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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산군일기 53권, 연산 10년 윤4월 25일 을유 5번째기사 / 김일손의 사초 사건과 관련이 있는 김전을 서용하는 일을 묻다
상고하게 하고, 정승들에게 묻기를, "김전이 김일손(金馹孫)에 관련되어 파직하였는데, 어찌 다시 서임하는가?" 하니, 정승 등이 아뢰기를, "전은 다만 사연이 정여창(鄭汝昌)에 관계되었을 뿐이요 중죄에 관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파직만 하였던 것입니다. 이미 김일손의 죄에 관계되지 않았으니, 어찌 끝내 서 용(敍用)하지 않으리까?" 하였다. 전교하기를, "전을 불...
2. 연산군일기 53권, 연산 10년 윤4월 27일 정해 5번째기사 / 김전이 쓴 폐비의 사실을 의논하게 하다
‘다만 전이 탄선(坦禪)을 말한 일은 이미 사초(史草)에 적혀 있다.’고 하였는데, 일기를 상고하 니, 여창이 ‘산승의 일을 어찌 사초에 실으랴.’고 하였으니, 말의 실마리가 틀리는 데가 있습니다. 그러나 전은 김일손(金馹孫)의 말에 의하여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다만 여창에게 전한 것이요 별로 다른 정실을 없었습니다." 하자, 전교하기를, "틀리는 점을 추문하라." 하였다.
3. 연산군일기 53권, 연산 10년 5월 4일 계사 1번째기사 / 성준의 논죄를 재촉하고 한치형·이극균 등의 죄를 논하다
간은 궁중의 비밀한 일이라도 감히 말하여, 또 김일손(金馹孫) 같은 무리는 들은 것이면 쓰지 않는 것이 없어 무도한 말을 많이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가한가. 예전에 이르기를 ‘나를 돌보아 주면 임금이요, 나를 학대하면 원수다.[撫我則后 虐我則讎] ’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재상과 대간으로 대우하는데, 재상과 대간은 그 도로써 섬기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죄...
4. 연산군일기 53권, 연산 10년 5월 9일 무술 10번째기사 / 승정원에 학문의 가치에 대해 묻다
인군으로 하여금 그것을 본받아 권장하고 징계함이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김일손(金馹孫) 같은 자는 선왕의 없는 일을 썼으니, 백 대가 되도록 고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천 년의 보배라고 할 수 없다." 하니, 계맹 등이 아뢰기를, "한 글자 사이에 포폄(褒貶)이 판연한 것이니, 사관된 자가 만약 바른 대로 쓰지 않으면 천년의 보배가 아니라, 이는 천 년의 화입니다." 하였다.
5. 연산군일기 53권, 연산 10년 5월 22일 신해 3번째기사 / 전 정언 이주의 졸기
옛사람의 기풍에 있었다. 김일손(金馹孫)·한훈(韓訓)과 함께 간원(諫院)에 있으면서 개연(慨然)히 말하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아, 알면 말하지 않는 것이 없어 지탄 공격하되 피하는 일이 없었다. 무오년 사화(士禍)를 만나 오랫동안 외방에 찬축(竄逐)되어 있다가 이때에 와서 추후로 죄받은 것이다. 형 이윤(李胤)과 아우 이여(李膂)도 모두 당세에 이름이 있었다.
6. 연산군일기 55권, 연산 10년 9월 10일 정유 10번째기사 / 김일손 등 죽은 자들의 집을 모두 깎아 평하게 하다
전교하기를, "김일손(金馹孫)·이목(李穆) 등 죽은 자들의 집을, 모두 땅을 깎아 평하게 하라." 하였다.
7. 연산군일기 55권, 연산 10년 9월 26일 계축 2번째기사 / 무오 사화로 살아 남은 자들을 모두 잡아오도록 하다
어디 쓰겠는가? 모두 잡아오도록 하라." 사초 사건(史草事件) 곧 사대 사화(四大士禍)의 첫 번째인 무오 사화. 연산군 4년(149 8), 사관 김일손(金馹孫)이 자기 스승 김종직(金宗直)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삽입한 것이 발단이 되어, 김종직을 부관 참시(剖棺斬屍)하고 김일손 등은 사형되며 강겸(姜謙) 등은 귀양가고 어세겸(魚世謙) 등은 파직된 일. 하였다.
8. 연산군일기 55권, 연산 10년 9월 26일 계축 7번째기사 / 정승 등이 무오년에 죄를 받아 유배된 자들을 써서 아뢰니, 거듭 죄를 더하다
금의 일을 허반(許磐)에게 전해 듣고, 그 뒤 김일손(金馹孫)과 서로 이야기 할 때, 일손이 먼저 궁금의 일을 말하니, 겸이 ‘나도 또한 들었다…….’고 말한 죄로, 장형, 가산 몰수, 처자를 종만드는 벌을 받았으며, 김굉필(金宏弼)·강백 진(康伯珍)·최부(崔溥)·이원(李黿)은 김종직(金宗直)의 문도(門徒)로서 장형을 받고 부처되었고, 성중엄(成重淹)은 이목(李穆)의...
9. 연산군일기 55권, 연산 10년 9월 30일 정사 1번째기사 / 유순·허침 등이 불공한 사람들을 뽑아서 아뢰니, 한치형·성준·김천령 등이었다
유순·허침·박숭질·송일·김수동·강귀손이, 일을 말할 때 불공한 사람들을 뽑아 써서 아뢰기를, "이극균·성준·한치형이 조목 들어 진달한 일, 김일손의 ‘소릉(昭陵) 을 복구하자.’고 한 일, 이주(李胄)의 ‘성묘(成廟)는 우리 임금이다.’고 한 일, 한훈(韓訓)의 ‘위태와 멸망이 곧 닥친다.’고 한 일, 박한주(朴漢柱)의 ‘전조의 위망이 응방(鷹坊)에 조짐했었 다.’고 한 일,...
10. 연산군일기 56권, 연산 10년 10월 1일 무오 5번째기사 / 소릉의 복위를 청한 김일손의 도당을 모두 잡아 가두고, 죽은 아비도 부관 참시하다
전교하기를, "김일손(金馹孫)이 소릉(昭陵) 복위(復位)를 청할 때, 그 도당이 반드시 있었을 것이니 모두 찾도록 하고, 이주(李胄)가 유독 성종(成宗)은 ‘우리 임금이다.’ 칭하였으니, 이런 사람도 모두 수금(囚禁)하도록 하며, 강형(姜詗)이 말한 ‘자식으로서 그 아버지를 거역한다.’와 ‘물려준 활이나 신발도 오히려 영원히 아끼는 마음을 갖는다.’는 등의 말은...
11. 연산군일기 56권, 연산 10년 10월 14일 신미 2번째기사 / 의금부가 이유청이 김일손을 추국할 때 빠진 자라 하니, 장죄에 처하고 종으로 삼도록 하다
있을 때, 김종직(金宗直)을 논의한 일로 장 80에 처하여 외방에 부처(付處)하였다가, 그뒤 특지(特旨)로 용서받아 지금 영서도 찰방(迎曙道察訪)으로 제수되었습니다. 또 김일손(金馹孫)을 추국할 때 누락된 사람인데, 까닭은 모르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유청은 장 1백에 처하여 직첩을 회수하고 종으로 삼도록 하라. 비록 재차 논죄한다 할지라도 또한 가하다." 하였다.
12. 연산군일기 56권, 연산 10년 10월 18일 을해 3번째기사 / 김일손의 첩자 두 사람을 법에 의하여 효수하라 전교하다
전교하기를, "김일손(金馹孫)의 첩자(妾子) 두 사람을 법에 의하여 효수(梟首)하라." 하였다.
13. 연산군일기 58권, 연산 11년 7월 8일 신묘 3번째기사 / 순정한 사람을 골라 사신으로 삼고, 《시정기》를 5년에 한 번 수찬하게 하다
사관(史官)을 둔 뜻이랴! 《춘추전(春秋傳)》에 이르기를 ‘어버이를 위해서는 숨긴다.’ 하였으니, 군부가 과실이 있더라도 오히려 숨겨 야 하거늘, 하물며 없는 일을 쓸까보냐! 전일 김일손(金馹孫)이 쓴 것이 드러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알 수 있었으랴. 이제부터는 《시정기(時政記)》를 5년에 한 번 수찬(修撰)하되, 쓰지 않아야 할 일이 있거든 죄를 다스리라." 하였다.
14. 연산군일기 58권, 연산 11년 7월 9일 임진 1번째기사 / 예문관을 혁파하고 겸춘추 직도 바꿔서 승정원에 상사케 하다
전교하기를,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 이하 12원(員)을 모두 혁파(革罷)하고, 겸춘추(兼春秋)의 직임은 녹고관(錄考官)이라 칭호하여 승정원에 상사(尙仕)케 하되, 출납(出納)의 일만을 적어서 춘추관(春秋官)에 보내게 하라. 따로 6품 이상으로 6원을 두어 교사관(校史官)이라 칭호하여 춘추관에 상사케 하되, 상세히 더 살펴 정리하여, 경박한 것을 억제하고 올바른 데로 나가게...
15. 연산군일기 62권, 연산 12년 4월 20일 기사 4번째기사 / 사관의 기사를 용인하고 치민하는 정사 이외의 것은 쓰지 말게 하다
전교하기를, "사관(史官)의 기사(記事)를 용인(用人)하고 치민(治民)하는 정사 등 이외의 것은 쓰지 말게 하라. 또 김일손(金馹孫)으로 경계를 삼아 글을 지어 깨우치라." 하였다.
16. 중종실록 1권, 중종 1년 9월 24일 경자 2번째기사 / 폐왕 때 죄인 김일손 등을 녹용하다
영의정 유순이 아뢰기를, "무오년의 죄인 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연좌된 사람을 모두 놓아 보내기를 청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쓸 만한 사람은 등용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무오년 1498 연산군 4년. 하니, ‘아뢴 대로 하라.’ 전교하였다. 【 일손 등은 춘추관의 관직을 맡고 있다가 사초에 관한 일로 죄를 입었기 때문에 이런 아룀이 있었다.】
17. 중종실록 1권, 중종 1년 11월 12일 정해 5번째기사 / 무오 사화 때의 정범과 연좌인에 대해 의논하다
영의정 유순·좌의정 박원종·우의정 유순정·좌찬성 노공필·우찬성 박안성·좌참찬 이손·무령 부원군 유자광·능천 부원군 구수영·고양 부원군 신준·연창 부원군 김감·해평 부원군 정미수·창산 부원군 성희안 등을 명패로 빈청에 모으고, 전교하기를, "어제 정상에서 무오년의 정범인(正犯人)과 연좌인(緣坐人)에게 아울러 모두 증작(贈爵)하였는데, 이 일은 내가 상세히 알지...
18. 중종실록 2권, 중종 2년 2월 2일 병자 2번째기사 / 유자광의 낙향 상소를 불허하다
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심복인 허반(許磐)·김일손(金馹孫)·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 등이 서로 칭찬하며, 종직을 추존( 推尊)하여 공자(孔子)라고 하였습니다. 종직이 죽은 뒤 그의 당파 이원(李黿)·표연말(表沿沫) 등은 그의 시호(諡號)를 ‘공자’라고 할 것을 의논하기까지 하였으니, 통탄스런 일입니다. 종직은 세조의 원수 역적이요, 그 악이...
19. 중종실록 2권, 중종 2년 2월 26일 경자 1번째기사 / 시강관 김철문이 대간의 일을, 영사 성희안이 무오 사화의 일을 아뢰다
帝文)’의 본의가 무엇인지를 모르겠습니다마는, 김일손(金馹孫)의 무리가 그것을 부연(敷衍)한 것은 그 죄가 베일 만한 것이었습니다. 무오년의 일 연산군 4년의 무오 사화. 추관(推官) 심문관. 그러나 그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은, 성종조에 이극돈(李克墩)·성준(成俊)이 모두 나라의 대신인데, 극돈이 병조 판서가 되었을 때에 성준(成俊)을 북도 절도 사(北道節度使) 로 삼으니, ...
20. 중종실록 2권, 중종 2년 4월 19일 임진 1번째기사 / 유자광을 벌주라는 간언은 모두 물리치다
문에 그 술책을 시험한 것입니다. 무오년 화에 김일손(金馹孫)은 그 죄를 달게 받았거니와, 기타 정사(正士)를 모두 붕당으로 몰아다 죽이기를 청하였으니, 폐주의 살륙하는 마 음이 여기서 시작되었으며, 갑자년에 와서는 정사(正士)들을 다 죽였으니, 자광의 죄는 이 천지간에서 용납되지 못합니다. 옛말에 ‘작상(爵賞)과 형벌은 모두 천명 천토(天命天討)하는 것이...
21. 중종실록 2권, 중종 2년 4월 21일 갑오 4번째기사 / 이윤 등이 유자광의 극형을 아뢰니 불허하다
을 굳히려 하였으니, 그 죄 둘이요, 무오년에 김일손(金馹孫)의 일을 가지고 무죄한 사람들까지 모함하여 폐주(廢主)에게 함부 로 죽이는 단서를 열어 놓았으며, 그 화가 뻗어나가 갑자·을축·병인년의 화를 빚어냈으며, 또 김일손의 친구들을 호되게 다스릴 것을 주장하여 선비들을 섬멸하려 하다가 노사신(盧思愼)에 의해 중지되었으니, 그 죄가 셋이요, 이세좌(李世佐...
22. 중종실록 2권, 중종 2년 4월 23일 병신 8번째기사 / 의금부가 유자광 등의 부처를 계청하니 따르다
王通) 과 한유(韓愈) 에 비하기까지 하였다. 김일손(金馹孫)이 일찍이 종직에게 수업하였는데 헌납(獻納)이 되자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권귀(權貴)를 피하지 않았다. 또 상소하여 이극돈(李克墩)이 성준(成俊)과 서로 친하여 우·이(牛李)의 당을 이룬다고 논하니, 극돈이 크게 성내었다. 사국(史局)을 개설하게 되자, 극돈이 당상(堂上)이 되어 일손의 사초에 자기의 죄악을...
23. 중종실록 3권, 중종 2년 6월 2일 갑술 5번째기사 / 무오 사화 이후 사관이 기록을 소홀히 하게 된 것에 대한 사신의 논평
조정의 논의나 상벌 등의 일에 빠진 것이 많았다. 무오 사화(戊午史禍) 연산군 4년(1498) 김종직(金宗直)이 기초한 사초(史草)에서 발단, 이극돈(李克墩)·유자광(柳子光)이 "이는 세조(世祖)를 비방한 글이다." 하여, 이를 사초에 올렸던 김일손(金馹孫) 등 김종직의 제자들이 화를 당하고, 김종직은 부관 참시(剖官斬屍)를 당한 사건. 사초(史草)로 발단되었다 하여 사화(史禍)라 함.
24. 중종실록 3권, 중종 2년 6월 10일 임오 2번째기사 / 사국에 관한 예문관 봉교 김흠조·정충량 등의 상소
, 이는 성종을 그른 임금으로 만든 것입니다. 김일손(金馹孫) 등의 사초(史草)의 허실(虛實)은 신 등이 논할 바 아닙니다. 그러나 만세의 공론으로 말하면, 당시에 사국(史局)을 맡은 자가 진실로 근엄하고 비밀하게 진위를 가리어 사실대로 쓰고 깎고 하였더라면, 위로는 조종(祖宗)에게 욕되지 않고 아래로는 역사를 더럽히지 아니하여, 사가(史家)의 쓰고 깎음[筆削]이 모...
25. 중종실록 3권, 중종 2년 6월 11일 계미 3번째기사 / 김종직·김일손 등과 관련되어 죄를 입은 자들에게 벼슬 추증을 명하다
예문관에 전교하기를, "앞서 대신들의 의논이 김종직(金宗直)·김일손(金馹孫) 등과 관련되어 죄를 입은 자는 과연 애매하다 하니, 응당 그 벼슬을 추증해야 할 것이다. 종직과 일손은 선왕께 죄를 졌으므로 그 때 추증하지 아니한 것이다." 하였다.
26. 중종실록 3권, 중종 2년 6월 18일 경인 3번째기사 / 김종직 등의 적몰 가산을 돌려 주도록 명하다
전교하기를, "지난 무오년에 죄를 입은 김종직(金宗直)·김일손(金馹孫)·권오복(權五福)·권경우(權景祐)·이목(李穆)·허반(許磐)·강겸(姜謙) 등의 적몰된 가산을 돌려주고, 그 때 추관(推官) 윤필상(尹弼商)·노사신(盧思愼)·한치형(韓致亨)·유자광(柳子光) 등에게 상으로 주었던 가사(家舍)·토지·노비(奴婢)·반당(伴倘) 등 하사했던 물건들을 도로 거두어 들이라 ." 하였다.
27. 중종실록 3권, 중종 2년 7월 15일 병진 4번째기사 / 이조 정랑 김세필이 유자광을 추국한 초사를 올리다
는데 허침(許琛)이 말하기를, ‘허반(許磐)과 김일손(金馹孫) 등이 《성종실록》에 세조(世祖)의 일을 뒤따라 썼으니 어찌 이런 말할 수 없는 황당한 무리가 있겠는가?’ 하였고, 그 뒤 이극돈(李克墩)에게 그 상세한 것을 질문하니 일일이 말하고 통분하게 여기며 말하기를, ‘허반·김일손 등이 세조를 그르다고 헐뜯어 사초(史草)에 썼는데, 대비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며...
28. 중종실록 3권, 중종 2년 7월 18일 기미 3번째기사 / 일기청 총재관 성희안 및 당상 성세명 등이 유자광의 초사에 대해 아뢰다
일기청 총재관(摠裁官) 성희안 및 당상 성세명(成世明)·신용개(申用漑)·김전(金詮)·성세순(成世純)·김봉(金崶)·정광필(鄭光弼) 등이, 김세필(金世弼)이 서계(書啓)한 단자를 가지고 빈청에 와서 아뢰기를, "이제 유자광의 초사를 보니 믿지 못할 데가 많습니다. 대체로 허침(許琛)의 사람됨은 그 본성이 망녕되지 않고 자품도 단정하나, 자광이야말로 이랬다 저랬다 하는...
29. 중종실록 3권, 중종 2년 7월 20일 신유 1번째기사 / 사간 김당이 유자광의 일을 철저히 다스리도록 아뢰다
또 자광이 허침에게 말하기를, ‘허반(許磐)·김일손(金馹孫)의 사초(史草)에 비상한 사실을 기록했다.’ 하였으니, 허반은 성종조(成宗朝)에서는 미처 등제(登 第)하지 못한 유생이었는데 무슨 사초가 있었겠습니까? 곧 거짓으로 꾸며대는 말입니다. 지금 비록 다시 자광에게 묻는다 해도 자광의 본성이 정직하지 못하니 여전히 말을 꾸며댄다면 어쩔수 없이 형장(刑杖)...
30. 중종실록 14권, 중종 6년 6월 16일 갑오 1번째기사 / 예문관 봉교 유중익이 이극돈의 환직을 비판하니 전교하다
범한 말이라는 것이다.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이것을 실어서 우리 나라 사화(士禍)의 발단이 되었다. 춘추(春秋) 춘추관. 실률(失律) 죄에 비해 법률이 경한 실수. 하니, 전교하기를, "이극돈이 과연 사국에 죄는 지었으나, 죽은 지 이미 오래고 또 여러 차례 사유(赦宥)를 거쳤으므로 직을 환급한 것이니, 추론(追論)함이 불가하다." 하였다.
31. 중종실록 14권, 중종 6년 6월 21일 기해 2번째기사 / 헌부가 소격서 혁파 등의 일로 상소하니 불허하다
헌부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 등이 보건대 소격서의 설치는 그 유래가 오랩니다. 한(漢)에는 홍경(鴻慶)·숭복관(崇福觀)이 있었고, 송(宋)에는 옥청(玉淸)·소응궁(昭應宮)이 있었는데, 사실은 노군(老君) 을 받들고 천진(天眞)에게 복을 비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무제(漢武帝)는 문성(文成) 과 오리(五利) 의 술법에 혹(惑)하고 사조(祀竈)와 연단(鍊丹)의 일을 극진히...
32. 중종실록 27권, 중종 12년 1월 22일 무술 4번째기사 / 충청도 관찰사 권민수의 졸기
기개(氣槪)가 없었으므로 근세의 명유(名儒) 김일손(金馹孫)이 항시 희롱하기를 ‘그대는 인품이나 재질이 모두 차상(次上)이다.’ 하였으니, 대개 그의 범상함을 말한 것이다. 다만 벗들과 널리 좋게 지내고 인물들을 찾아 접하되 좋고 나쁜 사람 없이 한결같아, 세상에서 미워하 는 사람이 없고 또한 나타난 과오나 큰 실수가 없었기 때문에 명성과 지위가 매우 현달하...
33. 중종실록 28권, 중종 12년 6월 6일 경술 3번째기사 / 대간이 전의 일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다
서 세조(世祖) 때의 일을 많이 알고 있으므로 김일손(金馹孫)에게 누설하고 유자광은 윤필상(尹弼商)·신수근(愼守勤)의 무리와 함께 이를 연산(燕山)에게 말하여 사림의 화[士林之禍]를 일으키게 하였다. 그런데 처음 무오 사화 때에 허씨가 호소하기를 ‘권귀인이 나의 아비를 양자로 삼았으니 그 노비(奴婢)는 모두 아비의 사물이 된 것입니다.’ 하므로 내수사에 속해 ...
34. 중종실록 29권, 중종 12년 8월 27일 경오 1번째기사 / 정순붕 등이 이학을 숭상하지 않는 풍습을 교정하도록 아뢰다
인지 몰랐는데, 이는 다름아니라 무오년 이후로 김일손(金馹孫) 등 제유(諸儒)가 잇달아 죽어서 사림(士林)의 화(禍)가 지극히 참혹하였으므로, 부형들이 이록(利祿)을 꾀하는 것만으로 자제를 가르치고 학문하는 근본을 가르치지 않아 풍속과 사습이 극도로 무너진 때문입니다. 《소학》·《대학》을 끼고 다니는 자가 있으면,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하고 웃으며 ‘이 사람은 ...
35. 중종실록 30권, 중종 12년 11월 18일 경인 3번째기사 / 정언 양팽손이 이성언을 극론하지 않는 것을 논핵하다
후세에 있는 것입니다. 폐조(廢朝) 무오년에 김일손(金馹孫)의 무리가 다 사직지신(社稷之臣)인데도 목을 잇대어 처형되었습니다. 당시에도 선악(善惡)·시비(是非)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폐조에서 형(刑)을 엄하게 하고 법을 중하게 하여 일대(一代)의 입 을 막았으므로, 말하는 사람이 없고 공론이 통하지 않아서 마침내 문란하게 되었습니다. 반정(反正)한 뒤에 선악...
36. 중종실록 31권, 중종 13년 1월 16일 병진 1번째기사 / 조강에서 충량한 사람을 뽑아 씀이 중요함과 초직에 6품직을 줌은 가볍지 않다고 아뢰다
.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도 유자광(柳子光)이 김일손(金馹孫)의 무리를 해쳤는데 이후로는 부형들이 이것으로 자제들을 경계시키고 선비된 자들 또한 이것으로 서로가 경계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폐주(廢主)는 끝내 몸을 망쳤고 곧은 말을 하고 바른 의논을 하는 선비가 없어서 종사(宗社)가 거의 무너질 뻔하였으니 사림들이 통탄하고 탄식한 바입니다. 근일에 위에서...
37. 중종실록 32권, 중종 13년 4월 28일 정유 3번째기사 / 석강에서 사습을 바로잡을 것을 아뢰다
니함을 보고 화가 조석에 일어 날 줄 알았고, 김일손(金馹孫) 도 화가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빨리 물러가지 아니한 것은 애초 강명(剛明)했던 폐조가 관대한 성종을 계승할 때 자신은 폐주를 도와서 뜻을 이루리라고 생각했을 뿐, 성종 때 재상이 벌써 그 사이에 농간을 부려 화란의 조짐이 생기게 될 것은 몰랐습니다. 이처럼 폐주를 의지하여 한번 다스림을 이루려...
38. 중종실록 33권, 중종 13년 6월 14일 임오 1번째기사 / 종묘를 바로하고, 과거의 시험 과목을 새로이 하기를 청하는 훈련원 첨정 김수돈의 상소
로 이장(移葬)하였다. 그 후 남효온(南孝溫)·김일손(金馹孫) 등의 상소를 필두로 여러 차례에 걸쳐 소릉 추복(追復)에 관한 논의가 있던 중, 중종 8년에 소세양(蘇世讓)에 의한 복릉 건의(復陵建議)가 채택되어 다음해에 현릉(顯陵:문 종의 능)으로 이장되고 소릉이란 명칭은 없어졌다. 《성종실록(成宗實錄)》. 다음은 과거의 시험 과목(科目)을 새롭게 하는 일입니다. ...
39. 중종실록 36권, 중종 14년 7월 21일 임자 3번째기사 / 경연관의 자질 문제와 원자 보양관 및 노산군에게 제사하고 소릉을 복위한 일에 대한 논의
후(端敬王后)라 한다. 지난 폐조(廢朝) 때에 김일손(金馹孫)은 군자다운 사람이었는데, 이미 권세 있는 신하들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또한 국가의 은휘(隱諱)하는 일을 직필(直筆)하였다가 마침내 무오(戊午)의 화(禍)를 입었으니, 차마 말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대저 군자들의 행사 란 자신의 일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위해 정당한 공론을 지키는 것일 뿐인...
40. 중종실록 66권, 중종 24년 10월 16일 무인 5번째기사 / 김종직과 유자광의 일을 재론한 이종익의 상소문
斯文)의 화가 어느 때나 그치겠습니까? 심지어 김일손(金馹孫)은 ‘주(周)나라가 쇠할 때 하늘이 공자(孔子)를 내어 70년 동안이나 인심을 배양했으니 안연(顔淵)이 어찌 수를 누릴 수 있겠으며, 하늘이 점필재(佔畢齋) 를 동방에 태어나게 하여 인심을 배양한 지가 이미 오래이니 나 역시 어찌 수를 누릴 수 있겠는가?’ 했습니다. 종직이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공자에게 견...
41. 중종실록 72권, 중종 27년 3월 1일 경술 1번째기사 / 박운·이행·김극성·조계상 등을 복귀시킬 것을 청한 생원 이종익의 상소문
선릉조(宣陵朝) 성종의 조정. 세상에서는 혹 김일손(金馹孫)의 무 리는 왕자(王者)의 난민(亂民)이므로 하루에 1백명 씩을 죽인들 나라에 무슨 해가 있겠느냐고 합니다. 옛사람에게 듣기로는 ‘어떤 부마(駙馬)가 잠시 학조(學祖)를 능멸하자, 성종 대왕이 곧 뜰로 불러 「나도 이 중의 거짓됨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그가 왕사(王師)이므로 감히 업신여기지 못하는데, 너...
42. 중종실록 74권, 중종 28년 5월 28일 경오 1번째기사 / 종묘에 고하는 제사에 대해 하문하다
있었는가?" 하니, 순손이 아뢰기를, "신이 검상(檢詳)으로 있을 적에 김일손(金馹孫)의 죄를 다스린 뒤 종묘에 고했었습니다. 그러나 하례를 받았는지는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효원도 아뢰기를, "하례를 받고 종묘에 고하는 일은 전례를 조사해 보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하였는데, 전교하였다. "알았다. 하례는 받지 않더라도 종묘에 고하는 것은 폐할 수 없다."
43. 중종실록 102권, 중종 39년 4월 7일 을해 2번째기사 / 기묘 사화에 대한 홍문관 부제학 송세형 등의 상소문
라고 했었다. 《송사(宋史)》 권 314. 【 김일손(金馹孫) 등의 사화(史禍)를 가리킨다.】 갑자(甲子)의 화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尹氏)의 폐출(廢黜)과 복위(復位)로 인한 사화. 성종의 후궁들 및 아들 둘과 김굉필(金宏弼)·윤필상(尹弼商)·이극균(李克均)·이세좌(李世佐) 등은 죽이고, 한명회(韓明澮)·정여창(鄭汝昌)·남 효온(南孝溫) 등은 부관 참시(剖棺斬屍) 했었다...
44. 중종실록 103권, 중종 39년 5월 29일 병인 2번째기사 / 성균관 생원 신백령이 조광조의 신원을 요청하는 상소
무오년·갑자년 무오년은 연산군 4년(1498)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 사류(新進士類)들이 유자광(柳子光)을 위시한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화를 입은 해. 갑자년은 연산군 10년(1504)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尹氏)의 복위(復位) 문제로 대비(大妃)·후궁(後宮) 및 많은 전직 또는 현직 관원들이 살해되고 귀양가고 부관 참시(剖棺斬屍)되었다. 전하께서 인재를 교육하...
45. 중종실록 105권, 중종 39년 12월 21일 을유 3번째기사 / 상례의 잘못을 지적하는 성균관 생원 신백령 등의 상소
의 변과 기묘년의 화 연산군 4년(1498)에 김일손(金馹孫) 등 사 림파(士林派)가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화를 당한 무오 사화와 중종 14년(1519)에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사류들이 훈구파에게 화를 당한 기묘 사화를 말한다. 신들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지금 힘쓸 일은 공도(公道)를 여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없습니다. 공도가 열리지 않으면 염치의 도가 무너지고...
46. 명종실록 28권, 명종 17년 2월 25일 기묘 1번째기사 / 홍천민·윤의중·박계현 등에게 정일 집중 등에 대해 논란하게 하다
李荇)의 시가 훌륭하였다. 박은(朴誾)의 시와 김일손(金馹孫)의 문(文)도 그 짝을 찾기가 힘들다." "선조(先朝) 때에 나세찬이 책문(策文)을 제술했다가 김안로에게 해침을 당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책문의 내용은 중화(中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김안로는 그것이 자기를 비난한 것이라고 의심했습니다. 그 때문에 죄주었던 것입니다." "난정(蘭亭)에...
47. 선조실록 1권, 선조 즉위년 10월 23일 갑진 2번째기사 / 상이 조강에서 《대학》을 강하고 기대승이 기묘년 이후의 시비를 가릴 것을 청하다
행함. 사화(史禍) 무오 사화. 문도(門徒) 김일손( 金馹孫)을 말함. 갑자년 1504 연산군 10년. 지금 조정에서 분명하게 시비를 밝힐 수는 없으나 부득이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한 뒤에야 인심이 기뻐하며 복종할 것입니다. 이언적은 이미 사유(赦宥)를 받았는데 비단 죄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학문과 행실은 근래에 없던 인물입니다. 지난날 중국 사신이...
48. 선조실록 74권, 선조 29년 4월 2일 무술 1번째기사 / 유성룡이 노모를 만나고 돌아오자 영남의 정세를 묻고 여러 가지 정사를 논의하다
성(可隱山城)이 있어 그 형세가 몹시 좋은데, 김일손(金馹孫)의 《이락록(以樂綠)》 에 실 려 있습니다. 대개 죽령은 적이 넘을 수 없고, 죽령을 넘어 단양에 이르기까지는 형세가 매우 험준하며, 도로 또한 몹시 험난합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두 산이 벽립(壁立)하고 기암(奇巖)이 높이 솟아 있는데 김일손의 기록 중에는 서골암(栖鶻巖)이란 이름이 붙여져 있습니다. 지...
49. 선조실록 166권, 선조 36년 9월 9일 임술 1번째기사 / 전대 임금의 능묘의 일을 의논하다
書) 길재(吉再)의 묘, 청도( 淸道)에 있는 김일손(金馹孫)의 묘, 밀양(密陽)에 있는 문간공(文簡公) 김종직(金宗直)의 묘, 흥해(興海)에 있는 증 영의정 이언적(李彦迪)의 묘, 함양(咸陽)에 있는 증 우의정(贈右議政)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의 묘, 현풍(玄風)에 있는 증 영의정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의 묘, 경기 장단(長湍)에 있는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
50. 선조수정실록 21권, 선조 [수정실록] 20년 9월 1일 정해 8번째기사 / 공주 교수 조헌이 소장을 올렸는데 감사가 받지 않자 사임하고 귀향하다
勳舊派)가 학자를 싫어하는 연산군을 충동질하여 김일손(金馹孫) 등 사림파(士林派)를 대거 처단한 일. 기묘년 1519 중종 14년. 사숭지(史嵩之) 가 송(宋)나라의 정권을 잡고 있을 적에 아비의 병을 간호하지 않다가 상을 당하게 되었는데도 기복(起復)되기를 바 라면서 지류(遲留)하며 떠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집정(執政)이나 시종(侍從)이 사숭지의 팔다리와 우익이었고 대간...
51. 광해군일기[중초본] 55권, 광해 4년 7월 11일 계묘 7번째기사 / 전 동지중추부사 최립의 졸기
서거정(徐居 正)·김종직(金宗直)·성현(成俔)·김일손(金馹孫) 같은 이와 근세의 노수신(盧守愼) 같은 무리가 적지 않게 있다. 비록 대소 활협(大小闊狹)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당대의 성대함으로 자처하기에는 충분하였다. 그러나 그 문체를 살펴보면 논의의 소지가 없지 않아 중국의 여러 대가와는 화이(華夷)의 차이가 있었다. 최립의 문장은 날카로운 의지와 담박한 의사...
52. 광해군일기[중초본] 147권, 광해 11년 12월 26일 을해 2번째기사 / 상지관 김일손을 빨리 잡아오도록 명함
전교하였다. "부안(扶安) 땅에 내려가서 상지관(相地官) 김일손(金馹孫)을 빨리 잡아서 올려 보내라고 〈전라 감사에게 하유하라.〉"
53. 광해군일기[정초본] 55권, 광해 4년 7월 11일 계묘 6번째기사 / 전 동지중추부사 최립의 졸기
서거정(徐居 正)·김종직(金宗直)·성현(成俔)·김일손(金馹孫) 같은 이와 근세의 노수신(盧守愼) 같은 무리가 적지 않게 있다. 비록 대소 활협(大小闊狹)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당대의 성대함으로 자처하기에는 충분하였다. 그러나 그 문체를 살펴보면 논의의 소지가 없지 않아 중국의 여러 대가와는 화이(華夷)의 차이가 있었다. 최립의 문장은 날카로운 의지와 담박한 의사...
54. 광해군일기[정초본] 147권, 광해 11년 12월 26일 을해 2번째기사 / 상지관 김일손을 빨리 잡아오도록 명함
전교하였다. "부안(扶安) 땅에 내려가서 상지관(相地官) 김일손(金馹孫)을 빨리 잡아서 올려 보내라. "
55. 인조실록 30권, 인조 12년 12월 11일 계사 1번째기사 / 이홍주 등이 사관이 기록한 일기를 열람하고 전최하기 시작하다
것을 싫어하여 사화(史禍)를 얽어 만들었는데, 김일손(金馹孫)·박은(朴誾)의 무리들이 모두 이로 인해 죽임을 당하였다. 중종 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자 비로소 그 폐단을 고쳤다. 계해년 초에 훈신 김류가 또 본관 당상으로서 사초를 보는 폐단을 열어놓자, 이 홍주 등이 준례를 삼아 전최하는 날에 사관이 기록한 일기를 가져다가 점검하는 것처럼 일일이 살펴...
56. 인조실록 31권, 인조 13년 2월 17일 무술 1번째기사 / 성종 대왕의 세실에 대한 응행 절목을 논의하다
과 같습니다. 김극뉴(金克忸)·이무의(李茂宜)·김일손(金馹孫)·한훈(韓訓)·이주(李胄) 등이 간원에서 헌의하기를 ‘한 경제(漢景帝) 원년에 승상 신도가(申屠嘉) 등이 상주하기를, 「공으로는 고황제(高皇帝)보다 더 큰 이가 없으니 고황제는 당연히 황제로서의 태조묘(太祖廟)를 세우고 덕으로는 문황제(文皇帝)보다 더 높은 이가 없으니 문황제는 당연히 황제로...
57. 인조실록 31권, 인조 13년 3월 4일 갑인 2번째기사 / 최명길이 세실의 제도에 대해 아뢰다
도 다 직접 보고 들은 것에서 나왔을 뿐더러, 김일손(金馹孫)·이주(李胄)는 문장과 학술이 한 시대에 우뚝 뛰어나서 오늘날까지 사람의 칭송을 받고 있으니, 그들의 말은 참으로 백세토록 바뀌지 않을 공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때 예관(禮官)이 주나라 문왕과 무왕의 세실에 대한 고사를 끌어대어 대수가 다할 때까지 보류해 두려고 한 것은, 당시 선비들의 마음에 ...
58. 효종실록 6권, 효종 2년 6월 6일 신해 3번째기사 / 부사과 민정중이 왕도·외직 임용·언로의 확대·기강 확립에 대해 아뢰다
신·예관(禮官)과 간신(諫臣) 김극뉵(金克忸)·김일손(金馹孫) 등이 헌의한 글이 있습니다. 그 당시 대신·예관·대각(臺閣)으로 하여금 다 의논에 참여하게 하였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그 예를 중시했던 경향은 이와 같았으며, 그 후 선조(先朝)에 헌의할 때에는 그때의 헌의를 상고해 낸 다음에 뭇사람의 의논이 비로소 결정되었습니다. 대체로 열성(列聖)의 세실...
59. 현종실록 2권, 현종 1년 2월 19일 갑진 2번째기사 / 체류되어 있는 공문서를 결재하다
타이르기만 하고 허락치 않았다. 준길이, 이어 김일손(金馹孫)에게는 증직을, 송인수(宋麟壽)·오윤겸(吳允謙)에게는 증시할 것을 청하자, 상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준길이 또 아뢰기를, "관시(館試)의 정원이 50명에 불과한데 근래 원점(圓點)의 선비는 그 수가 1백 명 가까이 되어 앞으로 시험을 거쳐 뽑을 때 낙방자가 거의 절반이나 되겠으니, 고생해 가면서 공부했다...
60. 현종실록 2권, 현종 1년 3월 7일 임술 1번째기사 / 흥정당에 나아가 송준길을 인견하고 서원 청액 상소에 대해 의논하다
경상도 청도(淸道) 선비 이광정(李光鼎) 등이 김일손(金馹孫) 등을 위하여 서원 청액(請額)을 한 상소문을 읽으니, 상이 우참찬을 오라고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이조에 있을 때 일손의 자손들이 상언하여 증직을 청하여 왔었는데, 그 일이 자손으로서는 일 체계상 부당한 일이었기 때문에 방계(防啓)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번 탑전에서는 감히...
61. 현종실록 2권, 현종 1년 3월 18일 계유 2번째기사 / 흥정당에 나아가다. 대신들이 윤휴의 상소문 건 등에 대해 아뢰다
던 그 자이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김일손(金馹孫)은 어떠한 인물인가?" 하여, 정위가 아뢰기를, "일손은 김종직(金宗直)에게 수업하여 문장(文章)으로 세상에 이름났고 연산군 때 화를 당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 르기를, "그에게는 허락하되 뒤에 그를 전례로 삼지는 말라." 하였다. 정위가 또 영릉 참봉(寧陵參奉)이 보고한, 토련(土蓮)을 봉진하지 말자는 건에...
62. 현종개수실록 2권, 현종 [개수실록] 1년 2월 19일 갑진 2번째기사 / 상이 승지에게 명하여 공사를 가지고 입시하게 하다
諭)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준길이 아뢰기를, "김일손(金馹孫)은 연산조(燕山朝) 때 참화(慘禍)를 입었고, 송인수(宋麟壽)는 충효가 지극하고 덕선(德善)이 구비된 인물인데 역시 정미년에 참화를 당했으니, 모두 증작(贈爵)해야 마땅합니다. 오윤겸(吳允謙)은 인조조(仁祖朝)의 명재상으로서 청백하고 유아(儒雅)한 인물인데 임종 때에 그 자손들을 경계시키며 시호를...
63. 현종개수실록 2권, 현종 [개수실록] 1년 3월 7일 임술 1번째기사 /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우참찬 송준길 등을 인견하다
도(淸道)의 사인(士人) 이광정(李光鼎) 등이 김일손(金馹孫) 등의 서원(書院)에 사액을 청한 소를 읽자, 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이조에서 직책을 수행하고 있을 때 일손의 자손이 상언(上言)하여 증직(贈職)을 청했습니다만, 자손이 된 입장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사체상으로 타 당하지 않기 때문에 방계(防啓)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번에 신이 탑전에서...
64. 현종개수실록 2권, 현종 [개수실록] 1년 3월 18일 계유 3번째기사 / 도승지 김수항, 좌승지 오정위, 우승지 이은상이 공사를 가지고 입시하다
청했던 인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일손(金馹孫)은 어떤 사람인가?" 하자, 정위가 아뢰기를, "일손은 김종직(金宗直)에게 수업(受業)하였는데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고 연산군 때 화를 당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허락해 주되, 뒤에 가서 이를 관례로 삼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정위가 또 영릉 참봉(寧陵參奉)이 보고한 바 토련(土蓮)을 정봉(停封)하는 일...
65. 현종개수실록 26권, 현종 [개수실록] 14년 1월 3일 갑술 1번째기사 / 좌상 김수항이 상의 책려하고 신칙하는 방법에 소홀함이 있음을 아뢰다
일이 흡사 그릇을 다 만들었다가 깨뜨리는 것과 같이 되었으니 정말 애석합니다." 하였다. 교리 이규령(李奎齡)이 아뢰기를, "안동(安東) 사람인 고(故) 교리 이종준(李宗準)은 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무오 사화(戊午史禍) 때 죽었는데, 뒤에 신리(伸理)되기는 했어도 아직까지 추증(追贈)되지 않았으니, 참으로 흠전(欠典)이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증직하도록 명하였다.
66. 숙종실록 60권, 숙종 43년 8월 28일 기유 1번째기사 / 제조 민진후의 건의로 이목에게 증시하다
壤)에까지 미쳤습니다. 같은 시대에 화를 입은 김일손(金馹孫) 등 여러 현인(賢人)들은 모두 이미 역명(易名)의 은전(恩典)이 내렸는데도 이목(李穆)의 경우는 그의 후손(後孫)인 이기혁(李基赫)이 상언(上言)하여 증직(贈職)을 얻는 데 그쳤을 뿐 아직 시호(諡號)를 내리는 것을 그만둘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반궁(泮宮) 성균관. 무오 사화(戊午士禍) 연산군 4년(1498)에 유...
67. 영조실록 13권, 영조 3년 10월 26일 무신 1번째기사 / 부사직 김유경이 사서 개찬과 김일경 일당의 국정 운영을 비판하니 절도로 안치하다
제문(弔義帝文)을 빌미로 무오 사화를 일으켜, 김일손(金馹孫)을 비롯한 많은 선비들이 죽음을 당하고 쫓겨났음. 이사(李斯)와 같은 분서(焚書)의 변이 이사(李斯)는 순경(荀卿)의 제자로, 진 시황(秦始皇)이 천하를 평정하자 승상(丞相)이 되었는데, 진 시황 즉위 34년에 학자들의 정치 비평을 금하기 위하여 진 시황으로 하여금 민간에서 가지고 있는 의약(醫藥 )·복서(卜...
68. 정조실록 54권, 정조 24년 5월 2일 계미 3번째기사 / 고 교리 권경유의 증직, 유취장·심진의 증시, 금군 별장 최동악의 사판 삭제 등을 결정 하다
는 문간공(文簡公)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김일손(金馹孫)과 함께 무오 사화에 죽었는데 그 덕량과 문행(文行)은 한때 사류들로부터 크게 인정을 받았으나 죽은 뒤에 집에 소장하고 있는 그의 글이 흐지부 지 없어져 전해오는 것이 없고 게다가 후손도 없어 수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유풍과 여운은 그저 그 고을 선비들의 경모 대상으로만 남아 있을 따름입니다....
69. 순조실록 31권, 순조 30년 10월 30일 갑인 3번째기사 / 박여룡·채득기·김일손 등에게 가증 등을 하다
이조 정랑(吏曹正郞) 김일손(金馹孫)에게는 가증(加贈)하고 시호(諡號)를 내리도록 명하였는데, 예조에서 유생(儒生)들의 호소로 인하여 대신(大臣)에게 의논해서 청하였기 때문이었다. 박여룡은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의 문인(門人)이고, 채득기는 명(明)나 라를 높이는 의리를 스스로 지킨 자이며, 김일손은 연산조(燕山朝) 무오 사화(戊午史禍) 때에 원통하게 죽은 자이다.
70. 순조실록 34권, 순조 34년 5월 30일 갑오 4번째기사 / 시호 의망에 대하여 비답을 내리다
시호 의망에 대하여 비답을 내렸다. 좌의정 김사목(金思穆)은 경헌(敬獻), 이조 판서 조득영(趙得永)은 문충(文忠), 이조 판서 한용탁(韓用鐸)은 정헌(靖獻), 이조 판서 김종정(金鍾正)은 청헌(淸獻), 호조 판서 이태중(李台重)은 문경(文敬), 예조 판서 이정보(李鼎輔)는 문간(文簡), 형조 판서 정범조(丁範祖)는 문헌(文獻), 공조 판서 정방(鄭枋)은 효 헌(孝憲), 봉조하...
71. 고종실록 22권, 고종 22년 3월 6일 을사 4번째기사 / 문충공 김종직 등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경상도 유생 강복영 등이 상소하다
경상도(慶尙道) 유생(儒生) 강복영(姜福永) 등이 상소하여, 문충공(文忠公) 김종직(金宗直), 문민공(文敏公) 김일손(金馹孫)을 문묘(文廟)에 배향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양현(兩賢)의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서 선비들의 스승으로 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진달한 바와 같다. 그러나 배향하는 은전은 사체가 중대하여 대번에 논의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하였다 .
72. 고종실록 22권, 고종 22년 4월 9일 정축 2번째기사 / 김종직 등을 문묘에 배향하도록 이계호 등이 상소하다
전라도(全羅道) 유생(儒生) 이계호(李啓鎬) 등이 상소하여 문충공(文忠公) 김종직(金宗直), 문민공(文敏公) 김일손(金馹孫)을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종사(從祀)하는 문제는 사체(事體)가 중대한 것이므로 갑자기 토의하기 어렵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경상도(慶尙道) 유생에게 내린 비답에서 모두 말하였다." 하였다.
73. 고종실록 22권, 고종 22년 5월 19일 정사 5번째기사 / 김종직과 김일손 등을 문묘에 배향하도록 황익희 등이 상소하다
공(文忠公) 김종직(金宗直), 문민공(文敏公) 김일손(金馹孫),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 문순공(文純公) 권상하(權尙夏), 문정공(文貞公) 민유중(閔維重) 등 오현(五賢)을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어진 이를 사모하고 도를 높이는 일인데 어찌 그대들의 말을 기다리겠는가? 문묘에 배향하는 문제는 사체(事體)가 매우 신중하고도 중대...
74. 고종실록 42권, 고종 39년 8월 23일 양력 1번째기사 / 안종덕 등이 예법에 대한 상소를 올리다
판서(吏曹判書)를 추증받은 문민공(文愍公) 신 김일손(金馹孫)이 참화를 입을 때 형제와 삼촌, 조카들도 모두 귀양을 갔으며 아들 딸마저 없었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던 초기에 그의 처 김씨의 분부로 그의 맏형인 직제학(直提學) 신 김준손(金駿孫)의 둘째 아들인 김대장(金大壯)을 양 자로 삼았습니다. 대장은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아들 김갱(金鏗)은 아들이 없었으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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