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마 비잔틴 제국의 멸망
기원전 753년 로물루스 형제에 의해 창업된 서로마는 기원후 476년에 멸망하였지요.
멸망한 476년부터 동로마 비잔틴 제국이 오스만 투르크 이슬람 군에 멸망한 1453년까지를 유럽 교회사에서 중세사로 분류하지요. 중세사 중에서 476년부터 1천 년까지를 전반기 1천 년 이후를 후반기로 재분류하지요.
서로마가 멸망할 때의 황제 이름이 공교롭게도 창업자의 이름과 같은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 황제였다면 동로마 비잔틴 제국도 같은 이름으로 창업되고 같은 이름으로 멸망되었지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온갖 우상과 신들로 얼룩진 로마를 떠나 자신의 기독교적 꿈을 실현할 새 수도로 동서양의 접점이고 요새인 보스포러스 해협의 가장 좁은 곳 동방과 서방의 끝점을 택하여 자신의 이름으로 새로이 건축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 도시의 도로망을 조성하고 기존 로마와 같은 14개 행정구역으로 분류하여 바자르와 거대 물 저장고를 도시 지하에 만들고 12사도 교회 건물도 커다랗고 웅장하게 세워 시작하지요.
허지만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팍스 로마의 군형이 기울어 가면서 동방 아르비(아랍)쪽 6세기 후반에 메카에서 출생한 마호메드에 의해 시작된 모슬렘 세력이 메디나에서 출발하여 한 손에 쿠란과 다른 손에 초승달 형의 칼을 휘두르며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메뚜기떼같이 북상하더니 점차 확장되면서 거대 로마의 식량창고인 이집트와 북아프리카 일대가 점령되고 팔레스틴 예루살렘을 거쳐 비잔틴 제국의 턱밑까지 다가와 영토가 축소되는 사태로 악화되어 가더니 마침내 1453년 1월에는 항가리인 우르반을 고용하여 거포를 제작하여 실험에 성공하자 자신의 측근 아샤크 파샤 대신에게 16만의 군대를 선두에서 지휘케 하더니 예니체리(기독교측 포로 소년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킨 다음 혹독한 훈련과 위협으로 절대복종하도록 단련된 소년 군)군단 일만오천을 측근으로 거느리고 이슬람 술탄 메메드(Muhammad재위1451-81) 2세 군대가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출발 30마리의 소들과 700명이 끄는 우르반 거포 3문을 끌고 300Km 거리를 행군하여 가서 1453년 3월 26일에 콘스탄티노플 인근 마을에 도착하여 초토화를 시작 하더니 서방측 비잔틴 제국 수도 난공불락의 요새 3중 성벽을 400m 앞까지 접근시켜 천막을 치고 자고 난 다음 날인 4월 초에 우르반 거포의 발포를 시작으로 공성전이 전개되고 무너진 성벽으로 메뚜기떼같이 달려들었지만 실패하였지요.
우르반 거포 3문은 장약과 거대한 돌 탄환의 장전에 시간이 걸려 하루에 7번 정도 발사하였다지요. 발포할 때 충격으로 포신이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많은 군사와 소를 동원하여 제자리에 다시 설치하여 발포하였다지요. 처음들어보는 공기마저 찢어놓는 듯한 무서운 거포소리에 기겁을 하였지만 죽을 각오로 임하는 비잔틴 군대의 수성전에 4배나 많은 이슬람의 군대가 오히려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연이은 공격에도 3중 성벽의 콘스탄티노풀은 난공불락이었지요.
심지어는 금각만 쪽의 해로를 굵은 쇠사슬로 차단하자 그쪽 면에 속한 산을 나무로 레일을 설치하여 동물의 기름을 칠하면서 배를 밀고 끌어당기며 안개 속에 몰래 산을 넘어가 쇠사슬 안쪽 바다에 배를 띄워 건너가 공격하려고 시도하여보았지만 이런 낌새를 알아차린 기독교 측의 기습으로 제대로 된 공격도 못 하고 많은 사상자와 피해를 내면서 무산되어 버렸지요.
다양한 방법으로 계속되는 공격도 별 효과를 내지 못하여 물적 인적 피해가 늘어감에 따라 부친 때부터 유명한 자가노스 파샤 노 재상마저 콘스탄티노플 성에 대한 공격의 부당성과 선친 때부터 상호 평화적으로 지내왔다는 충고까지 듣게 되었지만 22세의 젊은 술탄 메메드 2세는 굽히지 않고 작전 회의를 열고 공격의 실패에 대한 문제점을 보완하여 동성애 시종 튀르순(유럽귀족의 빼어난 미소년 포로)을 거느리고 1453년 5월 29일 새벽에 60Kg의 돌 탄환을 재장전한 우르반 거포의 발사를 시작으로 공격을 재개하여 정오쯤에 이슬람 오스만 투르크 군대의 술탄 메메드(무하마드) 2세의 16만 군대와 예니체리 군의 파상 공격으로 무너져서 방어력이 취약해진 비잔틴 황궁 쪽의 성벽으로 메뚜기떼처럼 밀려 들어가 순식간에 점령되어 버렸다지요.
이슬람 군대의 함성과 혼란 속에 눈물을 흘리며 바라보던 멸망의 순간에 콘스탄티누스 11세 마지막 황제는 황제의 주홍색 외투를 벗어 던지고 칼을 뽑아 들고 적진을 향하여 용감하게 달려들어 갔다지요.
화염과 검은 연기 속에 오스만투르크 쪽 승리의 폭죽이 울리고 공방전의 혼란이 진정되고 난 후 이슬람 술탄 메메드 2세의 명령에 의해 발견된 황제의 시체는 확인과정을 거쳐 목을 치게 하여 소피아 성당 옆 둥근 기둥 위에 걸게 하였다지요.
로마 교황의 대리인이며 콘스탄티노풀의 대 주교 이시도로스는 걸인을 발견하고 옷을 바꾸어 입고 달아났다는 것이지요.
오스만 투르크 군대에게 허용된 3일간의 약탈은 귀족의 저택은 물론 일반주택, 황궁이나 교회의 예외가 없었다지요.
313년 종교의 자유와 일요일 휴업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330년 5월 11일에 우상과 미신의 도시 로마를 떠나 기독교로 새로 창업된 동로마 비잔틴 제국은 1453년 5월 29일 정오를 지나 창업자와 같은 이름의 콘스탄티누스 11세 때 멸망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로써 동로마 비잔틴 제국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지요.
황제의 권한아래에서 헤매이던 비잔틴 동방의 교회는 아르비(메뚜기 아랍)떼들에게 멸망하고, 중세 유럽의 지배권은 십자군 전쟁으로 다시 일어선 교황이 성경말씀 계시록 17장의 내용대로 정치와 종교가 통합된 최고 권력의 정점인 교황에게 완전히 넘어가게 되고 많은 물위에 앉은 큰 음녀, 땅의 임금들도 그와 더불어 음행하고 유럽에서 세계의 지배권자로 등장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