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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강론으로 마산 시민인 여러분들을 아주 존경하는 마음으로 3.15 때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김주열의 고향은 마산에서 150km 떨어진 남원이었습니다. 김주열은 공부를 참 잘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병이 들어 오랫동안 누워있는 바람에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가고 싶었던 대학의 꿈을 접고 1960년 3월 10일 마산상고 지금은 용마고등학교에 입학시험을 치기 위해서 마산에 왔습니다.
김주열의 큰누나 김영자 씨는 동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참 착했어요. 아 애가 헛된 것이 없어요. 항상 책을 들고 다닐 때는 무엇을 보는지 책을 들고 다니고 또 자기가 공부하면서도 들고 다니고 뭐를 하든지 책을 들고 다녀.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 보면 소죽을 쓰다가 자기가 거기 가서 불 때가지고 그 앞에 앉아 있어. 앉아 있으면서 또 책을 봐요. 공부를 해. 그렇게 그 모습이 지금도 선해요. 마산에 가기 전날 목욕도 하고 이발도 말끔하게 했습니다. 어머니는 쌀을 팔아서 새 셔츠도 사주셨습니다. 우리 아들 시험 잘 보라고 사주는 거야. 어머니 걱정 마세요.
꼭 장학생으로 합격해서 제가 집안을 일으켜 세울게요. "
누나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나이가 어려도 어른 같은 마음으로 가정 한편을 봐서 마산 상고에 가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잘 갔다 오겠다고 해서 시험 잘 보고 그리고는 이튿날 새벽에 떠났죠. 두 살 위인 형인 김광명씨가 보호자로 따라나섰습니다. 3월 11일 금요일 입학시험 다행히 시험도 잘 봤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3월 14일 월요일 합격자 발표 날이었습니다. 합격했을까요? 아닙니다. 합격자 발표가 연기가 됐답니다.
원래 14일에 발표했어야 되는데 이틀 뒤로 연기가 돼서 원래는 14일에 결과를 확인하고 남원으로 넘어가려고 했는데 발표가 미뤄지는 바람에 더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인 3월 15일 화요일 주열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형, 광열 씨 말로는 같이 마산 시내 구경을 나서는데 어느 순간 주열이가 안 보이더랍니다. 주열이는 어디로 간 걸까요? 어머니 권찬주 여사는 그 소식을 들으시고 바로 짐을 꾸렸습니다. 주열이 찾기 전까지는 안 올랍니다. 몸조리 잘하고 계세요. 아픈 남편에게 이렇게 당부하고 마산으로 출발하셨습니다.
어머니는 경찰서 뿐만 아니라 마산 시내를 떠돌면서 사람들마다 붙잡고 우리 아들 주열이 좀 찾아 주세요. 사진도 보여주고 인상착의도 다 설명했습니다. 그래도 찾지 못하자. 병원이란 병원은 다 다녀보고 심지어 화장터까지 가봤다고 합니다. 같은 시각 부산일보 마산지구에 상주하는 기자가 있었습니다. 이름은 허종기자 이 허 기자님도 주열이의 행방을 찾고 있었습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게 분명하다. 단순 실종 사건이 아니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신문에 실종 기사를 내고 정보원들도 쫙 풀어놨습니다.
그리고 양복 안주머니에 카메라를 깊숙이 숨겨 넣었습니다. 1960년대에는 마음껏 취재할 수 없는 것이 당시 분위기였고 언론의 자유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현장에서 카메라를 들고 나타나면 비자고 몫 없이 바로 끌려가 구타를 당했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숨기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찰칵 찍으려고 품에 넣어 갔던 겁니다. 다른 신문사 기자들도 하나둘 추적에 들어갔는데 귀신이 곱할 노릇입니다. 실마리가 하나도 나오지 않고 목격자도 흔적도 전혀 없었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없었습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주열이 어느덧 실종 27일째 어머니는 남원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주열이 아버지의 건강 상태가 악화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연이 포기하면 안 돼요. 제발 좀 부탁드립니다. 기자들이 기자들에게 하나하나 다 찾아가서 신신당부를 하고 남원행버스에 오르셨습니다. 그로부터 3시간 후 정말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허 기자가 다방에 앉아 있는데, 다방 문이 열리더니, 남자 하나가 뛰어들어 왔습니다. 낯익은 얼굴이었습니다. 바로 허 기자의 정보원이었습니다. 그는 주위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허 기자 옆자리에 앉았습니다.
1960년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그의 눈에는 경찰이 쏜 최루탄이 박혀 있었고, 이는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 중 경찰의 폭력에 의해 희생된 증거였습니다. 시신이 떠오르자 시민들이 몰려들어 바다를 내려다보며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습니다. 이 참혹한 장면은 곧 언론에 보도되었고, 전국적인 공분을 불러일으켜 4·19 혁명의 불길을 당겼습니다.
중앙부두 앞바다 현장으로 달려간 허 기자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습니다. 철컥 철컥. 바로 그날 찍은 허기자의 사진이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꿨습니다. 그 사진 다 보셨죠? 보통 영화에서 사람이 물에 빠져서 익사한 시신의 모습을 보면 이렇게 엎드려 있거나 아니면 누워서 이렇게 그런 자세가 일반적인데 주연이는 얼굴을 꼿꼿이 들고 서 있었습니다. 마치 산사람처럼 그리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모습으로 가장 끔찍한 건 눈 부위였습니다. 시신은 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그 병원은 마산의료원 전신인 경상남도립병원 양에 있던 간호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프로필러가 달려 있더라고요.
08:38
눈 쪽으로 달려서 그게 커서 안 들어갔는지 모르겠지만, 눈에 박혀 있고 목 뒤로 나와 있었습니다. 앞에는 프로펠러가 달려 있으니까 눈에서 목, 뒤까지 굉장히 길잖아요. 그 정도로 굉장히 크더라고요. 프로펠러가 달려있는 쇳더미가 오른쪽 눈을 안 통해서 뒷목까지 뚫고 나왔다는 겁니다. 대체 누가 왜 이런 걸 쐈을까? 범인은 바로 경찰입니다. 도대체 경찰이 왜 그랬을까? 범인은 생각보다 금방 잡혔습니다. 박종효 경위, 마산경찰서 경비주임. 경비주임의 주 임무는 집회나 시위 현장을 통제하는 역할입니다.
09:36
박 경위는 주열이한테 이 같은 최루탄을 쏜 걸까요? 주열이가 사라진 건 3월 15일입니다. 원래 14일에 합격자 발표가 이루어져 마산에 더 머물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뭐 때문일까요? 선거 때문이었습니다. 1960년 3월 15일은 무슨 선거다? 제4대 대통령과 5대 부통령 선거가 있었습니다. 이미 이승만 대통령 그때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1대부터 3대까지 그러니까 1948년 우리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할 당시부터 세 번이나 대통령을 했었는데 헌법을 또 고치고 고쳐서 네 번째 대통령을 또 당선하려고 출마를 한 겁니다.
10:36
그 당시 그러면 야당 후보는 누굴까요? 없었습니다. 원래 민주당에 조병옥 박사가 있었는데, 선거를 한 달 앞두고 갑자기 미국에서 사망했습니다. 좀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어요.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은 단독으로 선거에 출마하게 되었습니다. 이것만 봐도 이승만 대통령은 거의 당선 확정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통령 선거였습니다. 지금은 부통령이 없지만, 당시에는 미국처럼 대통령이 사고로 인해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는 부통령이 있었습니다. 여당의 부통령 후보는 누굴까요? 예, 이기붕입니다.
11:35
그런데 이기붕 후보에게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능한 사람이었어요. 게다가 인기도 없었습니다. 앞전 선거에도 부통령으로 출발을 했었지만 야당 후보인 장면 박사에게 참패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은 여당 부통령은 참 불편한 마음이었습니다. 이 불편한 동거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이번 선거에 꼭 이겨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내무부 장관이 경찰들을 불러모았어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이승만 박사와 이기붕 선생이 당선되도록 하라. 콩밥 먹어도 내가 먹고 징역가도 내가 받아. 목표 득표율도 정해 놓았는데 85%였습니다.
12:34
목표 달성 못하면 자기부전 못할 줄 알아. 그러면서 수입경찰제의 사표까지 미리 받아갔답니다. 선거날이 다가오자. 네 가지 비밀지령을 빌려왔습니다. 첫 번째 지령은 누구를 찍었는지 분발할 수 있게 하고 완전히 공개투표를 하도록 해라. 원래 선거의 원칙은 뭐죠? 비밀투표죠. 공개투표를 하라는 겁니다. 그 방식으로 3명, 4명, 3명이 한 투표소에 같이 들어가서 같이 보면서 투표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투표소에는 덩치 좋은 사람 곧 정치 깡패들이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눈에 힘을 빡 주고 몇 번을 찍는지 지켜보고 있는 바람에 싫어도 여당을 찍을 수밖에 없도록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13:33
야당인 의원들이 가만히 있었겠어요. 투표소에 가면 야당 참관인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온 두 번째 지령 야당 참관인은 사전에 매수하라. 불가능할 때는 사망 전보를 쳐서 즉시 집으로 돌아가도록 조치하라. 이처럼 가짜 사망 전보를 쳐서라도 그 자리를 떠나게 할 정도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마산 시내에 그 당시에 투표소가 47개가 있었는데, 야당 참관인이 들어간 곳은 두세 군데 뿐이었답니다. 세 번째 지령은 투표 전에 4할 정도의 표를 자유당 지지표로 만들어 미리 투표함에 집어넣어라. 이름하여 4할 사전투표입니다.
14:32
당연히 일본 후보였던 이기붕에게 투표한 표였습니다. 말이 안 되죠. 그렇죠? 이미 투표가 다 돼 있는 40%의 표를 투표함에 미리 넣어놓고 사람들이 와서 찍은 거. 그런데 그걸 그대로 가져가서 개표를 한다는 거죠. 투표에 불참하거나 기권하는 표가 한 4회 정도 나올 거라고 예상을 하고 미리 넣어두었는데 그러다 보니 실제로 개표할 때는 유권자 수보다 투표수가 많이 나와서 몰래 투표용지를 졸업해서 불패용지까지 있었습니다. 만약에 이렇게 했는데도 안 되면 최후의 수단을 쓰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 비밀지형 만일 계획이 뜻대로 안 되면 투표함, 음반 도중 표를 바꿔치기하라.
15:29
바꿔치기 할 때 야당 참관인이 못 나오게 막고 부득이할 경우 유혈거까지 실행할 것을 각오하라. 피를 봐도 좋다는 얘기입니다. 이런 살벌한 분위기에서 3월 15일 날이 밝아왔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정부의 지침에 따라 박준표 경위는 최루탄과 발사용 총을 지고 항의를 하면 쏴서 진압을 해라. 오전 7시 투표 시작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습니다. 투표가 시작되자마자 한 투표소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야당 측 상관인이 사전투표를 눈치채고 말았습니다. 투표함 열어보라니까 아니 빈 투표함을 뭐하러 그냥 한다는 거야.
16:27
서로 몸싸움이 벌어지면서 투표함을 잡고 막 뉘우치다가 꽈당 하고 쓰러졌습니다. 어떻게 됐을까요? 그 투표 안에는 미리 찍어둔 4할의 투표용지가 들어있었는데, 사전투표를 적발했다. 야 이 포 돈 돈들아 이 투표 뿌리겠습니까? 여기저기서 사전투표가 발견되기 시작했습니다. 오전 10시 반 선거 중단을 선언하는 벽보를 붙였습니다. 이번 선거는 불법 무법 선거다. 인정할 수 없다.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부정선거 다시 하라 투표할 권리를 달라. 시민들도 하나하나 합류하기 시작했습니다.
17:24
그 시간 주열이의 형제는 마산 시내를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았습니다. 시청으로 가는 대로가 사람들도 꽉 찼습니다. "부정선거 다시 하여 민주정치 도로 찾자!" 엄청나게 큰 소리로 구호를 하면서 행진을 하는데 사람들이 점점 불어났습니다. 3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시위를 했습니다. 주연이 형제도 사람들에게 무슨 상황인지 얘기를 듣고는 시위에 동참을 했습니다. 이날시위에는 주열이 같은 중고등학생들이 많았습니다. 당시 16살에 시위에 참가했던 변승기 씨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18:16
우리가 초등학교, 중학교 다닐 때 민주주의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선거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 배웠는데 정부가 반대되는 행위를 하니까 이건 막아야 된다는 생각이 자동적으로 샘솟았죠. 우리가 여당, 야당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니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자는 위령이었고 학교 다닐 때 그렇게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시절에는 그 문제가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이런 시민들의 모습을 지켜본 경찰은 어땠겠습니까? 이러다가 선거에 지장이 생기면 경찰들은 모두 목이 날아갈 편입니다. 어느새 날이 저물었습니다. 박 경위는 기동대원들과 시청 앞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19:12
시청 앞으로 다가오는 시민들에게 경찰이 방송을 했습니다. 마음 시민 여러분 이성을 찾고 귀가하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불상사가 생깁니다. 과연 시민들이 물러났을까요? 아닙니다. 시청을 향해서 전진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때 소방차 한 대가 시위대를 향해서 돌진했습니다. 그러자 시위대는 차에 갇히면 죽으니까 다들 급하게 옆으로 피했습니다. 그순간 아!하는 소리와 함께 마산 시내가 암흑으로 변했습니다. 왜냐하면, 소방차가 전신주를 들이받았는데 그러면서 도시 전체가 정전이 된 겁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20:09
일렬로 서 있던 경찰차들이 일제히 헤드라이트를 켰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경찰차 불빛은 시위대를 비추고 있고 시위대는 경찰 쪽을 볼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시위대에게는 불리한 상황이 됐습니다. 그러자마자 차 뒤에 있던 경찰들이 앞으로 나오는가 싶더니, 총을 들고 시민들을 향해서 사격 자세를 유지했습니다. 시민들이 물러섰을까요? 그때 학생들은 이렇게 생각을 했답니다. '아무리 경찰이라 하더라도 자신들의 아버지 아저씨 뻘인데 설마 우리를 쏘겠나 우리를 지켜줘야 할 경찰들이 우리를 죽이겠나' 라고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21:01
그때 탕 탕!! 이 총소리가 아니라 톡톡 소리를 내는 뭐 쏘는 소리? 최루탄 쏘는 소리였습니다. 모르지만 그저 눈이 따갑고 시위대는 쩔쩔댔습니다. 어두운 데다 눈이 매워 눈도 못 떴습니다. 그 시위대 한 가운데 주열이 형제도 있었습니다. 주열아 위험해 뒤로 물러서 동생이 동생 손을 잡아 끌었습니다. 군중 속에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하면서 주열이 형제는 필사적으로 손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계속되는 최루탄 발사에 그만 주열이 형, 광열이는 동생의 손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21:55
그 후로 아무리 찾아봐도 주열이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게 주열이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그날 밤 마산경찰서 순경 하나가 경찰서로 뛰어들어오더니, 박경이를 찾았습니다. 경위님 눈에 포탄이 박힌 시체가 있습니다. 바로 그 경찰은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소년이 길에 누워 있었습니다. 누구였을까요? 김주열이었습니다. 박경위가 상관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최루탄이 문에 박힌 시체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22:43
위 상관은 자네가 알아서 적당히 처리해 일단 박경위는 주열이의 시신을 차에 실어 그리고 차를 몰고 부두로 가서 주열이 몸에 돌을 매달고 차가운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리고 주열이의 시신이 가라앉는 걸 한참 동안 지켜봤습니다. 박경위는 그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 제발 떠오르지 말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뜻대로 내지 않았습니다. 바다에 가라앉은 지 27일 만에 주열이의 시신이 떠올랐습니다. 파도에 떠내려가지도 않고 거의 한 달이 다렸는데도 부패도 전혀 되지 않았습니다.
23:38
심지어 얼굴을 꿋꿋이 들고 주먹을 불끈진 채로 주열이는 돌아왔습니다. 끝까지 싸우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어쩌면 주열이는 자신의 죽음을 알리고 싶었던 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그 사실을 안 시민들이 병원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선두에는 학생들이 서고 그 뒤를 어머니들이 따랐습니다. 그날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이 주열이 만이 아니었습니다. 185명이 다치고 9명이 총에 맞아 사망했습니다. 그 중에 10대가 6명이었습니다. 그 중 5명이 머리에 총상, 1명이 복부에 총상을 입었습니다.
24:30
그 아이들의 명단은 김영호 19세, 김용실 18세, 김효덕 19세, 전의규 18세, 김상우 19세 이 중에 복부에 총을 맞는 김상우 학생은 숨지기 전에 어머니께 내 할 일을 하고 죽는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라며 오히려 어머니를 위로했다고 합니다. 한참 인생의 꿈을 꾸던 어린 학생들이 경찰의 총에 희생당했습니다. 그 후로 시민들의 시위가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신문에 허정 기자가 찍은 사진과 함께 마산 시민들의 시위 내용이 신문에 실렸고 전국으로 퍼졌습니다. 그 파장은 어마어마했습니다.
25:27
그리고 일주일 만에 대한민국 역사가 바뀌었습니다. 1960년 4월 19일 피의혁명이라고 불리는 4.19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주의 혁명이었습니다. 이 혁명으로 초대 대통령은 사임을 선언하게 되었고 하야성명을 발표하고는 하와이로 망명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주열이의 시신이 발견된 지 딱 보름 만이었습니다. 한 달 뒤에 한 신문에 주열이 어머니께서 쓰신 편지가 실렸습니다. "주열이가 행방불명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살아있겠지 희망을 가졌습니다.
26:23
여러 자식 중에서도 특히 말이 없고 착한 자식의 죽음이고 보니 한층 더 미칠 것 같았습니다. 성격이 온순하기가 이를 게 없어. 공부와 일밖에 몰랐습니다. 철부지의 죽음이 너무 허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너무 갸륵했다는 것을 새삼스러이 깨닫습니다. 그들은 압제자의 부의 권력의 횡포를 언제까지나 참아야 했던 너절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귀여운 자녀들을 잃은 어머니 여러분 우리 다같이 눈물을 거둡시다. 자식들이 뿌린 따뜻한 선혈이 헛되지 않도록 이 나라의 어머니로서 다시 한번 옷깃을 여깁시다. 5월 8일 권찬주 올림 "
주열이는 고향 남원의 나지막한 산기슭에 잠들었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4월의 영혼 고 김주열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주열이가 죽은 후에 주열이는 앞으로 우편물이 하나 왔는데 무슨 우편물일까요? 그 안에는 합격통지서가 들어 있었습니다. 합격증 성명 김주열 1944년 10월 7일생 위 사람은 본교 제1학년 입학고사에 합격하였음을 증명합니다.
28:09
1960년 3월 16일.마산상업고등학교 장. 그것도 장학생으로 합격했다고 합니다. 김주열 열사는 비록 죽음을 맞이했지만, 시험치러 갈 때 한 어머니와의 약속은 지켜냈습니다. 김주열은 비록 우연히 시위에 참가해서 희생을 당했지만, 그의 희생은 대한민국 역사를 바꿀 만한 큰 힘을 발휘했습니다.
그의 죽음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죽음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17살에 어린 학생과 십자가를 치고 끌려가는 힘없는 어린 양이신 예수님, 둘 다 너무 약해 보이지만 한 나라를 바꾸고 세상을 바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후 제자들 앞에 나타나 평화가 너희와 함께 라고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평화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바다에 빠진 김주열이 27일 만에 올라왔을 때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은 힘없는 시신의 모습이 아니라 고개를 들고 두 주먹을 불끈 쥔 당당한 모습으로 나타나 예수님처럼 평화와 민주주의를 선물해 주었습니다.
29:38
이 평화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 온다고 여겨지는 거짓 평화가 아니라 불의 앞에 목소리를 내고 자신을 희생하며 이웃을 돕고 맡은 자리에 책임을 다할 때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에 누군가가 그 행복을 위해서 고통을 감수하고 또 피땀을 흘렸던 그 순간을 자주 잊을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김주열 열사가 선물해 준 그 평화와 예수님이 주신 평화를 가슴에 간직하고 살아가는 마산시민이자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소중한 선물을 잘 간직하며 마산시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노력하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