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있는 묘비명
허봉의 하곡집을 보다가 아주 짧은 묘비명이 있어서 이상하게 생각하고 보니 아래와 같은 묘갈명이었다.
安山人墓碑銘
謹齋後慶昌樂山水。以山水終。其友陽川許某銘曰。
生非生。死非死。吁嗟乎彦盛。生死而已。
안산인 묘비명
근재(謹齋, 안축(安軸))의 후손 안경창(安慶昌)은 산수(山水)를 즐기다가 산수에서 마쳤다. 그의 벗 양천(陽川) 허봉(許篈)이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오,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다. 아! 언성(彦盛, 안경창의 자(字))은 태어났다가 죽었을 뿐이다.
안경창은 비록 천한 출신이었지만 당대 최고의 시인들과 수창한 시가 상당히 많고 그는 호를 사내(四耐)’라고 하였는데, 굶주림과 곤궁함, 추위와 더위를 견딘다는 뜻이 라고 하였으니 하곡 허봉 또한 풍류인이라 그에게 맞는 묘비명이라 하겠다.
오늘날에는 이와 같은 풍류가 없으니 글을 읽으며 애석함을 금할 수 없다.
참고로 안경창에 관한 몇 편의 글을 부기합니다. 장달수
《송도지(松都志)》에 “서인(庶人) 안경창은 천성이 효성이 지극하고 선(善)을 좋아하여 의리에 맞지 않으면 물품 하나도 남으로부터 받지 않았으며, 선인(善人)의 이름을 들으면 천리를 멀다 않고 찾아가 놀았으며, 호소할 데 없는 궁한 사람을 힘써 구제하였다. 별호를 ‘사내(四耐)’라고 하였는데, 굶주림과 곤궁함, 추위와 더위를 견딘다는 뜻이다. 명산대천이라면 가 보지 않은 곳이 없었고, 회재(晦齋), 퇴계(退溪), 우계(牛溪), 율곡(栗谷) 및 남명(南冥), 소재(穌齋)의 문하에 출입하였다.”라고 하였다. 《星湖僿說 卷9 人事門》
10월에 평양으로 돌아가려고 개성 사람 안경창(安慶昌)과 술병을 차고 단기(單騎)로 달려 왔는데, 때는 17일이었다. 오래 앉아 있자니 숲속에 첫 달빛이 골짜기에 두루 퍼지자 잠자던 새들은 놀라 깨고 나는 즐거움이 넘쳐서 시 두 장(章)을 짓고서, 불을 토닥거리며 잔을 기울이다가 밤이 깊어서야 떠났다. 만약 이를 오늘날에 견주어 본다면 한가롭고 분주한 모습은 일찍이 같이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허봉의 조천기-
안경창(安慶昌)은 송도의 천한 사람으로 호가 사내(四耐)인데, 성질이 남에게 구속되지 않고 기절(氣節)이 많았다. 어렸을 때 중을 따라서 화장사(花庄寺)에서 공부를 했다. 이때 늙은 중 하나가 있는데 겨울에는 맨 이마에 맨발로 눈위를 걸어다니고, 여름에는 누덕누덕 꿰맨 옷을 입고 바위 위에 누워서 코를 드르렁거리며 골았는데, 모든 중들이 모두 공경하여 신승(神僧)이라고 했다. 안경창도 마음으로 몹시 사모하여 아사리(阿闍梨)가 되어 주기를 원하니 중은 이를 허락했다. 이에 그를 좇아 배운지 거의 반년이 되었을 때 가만히 중이 하는 것을 엿보았더니, 중은 밤마다 북두성에 절을 하고, 밤중이면 일어나서 입으로 줄줄 불경을 외우며, 먹는 것은 다만 솔잎뿐이었다. 안경창은 스님에게 청하기를,
“원컨대, 추위를 이기고 더위를 참는 방법을 듣고자 합니다.”
하니, 스님은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다른 방법이 있으랴? 오랫 동안 솔잎을 먹으면 자연히 추위에도 춥지 않고 더위에도 덥지 않으며, 배고프고 목마른 것이 몸에 침노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했다. 안경창은 또 물었다.
“스님께서 외우시는 것이 무슨 경(經)입니까?”
하니, 스님은 말하기를,
“북두(北斗)이다.”
하였다. 또 묻기를,
“다른 중도 솔잎을 먹는 자가 많은데 추위와 더위와 기갈(飢渴)을 참는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하니, 스님은 말하기를,
“솔잎 외에 다른 소금이나 간장을 먹으면 정신을 거둘 수가 없는 것이다.”
하였다. 또 묻기를,
“어떻게 하면 정신을 거둘 수가 있습니까?”
하니, 스님은 말하기를,
“욕심이 없어야 한다.”
하였다. 안경창은 그 법을 조금 전해 받아서 자못 네 가지 괴로움을 참았기 때문에 사내(四耐)로 자호(自號)를 하였던 것이다. 스님은 실로 이승(異僧)이었고, 안경창도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겨울에 베옷을 입고 다리를 내놓고 다니며, 또 얼음을 깨고 들어가 목욕을 했다. 얼굴은 마치 붉은 칠을 한 것 같았는데 나이 80여 세에 죽었다.
만력 갑진년(1604, 선조 37)에 나는 응교(應敎)로서 송도에 시재어사(試才御史)로 나갔는데, 이때 무과의 인원수가 가장 많아서 수십여 일을 머무르는 동안 매양 안경창과 같이 거처했다. 안경창은 국내의 명산에 두루 돌아다녀 여태까지 유람했던 승경을 잘 말하므로, 나는 재미있게 듣고는 꽤 와류(臥遊)의 흥취가 일었다. 그때 마침 안경창과 박연(朴淵)에서 놀기로 약속을 했는데, 안경창은 또 박연에 대한 기이한 일을 이야기하기를,
“제 나이 열두 살에 같은 마을 족당(族黨)들을 따라서 박연에 갔었는데, 남녀 노소가 거의 3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때는 마침 4월 보름이라서 철쭉꽃이 한창 피었고 신록이 정말 아름다왔으며 더욱이 비온 뒤라서 폭포 물이 넘쳐 흘러 경치가 가장 좋았습니다. 새로 시집간 여인 하나가 자색이 몹시 아름다웠는데, 옷을 벗고 가슴을 드러낸 채 물에 들어가 몸을 씻었습니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못의 물이 저절로 끓어오르고 물결이 치솟더니 검은 구름 한 줄기가 마치 일산(日傘)같이 펴졌습니다. 그리고 무슨 물건이 못 가운데에서 나오는데, 그 모양이 키[箕]와도 같았으며, 구름과 안개가 모여들어 머리도 얼굴도 분별할 수가 없고 눈빛만이 번개처럼 번쩍였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 떨고 있는데, 그 여인은 놀라 부르짖고 물에 자빠지는 것이었습니다. 친속(親屬)들이 엉겁결에 그녀를 엎고 도망하여 바위 밑에 두었더니, 이윽고 검은 구름이 사방을 메우고 골짜기가 캄캄해지면서 큰비가 물 쏟아지듯이 내리고 바람 소리와 물소리가 산골짜기를 진동했습니다. 놀러간 사람들은 모두 나무를 껴안고 앉아서 벌벌 떨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한참만에 날이 개이므로 엎어지고 넘어지며 분산하여 겨우 동구를 나오니, 태양은 중천에 떴고 풀이나 나뭇잎에 하나도 젖은 흔적이 없어 비가 온 기운이란 전혀 없었으니, 더욱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집에 돌아와서 한 달 만에 죽었는데, 그 후에 이웃에 사는 사람이 보니, 그 여인은 흰옷 입은 소년과 함께 박연 못가에서 놀더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였다. - 이덕형(李德泂) 송도이기-
송경(松京)에서 사내(四耐)에게 사례하다 사내는 안경창(安慶昌)이다
-허균(許筠)-
역려에 만나보니 때마저 석양이라 / 逆旅相逢斜日時
옛 서울 풍물들은 가을 들어 슬프구려 / 古都風物入秋悲
수고로운 내 인생을 선옹은 웃을 테지 / 勞生却被仙翁笑
개성을 세 번 와서 시 한 편 없었거든 / 三過開城不賦詩
사내옹(四耐翁) -성호사설-
종조(從祖) 두봉공(斗峰公)의 ‘과송경시서(過松京詩序)’에 이르기를 “내가 송경(松京)을 지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반드시 먼저 사내옹(四耐翁)을 찾았으며 옹도 역시 서울에서 관원이 왔다고 들으면 반드시 먼저 나의 행지를 묻곤 하였었다. 정미년 가을에 나는 관서(關西)의 수의(繡衣 어사(御史)를 말함)로 이곳을 지나면서 미처 자리에 앉기도 전에 그의 안부를 먼저 물었더니 이미 작고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일을 느껴 절구(絶句) 한 수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말에 내려 사내옹을 먼저 찾으니 / 下馬先尋四耐翁
저승 사람 자취 하마 아득하구려 / 仙遊冥漠已陳蹤
송도도 이제부턴 매력이 없어 / 松都自此無顔色
천마산 제일봉만 홀로 대하네 / 獨對天磨第一峰
상고하건대, 《송도지(松都志)》에 “서인(庶人 관직 없는 자를 이름) 안경창(安慶昌)은 천성이 효도에 지극하고 선(善)을 좋아하여, 의(義)가 아니면 한낱의 물품도 남에게 받지 아니하며, 선인(善人)의 이름을 들었을 때는 천리를 멀다 아니하고 좇아가서 상종하며, 호소할 데 없는 궁한 사람이면 힘써 구제하였다. 별호를 ‘사내(四耐)’라 하였는데, 즉 주림을 견디고, 곤함을 견디고, 추위를 견디고, 더위를 견딘다는 뜻이다. 명산 대천(名山大川)이라면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고, 회재(晦齋)ㆍ퇴계(退溪)ㆍ우계(牛溪)ㆍ율곡(栗谷) 및 남명(南冥)ㆍ소재(蘇齋)의 문하에 출입하였다.”라 하였다. 소재는 그에게 시를 지어 주기를,
나는 상기 어두운 데선 잘 속이는데 / 我迹猶欺暗
그대는 은미를 아는 것 같네 / 君心似識微
어려움 견지하여 늘 힘써다오 / 持難長黽勉
순을 따라 답습만 한다 해서야 / 從順肯因依
하였고, 또 이르기를,
지령이라 소재는 늙어가는데 / 芝嶺蘇齋老
송도라 처사는 편안하구려 / 松都處士安
만나니 슬픔 기쁨 아울러 일고 / 相逢動悲喜
묵어가니 한ㆍ망이 구별되네 / 信宿辨忙閒
라 하였으니, 그 사람됨을 알 만하다. 회재의 문하에 노닐었다 한다면 이는 을사년(乙巳年) 이전 일인데, 을사년에서 정미년까지는 60여 년이 되니 옹의 나이는 반드시 80~90세였을 것이다. 《죽창한화(竹窓閒話)》에는 “옹의 인내성은 화엄(華嚴) 노승(老僧)에게서 얻어진 것이다.”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