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살다 보면 참 어리석은 순간이 찾아온다. 아직 3년 차면서 제주를 다 안다는 식으로 으스대고, 마치 제주도민이 된 것처럼 행동한다. 오늘 포스팅할 내용도 그것과 어쩌면 일맥상통한다. 생각해 보면, 나는 제주의 일부만을 안다. 아직 협재해수욕장에서 봉긋하게 보이는 비양도도 못 가봤고, 제주하면 떠오르는 승마 체험 또한 한 번도 못해봤으며, 오늘 소개할 귤 따기 체험도 이제서야 처음 해보니까. 이 모든 건 안일한 생각에서 찾아왔다. 제주에 살고 있으니까 언제든 하겠지라는.
하지만, 이 생각은 친구의 한마디로 끝났다. "네 생각이 옳을 수도 있지만, 틀릴 가능성이 훨씬 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분명 후회할 거야". 누가 보면 네가 뭘 알아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제주에 5년을 거주하고 다시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친구가 한 말이기에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는 대화 마지막에 내게 말했다. 제주에 살면서 마지막으로 해보고 싶은 게 바로 이 귤 따기 체험이라고. 그 또한 5년 동안 안일한 생각으로 차일피일 미뤘던 이 체험을 너랑 하고 싶다고.
농부의 마음을 고스란히
귤의정원바령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선흘남3길 87
바령하다: 말과 소 따위를 가두어 먹이면서 배설물로 밭을 걸게 하다는 뜻으로 제주에서는 '바령다'로 적는다.
귤의정원바령은 이름과 가장 잘 걸맞은 장소였다. 환경을 살리는 친환경 유기농법으로 감귤을 키우는 이곳은 부모님의 뜻을 이어가고 있는 장소였다. 부모님이 48년여 중 12년을 무농약으로 농사지으셨고, 2020년부터 자녀인 부부가 이어받아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지었다. 화학비료와 농약을 전혀 쓰지 않고, 제주의 청정 바닷물과 미생물을 활용해 싱그러운 제주의 자연 그대로의 맛을 담아내려는 노력. 환경을 생각하는 부부의 농사법은 말뿐이 아닌 행동으로 옮겼다. 또한, 바령은 어떻게 하면 사람과 더불어 살 수 있을까 고민하는 곳이었다. 바령의 수익 중 1%를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쓰는 것만 보아도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귤의정원바령의 1년
3-6월 : 귤밭피크닉
8-9월 : 풋귤(청귤) 따기 체험
10월 : 귤밭 피크닉
10월 말~ 1월 : 귤 따기 체험
그 외: 농장 둘러보기
친구의 소원, 그리고 나의 소원
친구를 위해 여러 귤 밭을 고르고 골랐다. 어떤 귤 밭이 친구의 마음에 들까. 고민하고 고민해 고른 3개의 후보. 친구는 말똥말똥 해진 눈으로 무언의 칭찬을 내게 보냈다. 어떤 귤 밭을 고를까 고민하기도 어려운 선택지. 친구는 고심 끝에 귤의정원바령을 택했다. 이유를 물으니, 귀에 닳도록 듣던 ESG에 대해 자신이 한 것은 전혀 없는 것 같다며 귤 따기라도 ESG 실천을 하고 싶다 말했다. 그러며 덧붙였다. 요새 친환경으로 무언가를 하는 건 참 무모한 것 같다고. 그런대도 이렇게 줏대 있게 귤 밭을 꾸리는 건 참 대단한 일 같다고.
그렇게 떠난 귤의정원바령.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귤 밭으로 향하는 차 안에는 부슬부슬 떨어지는 비가 함께 했다. 비를 맞으며 귤을 따게 생긴 순간. 우리는 이 또한 추억이라며 위로했다. 물론, 속은 둘 다 아니었지만.
다행이라면 다행이겠다. 귤 밭에 도착한 순간 비는 멈췄고, 흐린 하늘만이 귤의정원바령에 있었다. 귤의정원바령은 조금 특이했다. 돌창고에서 친환경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귤 따는 설명과 농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뒤 귤을 딸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이런 친절한 설명이 좋게 다가왔다. 자신들의 귤 밭에 애정과 사랑이 있다는 뜻이니까.
설명을 다 듣고 우리는 부부의 설명대로 귤 밭을 크게 한 바퀴 돌며 제주 동쪽의 풍경을 눈에 담았고, 쓰레기를 주워 만든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가위바위보 끝에 진 사람이 수동으로 움직이는 레일바이크를 밀어주었다. 물론, 가위바위보는 단연 내가 졌다. 그렇게 귤 밭을 요리조리 구경한 끝에 도착한 꽃 길. 이곳엔 있었다. 이번 연도 끝자락에서 빈 나의 소원 '동백꽃 보기'의 동백꽃이. 사랑스럽게 핀 분홍색의 아기동백. 이는 내 겨울의 시작을 알렸고, 친구의 소원 아래 꽃 피었다.
못생겼지만 괜찮아
귤의정원바령의 귤들은 대개 못생겼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친환경으로 자라 못생긴 거고, 못생겼지만 맛있었다. 친환경이기에 그 자리에서 바로 따서 까먹어도 되는 순간들. 마음에 드는 귤을 직접 따서 입에 넣을 때마다 주황빛 과즙은 상큼하게 다가왔고, 친환경으로 이 정도의 맛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왜 3년 만에 귤 따기 체험을 했을까라는 후회마저 드는 순간. 나는 바구니 안에 엄선하고 엄선한 귤을 하나하나 채웠고, 금세 가득 찬 바구니에 뿌듯함을 느끼며 얼마나 맛있을까 상상했다. 그러면서 이 귤은 친구들과 꼭 나눠 먹겠다 다짐했다. 이들이 실천하는 그 따뜻한 마음을 함께 나누고파서.
귤 따기 체험을 마치고 다시 돌아온 창고. 그 안에는 귀여운 강아지와 고양이가 우리를 반겼다. 그러며 농장을 운영하는 부부는 우리에게 몸을 녹이고 가라며 불을 때는 곳에 앉혔다. 그리고 난로 위에 있는 익은 귤을 하나씩 손에 쥐여주었다. 그러며 익혀 먹는 귤도 정말 맛있다고 말했다. 나는 반신반의한 생각으로 따끈하게 익은 귤을 입에 넣었다. 그때 깨달았다. 이건 신세계라고. 입안에 느껴지는 따뜻함 속에 익은 귤은 마치 차를 마시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이마저도 완벽한 순간. 나는 이곳이 퍽 마음에 들었다. 그렇기에 이 못생겼지만, 맛있는 귤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알리기로 했다. 10kg짜리 귤 세 박스를 사서 하나는 부모님에게, 또 하나는 은사님에게, 또 하나는 아빠랑 가장 친한 삼촌에게 보내는 방법으로.
귤의정원바령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사랑스러운 장소였다. 모든 게 따뜻했던 순간들. 나는 친구의 소원 덕에 제주에서 꼭 알리고 싶은 귤 밭 하나를 얻었다.