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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에서 백제를 만나고, 너를 만나고
김정숙 명예교수(역사학과)
[추억을 공유한 이들, 만남의 공간을 열고]
2022년 5월 18일, 아침 햇빛이 막 기운을 싣기 시작하고 있었다. 어린이회관 주차장에 일등으로 도착했다. 아직 버스도 오지 않았다. 소풍간다고 설레여서이기도 하지만, 실은 집행진의 차를 얻어탔기 때문에 일찍 현장에 나타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팀의 도착 모습을 처음부터 살필 수 있었다.
곧 Early Bird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잘 지내시죠?” “그동안 좋은 일 많으셨어요?” 다양한 인사에 새우는 소리가 묻혔다. 학교 이후 어디서 무얼하며 어떻게 지내는지 등을 묻는다. 사실은 학교 캠퍼스가 커서인지 같은 학교에서 근무했지만 처음 보는 분도 있고, 보긴 했어도 말을 나눈 적이 없는 분도 있다. 그럼에도 30여년을 같은 직장명으로 지낸 공감대가 바탕이 되어 스스럼이 없다.
곧 버스가 왔고, 각자 솔선수범해서 보이는 일들을 도우며 출발 준비를 했다. 개인용 간식 봉지를 보며 감탄했다. 물, 사탕, 초콜릿, 떡, 과일..... 골고루도 챙겼다. 명예교수회 운영간사는 남자 교수다(이분의 활약은 이것이 끝이 아니다. 차차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아직도 남녀 편견에 젖어 있는 것인지, 간사의 정성에, ‘그래도 명색이 여교수인데’라는 미안함이 들었다. 그래서 이제는 현직에서 떠난 ‘헌 교수편’에 속하는지 모른다.
어쨌든 나는 학교 다니면서 극히 소수인 여자 인원에 속했다. 전공이 역사여서인지 거의 남자 동료들과 활동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명예교수회에는 현직 때보다도 여자가 더 적다. 이번 답사에 배우자들이 함께 하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또 눈치를 보니, 사모님들끼리 초면이 아닌 분들도 있었다. 언젠가는 남녀교수 모두 부부 동반하여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되겠지. 배우자까지 만나면 동료들의 만남이 두 세배로 넓어지지 않을까?
물론, 재직 중에 있던 인연도 더욱 새롭게 꾸려진다. 이원경 교수님은 영대 부임 초기 AID아파트에 살 때 옆집이셨다. 그분이 퇴직할 때도 보지 못했는데, 반갑게도 여기서 만났다. 또 당시 버스에서 최고참이시지 싶은 도명기 교수님은, “나는 김 교수 제자잖아.”라고 하셔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영대 박물관에서는 대구시청 의뢰로 대구 시내 유적지에 배치될 ‘문화해설사’ 육성 교육을 했다. 당시 이미 정년을 하신 도 교수님은 일본어로 해설하시고 싶다고 이 과정에 신청하셨다. 벌써 십년을 두 번쯤 지난 일인 것 같다. 그때 수업을 들으시던 도 교수님을 어려워했고, 또 부러워했다. 지금은 농사를 짓고 계신다고 하는데, 건강도 생각도 여전히 ‘청춘’이시다.
같은 버스를 타면서, 대학에서 각자 따로 일했던 사람들이 공감된 호흡을 시작했다. 원래 교수란 자신의 분야에서는 최고의 경험과 노력, 지식을 소유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만큼 사회를 모른다고 하던가? 각자의 좁고 깊은 세계가 합쳐 일반생활에 유용한 더 넓고 둥근 지혜를 만들 것이다. 이것이 명예교수들 만남의 신묘한 산물이 되겠지. 그 지름길은 물론 한국인의 역사 시간을 누비며 다져질 것이다. 이제 출발이다.
우리는 예정된 7시 30분 정각에 출발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각에 차에 오른 이가 있다. 박종갑 교수님은 일찍 나와서 평소에 모이던 법원 주차장 앞에서 기다렸단다. 시간이 다 되어서 출발장소가 어긋났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사모님의 도움으로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추었다. 버스 안의 행사는 출발 정각에 도착한 이에게 박수를 쳐주면서 시작되었다. 김봉식 회장 교수님의 감사 인사로 시작해서 사전답사까지 철저히 마친 운영위원장의 일정 소개가 있었다. 차 안에는 먹을 것이 풍부했고, 할 이야기들도 많았다. 휴게소도 두 번이나 들렀다. 금강휴게소를 지나고 내 차례가 왔다. 즉 역사 선생이 차를 타니 구색을 갖추려는 집행진은 나보고 부여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라고 했다. 폐업한지 3년이나 되기때문에 할 말이 없다고 했더니, 폐업해도 3년은 간다면서 짧게만 하면 된다고 했다. ”그러면 잔고 처리를 해 봐~???“
그런데 대구에서 부여는 승용차로 대략 3시간 거리이다. 전공만으로 50년 가까이를 살았는데, 백제 700여년, 부여만도 120여 년 세월을 30분 안에 설명하란다. 이것은 또다른 재주를 요하는 일이었다. 젊었을 때 버스를 타고 하루종일 서서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유적지 설명을 하던 일이 생각났다. 대학에서는 물론 학생들이 답사 계획을 짜고, 설명하기때문에 교수는 잘 들어주기만 하면 된다. 자, 한마디를 하면 열마디를 알아듣는 교수들에게 열마디를 꿰는 한단어는 무엇일까? 더구나 전공이 아닌 분들에게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은 유혹도 일어서 내게는 어려운 훈련이었다. 집행진은 30분이 넘으면 지루하겠다고 판단한 것 같다. 끝나고 보니 그 판단은 적중한 것 같다.
[꿈꾸는 백마강]
“백제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그리고 왜 부여인가만 느끼면 되리라.” 일단 나는 새벽에 삶은 달걀을 여성 참가자들에게 한 개씩 나누어주었다. 달걀은 비싼 것도 아니지만, 차별적으로 지급하면서 그 참여를 감사했다. 그리고는 느닷없이 노래하겠다고 했다. 갑자기 모두 집중했다. 이런 때 정말 제대로 노래 한곡 뽑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나는 필요한 경우에 필요한 만큼의 효과를 낼 수 있는 음악 소질이 없다.
Youtube를 켜고, 「꿈꾸는 백마강」을 시작했다. 가수 이인권(일명 임영일, 1919-1973)이 1940년에 부른 곡이다. 이 노래는 백제의 멸망에 대한 내용이 있어 조선총독부에서 발매 금지당했고, 광복 이후에는 작사자 조명암이 월북해 금지곡이 되기도 했다. 아무튼 뽕짝의 매력은 사람들이 쉽게 따라 한다는 것이다. 몇 사람은 따라하고, 그러면서 관심이 발동했다. 나는 비오는 날, 백마강 유람선 위에서 이 노래를 들은 적이 있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 잊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 / 낙화암 그늘에 울어나 보자.....
고대사 연구자들끼리 노래로 왕조를 소개할 수 있기를 희망한 적이 있다. 그나마 나와있는 노래로서 ‘신라의 달밤’(신라), ‘눈물젖은 두만강’과 ‘한 많은 대동강’(고구려) 등을 꼽았다. 백제는 이 곡이었다. 답사팀은 부소산을 오르며, 보다 더 적당한 노래가 없는가 토론하기도 했다.
부여는 가까운 사람과 조용히 걸으면 알맞을 포근한 동네이다. 단층짜리 집이 주욱 늘어서 있어 반가운, 현재 인구 7만인 군(郡)이다. 그 안에 천년이란 단위를 훌쩍 넘는 유적들이 조밀조밀 모여있어서 하루종일 걸으면 깊이 있는 ‘철학인’이 되었다는 자신감이 생기는 곳이다. 유적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금방이라도 장작 때는 냄새가 코를 스칠 것 같고, 어디선가 추운 날 가게 안에 있는 호빵 통에 언 손을 대면서 빵 하나를 주문하던 그런 구멍가게가 불쑥 나타날 것 같은 동네이다.
이런 소박함을 두고 일제 강점기 육당 선생부터 여러 인사들이 백제의 멸망과 연관지어 애잔함을 드러냈다. ‘꿈꾸는 백마강’도 그런 선상에서 나온 노래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역사 위에 멸망하지 않은 왕조가 있는가? 물론, 백제에 대한 기록이 고대 삼국 중에 가장 적다는 아쉬움은 있다. 그러나 그 공백은 지속적으로 출토되는 유물들이 채워가고 있다.
나는 명예교수회에서 역사탐방을 한다고 할 때 왜 역사 답사냐고 묻지 않았다. 그것은 당연한 일일 테니까. 다만, 왜 부여를 택했냐고 물었다. 집행진에서는 백제지역이 무척 많이 변했고, 또 잘 가보지 못하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 한국사 관련 유적들은 전공자도 이삼년 전에 가본 것 가지고는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변하고 있다. 게다가 지방자치제도가 실시되면서 각 지자체에서는 마음으로 보아야 하는 시간을 눈으로 보게 하겠다고 여러 시설들을 설치한다. 내가 대학시절에 찍은 유적 사진이 ‘역사자료’가 될 지경으로 유적 주변이 변하고 있다.
조용하던 공주나 부여에는 김종필이 김대중과 연대하며 두 번째 총리가 되었을 무렵부터 크게 투자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백제 다시 세우기’였다. 삼국시대 이후에도 고려, 조선왕조 500년씩, 그리고 대한민국으로 이어졌는데, 왜 유독 백제시대에 집착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백제 전공자들은 그 시대는 ‘왕도’였기 때문이란다. 번다한 현대의 생활에서 1500년이 넘는 백제의 왕도에 머무르고자 하는 부여가 고맙다. 관광지를 만들기 위해 자꾸 손을 대어도 조금만 주의해 걷어내면 백제의 진품과 고즈넉한 역사시간을 향유할 수 있다. 더욱이 근래에는 수십 권에 이르는 백제 관련 단행본들이 발간되어 크게 도움이 된다.
[백제 700년 왕조(B.C. 18 - A.D. 660)와 수도 부여]
백제왕조는 서울 500여년, 공주 60여년, 부여에 120여년 도읍했다. 그래서 백제의 역사를 한성백제(B.C.18∼A.D.475), 웅진백제(475∼538), 사비백제(538∼660)로 나누기도 한다. 백제는 한성이 장수왕에게 함락되고 급히 공주로 천도했다가, 국력을 회복하고, 철저한 준비를 하여 부여로 옮겼다. 물론, 도읍을 옮길 때마다 큰 사건이 있고, 지배구조가 변한다. 부여는 538년부터 660년 멸망 때까지 122년 도읍지였다. 백제 문화의 최전성기 지역이다.
부여군은 충청남도 서남부에 위치하여 동쪽으로 논산시, 서쪽으로 보령시와 서천군, 북쪽으로 청양군과 공주시, 남쪽으로 전라북도 익산시, 군산시와 접한다.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금강이 흐르며, 비옥한 충적평야를 형성한다. 강은 방어에 유리하고 또 넓은 평야가 경제적으로도 유용했다. 부여의 도성 계획은 아주 정연했는데, 가령 현재 원형을 추정하기에 가장 풍부한 자료를 가지고 있는 서울과 비교하면 이렇다. 남산 일대에서 동대문, 북한산 쪽으로 이어지는 성은 한성의 나성(羅城)이라고 한다. 부여(사비성)의 나성은 능산리 고분군 뒤쪽으로 남아있다. 즉 사비도성은 북쪽과 동쪽에 나성이 있었고, 서측과 남측은 백마강을 자연방어 시설로 활용했다. 나성 외곽에는 청마산성 등 5개의 성이 서울의 남한산성이나 북한산성처럼 난을 피하기 위한 성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이와는 달리, 부소산성은 이름이 산성이어서 혼돈을 주는데, 이는 산성이라기보다는 평화 시에는 마치 창덕궁의 후원(일명 비원)처럼 궁궐의 후원 역할을 했다. 다만, 부소산은 해발 106m 밖에 안되지만 북쪽으로 백마강이 흐르기 때문에 방어역할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왕궁은 부소산성 아래 쪽에 위치한 관북리 유적 일대이다. 지금 부여박물관 있는 곳도 그 영역에 해당된다. 시가는 왕궁에서부터 남북 대로를 중심으로 사방이 바둑판처럼 짜여졌다. 궁남지에 이르는 지역까지 몇몇 발굴지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집행진에서는 이런 시가지 모습을 보기 위해 이를 조성해 놓은 백제문화단지를 답사 일정에 넣었다).
그러므로 부여에서는 관북리 왕궁 유적· 부소산성과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와 부여 나성 등 4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백제역사 유적’으로 등재되었다. 그외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은 부여박물관, 궁남지 등이다. 우리는 오전에 정림사지와 부소산성을 방문하고, 점심먹고 백제문화단지로 갔다. 그리고 이른 저녁을 먹고 궁남지를 거쳐 돌아오는 버스에 올랐다. 상당히 많은 유적을 남겨두고 왔다.
한편, 백제왕 34명 중에서 마지막 여섯 왕이 이곳에서 통치했다. 성왕부터 위덕왕, 혜왕, 법왕, 무왕, 의자왕이다. 성왕은 무령왕 대에 이루어진 안정과 번영을 기반으로 538년(성왕 16) 부여로 천도를 단행하고 국호 ‘남부여’로 개칭했다(참고로 우리 역사에는 북부여, 동부여, 이 남부여 하여 부여왕조가 셋 있다. 그리고 아버지 무령왕의 위력은 공주 무령왕릉에서 볼 수 있다).
성왕은 불교를 보호하고. 중국 남조와 교류하고 일본에도 학자들을 파견하는 등 문화진흥에도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다. 중흥을 이룩한 성왕은 한성이 함락되면서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회복하기 위해 신라·가야군과 연합군을 형성해서 목적을 달성했다. 그렇지만 전쟁이 끝나고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해 버리자, 성왕은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라를 공격했다. 불행히도 왕은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아버지 성왕이 구하러 나갔던 왕자 여창은 목숨을 건지고 즉위하여 위덕왕이 되었다. 그러나 신라정벌을 반대했던 귀족들은 왕에게 책임을 물으며 실권을 장악했다. 위덕왕은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능사를 창건했고, 죽은 왕자를 위해 왕흥사를 창건하고, 왕권강화를 추구했다. 그러나 뒤를 이은 혜왕, 법왕이 각각 즉위 1년 여만에 죽었다. 법왕이 죽자 귀족들은 왕족 중에 한명을 선택하여 왕을 세웠다. 무왕이다. 그리고 무왕의 아들이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다.
부소산성, 왕궁, 정림사 등에서는 성왕을 볼 수 있고, 능산리 묘에서는 성왕의 극락왕생을 비는 능사 유적, 궁남지에서는 이를 만든 무왕의 역사를 볼 수 있다. 의자왕은 다시 공주로 피신해 간다.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박물관]
우리는 부여박물관 앞에 차를 세우고 바로 정림사지로 들어섰다. 신분증을 가지고 오라고 한 효력을 마음껏 발산하며 무료 입장했다. 오로지 한분, 남두현 교수 사모님만이 표를 사야했다. 늘 주책을 떠는 나는 오늘 표를 산 사람은 한턱내야 한다고 소리 질렀다. 젊음은 한턱 낼만큼 자랑스러운 것이니까.
정문을 들어서면 정림사 오층석탑이 모든 이를 끌어당긴다. 전에는 들판에 혼자 서 있는 탑이었으나, 현재는 절터가 발굴되어 눈 밝은 이는 절의 규모와 이 탑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백제가 멸망한 후 이 탑의 1층 탑신석에 소정방이 자신의 공적을 과시한 '대당평백제국비명'을 새겨 오랫동안 평제탑이라고 불렸으나, 이미 존재하던 비에 글을 새겼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석탑은 백제 석탑의 전형적 양식을 지니고 있다. 탑은 각각 옥개석(탑신의 지붕)이 있는 것을 층으로 세고 그 밑은 기단부, 탑신 맨 위 장식을 상륜부라 부른다. 정림사 5층탑의 형태를 눈에 익혀두는 것은 중요하다. 백제의 탑이 이런 유형이기 때문이다. 3층 석탑이 주를 이루는 신라탑과는 탑신의 체감률, 옥개석 등에서 차이를 보인다.
중국은 전탑, 한국은 석탑, 일본은 목탑을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초기에는 목탑을 세웠다가 시간이 가면서 보다 견고한 돌로 바꾸었다. 이 변화 과정에서 익산 미륵사탑은 목조탑 모습을 띠는 석탑으로, 정림사탑은 석탑의 양식을 세우면서 아직 목탑의 흔적을 지닌 탑으로 남게 되었다. 이는 고유섭 선생의 분류이다. 그리고 정립사탑의 구조를 정확히 실측한 사람은 석굴암을 측량한 요네다 미요지이다. 중심에서 어느 점을 잇더라도 비례가 맞는 조형물이며, 기준은 고구려 자로 7척이다. 탑신의 각층은 0.1척씩 줄이는 등 과학적 미학을 충실히 살려낸 이 탑은 그 양식의 고유성, 유구성, 한국탑 역사에서 점하는 위치 등이 고려되어 국보 9호로 지정되었다.
정림사는 백제 성왕이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세운 절이다. 정림사지의 현재 입구에서 가장 먼 곳에는 높이 5.62m인 고려시대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08호)이 있다. 화재로 심하게 마모되었고, 머리의 갓은 후대에 씌운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현재는 불상이 건물 안에 있는데 예전에는 외부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불상은 손의 표현으로 비로자나불상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답사팀은 사진찍는 장소라는 표지를 보면서 신기해했고, 그곳에서 제일 좋은 배경이 잡히는가 시험해 보기도 했다. 문화유적에서 사진찍는 곳 표시가 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수년 전부터임을 살짝 언급한다.
부여에서는 정림사지를 발굴하면서 정림사박물관을 세웠다. 박물관은 불교의 상징인 "卍“자 모양으로 중앙홀을 중심하고 각 건물을 배치했다고 하는데 알고 보지 않으면 파악하기 쉽지 않다. 박물관을 세운 초기에는 기와 만드는 법, 불교 역사, 사찰 짓기 등 여러 교육적인 과정을 점토 인형으로 만들어 전시했었는데, 백제역사문화관이 생기고 나서 그곳으로 많이 옮겨진 것 같다. 현재 이곳에는 정림사 모형, 또 현지에서 출토된 소형 불상, 기와, 생활유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고대 유물을 보는 방법을 설명하면서 돌다 보니 시간이 꽤 많이 흘렀다. 모두 열성이 대단했다. 한 분은 열심히 따라다니다 화장실까지 따라갈 뻔했다고도 했다.
[부소산성과 낙화암, 관북리 유적]
우리 일행은 서둘러 부소산성에 올랐다. 왕궁인 사비성 뒤편에 위치하여 후원 역할을 했던 부소산에는 능선과 계곡에 흙과 돌로 성을 쌓아 비상시에는 피난처로 삼았다. 부소산성은 풍광이 좋은 곳이며, 현재 여러 갈래의 산책로를 만들어 놓았다. 우리는 그냥 각자 좋은 코스를 걷기로 했다.
산성 안에는 군량미를 보관했던 군창터, 군대 움막 등이 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몇몇 이야기를 지닌 건물들, 즉 궁녀사와 삼충사 그리고 구드래 조각공원 등이 들어섰다. 더구나 부소산에서 내다보는 전망이 좋은 곳곳에 영일루, 반월루, 사자루, 백화정 등의 누각을 세웠다. 누각 건물들은 일제시대 지어졌거나 다른 지역에 있던 정자를 옮겨온 것으로 백제하고는 상관이 없으나, 여행객들에게 사랑받는 장소라는 증거처럼 서 있다. 부소산에 오르면서 몇몇 노래를 흥얼거리던 교수들은 교수합창단원인 채영석 교수님을 중심으로 누각에 올라 노래하기 시작했다. 영일루(예전에는 영월루라고 했음)에서 바라보는 백마강 달빛과 정경이 굉장하다고 하지만 낮에 간 우리는 햇빛만 즐겼다.
부소산 꼭대기에는 백화정이 서 있는 낙화암이 있다. 바로 백마강을 내려다 보며, 그 너머 산과 들판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어서인지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이곳에서 사진찍고 추억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백마강을 보면서 어떻게 여기서 삼천궁녀가 뛰어내릴 수 있느냐고 질문한다. 조선 왕조의 궁녀가 모두 합해서 5백명쯤이었는데, 백제의 궁녀가 3천명이라는 것은 과장이다. 그래서 우리는 궁녀 3천명이 뛰어내린 것이 아니고, 이름이 ‘삼천’인 궁녀가 뛰어내린 것이라는 농담도 한다.
낙화암에서 고란사를 보려면 가파른 자연 돌계단을 내려가야 한다. 고란은 아주 조금 바위에 붙어있고, 백제왕의 건강을 지켰다는 고란사 약수는 각자 마셔 볼만큼은 충분하다. 고란사는 백제 아신왕(?~405) 때 혜인대사가 세웠다는 설과 백제 사비성이 함락되자 낙화암(타사암)에서 떨어져 목숨을 버린 궁인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고려 현종 때 세웠다는 설이 있다.
[백제문화단지와 백제역사문화관]
점심을 쌈밥으로 잘 먹고 나니, (입장하는) 표를 살만큼 젊은 사모님께서 아이스크림도 돌렸다. 다시 에너지를 충전한 답사팀은 백제문화단지로 향했다.
이곳은 부여군에서 관광객 유치를 위해 1994년부터 2010년까지 약 16년간 조성한 100만평 규모의 역사테마파크이다. 그 안에는 백제의 생활과 문화를 보이는 4층짜리 백제역사 전문박물관이 있다. 그리고 전시관 뒤편으로 왕궁인 사비궁을 지어 놓았는데, 국가의 중대사가 행해졌던 천정전과 문관과 무관이 업무를 보던 동궁과 서궁이 갖추어져 있다. 그리고 능산리에 있는 능사, 고분 공원은 물론 한성백제 시절의 위례성, 생활문화마을 등도 조성해 놓았다. 물론 촬영장처럼 축소했고 그나마도 추정된 형태들이지만, 눈으로 보고 싶거나 사진찍는 사람들에게는 안성맞춤이라고 할까?
백제의 역사·문화를 책을 읽듯이 한꺼번에 알고픈 이는 가볼 만하다. 그런데 이런 경우라면, 먼저 백제문화단지에 머물면서 전시실의 내용까지 샅샅이 살펴보고 나서 현재 남아있는 유적지를 일일이 방문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본다. 아니면 반대로 각 유적지에서 역사와 시간을 느끼고 그것이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이 문화단지 안에서 종합해 볼 수도 있겠다. 물론, 역사 전공자로서는 만들어놓은 유적은 불안하다. 버스로라도 유적지 현장을 다니면서 각 유적의 지역적 환경, 규모, 얽힌 역사를 파악하면서 이해하고 자신들이 그 형태를 머리 속에 복원하기를 바라게 된다. 앞서 정림사지 박물관에서 언급한 것처럼, 현지에서 하던 참고 역사 설명도 시간이 가면서 이곳으로 모아놓는 것 같다. 아쉬운 점이다.
이곳에는 민자시설인 숙박시설(콘도, 스파빌리지), 테마파크, 테마아울렛, 체육시설(대중골프장) 등도 있다. 그러니까 부여군에서는 방문객이 하루 묵으면서 백제 문화단지에서 공부하고 즐기고, 다음날쯤 각 유적 현장을 돌기를 바란 것 같다. 부여 관광지를 둘러보는 수륙양용버스 투어도 있고, 단지 내의 열차나 전기자전거 등의 이동 수단들도 개발해 놓았다. ‘유적 안내인’들도 배치되어 있다.
우리는 집행진이 정리하는 동안 먼저 도착해서 전시실에서 본격적인 역사 공부를 시작했다. 자료를 보면 공부할 수밖에. 그런데 밖에서 빨리 나오라는 연락이 왔다. 즉 궁궐로 가는 관광용 차를 타고 건물 뒤편 유적지 모형장소로 이동하는 거였다. 궁궐 앞에서 단체 사진도 촬영했다. 하늘은 맑고, 만들어진 백제 도시는 배경으로 좋았다.
답사 일정이 예정보다 늦어지면서 당초 일정을 바꾸어 이른 저녁을 먹기로 결정되었다. 그 결정이 나자마자 카톡에 문자가 올라왔다. 집행진에서는 ‘사비면옥’을 찾아냈는데, 미리 주문한다고 물냉면, 비빔냉면, 회냉면 중에 선택하라는 것이었다. 점심 먹은지 얼마되지도 않았고, 배가 고프지도 않았는데도 메뉴가 달라서인지 저녁 식사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운영간사는 본인도 처음 오는 집이라는데 잘 찾았다. 그 교수님은 생명공학과인데, 아마 생명공학이 컴퓨터 접속이나 아니면 식당 이런데도 다 관여하는 모양이다.
더욱 묘한 것은 이 식당 운영 시간이 아침 9시에서 오후 5시까지라는 점이다. 우리는 4시 30분에 오후 간식 겸 저녁으로 시간을 잘 맞추었다. 하지만, 5시에 문닫는 유적지 식당은 이곳에서 숙박을 하던가, 아니면 일찍 떠나라는 명령을 하는 것 같았다. 저녁은 먹었지만 아직 중천에 있는 해를 따라 궁남지로 갔다.
[궁남지,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
궁남지는 백제인이 만든 인공 연못인데, 현재까지로는 우리 역사 최초의 인공못으로 인정받고 있다. 『삼국사기』에 무왕 35년(634)에 궁의 남쪽에 못을 파서 20여리 밖에서 물을 끌어다가 채우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못 가운데는 섬을 만들었는데 방장선산을 상징한 것이라고 했다. 안압지보다 40년 전에 조성되었다. 무왕의 궁궐 가까이 있던 이 연못 주변에서는 백제 토기와 기와 등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현재 이곳에는 연못의 구조나 방법, 용처 등을 보이기보다는 계절마다 각가지 꽃을 피우게 하고 있다. 7월부터 피는 연꽃 계절을 추천한다. 또 여행하는 이들은 궁남지 일몰과 야경이 좋다고 한다. 즉 한국인들에게는 단순히 꽃구경 가는 연못 대우를 받고 있다. 그래서 역사과 학생들도 답사코스에서 제외하기 일쑤인 역사유적지이다. 이와는 달리, 일본에서 발간하는 백제지역 탐방지에는 꽤 중요한 곳으로 잡혀있다. 7세기에 이르러서야 왕조를 세우게 된 일본은 초기에는 궁궐을 따로 짓지 않고, 실권을 잡는 자의 집이 궁궐이 되었다. 나라에 있는 평성(平城)이 일본 첫 궁궐인데, 이 궁궐 건축이 백제의 영향을 받았고, 특히 궁남지를 본떠서 연못을 만들었다며 궁남지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무왕이 만든 이 궁남지에서는 무왕의 사랑을 보이는 서동요를 소개하고 있다.
“선화공주님은 / 남몰래 시집가서 / 서동 방을 / 밤이면 뮐 안고 간다.”
재미있는 역사 전설이지만 동시에 무왕을 이해하게 하는 중요한 사료이다. 서동요는 여러가지로 윤색되어 회자되고 있어 원문을 볼 필요가 있다.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璋(장)이다. 그 모친이 과부가 되어 서울 남지변에 집을 짓고 살던 중, 그 연못의 용과 교통하여 장을 낳고 아명을 서동(薯童)이라 하였는데 그 度量(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항상 마를 캐어 팔아서 생활을 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이에 의하여 이름을 지었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善花, 혹은 善化)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 서울로 가서 마를 가지고 동네 아이들을 먹이니 아이들이 친해서 따르게 되었다. 이에 동요를 지어 여러 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하였는데 그 노래에 「선화공주님은 남 그스기(몰래) 얼어(시집가)두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가다」라 하였다. 동요가 서울에 퍼져 대궐에까지 알려지니 백관이 임금에게 극간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 보내게 하였는데 장차 떠나려 할 때 왕후가 순금 일두(一斗)를 노자로 주었다. 공주가 귀양처로 갈 때 서동이 도중에서 나와 맞이하며 시위하고 가고자 하였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온 지는 모르나 우연히 믿고 기뻐하여 따라가며 잠통(潛通)하였다. 그 후에야 서동의 이름을 알고 동요가 맞은 것을 알았다. 함께 백제로 와서 모후가 준 금을 내어 생계를 꾀하려 하니 서동이 크게 웃으며 이것이 무엇이냐 하였다. 공주 가로되 이것은 황금이니 가히 백년의 부를 이룰 것이다. 서동이 가로되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캐던 곳에 (황금을) 흙과 같이 쌓아 놓았다 하였다. 공주가 듣고 크게 놀라 가로되 그것은 천하의 지보(至寶)니 그대가 지금 그 소재를 알거든 그 보물을 가져다 부모님 궁전에 보내는 것이 어떠하냐고 하였다. 서동이 좋다 하여 금을 모아 산더미 같이 쌓아 놓고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에게 가서 금 수송할 방책을 물었다. 법사가 가로되 내가 신력(神力)으로 보낼 터이니 금을 가져오라 하였다. 공주가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갖다 놓으니 법사가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에 갖다 두었다. 진평왕이 그 신(神)의 변통을 이상히 여겨 더욱 존경하며 항상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이 이로부터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하략. 이후는 미륵사를 창건하는 이야기가 연결되어 있음)(『삼국유사』 무왕(武王)조)
앞서 성왕의 관산성 전투 패배 후 귀족들이 실권을 잡았음을 보았다. 성왕의 아들 위덕왕 이후 혜왕, 법왕 등이 단명하고 실권 귀족들은 익산에서 마를 캐며 살던 몰락한 왕족 출신인 무왕을 옹립했다( 『삼국사기』에는 법왕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다). 용과 사통해서 낳은 아들은 비범한 사람임을 보이기 위한 상징이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도 어머니가 지렁이와 정을 통해 낳았다고 한다.
무왕은 귀족들의 정략적 옹립에 의해 왕이 되었지만, 즉위 후 실추된 왕권의 회복을 추진했다. 먼저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와 혼인했다. 그러니까 진평왕의 맏딸은 선덕여왕, 둘째 딸은 김춘추를 낳은 천명부인, 그리고 셋째가 선화공주이다. 당시에 백제와 신라는 전쟁이 빈번했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설화화’된 것이라고 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왕실 사이의 결혼은 두 나라 사이에 긴장감이 고조될 때 이루어질 수 있다.
한편, 역사에서는 이들의 혼인 시기는 마를 캐던 서동 시절이 아니라 그가 왕으로 옹립되고 난 이후로 본다. 무왕은 왕권이 안정되고 나서 미륵사를 세워 익산으로 천도하고자 했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즉 지배 귀족세력 재편성 계획은 좌절되었다(한편, 미륵사지서탑의 사리봉안기에 무왕의 왕비가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기록이 나와 선화공주의 존재를 의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왕비가 죽고 다시 왕비를 얻는 예는 많고, 또 동시에 2명 이상 있을 수도 있다).
이런 여러 해결할 사항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사실은 무왕의 아들이 의자왕이라는 점이다. 의자왕은 매우 총명하고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라 불리웠다. 그는 즉위 후 아버지 무왕이 노력했던 왕권강화에 힘써 귀족 40명을 축출하고 자신의 자녀들을 그 자리에 앉히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한강유역을 빼앗은 신라에 보복전을 감행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신라 김춘추의 사위와 딸이 대야성 전투 때 죽기도 했다. 그러나 왕은 점차 무사안일에 빠지게 되고, 귀족들은 서로 자신들의 사욕을 챙기면서 국내외의 정세변화에 대처하지 못했고, 결국 종말을 맞게 되었다.
[다시 부여를 찾는다면]
부여는 자그마한 군이지만, 하루에 다 볼 수 있는 유적지는 아니다. 우선, 능산리 고분군을 놓고 온 것은 못내 아쉽다. 능산리 고분군에는 사적 14호로 지정된 고분 7기가 있고, 백제 수도 사비를 보호하기 위해 쌓은 8.4km의 나성이 남아있다. 무엇보다도 위덕왕이 설치한 능사(陵寺)지역을 발굴하면서 백제금동대향로(국보제287호)와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국보제288호)이 출토되어 많은 역사 정보를 제공하는 곳이다. 그리고 국립부여박물관도 빼놓고 왔다. 이 박물관은 부여 내 지상에서 사라져버린 백제의 유산을 땅속에서 찾아 다시 지상에 복원한 곳이다. 그 외에도 강을 따라 천정대, 낙화암, 왕흥사지, 구드래, 수북정, 자온대 등으로 도는 백마강 수상코스와 부여 이전의 역사유적, 불교유적 등 많은 곳이 아직 남아있다.
[순간은 영원으로 살아나고]
궁남지를 돌 때 우리는 역사공부보다는 사진찍는데 열을 올렸다. 그리고 귀가 버스에 올랐다. 돌아오는 버스에서는 갈 때보다 이야기가 많아졌다. 나는 지난번 운영위원장이었고 현재 부회장을 맡고 있는 김갑수 교수님의 정년 후 삶을 들었다. 김 교수님은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님’이 되었다. 담당교회가 있는 것은 아니고 초대받는 곳으로 원정 설교 다닌다는 것이 무척 보람있어 보였다. 또 버스에서는 다음번 만남을 기약하며 여러 감사와 주문 사항들이 있었다. 특히 버스를 ‘기어이’ 탄 편집위원장 박종갑 교수님의 목적이 폭로되었다. 그분은 모두에게 『늘 푸른나무』에 실릴 원고를 간곡히, 그리고 길게 부탁했다. 이렇게 하루가 저물고,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그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다.
이번 명예교수회 역사탐방은 운영위원장과 간사의 맹활약에 큰 덕을 입었다. 답사 계획이 시행되면서 운영간사가 단톡방을 개설하고 신청을 받기 시작했다. 우리는 누가 신청했는지를 알면서 들어가게 된다. 약간의 출입이 있었지만 28명을 꼭 채웠다. 좀더 편히 가기 위해 28인승 버스를 택하느라 정원을 한정했다고 한다. 또 답사일이 가까와지자 신분증, 물과 간식용 작은 가방을 챙기라는 등 소소한 공지사항이 차례로 제시되었다. 그리고 일정이 뜨고 출발시간과 도착시간까지 공지가 나왔다.
여행을 잘 마친 후에는 우리가 찍은 사진을 이곳에 모았다. 특별한 장소에서 단체 사진을 몇장 찍긴 했지만, 그외 서로들 좋은 곳에서 좋은 시간을 담은 사진을 단톡방에 올리는 것이다. 조무환, 채영석, 황평, 김정숙, 김상태, 강용호 교수님 등이 사진을 올렸고, 잇달아 김준호, 박종갑 교수님 등의 댓글이 달렸다. 특히 홍우흠 교수님이 그린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우리가 느낀 시간과 정감을 그대로 담아냈다. 물론, 진행을 했던 김봉식 회장님, 조무환 위원장님, 강용호 간사님에 대한 감사 댓글도 계속 달리고......
그런데, 6월 5일, 동영상이 하나 떴다. 카톡에 수집된 사진을 선정·편집하고 아름다운 선율에 실어 부여에서의 하루를 눈으로 보게 했다. 이렇게 우리와 백제의 만남은 새록새록 살아나는 역사가 되었다. 운영간사 강용호 교수님의 작품이다. 이런 운영간사님 덕(?)에 우리는 노래를 하더라도 제대로 해야 하고, 옷도 좀 예쁘게 입고, 또 표정도 늘 우아하게 다녀야 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운영간사님이 사진을 손질 하시는지, 아니면 제대로 된 사진만 고르는지 정말 아름다운 동영상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의 답사기에는 지금 이렇게 적는 문서기록 말고 눈으로 보고 소리로 듣는 답사기가 이미 명예교수회 홈페이지에 있다(YouTube: https://youtu.be/x6LRT3CoFOE).
우리는 새로운 세계로의 새로운 만남을 시작했다. 명예교수회는 우리가 지닌 공통분모를 바탕으로, 한 주제에 매달려 살아온 우리가 아주 넓은 일반생활을 함께 짓는 공간이 되어간다. 게다가 어느 단체이고 간에 희생해주는 한두 명만 있으면, 굴러갈 수 있는데, 이 팀은 버스에 탄 사람들 전부가 이미 다 그런 자발적 희생자들 같다. 사람에게는 숙연(宿緣)들이 있다. 명예교수회는 그 숨은 인연들을 재창조해 가는 장이 될 것이다.
2022년 봄 역사나들이를 함께 쓴 이들은 강용호, 곽태천, 김갑수, 김봉식, 김복진, 김상태, 김정숙, 김준호, 김한곤, 남두현, 도명기, 박정윤, 박종갑, 이석규, 이원경, 이재원, 이화조, 조무환, 조윤래, 채영석, 홍우흠, 황평, 부부 동반(김갑수, 김복진, 남두현, 박정윤, 조무환, 조윤래) 포함해서 모두 28명이다. |
첫댓글 긴 글 게재하시느라 고생하신 강용호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게재하시고.... 수정 게제하시고.... 그 수고에 보답이 있기를!
"역사는 아는 것 만큼 느낀다" 더니, 김 교수님의 글을 읽고 나니 백제문화에 대한 느낌이 훨씬 더 풍성해졌습니다. 단순한 봄나들이 여행이었는데 그 속에 이렇게 많은 삶의 애환들이 넘치고 있었다니~~ 먼 과거의 일이 아닌, 바로 현재의 일처럼 다가옵니다. 엄청 힘들었을 터인데 이렇게 즐겁고 아름다운 추억을 담은 멋진 글을 소개하여 주셔서 넘넘 감사합니다. ^^
앞으로 부여 역사 기행을 가는 분들은 이 글을 가져 가서 읽으면서 그대로 따라 가시면 최고의 기행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