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06. 28
이번 칼럼을 완성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예정대로라면 지난주 월요일(19일)에 발행됐어야 한다. 하지만 내게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마지막을 더 완벽하고, 더 아름답게 장식하고 싶은 나의 욕심이었다. 이것은 나의 마지막 칼럼이다.
시즌을 마무리하고, 한국에 들어오고, 국가대표에 소집되며 정신이 없는 와중에 마지막 칼럼을 쓰자니 쉽게 생각 정리가 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은 너무나 많은데 글로 옮겨지지 않았다. 감사하게도 관계자분들의 이해로 발행 일자를 열흘 늦췄다. 그동안 ‘스토리텔러’로 활동하며 느낀 점들을 마지막 칼럼을 통해 전하려 한다. 여전히 아쉬움이 많이 남는 마무리이지만 이번에도 재미있게 읽어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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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빨간색 다이어리였다. 2011년, 내가 스무 살이 되던 해. 19년 동안 지내던 울산을 떠나 서울행을 앞두고 있었다. 우연히 들른 문구점에서 빨간색 다이어리가 내 눈에 유독 눈에 들어왔다. 20대의 첫 순간을 저 다이어리에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때부터 일기는 나의 습관으로 자리 잡았고, 빨간색 다이어리는 나의 소중한 보물이 됐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나의 꿈인 유럽을 위해 홀슈타인 킬에 왔다. 독일에 와서는 정신이 없고, 축구 외에도 혼자서 해야 할 것들이 많아 일기에 조금 소홀해졌다. 그때 지인분이 타 포털 사이트에 <이재성의 축구일기>를 적어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한참 고민하고 망설였다. 일기는 지금까지 사생활의 영역이었는데, 팬들에게 내 일기를 공개한다고 생각하니 부담이 됐다. 그때 지인이 “축구 팬들이 정말 좋아할 거야!”라고 했다. 그 말이 나를 움직였다. 가뜩이나 먼 독일 땅에 와서 팬들이 내 소식을 받아보기 어려울 텐데, 일기가 즐거움을 줄 수 있다면 안 할 이유가 없다. 그렇게 처음으로 내 일기를 세상에 공개하기 시작했다. 정해진 형식 없이 그냥 나의 일상과 생각을 자연스럽게 적어 올리는 시스템이었다. 덕분에 부담감이 많이 사라져 편하게 글을 쓸 수 있었다.
마인츠로 이적한 후 <네이버>에서 새로운 칼럼니스트를 구성 중이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내게 함께 하자는 제안도 받았다. 이미 타 포털 사이트에서 연재를 하던 터라 “아쉽지만 할 수 없다”라고 전달했다. 그런데 며칠 후, 해당 포털에 사정이 생겨 내가 일기를 더 쓸 수 없게 됐다. 아쉬웠다. 팬들과 일기로 소통하는 즐거움을 이제 막 알게 되었는데... 무엇보다 축구 팬들에게 즐길 거리를 하나 더 줄 수 있다는 점에서 큰 보람을 느끼는 중이었다. 이미 타 종목 팬들은 그런 즐길 거리를 갖고 있어 우리 축구 팬들도 충분히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시 <네이버> 측에 연락을 취했다. 다행히 나를 위한 자리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렇게 <네이버>와 여정이 시작됐다. 기대가 됐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포털 사이트를 통하면 더 많은 사람에게 이야기를 전할 수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혼자만의 힘이 아닌, 능력 있고 나를 잘 아는 정재은 에디터님이 곁에서 함께 한다면 더 의미 있는 글을 만들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규모가 커진 만큼 칼럼 발행 시스템도 훨씬 체계적이었다. 한 달에 두 차례 칼럼 발행과 한 차례 라이브 방송 진행이 조건이었다. 계약서를 작성하고, 서명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해외에 있다 보니 국내 관계자분들과 소통을 바로바로 하기 힘들었다. 여러 가지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지만 팬들에게 얼른 내 일기를 공개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새 계정을 만들고, 블로그를 개설 소식을 알리며 드디어 조금씩 실감이 났다. 그리고 2021년 10월 4일, 유럽파 선수들의 시차적응을 주제로 첫 칼럼을 발행했다. 이제껏 선수들이 직접 시차적응의 어려움을 말한 적이 없어서 걱정 반, 기대 반의 마음으로 글을 썼다. 자칫 힘들다고 투정 부리는 사람이 되지는 않을까 고민하고, 고심하며 글을 썼던 기억이 난다.
첫 칼럼에 대한 반응은 생각보다 더 컸다. 팬들의 관심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글에 대한 책임감이 더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칼럼을 꾸준히 쓰면서 팬들에게 받는 칭찬의 종류도 달라졌다. “블로그 잘 읽고 있어요”, “글 너무 잘 써요”라는 메시지를 많이 받았다. 나를 만나는 사람들도 축구보다 칼럼 이야기를 더 많이 했다. 내가 축구선수가 아니라 칼럼니스트인지 잠깐 궁금해지기도 했다, 하하.
우리가 칼럼을 준비하는 과정은 이렇다. 첫 번째, 주제를 정한다. 최근 내가 특별한 경험을 했거나, 이슈가 되는 사건이 있다면 그 사이에서 주제를 몇 개씩 고른 후 에디터님과 대화를 통해 결정한다. 두 번째, 에디터님이 주제에 맞는 질문들을 준비한다. 세 번째, 그 질문을 토대로 내 생각을 글로 정리한다. 네 번째, 나의 글을 에디터님이 검토한 후 보충할 부분을 체크해서 내게 다시 전달하고, 글을 매끄럽게 정리한다. 다섯 번째, 정리된 글을 내가 최종적으로 검토한다. 그리고 글에 어울리는 사진을 찾아 블로그에 업로드한다. 글 한 편을 위해 들이는 시간과 노력은 상상 이상으로 크다는 걸 직접 경험하고 나서야 알았다.
이런 과정을 매달 두 번씩 한다. 사실 힘든 적도 많다. 2주에 한 번씩 칼럼을 준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2주가 정말 금방 지나갔다. 글을 주어진 기한 내에 써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쉽게 집중이 안 되기도 했다.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에서 다양한 주제를 찾기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에디터님과 주제에 대한 고민을 특히 많이 했다. 막상 선택한 주제를 글로 풀어내려니 어려워서 고생한 적도 있다. 혼자 하는 게 아니라 함께 글을 준비하는 것이기에 대화는 필수였다. 에디터님과 대화 시간을 위해 늘 약속을 잡았는데, 서로 개인적인 일정이 있어 조율에 어려움을 겪은 적이 많다. 갑작스러운 사정이 생겨 약속 시간을 변경한 적도 있다. 그래도 서로의 상황을 이해해 주고, 배려하며 좋은 대화를 많이 나눴다. 여건에 맞춰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또, 감사하게도 우리에게 좋은 주제가 늘 떠올라 뜻깊은 이야기를 전할 수 있었다. 힘든 순간을 돌아보면 이렇게 감사한 일이 꼭 존재한다.
한 달에 한 번씩 진행했던 라이브 방송도 솔직히 내게는 커다란 관문이었다. 카메라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는 성격인데, 심지어 혼자 1시간 동안 라이브를 해야 한다니! 말주변이 좋은 편도 아닌데 말이다. 그나마 에디터님이 좋은 방송 컨셉 아이디어를 많이 내주셨고, 곁에서 잘 이끌어 주셨다. 그 덕분에 방송 전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걱정이 조금씩 녹아내렸다. 팬들과 농담도 주고받고, 장난도 치며 진행한 마지막 방송이 기억난다. 돌이켜보니 나도 모르게 은근히 즐겼나 보다.
나는 평소에 말보다 생각을 더 많이 하는 편이다. 아마 나를 잘 아는 분들이라면, 내가 미디어에서 말을 많이 하지 않는 편이란 걸 알고 계실 거다. 그런 내게 칼럼은 나를 알리는 창구였다. 일상 속에서 겪은 일들을 생각하고, 느낀 것들을 차분히 정리하며 많은 사람에게 전하고 나눌 수 있는 사실은 무척 기쁜 일이었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이 소중했다. 바쁜 일상을 내려놓고 깊이 생각에 빠질 수 있는 시간이 좋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의식하지 못하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지내는 건 아주 위험하다. 의식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지 칼럼을 쓰며 느꼈다. 깊은 묵상을 통해 내가 지금 진짜 갖고 있는 생각과 마음은 무엇인지 알게 되는 점도 좋았다. 그렇게 축구선수가 아닌 사람 이재성으로 팬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마지막 글을 쓰며 지난 연재물을 하나씩 읽어보았다. 내 경험을 토대로 글을 쓸 때 유독 즐거웠다. 어려운 주제는 생각을 정리하는 것부터 힘들었는데, 재미있는 주제는 막힘없이 술술 써내려갔다. <독일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카타르에서 전하는 나의 월드컵 일기>, <나는 N년좌가 아니다> 이 세 주제가 유독 기억에 많이 남는다. 쓰면서 그 상황에 완전히 몰입이 됐다. 정말 신나게 썼다. 다양한 경험이 글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 지 새삼 느꼈다. 사실 모든 글이 소중하다. 에디터님과 뜻깊은 글을 많이 썼다. 나에게는 능력 있고 좋은 에디터님을 만난 게 큰 행운이었다. 아마 에디터님이 없었더라면 많은 사람에게 지금처럼 꾸준히 이야기를 전하지 못했을 거다. 내가 생각하고, 글 쓰는 것에 지칠 때쯤 곁에서 나를 다독여 줬고, 더 잘할 수 있도록 격려를 많이 해줬다. 특히 서툰 나의 글솜씨가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고 말해줬을 때 큰 힘이 됐다. 함께 일하는 사람에게 받는 칭찬은 더욱 특별하고 큰 동기부여가 된다.
선수들도 나의 글을 자주 읽었다. 내게 “글 쓸 시간이 있냐”라고 묻거나, “형이 쓰는 거 아니죠?”라고 은근슬쩍 나를 떠보며(?) 궁금해했다. 나는 쉴 때 틈틈이 쓴다고, 에디터분이 옆에서 잘 도와준다고 대답했다. “재밌는데 한번 해볼래?”라고 추천도 했다. 돌아오는 답변은 모두 똑같았다. “아니요.. 저는 못 해요...”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으니까. 돌이켜 보니 칼럼은 내게 상당히 의미 있고 특별한 존재였다. 시작하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가 겪는 매 순간이 소중하고 감사한 일이란 걸 칼럼을 준비할 때마다 깨달았다. 축구를 통해 인생을 배우고 있더라. 그 순간을 나만 간직하지 않고 여러 사람과 나누자 기쁘고 행복한 감정이 더 커지고 풍성해졌다. 또, 축구선수로서 전혀 다른 일을 경험할 수 있어 감사했다. 글의 힘을 느꼈다. 메모하고, 기록하고, 간직하는 건 정말 가치 있는 일이다. 내가 조금만 수고를 더 하면 팬들은 몇 배나 더 큰 행복을 느낀다. 나의 블로그에서 축구를 즐기며 좋아라 하는 팬들을 보니 정말 기쁘고 보람찼다. 그러니 혹시나 망설이고 있는 나의 동료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싶다. 꼭 한 번 해봐!
‘스토리텔러’ 이재성은 이 43번째 칼럼으로 작별 인사를 하지만 난 여전히 글을 쓰고 있다. 독자 여러분에게만 공개하는 비밀인데, 내 이야기가 담긴 책을 쓰는 중이다. 팬들을 위해 칼럼을 쓰기 시작하다가 결국 책을 집필하는 순간까지 왔다. 어릴 때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축구선수가 되는 상상은 했어도, 책을 쓰는 일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이런 일들이 내게 벌어져서 신기하고 감사하다. 칼럼에서 차마 다 전하지 못했던 나의 어릴 적 순간부터 현재까지 책을 통해 상세하고 재미있게 전하려 한다. 나만의 책이 출간되면 어떤 감정이 느껴질지 기대된다.
지금까지 저의 칼럼을 읽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2년 가까이 칼럼을 쓰며 한 사람으로서 크게 성장한 기분이 듭니다. 저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고,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인츠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저의 여정도 지켜봐 주세요! 더 많은 즐거움을 드리는 축구선수가 되겠습니다.
이재성 / 분데스리가 마인츠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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