 조(詔)를 갖추어 삼별초(三別抄)를 타일렀으므로 원외랑(員外郞) 박천주(朴天澍)를 보내어 가서 타이르게 하였다. ○ 김방경(金方慶)이 진도(珍島)에서 적을 공격하였으나 이롭지 못하였다.
방경이 서울로부터 진도로 돌아왔다. 적이 배를 타고 기치(旗幟)를 성대히 벌여 세우고 바다가 들끓도록 징과 북을 치며, 또 성 위에서는 북을 치며 외쳐서 형세를 도우니, 아해(阿海)가 겁이 나서 배에서 내려 나주로 물러나 주둔하려 하매, 방경이 말하기를, “원수(元帥)가 물러나면 약한 것을 보이는 것이니, 적이 승세를 타고 몰려오면 누가 감히 예봉(銳鋒)을 당할 것이며, 황제께서 듣고 문책하시면 어떻게 응대하겠소?” 하니, 아해가 감히 물러나지 못하였다. 방경이 홀로 부하를 데리고 나아가 공격하였으나, 적이 전함(戰艦)으로 역습하여 공격하니 관군이 다 달아나매 방경이 말하기를, “승부를 결단하는 것은 오늘에 달려 있다.” 하고 적 가운데로 돌입하였는데, 적이 배로 포위하여 몰고 갔다. 방경과 사졸이 죽을 각오로 싸웠으나, 시석(矢石)이 다하고 또 모두들 화살에 맞아 일어나지 못하였다. 이미 진도 해안에 다가갔을 때에 칼을 뽑아 든 적의 병졸이 배 안으로 뛰어들었는데, 김천록(金天祿)이 단모(短矛)로 도리어 찌르매, 방경이 일어나서 말하기를, “차라리 물고기의 뱃속에 장사지내게 될지언정 어찌 적의 손에 죽으랴!” 하고 바다에 몸을 던지려는 것을 위사(衛士) 허송연(許松延)ㆍ허만지(許萬之) 등이 말렸다. 부상자가 방경이 위급함을 보고 외치며 다시 일어나서 재빨리 싸우매, 방경이 호상(胡床)에 의지하여 사졸을 지휘하되 낯빛이 태연하였고, 장군 양동무(楊東茂)가 몽충(蒙衝)으로 돌격하니 적이 달아나므로 드디어 포위를 무너뜨리고 나왔다. 방경이, 장군 안세정(安世貞)ㆍ공유(孔愉) 등이 구원하러 오지 않은 죄를 따져서 참하려 하였으나, 아해가 말려서 면하였다. 【안】 아해 때문에 군법이 행해지지 않았으니, 장차 어떻게 사나운 장수를 어거할 것인가? 방경이 군율의 시행을 잘못하였다.
[주D-001]함께하여 …… 닦을 자 : 직공(職貢)은 공물을 바치는 것, 또는 그 공물을 뜻하니 ‘함께하여……닦을 자’란 ‘내가 다스리는 백성’이란 뜻이다. [주D-002]삼반(三叛)이 …… 들어간 것 : 본국을 배반하여 토지를 가지고 노(魯)나라에 와 붙은 소국(小國)의 대부(大夫) 3인, 곧 주서기(邾庶其)ㆍ거모이(莒牟夷)ㆍ주흑굉(邾黑肱). 《春秋左氏傳 襄公 21年, 昭公 5年, 昭公 31年》 [주D-003]몽충(蒙衝) : 옛 전함의 하나. 모양이 좁고 길며 위는 생우피(生牛皮)로 덮고 전후 좌우에 노(弩)ㆍ모(矛)를 설치하는 창구멍이 나 있으며 속력이 빨라서 적선 가운데를 충돌(衝突)해 들어가는 데에 쓰인다. 《尉繚子 武議, 通典 兵典 水中及水戰具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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