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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가산 유산록 번역
한 번 떠난 학은 돌아오지 않나니
이원걸(문학박사)
학가산(경북 안동시 북후면 신전리·서후면 자품리와 예천군 보문면 경계에 있는 산). 학가산 입구 광흥사
「유학가산기」 홍병기
그 해가 을유년[靑溪] 구월[重陽月] 1일[初吉]이었는데 벗인 권규백(權圭伯)이 적막한 물가인 묵산(墨山)을 방문하였다. 인사를 나눈 뒤 개연(慨然)히 내게 이르기를,
선비로 이 세상에 태어나 조정에서 벼슬을 하지 못한다면, 산림(山林)에 처해 살 뿐일세. 대저 산림지사(山林之士)는 반드시 이곳에서 먹고 마시며 이곳에서 살아가야 하네. 그런데 문을 닫고 조용히 독선기신(獨善其身)만하고 좋은 경치를 골라 장쾌한 유람하지 않으면 해상(海上)에서 우괴(迂怪)하다는 칭호에 불과합니다.
남주(南州) 학가산(鶴駕山)은 웅장하게 자리 잡은 큰 산으로 선유(先儒)들의 문집(文集)을 볼 것 같으면, 왕왕(往往) 이 산에 대한 기영(記詠)의 자취가 남아 있어 창려(昌黎)가 형악(衡岳)에서 시를 읊은 것이나 노소(老蘇)가 여산(廬山)을 읊은 것보다 못하지 않다네. 노인이 된 우리는 숙용지지(宿舂之地)에 있는 자들이 많아 늘 이 학가산을 두루 등람(登覽)하길 원해 왔었네. 단풍(丹楓)이 들고 황국(黃菊)이 피었으며 날씨도 참 좋은데 그대 의향은 어떠한가?
라고 하기에
나는
좋다!
라며 승낙을 했다.
급기야 하루 밤을 지내고 다음 날 갑자(甲子)일에 그와 함께 나란히 출발하여 오후에 태산(台山)의 산점(山店)에서 쉬었다. 그 위에 명옥대(鳴玉臺)가 있었다. 이는 선현(先賢)께서 강학하셨던 곳으로, 산천과 초목은 모두 곱고 생동감 넘쳤다. 해가 기우는 탓에 시를 읊을 겨를이 없어 금자암(金紫菴)에서 투숙했다.
일찍 출발하여 차현점(車峴店)에 이르러 술 한 사발을 마시고 험한 곳을 타고 돌 비탈길을 따라 올라가 겨우 예연암(刈蓮菴)에 이르렀다. 암자는 산의 허리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기이한 바위가 겹겹이 쌓였고 푸른 등나무 넝쿨이 우거져 하늘로 치솟았다.
삼면 남쪽으로 바라보니 먼 곳 경치가 아득하고 시냇물이 비단처럼 펼쳐져 흐르고 있었다. 궤안(几案)의 앞 오태(午態) 만상(萬狀)을 일일이 들 수 없다. 거승(居僧) 송운(松雲)이란 자가 있었는데, 눈썹은 흰 눈처럼 희고 얼굴은 학처럼 버쩍 말랐다. 차수(叉手)하며 느릿느릿 읍(揖)하는 행색이 티끌세상의 길손을 꺼리는 듯 했고 염주를 돌리며 홀로 앉아있었다. 환심(喚心)을 했다가 깨고, 깨어났다가 또 다시 그렇게 하였다. 잠꼬대하는 것 같았지만 부르면 대답을 했는데 자못 총명(聰明)하고 도리(道理)를 알아 접근하기 부담스럽고 인색하다는 생각을 버리게 했다.
이에 나는 다음처럼 질문하였다.
사람들 가운데 유학의 명분을 지닌 채 묵자(墨子)의 도리를 행하는 자의 말을 들어 보면 옳기는 하지만 그의 행실을 비교해보면 잘못되었습니다. 반면에 묵자의 도를 따르면서 유학의 규범을 따르는 자의 말을 들어보면 잘못되었지만 그 행동을 비교해 보면 옳습니다. 이는 창려자(昌黎子)가 문창(文暢)을 전송하면서 건네 준 서문의 글입니다. 선사께서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십니까?
무릇 사람으로서 사람이 되는 까닭은위로는 군신(君臣)․부자(父子)의 의리가 있고, 아래로는 실가(室家)․처노(妻孥)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효제(孝悌)로 으뜸을 삼고 충신(忠信)을 제일로 여깁니다. 성현(聖賢)의 천언(千言) 만어(萬語)가 방책(方策)에 실려 온 세상에 밝히 전해집니다. 할아버지가 이를 받아 손자에게 전해 주고, 집집마다 깨우쳐주고 호(戶)마다 알려주어 단전(單詮)과 지결(旨訣)로 전해져 폐단이 없습니다.
간혹 시대의 요구에 따라 쓰임을 받고, 죽더라도 그 이름이 드러나는 것이 우리 유가(儒家)의 규범입니다. 잘 알지는 못합니다만 대사의 지혜(智慧)와 영관(靈關)이 조금씩 젖어들고 텅 비고 미혹이 되어 보살(菩薩)을 조부로 삼고, 기화(氣化)를 모친으로 삼게 된 것은 아닌지요? 금의(金衣) 소질(塑質)로 다만 세상을 속이는 과목으로 삼고, 장사(長裟) 보발(寶鉢)을 모두 타인의 손에 맡긴 채 용마(舂磨)․좌멸(剉滅)의 술법을 믿어 끝내 주향(呪香)․고회(枯灰)의 혼(魂)이 되니 애처롭게도 선변(善變)은 되지 못합니다.
차라리 법해(法海)에서 배를 돌려 고도(古渡)를 건너 백독(百瀆) 원파(源派)를 거슬러 올라가며, 오경(五經)으로 묵은 마음의 밭을 갈고 김을 매어 차가운 배와 비인 창자를 따뜻하게 해주고 채워주는 효과를 거두십시오. 참으로 이러한 마음을 지극히 한다면 장차 어디에 간들 받아들여지지 않겠으며 무엇을 한들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이는 이른바 고치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이니, 오백년 이상 걸려도 가할 것입니다.
대사가 수긍을 하면서 한참 뒤에 대답했다.
유불(儒佛) 이교(二敎)는 저마다 존중할 대상을 존중하고 숭상할 바를 숭상하고 있습니다. 천지간(天地間) 천고(千古)에 걸쳐 무패(無悖)한 것이 서역(西域) 이전에는 더했습니다. 수양(隨梁) 이래는 물론이고 신라․고려 시대에 이르러 소사(蕭寺)의 부도(浮屠)로 고증할 수 있으니 운수가 다시 회복된 것은 또한 그런 이치 때문입니다.
나는 장차 그 성(性)을 보고 그 도(道)를 다하다가 끝내 천당(天堂)에서 환생(幻生)하여 천억년(千億年) 동안 산다는 주장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상해(桑海)가 세 번 변한 것을 보건대, 결과가 원인이 되고 그 원인이 다시 결과가 된다고 합니다. 색(色)이 공(空)하다가 공(空)이 다시 색(色)이 되며, 무궁한 부처로 극락(極樂)에서 장춘(長春)을 누린다면 견제장인(梘諸丈人)으로, 밝은 시절에 기운을 잃고 진흙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구덩이에 빠져 곤궁하게 신음한 채 초목과 함께 썩어 이름을 남기지 못하는 이가 왜 그렇게 많습니까?
라고 하였다.
서로 더불어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인해서 연하(烟霞)와 운림(雲林)이 빼어난 곳에 대해 논하다가 연등(蓮燈)이 가물거리는 것도 미처 깨닫지 못하였다. 맑은 경쇠 소리가 울려 새벽을 재촉하기에 동자승에게 길을 안내케 하여 정상에 올랐다.
이슬에 젖은 풀이 펼쳐진 작은 오솔길이 구불구불 펼쳐져 있었지만 찾아가지는 않았다. 나두(螺頭)가 나열해 있고 조골(鳥骨)이 그 동쪽으로 빙 둘러있으며, 선암(仙巖)이 그 서쪽에 자리를 잡고 있다. 가운데에는 수레를 들고 있는 것 같은 산[扶輿]과 깎아지른 겹겹의 산[斗陟}이 학가산 정상에 우뚝하게 솟아있으니 이것이 국사봉(國師峰)이다.
한쪽으로 층층이 쌓인 바위가 있는데 겨우 앞 사람을 따라 올라가니 뾰쪽한 꼭대기가 조금 넓어 대여섯 명 정도 앉을 수 있었다. 장군(張君)은 나무를 베고 올라가는 수고[乘槎]를 수고롭다 않고 청연(靑蓮)은 호흡하여 기가 통하니 전체가 손 안에 들어오는 경관을 갖추었다. 가운데 파인 굴에서 맑은 물이 방울방울 똑똑 떨어져 작은 샘을 이룬다. 두건을 벗고 기어들어가 한 옴큼 마시니 가슴이 시원하니 약수(藥水)라는 물이 바로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구름과 안개가 모두 걷히자 날씨가 맑고 산뜻하여 사방을 둘러보니 막힘이 없었다. 동쪽으로는 일월산(日月山)․청량산(淸凉山)이 있다. 북쪽으로는 태백산(太白山)․소백산(小白山)이 있다. 서남쪽으로 주흘산(主屹山)과 팔공산(八公山) 등이 모두 눈앞에 있어 고개만 들면 장관(壯觀)이 모두 보인다.
이는 곧 선유(先儒)들이 이른바 공부(工夫)의 차제(序次)에서 어려운 일을 먼저 하고 얻는 것은 나중에 한다는 것[先難以後獲]과 높은 곳에 오르려면 낮은 곳에서 시작한다는 것[登高而自卑], 책 한 편의 은미하고 극한 곳까지 모두 이해해야 한다는 것[到得了一篇窮微極處]과 모든 일의 안팎이 서로 필요하다는 것[諸般表裏相須],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함께 해야 한다는 것[知行兼擧]이 모두 한 가지 의미로 일관되게 전해진다.
기타 수백 개의 명산(名山) 거천(巨川)과 여러 고을의 들판과 일반 집들이 바둑판을 펴놓은 것처럼 알록달록하게 수놓아져 있다. 그 모양이 개미가 집을 짓기 위하여 파낸 흙가루가 땅 위에 수북하게 쌓인 것과 달팽이집처럼 보였다. 비록 이루(離婁)로 하여금 그 밝음을 궁구하게 하고 고생(顧生)에게 이 경관을 그대로 그리게 하더라도 이 모습을 일일이 보거나 그려내지 못할 것이다.
이곳 남향(南鄕)은 도덕(道德) 연수(淵藪)이며 문헌(文獻)의 보고지(府庫地)로, 손가락을 꼽아보아도 패강(浿江) 동쪽에서 두 번째 가지는 않을 것이니, 곧 정화(精華)와 청숙(淸淑)의 바탕이 이어져 크게 번성했기 때문이다.
호연하게 고개를 돌려보며 무이하산(武夷下山)의 시구를 외고, 저물어 이현(螭縣) 민가에서 쉬다가 광흥사(廣興寺)에 도착했다. 수목이 울창하게 우거졌으며 골짜기가 그윽하고 깊지만 특별하게 뛰어나거나 볼 만한 경관은 없었다. 스님들이 매우 많고 전각(殿閣)도 웅장하고 아름다워 복주(福州)의 거찰(巨刹)이라 할 만하다.
노승(老僧)에게 여쭈었다.
이 산의 이름을 학가(鶴駕)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산의 모양새가 적소(赤霄)나 진골(眞骨)처럼 평지에 우뚝 솟아 두 날개를 넓게 펴서 훨훨 공중에 날아가듯 하기에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까?
노승께서 시 한 구로 나의 질문에 응했다.
한 번 떠난 학이 돌아오지 않았으니 鶴一去兮不復歸
아득한 옛 일을 누가 알아주리? 滄茫往迹有誰知
그래서 며칠 동안 머물렀다. 향기로운 산나물과 익힌 반찬을 정성껏 공궤했다.
나는
정위를 만나지 못해 떠나려 하지만 不見丁威客欲歸
마음으로 노권처럼 알기 바란다오 心期許與老倦知
라는 시구로 답했다.
새벽 종소리가 한 벙 울려 새벽에 떠나길 재촉하여 일주문(一柱門) 밖에서 헤어졌다. 백현(白峴)에서 옹천(瓮泉)에 이르니, 두 갈림길이 나 있었다.
술잔을 들고 권우(權友)와 작별의 인사말을 건넸다.
우리가 노년에 이러한 산 유람을 한 것이 참으로 쉽지 않고 통쾌한 일일세.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면, 한가롭고 부질없이 보냈네. 소년 시절 자부(自負)하던 때는 참으로 글을 쓰고 논쟁을 했지만 자장(子長)과 남회(南淮)가 스스로의 기운을 돕는 것은 본받지 못한 것이 한스러우니 귀가하여 독서하면서 심신을 수양하여 궤공지진(簣功之進)을 어그러지게 않게 해야 하네.
날마다 하는 일에서 마음을 조용하게 가라앉히고 과묵하게 지내며 학가산의 중후(重厚)한 기상과 비슷해지길 기약함세. 문호를 넓히며 화의(和義)로 처하며 희노(喜怒)를 얼굴에 드러내지 않고, 사물을 대함에 정성스럽게 화합하며, 멀리하는 사람이나 친한 이를 같이 대하여 학가산의 장질(藏疾)과 용량(用量)과 비슷해지길 기약함세.
지금의 풍유(風猷)와 세도(世道)의 하강(下降)을 보건대 고가(古家)의 유래와 한 가지 맥락으로 문종(文種)이 거의 실추되었다네.
이는 후학들의 학문을 염려하지 않기 때문이니 이들이 학가산의 공리(功利)와 급물(及物)처럼 성취하길 기약한다면 남자가 한 번 문을 나서 떨쳐 일어나 얻는 효과를 얻게 될 것일세.
후일 괄목상대(刮目相對)하게 되리니 나는 장차 그대의 어묵거지(語黙擧止)를 징험해 보려네. 이로 인해 나는 스스로 경계하려고 하네.
권군(權君)은
예, 예!
라고 답했다.
이러한 내용을 기록했다.
遊鶴駕山記(洪秉機 : 1797-1877)
歲靑溪重陽月初吉, 權友圭伯, 訪余於墨山寂寞之濱. 叙凉暄訖, 慨然而語之曰, 士生斯世, 不得於朝, 則山林而已. 大抵山林之士, 必飮食於是, 起居於是, 閉門守靜, 獨善基身, 不志乎選勝壯遊, 則是不過海上迂怪之名. 南州鶴駕, 此雄蟠巨嶽, 而竊觀先儒文集中, 往往有記詠之蹟, 不讓於昌黎之衡岳, 老蘇之廬阜也. 白首吾儕, 多在宿舂之地. 常有一遍登覽之願, 而丹楓黃菊, 天時政佳, 未知君意何居, 余曰諾. 遂一宿. 其翌甲子, 與之聯笻發程, 午憩于台山山店. 先上鳴玉臺. 爲誦先賢所過之地, 山川草木, 皆有精彩. 緣於日迫, 未暇題詠, 而投宿金紫菴. 早發至車峴店, 酬一杯酒, 躡嶮拚磳, 僅到刈蓮菴. 菴在山之腰, 奇巖疊石, 蒼藤碧蘿, 合在諸天. 三面南望, 遙瓊渺渺, 川原羅布, 几案之前, 午態萬狀, 不可俱擧. 有居僧松雲云者, 眉如雪, 癯如鶴. 叉手懶揖, 似嫌塵世之客, 撫珠孤坐. 有若喚心而醒, 醒覺而復. 啽啽底樣. 呼而語之, 頗聰明識道理, 令人消却鄙吝. 余乃問之曰, 人固有儒名而墨行者, 聞是言則是, 較其行則非. 墨名而儒行者, 聞其言則非, 較其行則是. 此昌黎子序送文暢之言也. 師能解之乎. 凡人之所以爲人者, 上有君臣父子之義, 下有室家妻孥之樂, 以孝悌爲纓弁, 忠信爲甲冑. 聖賢之千言萬語, 載在方策, 如大明中天. 祖受而孫承, 家諭而戶說, 單詮旨訣, 傳之無弊. 或需時而顯焉, 沒世而稱焉者, 此吾儒家範也. 未知師之智慧靈關, 浸浸迷惑於虛寂之中, 以菩薩爲祖, 氣化爲母. 金衣塑質, 徒歸欺世之科, 長裟寶鉢, 只付他人之手, 崇信舂磨剉滅之術, 終作呪香枯灰之魂者, 可惜其不善變矣. 無寧回棹法海, 反于古渡, 洄溯于百瀆源派, 耕耨乎五經菑畬, 冷腹虛腸, 收拾溫理實得之效. 苟以是心至, 則其將安往而不受, 何做而不成乎. 此所謂改之爲貴, 以終五百年餘日可也. 師憮然良久曰, 儒佛二敎, 各尊所尊, 各尙所尙. 天地間亘千古幷行無悖者, 而西域以前尙矣. 勿論奧自隨梁以來, 逮夫羅麗之世, 蕭寺浮屠, 在在可據. 而晦明剝復, 亦其理也. 吾將觀其性而盡其道, 終乃幻生於天堂. 化身千億, 俯瞰桑海之三變, 果因而因還果. 色空而空又色, 無窮佛頭, 堪作極樂長春, 則梘諸丈人之落托明時, 滾汨於塵窠, 窮哦於坎塹, 草木同腐, 無所貽名, 反不多矣乎. 相與撫掌而笑. 因語及於煙霞雲林之勝, 不覺蓮燈耿滅, 淸磬催曉, 乃使尼兒導笻, 上絶頂. 逶迤細逕草汲, 不可尋. 螺頭列立, 鳥骨拱其東, 仙巖蟠其西. 中有扶輿斗陟, 特立乎鶴頂者, 是國師峰也. 一邊有層崖, 僅躡踵而登, 尖矗梢寬, 可容坐五六人. 張君之乘槎不勞, 靑蓮之呼吸可通, 全體俱一拳之積. 而其中穿穴, 淸溜滴滴, 唅呀作一小泉, 脫巾匍匐而入, 掬而飮之, 胸懷爽然, 謂之藥水是也. 雲煙捲盡, 天氣淸朗, 四顧無碍障處. 東之日月淸凉, 北之兩白. 西南之主屹及八公諸山, 皆在眼前, 一擧而壯觀俱該. 政先儒氏所謂工夫序次, 先難以後獲, 登高而自卑, 到得了一篇窮微極處, 則諸般表裏相須, 知行兼擧, 莫非一義貫來者, 此也. 其他幾百名山巨川, 幾州郡原野閭閻, 有如棊布而繡錯, 蟻垤而蝸居. 雖使離婁窮其明, 顧生模其畫, 不可枚陳而狀. 意者南鄕之道德淵藪, 文獻府庫, 指不再僂於浿江之東者, 無乃爲精華淸淑之種流而膺休者耶. 浩然回頭, 誦武夷下山之句, 暮揭于螭縣民舍. 轉尋廣興寺. 樹木參差, 邱壑幽邃, 別無超勝可觀. 而緇徒衆多, 殿閣宏麗, 儘福州巨刹. 問于老釋曰, 玆山之名以鶴駕者, 有何所以也. 山之體如赤霄眞骨, 特立平地, 翶翔兩翼, 翩然駕空而云耶. 老釋以一句詩應之曰, 鶴一去兮不復歸, 滄茫往迹有誰知. 因留數日. 香蔬煮饌, 供之甚款. 余以不見丁威客欲歸, 心期許與老倦知之句, 答之.
曉鍾一聲, 催人曉發, 與之分手於一柱門外. 自白峴, 行到瓮泉, 兩岐當前. 執爵而告權友曰, 吾輩暮途此遊, 誠不易底快活事, 而回憶前塵, 悠悠浪度, 於少年自負之時. 試以治文著辭, 恨未效子長南淮之以助吾氣, 莫如歸家讀書, 收養心身, 不虧簣功之進. 日用攸做, 沈靜寡黙, 思似乎山之重厚氣像. 恢拓庭戶, 處以和義, 喜怒不形於色, 接物款洽, 渾視疏戚, 思似乎山之藏疾用量, 見今風猷世降, 古家之由來一線, 文種, 幾乎墜絶, 不是細憂獎進來學, 得以成就, 思似乎山之功利及物, 則男子一番出門, 未始無振發獵得之效, 而異日刮目相對, 吾將驗君之語黙擧止. 因以自警. 權君曰, 唯唯. 是爲之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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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이원걸, [조선시대 학가산 유람록], 안동시,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